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세계 4대 발명의 진정한 종주국 1-삼국시대 이전부터 발전해 온 화약

설레임의 하루 2009. 8. 22. 03:16

*출처:다음카페-상촌 김자수 기념사업회    글쓴이: 금소영당/김현숙

                     http://cafe.daum.net/hskk2005-5/VVl/1635

 

 

 

 

 

본 블로그의 /촌철살인/면에 있는 [허구의 짱골라, 중국이라는 환상을 벗어던지자!]을 참고하세요. 

이 게시물은 대용량이라 불러들이는데 1분 정도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세계 4대 발명의 진정한 종주국 1

 

화약 이용한 무기, 삼국시대부터 등장매일경제 / 2008.08.26 15:56:54 입력

 

조선세종때 개발된 신기전은 일종의 로켓원리 적용한화기

 

영화"신기전"의 한장면
최근 '신기전'이란 영화가 눈길을 끌고 있죠. 조선 시대에 화약을 이용한 신무기를 중국보다 먼저 만들어 부국강병을 꾀했다는 내용이 통쾌하기까지 한데요.

한국 역사에서 화약을 이용한 무기가 신기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칠 때
사용했던 대포의 일종인 총통을
비롯해 다양한 화약 무기들이 존재했죠. 그러면 한국 역사에서 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도와준 전통 무기에는 어떤 과학적 원리가 있는지 살펴볼까요.

◆ 전통 무기의 근간인 화약의 역사

= 다양한 전통 무기들을 살펴보기 전에 이 무기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화약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 화약의 역사는 고려 말의 최무선으로 시작된다고 역사 교과서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도 화약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화포는 신라에서 시작해 고려 때에 정비됐고 조선에 와서 완성된
훌륭한 무기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때에도 화약을 만들어 사용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최무선은 고려시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화약 무기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연구를 거듭해
'화통도감'이라는 연구기관을 설립했죠.
그리고 화포, 화통, 철령전 등의 각종 화약무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렇다면 화약은 어떤 물질들로 구성된 걸까요. 19세기 말까지 사용된 흑색화약은 비폭발성
물질인 황(S), 숯(C), 질산칼륨(KNO₃ㆍ초석 또는 염초라고 함)의 혼합물입니다.
표준 구성비가 15대10대75 정도 되죠.

이 재료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게 질산칼륨입니다.
화약의 원료 중 황이나 숯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지만, 화학 지식이 모자라던 예전에는 순도 높은 초석을 대량으로 확보하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죠.
당시 화약 기술에서 앞서 있던 중국은 초석의 유통을 엄격히 통제했습니다.

질산칼륨은 높은 온도에서 열분해하면서 산소를 발생시킵니다.
산소는 황과 숯을 산화시켜 다량의 열과 기체(이산화황과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죠.
이때 발생하는 열이 질산칼륨의 열분해, 황과 탄소의 산화를 계속하게 만들므로 화약은 매우 빠른 속도로 불꽃과 연기를 내면서 연소ㆍ폭발하게 됩니다.

초석, 즉 질산칼륨은 나뭇재와 사람이나 가축의 소변에서 만들었습니다.
나뭇재와 소변을 오래된 집의 부뚜막이나 담벼락 아래에 섞어 비를 맞지 않게 쌓아 둔 후,그 위를 말똥으로 덮고 불을 지펴 더운 김을 쏘이면 흰 이끼가 생깁니다.
4~5개월 지난 후 이 이끼를 물로 씻어내 졸이면 거친 초석을 얻을 수 있고, 이를 다시 물에녹여 정제하면 깨끗한 초석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신기전의 구조

= 그럼 최근에 가장 잘 알려진 신기전에 대해 먼저 살펴볼까요.
신기전은 전통 무기의 역사에서 보면 가장 최신의 무기라고 볼 수 있는데요.
주로 조선 전기인 세종 말부터 중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가장 많이 사용된 화기입니다.
세종 때는 북쪽 변방지역에서 오랑캐를 물리치는 데 사용됐고, 중종 때는 왜구를 물리치는 데 사용됐습니다.

신기전은 일종의 로켓 화기로, 조선 초기의 병기도설에는 당시에 총 4종류의 신기전이 기록돼
있습니다.
우선 신화신기전과 대신기전 두 종류는 추진체인 약통과 폭탄에 해당하는 발화통의 위치와 구조가 약간 다를 뿐 크기를 비롯한 다른 부분들은 비슷합니다.
대신기전은 대나무 화살대의 한쪽 끝에 약통과 발화통을 붙였습니다.
약통 위에 발화통이 올라가고,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약선(도화선)을 연결했습니다.

다음으로 중신기전은 화살대의 맨 앞에 놓인 화살촉의 바로 뒤에 로켓 모터인 약통을
부착했습니다. 화살의 맨 끝에는 안정 날개 역할을 하는 새의 깃이 달려 있습니다.
약통 아래는 대발화통과 연결되는데, 대발화통 위쪽은 비어 있고 아래쪽은 화약이 채워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신기전은 대나무 화살 앞쪽에 대발화통과 약통이 붙어 있습니다.

현자총통
◆ 적진을 불지르고 교란시키는 화전

= 최신 무기를 알아봤으니, 이번에는 가장 오래 된 화약 무기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화전'이 바로 가장 오래 된 화약 무기인데요. 화전은 고려 말 화약과 화약무기가 본격적으로 개발될 때를 비롯해 조선 시대에서도 활용된
불화살입니다. 이름 그대로 적진을 불지르거나 폭발음으로 전진을 교란하는 목적에 적합한 무기죠.

화전은 길다란 쇠 화살촉에 화약통을 매달아 만듭니다. 화약통에는 황밀과 송지를 녹여
발라서 습기 때문에 화약의 성능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합니다.
화약통에 심지를 박고, 화전을 쏘기 전에 심지에 불을 댕긴 다음 활에 매겨 적진을 향해 쏘면 됩니다.

긴 쇠 화살촉에 화약통을 매다는 까닭은 화전이 날아가는 동안 화살이 불타면 화전의 효과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하면 사용한 화전을 회수해 화약통만 다시 붙여 재사용할 수도 있죠.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에서 가장 주요하게 사용했던 무기가 바로 총통인데요,
총통은 화약에 불씨를 손으로 점화하여 발사하는 청동제 유통식 화기입니다.
고려 말 최무선이 화통도감에서 20여 점의 화약무기를 개발했으나 그림이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정확한 모양이나 크기는 아쉽게도 알 수 없습니다.

총통의 구조는 대체로 화약을 놓는 약통, 화약이 폭발할 때 발사물에 작용하는 폭발력을
크게 하기 위해 약통, 발사물인 환 전 화살 등을 넣는 부리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의 이름은 드라마나 소설 등에서 나와 혹시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텐데요.

총통의 이름은 천자문의 순서를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천자, 지자, 현자, 황자 등 순서대로 새 이름을 붙이는 식이죠.

총통은 크기에 따라 대형 총통과 소형 총통으로 분류됩니다.
사람이 손으로 들고서 발사물을 발사할 수 있는 것이 소형 총통이고, 그 밖의 것들은 대형 총통입니다.

총통 이후 서양의 화약 무기와 동일한 구조를 지닌 소포와 중포가 등장하는데요.
소포와 중포는 바퀴가 두 개인 포가 위에 설치해 필요시 이동시키며 사용하는 것,
그리고 해안가의 포대에 고정포대를 설치해 그 포대에 포를 고정하여 사용하는 것 두 가지방식이 있습니다.

 

■ 사이언스올 사이트(www.scienceall.com)에서 더 많은 정보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제관 기자][ⓒ 매일경제 & mk.co.kr,

 

 

 

 
행주대첩, 첨단과학 무기 사용해 가능

 

 
김시민의 진주성 전투,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해전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중의 하나인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 전투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당시 권율 장군은 정병 2300명과 승병 및 농민군을 지휘하여 왜적 3만 명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연약한 부녀자들이 덧치마에 돌을 날라 투석전을 가능케 하여 조선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병이 몰려와 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가했을 때 아낙네들이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 싸움을 지원했다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돌을

던지는 것만으로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3만 명을 격퇴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행주산성 대첩의 요인으로 여러 가지가 거론된다.
우선 권율 장군이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가며 슬기롭고 용감하게 군을 지휘해 적의 공격에 대처했으며, 군 관 민 및 부녀자가 모두

혼연 일체가 되어 한강에 배수진을 치고 목숨을 걸고 적에 대항해 싸웠다는 것이다. 

▲ 93년 엑스포때 신기전의 발사장면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행주산성 전투에서 조총으로 무장된 왜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조선군이 과학적으로 설계된 신기전,

총통기, 비진천뢰 등 첨단 화약 무기를 보유하여 이들의 화력으로 왜군을 압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 고려시대에 로켓 발사
 
우리나라에서는 화약무기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다.
『삼국유사』에는 661년의 북한산성 전투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북한산성의 군사들이 구원병이 오지 않음을 원망하는데… 성부산에서 단을 설치하고 신술을 쓰니 큰 독처럼 생긴 광휘가 갑자기

생겨나 이것이 단 위로 떠올라 별이 되어 북쪽으로 날아갔다.

적이 공격하려고 할 때 갑자기 광휘가 남쪽 하늘에서 날아와 벼락이 되어 30여 개의 포석들을 쳐부수니 적의 활, 화살, 창, 칼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기록에 나오는 '광휘'는 신라군이 쏜 것인데 우선 그 뜻으로 보아 눈부시게 밝은 불빛을 내는 무기이다.
'신술'은 당시 '신기한 기술'이란 화약무기를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신술을 쓰니 큰 독처럼 생긴 광휘가 생겼다"는 표현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광휘는 현대의 로켓과 같은 분사추진 무기로서 흑색 추진 화약가스의 불을 뒤로 뿜으면서 날아가는 모양이 똑같다고 보는

것이고, 둘째는 흑색 화약을 포에 재어 발화하였을 때 포신이 짧아 화약이 포신 안에서 다 타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서도 계속 연소되므로

불길과 함께 독처럼 생긴 탄이 날아갔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것이든 이 기록이 전하는 광휘는 흑색 화약을 쓴 화약무기가 틀림없다는 말이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화약무기는 더더욱 발전했다.
이 중에서 무기로서 큰 역할을 한 것은 화전(火箭)과 주화이다.
화전은 화살에 달린 화약통에 불을 붙인 다음 이를 적에게 날리는 것이고 주화는 화살 통에 넣을 수 있는 화살의 일종으로 발사하면

 

불빛과 연기를 내면서 날라 간다.
화전과 주화는 추진 화약에 의한 분사추진식 화살로서 추진 원리는 지금의 로켓과 같다.
 
주화는 최무선이 활약한 우왕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에는 약통 밑에 뚫린 구멍의 크기까지 정해두고

있는데 소(小)주화의 경우 구멍의 크기는 1푼 3리(약 4밀리미터). ‘리’라는 단위는 0.31밀리미터로 대단히 정밀한 수치이다.

이렇게 구멍 크기를 정밀하게 지시한 것은 구멍의 크기가 성능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구멍이 너무 크면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너무 작으면 통이 폭발한다.
 
주화는 주로 병사 개인이 말 위에서 사용하기 편리하기 때문에 대나무 통이나 화살 통에 넣고 다녔다.
주화를 쏠 때는 초석지(礎石紙, 질산칼륨을 묻힌 종이)로 만든 불씨를 가지고 다니다가 주화의 약선에 불을 붙인 뒤, 대나무 통에

주화를 넣는다.

말을 타고 가다가 멀리 있는 적을 공격하거나 적에게 쫓길 때 발사했다.
활처럼 힘을 들여 당기는 무기가 아니기 때문에 병사들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주화를 발사하면 적들은 그 소리와 모습에 놀라 달아났다고 한다.
주화는 목표물을 정확히 맞추지 않아도 적의 기선을 제압하고 위협하는 데도 효과가 있었다.
 
〈KBS 역사스페셜팀〉에서 고려시대에 만든 것과 같은 방법으로 복원하여 실험한 결과 주화의 사정거리는 250∼280미터였다.
원거리의 적을 공격하는 화살의 사정거리는 100∼150미터로 주화는 화살에 비해 사정거리를 획기적으로 연장한 무기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화전의 비행거리는 1천3백 보로 되어 있다.
1보는 보통 1.5미터에 해당하므로 대략 1천950미터로 화전의 설계도에 의한 탄도 계산 결과와 완전히 일치한다.
학자들은 우리나라에서 흑색 화약을 추진체로 하는 분사추진식 화전이 최소한 1123년경부터 사용되었다고 추정한다.

좌측 화차는 신기전을 발사했고 우측의 화차는 총통을 발사했다.

(전쟁기념관 복원 화차의 모습)

 
로켓은 아시아에서 발명되어 11∼13세기에 아라비아인 또는 몽고인에 의하여 에스파냐에 전해져 1249년에 그곳에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랍의 알하산 알람마하에 의해 1285∼1295년 사이에 씌어진 『병기와 기마 전추에 대한 책』에는 "연소하며 스스로 날아가는 달걀"

이라고 기록했다.

 
그 책에는 납작한 냄비 2개를 포개놓고 그 가운데 2개의 큰 로켓을 장치했으며 양쪽에 꼬리 같은 막대를 2개 부착한 것으로 구조를

설명했다.

한편 로켓이라는 이름은 1379년 이탈리아의 카이오자 성에서 벌어진 베네치아와 제네바 사이의 전투에서 제네바 군대가

'로케타(rocchetta)'를 사용했다는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주화와 화전은 더욱 발전하여 임진왜란 때 그 위력을 발휘하는 신기전(神機箭)으로 발전한다.

신기전은 주화에 폭탄이라 할 수 있는 발화통을 연결한 것이다.

약통 앞에 화약을 넣은 발화통을 장착한 뒤 심지에 불을 붙으면 화약의 힘으로 날아간다.
 
신기전에는 대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세 가지가 있다.
소신기전은 약통과 외통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발사하면 추진체인 약통이 먼저 분사추진력을 내고 그 다음에 외통이 분사추진력을   내면서 2단 로켓처럼 비행한다.
중신기전은 약통, 외통 및 소발화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발사되면 약통이 먼저 분사추진력을 내고 외통, 소발화가 각각

 순차적으로 분사추진력을 내는 형식이다.

 
대신기전은 약통, 외통, 지화 및 소발화 네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발화하면 약통, 외통, 지화, 소발화가 순차적으로 분사추진력을

내도록 했다.

신기전은 전쟁에서 목표를 태우는 무기로 쓰이기도 하며 '기화'라고 하여 불, 연기, 소리 등 신호의 수단으로 쓰였다.

 
화살은 대나무를 사용했으며 화살대 앞부분에 약통이 달려 있다.
약통은 종이로 만들었으며 대신기전의 총길이는 5,588밀리미터, 소신기전은 1,152밀리미터였다.
중신기전을 복원하여 1992년에 발사 실험을 했는데 비행거리가 200∼250미터였다.
대신기전은 사정거리가 1.5킬로미터에서 2킬로미터나 되므로 주로 압록강 하구의 의주성에서 압록강 건너에 있는 오랑캐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신기전의 위력은 대단했는데 그것은 약통 앞부분에 발화통이 부착되어 있어 목표물에 도착할 즈음 폭발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다른 화기와 달리 비행 중에 불과 연기를 분출하며 큰 소리를 내는데다가 목표물을 향해 비행한 뒤 스스로 폭발할 수 있었으므로

 적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대형 화전은 성을 방어할 때나 해전에서 체적이 크고 불이 잘 붙지 않는 목표물을 태우기 위하여 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분사추진무기는 19세기가 되어서야 인도의 하이더 알리 왕자가 만들었다고 알려졌다.
그가 만든 나무로 만든 분사추진무기는 길이가 약 3미터 되는 참대 막대기에 직경과 길이가 각각 5.1센티미터, 20센티미터인

원통형의 철제 화약통이 붙어 있는 형태였다.

 
영국의 콩그리브가 19세기 초에 만든 분사추진무기는 약통 길이 55센티미터, 직경이 11센티미터이며 안정막대를 포함하여 총

 길이는 4.6미터로 사격거리는 2천4백 미터였음을 볼 때 조선에서 개발된 신기전이 얼마나 앞선 것인지 알 수 있다.


■ 전천후 자동무기 화차(火車)
 
이들 첨단 무기를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한 것은 화차이다.
조선의 무기체계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화차는 부속품만 300개가 넘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는데 화차에 대한 기록은

『태종실록』에 처음 나온다.

이것은 1409년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처음 만든 것으로 화차란 여러 개의 통을 싣고 이 통으로부터 수십 개의 철령 전을 화약의

힘으로 쏠 수 있게 한 작은 수레인데 위력이 아주 강해 쉽게 적을 제압할 수 있다.

태종 때 처음 선보인 화차는 그 뒤 기록에서 보이지 않다가 그로부터 약 40년 뒤인 문종 1년(1451)에 문종에 의해 직접 창안된

‘문종화차’로 출현한다.

 
'문종실록’에는 왕의 지시로 화차가 제작됐다고 했는데 이 기록에 의한 화차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화차 위에 신기전기 혹은 총통기를 설치하고 백 개의 신기전을 놓거나 사전총통 50개를 놓고 이것을 차례로 점화하여 발사한다.
특히 1개의 사전총통에는 4발의 세전을 장전할 수 있으므로 모두 2백 발의 세전을 연발로 발사할 수 있었다.
 
화차의 이동이 가능한지 실험하기 위해 기록에 의거해 만든 화차를 광화문에서 서강까지 이동시켜본 결과 평탄한 곳에서는 두 명이

 흙탕에서도 끌 수 있었고 땅에 돌이 있고 약간 높은 곳에서는 두 사람이 당기고 한 사람이 밀면 되었다.

도로 사정이 아주 나쁜 곳에서는 앞에 두 명, 뒤에 두 명이 있으면 되었다.
이와 같이 이동이 쉬운 화차는 평시에는 화물운반용으로 쓰이다가 전시에 화포 운반용으로 사용되었다.
 
화차는 총통 또는 신기전의 불심지를 서로 연결하여 한 개의 불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만으로 전체 화살을 연거푸 발사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자동화기였다.

문종화차에 사용한 수레의 길이는 2천311.7밀리미터, 폭은 734.7밀리미터이며 바퀴의 축은 차체로부터 588.2밀리미터 떨어진 아래에

설치되어 있고, 바퀴의 지름은 874.7밀리미터이다.

이는 중국의 화차에 사용되었던 수레와 비교하면 매우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즉 문종화차의 수레는 바퀴 축과 차체가 바퀴의 반지름 정도 떨어져서 설치되어 있다.
이럴 경우 화약무기에 가장 이상적인 발사각 45도를 유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실제 문종의 화차는 발사각 40도까지 가능했던 데 비해 중국 화차는 20도가 고작이었다.
 
조선이 보유한 화차가 얼마나 뛰어났는가는 동시대 유럽의 것과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화차는 자동화기로 분류될 수 있었으나 같은 시대의 유럽 전차는 마차 위에 병사들이 타고 화살을 날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화차는 15세기의 무기로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우리의 개발품이었다.
화차는 문종 1년에 곧바로 제조되어 8월에 서울의 군기감에 50대, 평안도의 안주, 의주에 각각 20대, 삭주, 강계, 영변에 각각 15대,

함경도 경흥과 부령 등에 각각 6대가 설치되었다.

전국적으로는 총350여 대였다.
 
추가로 9월에는 황해도의 4진에도 설치 되여 문종 1년 한 해 동안에만 7백여 대의 화차가 제작되었다.
화차는 외적의 대열을 무너뜨리고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 큰 위력을 발휘했다.
이 무기는 성종 23년(1492) 북쪽의 오랑캐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특히 임진왜란 때는 그 진가가 아낌없이 드러났다.
 
1593년 2월 12일,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을 사수할 때 300대의 화차가 동원되어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시 왜군의 주무기는 조총, 조선군은 당시 보유하고 있는 화약무기를 모두 동원했다.

사전총통과 같은 개인용 무기는 병사가 적을 조준하여 쓰러뜨렸다.
종이로 만든 지화통도 사용했는데 이것은 적군이 접근할 때 던지는 일종의 수류탄이다.
그뿐 아니라 천자총통, 지자총통을 비롯한 원거리 공격용 화포도 동원되었다.
 
새벽에 시작된 행주산성 전투는 무려 12시간이나 치열한 접전으로 이어졌다.
왜군은 아홉 번째 공격을 끝으로 퇴각했다.
왜군 사상자만 1만여 명, 노획 무기 720점, 총대장 우키다는 화차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왜군에게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타격을 입힌 행주산성 전투는 육상 전투에서 조선군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된 것으로도 더욱

중요하다.

 
이종호(과학저술가) 

 

 

 

화약

중국에서는 12세기 북송시대에 전장(戰場)에서 사용되었고, 우리 나라에서 화약의 폭발력이 알려져 중요한 무기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전반 고려 공민왕 이전으로 추측되고 있다.

고려 말에 자주 있었던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화약과 화포는 당시 최무선(崔茂宣)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발전되었다.

이에 대한 관심은 권력집중에 힘을 기울였던 조선 태조와 세조에 의하여 위험시되어 억압되었으나, 태종·세종 및 문종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개발이 추진되었다.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무경총요武經總要 :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1040년에 명하여 만들게 한 병서兵書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64214 )


북송(北宋)의 증공량(曾公亮) ·정도(丁度) 등이 찬술하여 1044년에 완성한 군사상의 기술서(技術書)로, 40권으로 되어 있다.

당시 서하(西夏)의 반란이 일어난 뒤 인종은 병법에 뛰어난 인재를 구하여 작전 ·군사기술 등의 지식을 정리시키고, 병기류의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

전집(前集) ·후집(後集)으로 나누어 전집은 제도 15권과 변방 5권으로, 후집은 병전(兵戰)의 고사(故事) 15권과 점후(占候) 5권으로

기술해 놓았다.

송나라 때인 1230년에 초간되었으나, 현재 전하는 판본으로는 명(明)나라의 정통(正統) ·만력(萬曆) 간본이 있고, 《사고전서진본초집

(四庫全書珍本初集)》에도 수록되어 있다.

내용 중 화약에 관한 기록은 이채를 띠고 있다.


일본의「소우기」(출처 : KBS 역사스페셜 20회 & 145회 기타등등) 

「소우기」기록에 따르면 고려의 배, 그 중에서도 과선은 철로 뿔을 만들어 적을 부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거북선이 바로 고려 군함을 원형으로 하여 개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 배에는 세계최초로 대포를 설치하였다.

'1019년 고려 전함이 화약을 넣어 공격한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 일본「소우기」

이미 한국이 원조이자 종주국으로 밝혀진 인쇄술과 더불어 '화약'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일찍 한국이 사용했다는 새로운

사실도 밝혀진 셈이다.

 

 

역사스페셜20 영상복원 - 해상왕국 고려의 군함

 

 

고려는 아직까지 많은 부분에서 베일에 쌓여 있는 나라이다.

하지만 고려에 대해서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가지는 고려가 우리의 마지막 해상 왕국이었다는 사실이다.

백제, 가야, 발해, 통일신라의 장보고를 잇는 우리 역사상 마지막 해상왕국 고려. 고려가 해상왕국이었다는 단적인 증거는 바로 고려

군함이다.

 

세부설명

 

1. 700년 전 일본의 기억

일본의 하이타마현 박물관에서 전시된 '몽골습래회사' 라는 그림에는 700년 전 일본에게 패배를 안겨 준 고려, 몽고 연합군과의

전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연합군의 일본 원정은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1차 원정 때 연합군은 단 하루 만에 큐슈 일대를 휩쓸어 버리며 일본을

두려움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 이듬해 일본은 고려, 몽고 연합군의 침략을 대비해서 방루를 쌓는데, 그 이름도 몽고방루이다.

그런데 유목 민족인 몽고가 어떻게 바다를 건너 일본을 원정할 수 있었을까?

2. 전북 부안군 구진 마을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발견되는 통나무와 마을 뒷산에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 전북 부안군 구진 마을에는 조선소가 있었던 흔적이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춘 구진마을은 고려인들이 군함을 만들며 일본 원정을 준비했던 마을이다.

3. 신의 바람 카미카제를 이긴 고려 군함

1281년 여몽연합군은 일본 2차 원정에서 대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당시 여몽연합군을 물리친 주역은 일본이 아니라 신의 바람이라 불리는 카미카제였다.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원사에는 ‘원나라 전선들은 모두 돌풍에 깨졌으나 고려의 배는 대부분 무사했다.’고 전하고 있다.


4. 고려군함 복원

고려의 군함 복원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고증된 사실을 토대로 정확한 설계도를 그리는 일이다.

먼저 과선의 설계도를 완성했다. 과선은 실제 해전에서 그 위력을 톡톡히 발휘한 고려의 대표적인 군함이다.

이어 완성된 과선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운동장에 실제크기의 대선을 세웠다.

고려에 대선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배위에서 말을 달릴 만했다고 하는데 그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5. 고려군함에 사용된 무기들

일본 고기록 소우기는 '고려전함은 돌에 화약을 넣어서 적선을 부순다'라고 적고 있다.

고려 군함에서 사용된 강력한 무기 중에 적선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는 불화살 주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화살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화포였다.

고려는 까다로운 모든 조건을 갖추고 세계최초로 군함에 화포를 설치했다.

6. 해군사령관 왕건

고려가 동북아 최고 수준의 군함을 보유할 수 있었던 데에는 과학적이고 뛰어난 조선술 외에도 다른 배경이 존재한다.

바로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 왕조를 건설한 왕건이다.

왕건의 조상은 대대로 해상무역을 벌인 해상 호족세력이었다.

따라서 해상 호족출신인 왕건은 철저하게 바다를 이용할 줄 알았다.

7. 해상무역이 가져다 준 풍요

고려는 성능이 우수한 군함을 바탕으로 바다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 힘을 통해 여러 나라와 교역을 벌이며 국제적으로도 우세한

지위를 확보했다.

고려는 동북지역, 일본, 중국의 북,남부, 그리고 동남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항로를 가지고 있었고 이 해상무역은 고려에

풍요로움을 안겨주었다.

 

<<쥐나 짱골라의 역사탐원공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다! 클릭참조>>  

 <<한국 배(선박)의 역사 클릭참조>>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이러한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근처 바다에서 많은 해산물을 채취해서 주요한 식생활의 하나로

이용해왔다. 그래서 바다에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고대부터 배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사용하기 시작한 배가 점차 문명이

발달하고 기술이 진보해짐에 따라 이러한 고기잡이배에 그치지 않고 나라의 해안을 지키거나, 이웃나라와 교역을 하거나, 조세나

물건을 옮기는 운송수단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다카시마박물관에 전장 40미터로 복원하여 전시되어 있는 여몽연합 함대

 

 

백제시대에는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하여 잦은 왕래가 있었고, 신라 말기에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남해안 일대에 출몰하는 왜구를 섬멸하고, 세력을 형성한 후에 남해안 해상제해권을 장악하고, 이웃 나라와의 해상무역을 독점하였는데, 이것으로 당시의

배를 건조하는 주조기술이 얼마나 발달하였는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건조기술의 축적을 되물림 받은 고려에서는 과연 어떠한 배가 건조되었을까?

918년 왕건에 의해 건국된 고려는 지방호족출신과 해상세력의 영향으로 건국된 나라로, 이 나라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는 바로

해양력이었다.

사실상 왕건의 조상과 그의 가문도 해상무역을 담당한 해상세력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해군을 지휘했으며 직책도 백선장군 해군대장이었고 당시의 해군력 또한 막강했는데, 909년에는 해군을 이끌고

나주를 공격하여 화공전법으로 승리함으로써 서남해 일대에 확고한 기반을 다지면서 후삼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해 가는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나주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호족의 딸이기도 한 장화왕후는 왕건이 해상활동 중에 맺어진 사랑이기도 하다.

기록에 의하면 왕건이 건조한 대선은 그 길이가 각 방 16보(36.6m)에 무게만도 250∼280톤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는 15∼16세기경 콜룸부스가 항해한 배의 규모인데 이미 5∼6백년 전에 고려에서 건조된 것으로 이를 통해서 당시 고려의 해상세력

의 배의 건조기술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큰 규모이다 보니 배 위에서 말이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할 만하다.

((서양 과학이 동양을 앞선 것은 1730년대 - 서양 학자들의 주장, 1730년대 이전 곧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동양과학이 서양보다

높았다))

당시 고려의 배에는 대선, 과선 등의 군함에서부터 순찰선인 순선, 행정지도선인 관선, 소나무로 만든 큰 배인 송방, 막선, 지방의

조세를 서울로 옮기는 조운선 등 매우 다양하였다.

(고려사에 대선·과선 등에 대한 기록이, 1123년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 순선·관선·송방·막선 등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대선은 현재까지 밝혀진 고려의 배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함이며, 과선은 고려의 대표적인 군함이다.

일본의 《소우기》 기록에 따르면 고려의 배, 그 중에서도 과선은 철로 뿔을 만들어 적을 부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거북선이 바로 고려군함을 원형으로 하여 개발된 것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고려배에는 세계최초로 '과포'라 하여 포를 설치하였다. '1019년 고려전함이 화약을 넣어 공격한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일본 《소우기》). 이렇게 보면 중국이 4대 발명품으로 자랑하는 것 중에 이미 한국이 원조이자 종주국으로 밝혀진 인쇄술과 더불어

'화약'도 한국이 최초로 발명했다는 새로운 사실도 밝혀진 셈이다.

특히 고려가 일본원정시 화약성 폭발무기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객관적 정황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백련초》에서는 997년 고려가 일본이 계속적인 통상요구를 거절하자 3차 요구 이후에는 큐슈를 침공했다고

하며, 5백여 척을 앞세운 고려군의 침공 기록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중세고려 이후로 근세조선시대에 나온 거북선도 3층 구조인데, 고려 배의 건조 방식과 대포 설치를 이어받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고려 배는 한선(韓船 - 한국배) 기능 보유자인 이원식이 밝힌 대로 바닥이 평평하며 배의 앞뒤가 부드러운 유선형으로 굽어져 올라간

형상이다.

그리고 밑바닥에 돌을 두어 15˚의 기울기에도 원상회복이 가능하게 했으며 배나무 펌프를 설치하는 등 고도의 과학을 동원했다.

 

고려의 전함에는 평전선(平戰船)과 누전선(樓戰船)이 있다.

 

 

 

 

1985년에 완도 근해에서 인양된 10-11세기 경의 도자기 운반선

 

 

 

 

 

 

고려 전함의 닻과 닻돌 (일본 나카사키 현에 보관)  닻과 닻돌 2개를 합쳐 무게가 1톤에 육박한다.

   

이러한 해양국 고려의 면모가 있었기에 활발한 해상교역이 가능했고 문화와 예악, 보화, 각종 물자 등이 늘 오갔으며 화려하고도

풍요로운 사회가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서긍은 고려의 객관(여행객이 묵는 여관)이 궁궐만 했다고 하여 활발했던 국제무역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이규보는 자신의 시(詩) 가운데 고려 배가 베트남 등은 물론이고 대식국(아라비아), 마팔국(인도), 섬라곡국(태국) 등지까지 오갔다

했다.
사실 오늘날 한국을 가리키는 영문자 'KOREA'도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를 보고 부르던 말에서 유래된 이다.
해상제국 백제의 해양활동과 장보고의 청해진 시대를 이어받은 고려인 것이다.
그래서 고려 배도 그 조선술과 전통을 이어받는다.

이에 힘입어 해상왕국 고려는 3개월만에 9백척을 건조했다고 한다.
지금도 전하고 있는 고려의 청동거울 중에는 항해 중인 고려 배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역사스페셜 145 - 고려·몽골 연합함대, 일본 원정 주력은... 클릭참조>>

 

이렇듯 갈래갈래 있는 파편들과 앞서 언급된 기록들을 모으고 연구하여, 고려 배에 관한 기록과 원형복원 작업을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
이제 우리는 고려의 해상력을 다시 밝히는 한편 해양대국을 꿈꾸는 21세기 한국의 미래의 본보기로 삼아 나가야 할 것이다.

 

고려도경, 더러운 짱골라를 비웃은 고려인들

  

<<중세고려는 어떤 나라인가? 클릭참조>>  

<<세계를 향한 선진해양국 고려 클릭참조>> 

<<광개토태왕께선 광활한 영토를 평정하셨었나이다! 클릭참조>>

<<근세고려시대 우리는 로켓을 쏘았다 클릭참조>>

 

  

 

 

디스커버리 다큐에서 방영한 신기전 재연 (출처 : '기침 가래엔 용각산' 블로그)

미국 디스커버리채널에 보면 mythbusters라고 호기심해결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총을 수직을 발사했을 때 살상효과라든지, 종이로 만든 활의 위력테스트, 천장선풍기로 사람 목이 끊어지는가,

보드카를 탄소정수기(?)로 거르면 맛이 고급스러워 진다든가, 아르키메데스가 정말 거울로 배에 불을 붙였을까 하는 '카더라'는

얘기에 대한 호기심해결하는 프로죠. 천조국 TV프로그램답게 물량이 아주 비범한데...


왠일인지, 이 친구들이 '신기전'을 들고 나와서 만들었습니다. 맨 서양물건만 보다가 신기전을 보니 왜 이리 반가운지...^^

화약무기 (...)
 
어떤 자료를 보고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발사대인 '화차'를 기준용어로 삼습니다. 
저 화살표는 날아가는 화살들을 그린거죠.

토리가 오늘 미쓰는 'The Hwacha. It's ancient korean weapon'이라고 합니다.
(조선이 ancient 취급받는 건 둘째로 치고....--;;)
캐리가 종이를 보고 '이 그림 보니까 존재하는거 같은 무슨데 미쓰야 -0-' 라고 따집니다.
그래서 토리가 말하는데, '지금은 존재하지 않아, 이거는 unreasonable hwacha'라고 말합니다.
(사실 영어를 잘 못해서 맞는 말인지는 장담못해요.)
....실존하는 것은 미쓰가 아니니까 검증대상이 아니죠. 그래서 집어넣은 내용일 수 도 있는데....뭐 틀린 얘기도 아니니...(한숨)
 

mythbusters에서 검증할 내용은.."화살 200발이 정말 한 번에 500야드를 날아가느냐." 입니다.
그리고 화살이 꽂혀 '폭발피해'를 입히는지....
영화 <신기전>과 다르게 왜군을 잡는 걸보면...참 개념이 있지요. (....)
실제로도 왜군잡는데 쓰였으니..-_-;;
저기 왜군 모델 중 신기전 맞고 터지는 애가 그랜트인데, '일본계'미국인입니다. (...)
뒤에서 토리가 경악의 눈으로 바라보는군요.. 
 
 
그 다음 검증할 것은 과연 200개 화살이 다 날아가느냐 입니다.
CG처럼...다 안 날아가고 몇 개 남는거 아녀? 이런 문제를 상정합니다.
그러니까 '동시에 200개의 화살이 날아가느냐' 이거죠.
미스버스터즈가 참 대단한게...일단 화살부터 만들기 시작합니다. ㅎㄷㄷ
 
깃털까지 구해서 다는게...역시 뭔가 본격적으로 합니다.
 
하지만 화살 만들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죠? ㅎㅎ
 
토리가 열심히 화살을 만들고 불꽃놀이전문가를 찾아서 화약사용에 대한 조언을 받으며, 폭약통을 만듭니다.

'흑색화약'사용 때문인데..적절한 양을 측정하기 위해 각각 다르게 만듭니다.
500야드 지점에 표적을 갖다놓습니다. 거리측정의 압박 (...)

500야드는 미터로 환산하면 457미터 정도가 됩니다.
준비가 된 사수부터 450 사로 ?!

각도는 45도로 맞춰주고요..
 
가장 작은 폭약통을 가진 놈...아직 준비가 안됐군요...제자리에서 뻥!   실패

...그래서 화약을 더 늘리고 가벼운 화살로 교체합니다.

 두 번째 화살도 뻥!  화약용량이 증가하니 폭발은 멋있네요.

굳!

역시 물량이 진리!
쉬이이이이이~~~~~~~익!   (피리빵?)

검은화약을 사용해서 화살을 500야드 날릴 수 있다. 검증.

보기에도 로켓같네요.
 
그 다음은 화력비교인데요.

2차폭발을 염두해 둔 실험으로 보였습니다. 저거는 돼지살덩이이고, '2차폭발'로 인한 인마살상효과를 보려고
비교군을 설정했지요.

1차 테스트는 폭약통이 얇게 되서 화염이 확 퍼져서 살상력이 좀 덜하고, 2차 테스트는 폭약통을 두껍게 해서 폭발력이 집중되도록

만들었습니다. 돼지고깃덩이이긴 하지만...직격이라면 2차 폭발에 의한 인마살상효과는 검증된 셈.

 

캐리와 그랜트가 화차에 대한 역사적인 이야기를 나눕니다.

캐리 : 조선 다이너스티 과학자들이 만들었엄.
그랜트 : 1593년 'battle of 행주' 에서 3천명의 조선군이 40대의 화차를 가지고 3만명의 일본군과 맞섰지.
캐리 : 와..그거 10대 1 이잖아..
발사시험과 위력시험에 만족을 하고 본격적으로 화차대량살상무기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신기전도 대량으로 제조하고

(안전제일)
음?
 
뚝딱뚝딱 화차를 만들어냅니다. (...)

한 쪽 바퀴가 좀 이상한데....이거는 전편에 '화약을 연료로 하는 엔진'을 구동하는 시험과정에서 만들어낸
실패작인데...그걸 그대로 재료로 썼네요. 화차 모양이 참 그럴듯 합니다. 
 
보시는 것처럼 3명이라는 적은 인원이 운용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영감! 신기전 방사준비가 끝난줄 아뢰오."

"방사하라~"
"방사하랍신다~"
(....이랬을까요?;;)
슬슬..심지가 타 들어가고
첫 화살이 발사되면서..
우왕ㅋ 굳ㅋ
/환호   /춤    /박수

'화차' 발음이 미국애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무슨 '기합소리'의 일종처럼 되서
시험중 마다 '화차~' '화차아아아아아아~' 하면서 환호를 합니다. (...)
'화차아아아아아아~' 
근데 사실 500야드지점에 스티로폴 인형을 세워놓고 있었죠.

 탄착군이 적절하게 형성되는지 보려고 했는데.

 

신기전이 예상보다 훨씬 멀리 날아가는 바람에~ 스티로폼 군대가 멀쩡하게 서있습니다.
하지만, 사거리측면에서 예상상회의 결과입니다.

원 영상을 보면 바람이 살짝부는데 그것 때문에 계산한 것 보다 좀 더 날아간 것 같습니다.

뭐, 화살이 적절한 탄착군을 형성해서 떨어지는 걸 확인했으니 됐죠.
원래 목적이 '200개 화살이 동시에 다 날아가서 적절한 타격을 입히느냐'니까요.

스티로폼 군대가 아작나지 않은 건 조금 아쉽네요..여기서 나오는 얘기가 지금 스티로폼 좀 세워놨지만,
진짜 전투때는 수십,수백 인원이 있었으니 그 때는 위력을 발휘했으리란 거였습니다.
호기심 해결은 '확인'한 걸로 종결됩니다. 

그림만 보고 만들었을리는 없지만..아무튼 단 한 번에 성공...(-_-)b
mythbuster에서 '거짓'이 정말 많이 나오고 '진실'은 잘 안 나오는 편이죠.. 정말 대단하고 재밌게 봤습니다.
그건그렇고...옛날 KBS에서 할 때 무슨 '육사'협조씩이나 받아가면서 만들어서 실험했는데...얘네는 그냥 만들어내는 솜씨라니. -_-;;

더러운 천조국에서 조선기술자를 납치해서 고문했나... ( -_);

(사실 자막을 보면 전쟁기념관에서 지원해준걸로 나옵니다. =_=;)

 디스커버리 홈페이지에서 관련 확인 가능합니다. 마우스로 요리조리 클릭.

요거는 이쪽계열 최신무기 러시아 스메르쉬 짤입니다. 

 

 

 

“세종의 아들 문종은 화약무기연구소장(?)”
채연석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전 원장

우리나라 로켓 역사를 연구해 온 채연석 항공우주연구원 전 원장은 조선시대 우리 나라 과학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조선시대 대표적 화약무기인 ‘대신기전'은 당시 세계 어느 나라도 넘볼 수 없는 뛰어난 성능과 정밀도를 갖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본지는 채 전 원장을 만나 '대신기전'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 註]



 
▲ 채연석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전 원장  ⓒ

“조선시대 5대 왕 ‘문종’이 수십 년간 조선을 통치했더라면 우리나라 판도가 바뀌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로켓’박사인 채연석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전 원장(현 연구위원)은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연구책임자가 되어 당시 세계 최고 성능의 로켓을 만들었다”면서 “문종의 화약무기 제조술이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바로 ‘커다란 귀신 같은 기계화살’이란 뜻을 가진 ‘대신기전’이라는 화차(火車)가 문종의 대표작. 지금으로 말하자면 국가화약무기연구소 소장을 문종이 맡아 이런 무기를 개발한 것이다.

채 전 원장은 “15세기 대신기전 개발 후 19세기까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 같은 성능의 화약무기가 개발됐다는 기록이 없다”면서 “문종이 왕으로 재위해 2년여 동안 나라를 통치하다 허약한 몸 때문에 병사했는데 만약 세종처럼 30년 이상 통치했다면 우리나라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4군6진 설치에도 대신기전이 큰 몫”   “한번에 100발, 최대 2km까지 날아가”

 
▲ 한번에 100발의 불화살을 발사하는 대신기전  ⓒ

그는 “세종이 북쪽 두만강에서 압록강까지 4군 6진을 설치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대신기전이라는 무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당시 왜군도 200여 년 동안 대신기전 때문에 조선을 침입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문종이 수십 년간 통치했다면 화약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해 세계 평정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채 전 원장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대신기전은 어떤 무기일까. 채 전 원장은 문종이 불화살의 크기에 따라 신기전을 대/중/소 3가지 크기로 만들었고 그 중에서 크기가 큰 것을 대신기전으로 불렀다고 말했다.

특히 대신기전의 경우 한번에 100발씩 불화살이 나갔으며, 사정거리가 최대 2km였다고

한다.

수십 대, 수백 대의 대신기전이 불을 뿜으며 하늘을 불화살로 수를 놓으면 아무리 용맹한

군이라도 모습을 감추었을 것이라고 채 전 원장은 말한다.

옛날 자료를 조사해서 대신기전 설계도를 보유한 채 전 원장은 지난 70년대 말 실제

대신기전을 제작했고 이를 행주산성 기념관에 전시해놓았다.

지난 1993년에 채 전 원장은 대전 엑스포에서 대신기전으로 불화살을 발사하는 시연을 했다.

대신기전, 0.1mm 단위로 정밀하게 제작
뛰어난 손기술과 과학기술력 보유한 증거

 
▲ 대신기전  ⓒ

대신기전의 또다른 놀라움으로 채 전 원장은 정밀도를 꼽았다.

즉 설계도를 보면 ‘척/촌/푼/리’ 단위가 나오는데 척은 30cm, 촌은 3cm, 푼은 3mm, 리는 0.3mm라는 것.

다시 말해 문종은 0.1mm단위까지 정밀하게 화약무기를 제조했던 것이다.

“당시 이렇게 정밀한 단위를 사용했던 기계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었다”고 말하는 채 전 원장은 “이는 우리 민족의 손재주가 뛰어났고 과학기술 분야에 탁월한 재주가 있었음을 대변해 주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우리나라 로켓의 기원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채 전 원장은 대학 2학년인 1970년대

초 우리나라 역사문헌 연구에 뛰어들어 고려 말 최무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이자 ‘달리는 불’이란 뜻을 가진 ‘주화’를 개발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석사 1년 차인 지난 1975년 우리나라 역사학회에 발표한 바 있다.

/서현교 객원기자  

2006.01.12 ⓒScience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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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武)에 대한 문종의 열정 클릭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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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 화성인 m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