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세계 4대 발명의 진정한 종주국 4-졸본부여 고구려에서 유래한 인쇄술

설레임의 하루 2009. 8. 22. 03:19

*출처:다음카페-상촌 김자수 기념사업회    글쓴이: 금소영당/김현숙

                                                                     http://cafe.daum.net/hskk2005-5/VVl/1632

 

 

 

본 블로그의 /촌철살인/면에 있는 [허구의 짱골라, 중국이라는 환상을 벗어던지자!]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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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 발명의 진정한 종주국 4

 

“팔만대장경은 발해대장경 계승한것”

조선일보ㅣ입력 : 2004.12.27 18:18 / 수정 : 2004.12.28 10:20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발해대장경은 거란대장경의 母本 처음 확인 北方불교문화 발해→ 거란 →고려로 이어져

 

조병순 성암고서박물관장이 거란 대장경의 사본을 짚으며“함차번호가 같은 발해 대장경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덕훈기자 leedh@chosun.com

 

최근 발견된 8~9세기의 ‘발해(渤海) 대장경’〈본지 8월 7일자 A2면〉이 11세기에 제작된 ‘거란 대장경’의

모본(母本)이었음이 확인됐다. 이로써 서기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발해 것을 그대로 옮긴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거란 대장경을 상당 부분 참고한 13세기의 고려 대장경(팔만대장경)이 사실은 ‘발해 대장경’을

계승했을 가능성이 높아져 발해와 고려의 문화적 계승관계를 밝히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서지학자 조병순(趙炳舜) 성암고서박물관장은 “거란 대장경인 ‘대방광불(大方廣佛) 화엄경 (華嚴經)’의

함차(函次)번호가 발해 불경으로 여겨지는 ‘대방광불 화엄경’ 권 제38 ‘대화령국장(大和寧國藏)’과 동일한

것을 확인했다”고 27일 밝혔다.

함차번호란 대장경의 여러 권(卷)을 묶어 천자문 순서대로 매긴 번호로, 이 순서가 동일하다는 것은 곧

같은 계통의 불경임을 의미한다. 화엄경의 31~40권에 해당하는 현존 ‘대화령국장’의 함차번호는 ‘육(育)’이다. 그 앞에 존재했을 21~30장은 앞 글자인 ‘애(愛)’가 되지만 송나라에서 청나라까지의 중국 불경은 이 부분이 ‘장(章)’으로 돼 있는 반면, 거란 대장경은 똑같은 ‘애’자였다.

고려 팔만대장경(1251년 완성)을 만든 결정적 공로자인 승려 수기(守其)는 1087년 완성된 고려의 ‘초조

대장경’과 북송(北宋)의 대장경, ‘거란 대장경’을 모두 비교·교감(校勘)했다는 내용이 ‘고려국 신조대장

(新雕大藏) 교정별록(校正別錄)’에 기록돼 있다.

많은 학자들은 지금까지 이 내용을 근거로 “거란 대장경은 중원과는 계통이 전혀 다른 대장경이었을 것”

이라고 추정했지만, 1991년 중국 산시성(山西省) 잉셴안(應縣)에서 거란본의 일부가 발견된 뒤에도 그와

같은 대장경이 없어 ‘북방 불교문화’의 실체는 찾지 못하고 있었다.

  •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오노 겐묘(小野玄妙)는 “고려 대장경이 참고한 거란본은 거란에 앞선 세력(발해)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아직까지 그 근거는 없었다.

‘동일한 함차번호’라는 것은 거란본이 발해본을 사실상 그대로 베꼈다는 얘기가 된다.

조 관장은 “거란이 발해의 궁중 서고를 고스란히 넘겨받았다는 기록이 있다”며 “여기서 고구려-발해-

거란으로 이어지는 고대 북방 문화의 계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고려 팔만대장경은 이 ‘북방 문화계통’과 당-송으로 이어지는 ‘남방(중원) 문화계통’을 모두 계승·

종합한 ‘완정본’이라는 의미이며, ‘북방 문화’는 중원이 아닌 고려로 계승됐다는 것이다.

조 관장은 또 “당시 대장경은 황제의 칙령이 없이는 번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대장경을 발간한 세력은

중원의 통치범위 바깥에 있었던 것이 된다”며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중국측의 주장을 반박했다.

불경 전문가인 박상국(朴相國)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장은 이에 대해 “불경사(史)를 다시 써야

할 큰 발견”이라며 “그동안 잃어버렸던 북방 문화의 실체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라고 평가했다.

 

 

국내 最古 발해 대장경 나왔다 .

조선일보ㅣ입력 : 2004.08.07 06:29 / 수정 : 2004.08.07 08:08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8~9세기 제작… 趙炳舜 박물관장 日서 입수    ‘발해는 中國지방정권’ 반박자료로 가치높아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의 대장경(大藏經) 중 가장 오래된 불경이 발견됐다.

이 불경은 발해(渤海·698~926)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서지(書誌) 유물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지학자 조병순(趙炳舜) 성암고서박물관장은 6일, 최근 일본에서 입수한 ‘대방광불(大方廣佛) 화엄경

(華嚴經) 권제38 대화령국장(大和寧國藏)’이란 제목의 불경을 공개했다.

총 길이 8m50㎝, 세로 28.6㎝의 이 불경은 황마지 위에 먹으로 글자를 쓴 것이다.

대장경의 여러 권(卷)을 묶어 천자문 순서대로 번호를 매긴 함차번호와 서체로 보아 서기 8세기 후반~

9세기 것이 거의 확실하며, 제작된 곳은 불경 제목에서 보듯 발해의 영토 안에 있던 지금의 함흥(화령)인

것으로 여겨진다.

  •  

이 불경은 최근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사에 편입하려는 ‘동북공정’과 관련,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을 반박할 획기적 자료로 보인다.

조 관장은 “역사상 ‘화령(和寧)’으로 불렸던 지명은 오직 함흥뿐이었다”며 “발해의 수준높은 문화 중심지

중의 하나가 지금의 한반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박상국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장은 “이 대장경의 발견은 발해가 독자적이고 수준 높은 불교

문화를 지니고 있던 나라였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지스카 하루미치(石塚睛通) 일본 홋카이도대 대학원 교수도 이 불경을 확인한 후 “주사(朱砂)로 괘선을

긋고 황마지를 사용하는 등의 특징과 서체로 보아 ‘중국 불경’으로는 볼 수 없고, 둔황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경은 고려시대인 1006년 제작된 ‘대보적경(大寶積經) 권제32’로

알려져 있었다. ‘대화령국장’의 일부는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에도 있지만 그동안 ‘14세기 불경’으로 잘못

해석돼 왔다.

 

 

조선시대에 ‘1인 출판업자’ 있었다네.

조선일보ㅣ입력 : 2007.05.26 00:58          신형준 기자 hjshin@chosun.com

 

이동식 인쇄세트·활자 7만 3천여자 공개  18세기말 등장… “세계적으로 유례 드물어”

 

조선 후기 ‘1인 출판업자’가 사용했던 활자와 인쇄용구 일체가 발견·공개됐다.

조병순 성암고서박물관장은 21일 ‘1인 출판업자용 나무활자와 인쇄용구’를 본지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공개한 유물은 7만3000여자에 이르는 나무활자(목활자)와, 나무활자를 담은 목판, 인쇄판, 책 겉장에

장식용으로 마름꽃의 무늬를 박기 위해 쓰는 능화판(菱花板), 인쇄용 솔, 주문받은 곳으로 이동할 때 활자를 담은 목판을 고정하기 위해 썼던 것으로 보이는 끈 달린 대나무 장치와 멜빵 등이다.

18세기 말~19세기 초반 이후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 활자는 가로 1.3㎝, 세로 1㎝ 안팎의 큰 활자 3만3000여자와, 가로·세로 0.6㎝ 정도의 작은 활자 4만여자

로 나뉘어진다.

큰 활자와 작은 활자는 각기 다른 목판 41판에 넣어 정리했는데, 각 목판에는 大, 竹, 田, ? 식으로 부수별로

정리돼 있어, 활자를 뽑을 때(문선·文選) 한자를 찾기 쉽도록 했다.

조선 후기 ‘1인 출판업자’가 사용했던 인쇄용구 완형 세트가 현재까지 전해진 경우는 아주 드물다.

보물 865호로 지정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품(19세기 초반 추정) 정도가 있을 뿐이다.

학계에서도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이 같은 출판 시스템을 부르는 공식 명칭도 없다.

일부 학자들은 ‘1인 출판업자’를 ‘각수(刻手)’로, ‘나무활자 등 인쇄용품 일체’는 지게로 옮겼다고 해서 ‘지게

활자’로 부르기도 한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품의 공식 명칭은 ‘민간활자 및 인쇄용구’이다.

 

 ▲조병순 성암고서박물관장이 조선 후기‘1인 출판업자’가 사용했던‘이동식 인쇄용구 세트’를 25일 본지에

공개했다.

나무로 만든 활자와 활자를 담은 목판, 그리고 활자가 담긴 목판을 지고 다닐 때 쓰던 종이를 꼬아 만든

멜빵이다. /이태경 객원기자 ecaro@chosun.com

 

‘1인 출판업’은 조선 후기의 변화된 사회상 속에서 탄생한 ‘문화산업’이었다.

18세기 후반기 이후 경제력이 전보다 나아지면서 족보와 개인 문집을 내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필사(筆寫)로는 여러 권을 내기가 여간 번거롭지 않았다.

그렇다고 활자를 직접 만들어 찍거나, 목판으로 깎아내 출판하는 방식은 막대한 비용 때문에 여간한

대갓집이 아니고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18세기 말부터 생겨난 게 ‘이동식 1인 출판업’이었다.

자체 제작한 나무활자(목활자) 등 인쇄용구를 가지고 있다가 족보나 개인 문집의 제작 의뢰가 들어오면

의뢰자의 집을 방문해 인쇄하는 방식이었다.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서구에서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책을 파는 ‘1인 책 판매상’은 있었지만,

이 같은 인쇄 방식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고 했다.

‘이동식 1인 출판업’은 신식인쇄기술이 들어온 19세기 후반 이후에도 살아 남았다.

안대회 명지대 교수(고전문학)는 “일제 때에는 ‘족보도 없는 집’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족보 발간이

성행했는데 당시 지방의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방식으로 족보 출판을 했다”고 말했다.

  
도움말= 이정섭 국립고궁박물관 자문위원, 신승운 문화재위원(성균관대교수), 송일기 한국서지학회장

(중앙대교수)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군인 이야기

 

 

 

인쇄술

 중국은 활자 인쇄술이 1041~1048년 사이에 중국 학자 필승(畢升)에 의해 발명되었으며 이에 대한 기록은

북송시대의 ‘몽계필담’(夢溪筆談·북송시대 유명 학자 심괄(沈括)의 저서)및 여러 역사서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고구려에서 유래된 인쇄술

 

 

 

 서지학자 조병순 박사는 최근 발견된 8~9세기의 '발해(渤海)대장경'이 11세기에 제작된 '거란대장

경'의 모본(母本)이었다고 발표했다.

서기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발해 것을 그대로 옮긴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거란대장경을 상당 부분 참고한 13세기의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거란대장경인 ‘대방광불(大方廣佛) 화엄경 (華嚴經)’의 함차(函次)번호가 발해 불경으로

여겨지는 '대방광불화엄경' 권 제38 ‘대화령국장(大和寧國藏)’과 동일하다고 설명했다.

함차번호란 대장경의 여러 권(卷)을 묶어 천자문 순서대로 매긴 번호로, 이 순서가 동일하다는 것은

곧 같은 계통의 불경임을 의미한다. 화엄경의 31~40권에 해당하는 현존 ‘대화령국장’의 함차번호는

‘육(育)’이다. 그 앞에 존재했을 21~30장은 앞 글자인 ‘애(愛)’가 되지만 송나라에서 청나라까지의

중국 불경은 이 부분이 ‘장(章)’으로 돼 있는 반면, 거란대장경은 똑같은 ‘애’자였다.

고려 팔만대장경을 사실상 만들었다고 알려지는 승려 수기(守其)는 1087년 완성된 고려의 '초조대장

경'과 북송(北宋)의 대장경, 거란대장경을 모두 비교·교감(校勘)했다는 내용이 '고려국신조대장(新雕

大藏)교정별록(校正別錄)'에 기록돼 있다.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오노 겐묘(小野玄妙)는 “팔만대장경이 참고한 거란본은 거란에 앞선 세력

(발해)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했지만 아직까지 그 근거는 없었다.

‘동일한 함차번호’라는 것은 거란본이 발해본을 사실상 그대로 복사했다는 얘기가 된다.

조 박사는 “거란이 발해의 궁중 서고를 고스란히 넘겨받았다는 기록이 있다”며 “여기서 고구려-발해-

거란으로 이어지는 고대 북방 문화의 계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조병순 박사는 “당시 대장경은 황제의 칙령이 없이는 번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대장경을 발간한

세력은 중원의 통치범위 바깥에 있었던 것이 된다”며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중국 측의

주장도 자연스럽게 부정된다고 설명했다.


△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직지심경’ 초판본의 하권 겉표지(왼쪽 사진)와 내용 일부(오른쪽 사진).

아래는 청주 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된 ‘직지’ 활판 복제품.

△ 1455년 구텐베르크가 제작한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42행 성서’. 원 안은 구텐베르크 초상화.


△ 팔만대장경의 첫번째 경판인 대반야바라밀다경. 한겨레 자료사진


△ 고려대장경을 CD-ROM에 담기 위한 작업중 두드리기 단계의 모습. 대장경 원문을 얻으려면 먹칠하기,

종이붙이기, 두드리기, 떼어내기등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 경남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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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고어 전미부통령 서울디지털포럼 개막식

 

고어 전 부통령은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서울디지털포럼 2005'에서 한국의 정보기술(IT) 발전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얻어온 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위스의 인쇄박물관에서 알게 된 것"이라며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때 교황의

사절단과 이야기했는데 그 사절단은 한국을 방문하고 여러가지 인쇄기술 기록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친구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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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 화성인 m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