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중국사가들이 歪曲한 <동이족>의 性品

설레임의 하루 2009. 8. 17. 02:39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心濟     http://cafe.daum.net/dobulwonin/HVLO/71

 

 

 

 

기록에 나타난 한국인은 어떤 사람일지 알수가 없고 또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영토가 축소된후 서하족 사가들이 워낙 날조만 하다 보니 그렇겠지만,이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동이전의 일부를 보면,

 

삼국지 위서 동이전

夫餘 (부여)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平敞.土地宜五穀, 不生五果.其人大,性彊勇謹厚,不寇.

 

산과 능선이 많으며, 진흙창이 넓으니, 동이의 지역중에 가장 평평하다.

흙은 오곡에 마땅하고, 오과는 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인품이 크다.

성격은 강하고 용감하며, 삼갈 줄 알고, 후덕하니 도둑질 하지 않는다.

 

高句麗 (고구려)

其人性凶急, 喜寇.

그 사람들의 성품이 흉악하고 급하여, 도둑질함을 즐긴다.

 

其人絜清, 自喜喜藏釀

사람들은 탐욕이 없지만, 좋은 술을 두고 즐기는 것을 좋아한다.

 

沃沮 옥저(東沃沮 동옥저)

人性質直彊勇,

사람들의 성질은 곧고, 강하며, 용감하다.

 

 

국지 위서 동이전의 부여,고구려, 옥저조에서 보면 사람들의 성격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부여와 옥저는 인성(人性))이 좋다고

하였는데 여기까지는 좋다고 쳐도, 고구려는 성품이 흉악하고 급하며 도둑질함을 즐긴다고 하면서 그 사람들이 탐욕이 없다고 하고

있으니 앞뒤가 맞지를 않는다.

다가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하였음에도 부여는 인성(人性)이 좋고 고구려는 나쁘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너무도 다른 말이

된다. 

부여에서 나온 고구려의 인성(人性)이 흉악하다고 하는 가운데 예(濊)는 역사날조를 위해 조치된 것으로 보여서 좀 길게 인용해 본다.

 

 

예(濊)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戶二萬.

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淮)<[準]>僭號稱王.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

數萬口. <燕>人<衛滿>,  結夷服, 復來王之. <漢><武帝>伐滅<朝鮮>, 分其地爲四郡.

自是之後, <胡>·<漢>稍別. 無大君長, 自漢已來, 其官有侯邑君·三老, 統主下戶.

其耆老舊自謂與<句麗>同種. 其人性愿慤, 少嗜欲, 有廉恥, 不請(句麗). 言語法俗大抵與

<句麗>同, 衣服有異. 男女衣皆著曲領, 男子繫銀花廣數寸以爲飾. 自<單單大山領>

以西屬<樂浪>, 自領印七縣, 都尉主之, 皆以濊爲民. 後省都尉, 封其渠帥爲侯,

今<不耐濊>皆其種也.

 

'예'의 남쪽은 '진한'이고,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이다. 동쪽으로 큰 바다가 있고, '조선'의 동쪽은 모두 그 땅이다.

호수는 이만이다.

옛날 '기자'가 '조선'에 이르러 팔조의 가르침으로 가르치자 문을 닫지 않고 백성들은 도둑질 하지 않았다.

그 사십여세 후에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였다.

'진승'등이 일어나니, 천하가 '진'을 배신하였다.

'연','제', '조'나라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조선땅으로 들어오니, 수만이나 되었다.

'연'인 '위만'이 있어 상투틀고 이족옷을 입어 돌아와 왕노릇하였다.

'한 무제'가 조선을 벌하여 멸하니, 나누어 그 땅에 사군을 두었다.

 

이로부터, '호'와 '한'이 점점 나뉘게 되었다.

대 군장이 없고, 스스로 한때부터의 관직에, '후', '읍군', '삼노'가 있어 하호의 주인으로 다스렸다.

그 늙은 노인들은 옛날부터 스스로 '구려'와 같은 종류라고 한다.

사람들의 성질은  삼갈 줄 알고,성실하다.

즐기고, 탐욕함이 적고, 겸손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알아, '구려'에 구걸함을 청하지 않았다.

 

언어와 법과 풍속은 크게 '구려'와 같고 의복만은 다름이 있다.

남녀의 옷은 모두 분명하게 옷깃이 굽었고, 남자들은 넓이가 수촌이나 되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를 매는 것으로 장식을 한다.

스스로 '단단대산령'서쪽은 '낙랑'에 속하였다.

령의 동쪽에 칠현을 두었는데 도위가 주인이었다. 모두 예의 백성이다.

후에 도위를 없애고, 그 거수들을 후에 봉하니, 이제 '불내, 예'는 모두 그 종류인 것이다.

 

 

예의 늙은 노인들이 스스로 구려와 같은 족속이라고 한다는데 사람들의 성질이 삼갈줄알고, 성실하며 겸속하고 부끄러워 하는

의염치를 안하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구려(句麗)가 고구려라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니 예도 부여의 별종이된다.

그런데 위에 고구려조에서는 고구려 사람들이 포악하고 흉악하다고 하고 있으니 이 또한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같은 족속인데 왜 그리 성품이 다르단 말인가?

 

 

<漢>末更屬<句麗>.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同姓不婚. 多忌諱,

疾病死亡輒捐棄舊宅, 更作新居. 有麻布, 蠶桑.曉候星宿, 豫知年歲豊約. 不以珠玉爲寶.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 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

牛馬, 名之爲責禍. 殺人者償死. 少寇盜. 作矛長三丈, 或數人共持之, 能步戰.

樂浪檀弓出其地. 其海出班魚皮, 土地饒文豹, 又出果下馬, <漢><桓>時獻之.

 

'한'의 말에는 다시 '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그 풍속에 산과 천을 중하게 여기어 산천으로 각각 부를 나누어서, 서로 들어와 허망함을 바라지 못하게 하였다.

같은 성씨끼리는 혼인하지 못하니, 꺼리는 것들이 많았다.

질병으로 사람이 죽으면, 빨리 버리고, 옛집도 버린다. 새로 집을 짓는다.

마포가 있으며, 양잠을 하고, 면을 짓는다.

별자리를 보아서 그래의 풍년들 것임을 미리알고, 구슬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

항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없이 술마시고 노래하고 츰을 추니, 이름하여, '무천'이라 하였다.

또한 호랑이를 신으로 모셔 제사지낸다. 읍락끼리 서로 침범을 하면, 서로 꾸짖어 소나 말로 갚는데, 이를 명하여, '책화'라 한다.

사람을 죽이면, 죽음으로 보상하고, 도둑이 적다. 창은 길이가 삼장이나 되고, 혹 여러 사람이 함께 창을 들기도 한다.

보병전에 능하다. 

'낙랑'과 '단궁'이 이 땅에서 나오고, 바다에서는 반어피가 나오며, 얼룩표범이 있고 또한 과하마가 나온다.

'한 환제'때에 이것들을 바쳤다.

 

 

여기서 예의 사람들이 호랑이를 신으로 모셔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예의 사람들이 현재 한국을 예맥, 호랑이 등과

연결지으려는 사람들 인듯도 하다 한국의산신각에는 산신과 호랑이를 같이 그려두고 있고,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고 하고,

축구팀의표장도 호랑이를 그려 두었으니 부여, 예 를 같이 연결을 지으려 하는 사람이 일부 있는 것 같다.

앞에 보면 기자의 팔조 가르침으로 예의 백성들이 도둑질하지도 않고 문도 닫지 않고 산다고 하였는데 이와 연관된 한서 지리지

내용을 보면,

 

한서 지리지,

 

新校本漢書/志/卷二十八下 地理志第八下

 

玄菟﹑樂浪,武帝時置,皆朝鮮﹑濊貉﹑句驪蠻夷.[一]殷道衰,箕子去之朝鮮,[二]教其民以禮義,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三]相殺以當時償殺;相傷以穀償;相盜者男沒入為其家奴,女子為婢,欲自贖者,人五十萬.

雖免為民,俗猶羞之,嫁取無所讎,[四]是以其民終不相盜,無門戶之閉,婦人貞信不淫辟.[五]其田民飲食以籩豆,

[六]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往往以杯器食.[七]郡初取吏於遼東,吏見民無閉臧,及賈人往者,夜則為盜,俗稍益薄.

今於犯禁多,至六十餘條.可貴哉,仁賢之化也!然東夷天性柔順,異於三方之外,

[八]故孔子悼道不行,設浮於海,欲居九夷,有以也夫!

 

현토, 낙랑은 무제때 설치하였는데 모두 조선,예맥,구려만이였다.

은나라 도가 쇠퇴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사람들에게 예의와 농사와 양잠,길쌈을가르쳤다.

낙랑조선 사람들이 금8조를 범하면;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고, 상하게 하면 곡식으로써 배상하며,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家奴로

삼고,여자는 婢로 삼되, 면죄받고자 하면(자속하려면) 1인당 50만을 내야 했다.

비록 면죄받아 평민이 되더라도 세속에서는 오히려 이를 부끄럽게 여겨,시집가고 장가듦에 있어 짝(배필)으로 삼는 바가 없었다.

이로써 그 백성들이 마침내 도둑질을 하지 않아, 문을 닫는 일이 없어지고 부녀자들은 정조를 지켜 간음하지 않았다.

그 농민들은 먹고 마심에 籩과 豆를 사용했는데,도읍에서는 관리들과 내군의 상인들을 많이 본받아 종종 배기(술그릇)를 사용하였다.

고을에서 처음에는 관리를 요동에서 데려왔는데, 백성이 문을 닫지 않는 것을 본 관리들과 상인으로 간 자들이 밤이 되면 도둑질을

하였으니,풍속이 점점 더 야박해져,이제는 금제를 범하는 자가 점점 많아져서,(조문이) 60여 조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공자는 道가 행해지지 않음을 슬퍼하여, 뗏목을 바다에 띄워 구이에(가서) 살고자 함은 까닭이 있었으니,그렇지 않겠는가?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濊)조 와 한서 지리지의  동일한 내용인데 한서지리지가 좀 더 자세한 것을 볼수 있다.

 

현토,낙랑지역은 조선,예맥,구려 만이의 지역이라고 하는데 이 지역에서 처음에 관리를 요동에서 데려와서는 백성들이 2개의 기록처럼 문도 닫지 않고 도둑질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관리와 상인들이 밤이 되면 도둑질을 하여 풍속이 문란해지고 음란하여

졌다는 것을 볼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기록대로 동이족 중에 인성(人性)이 나빠졌다면 그것이 누구의 탓인가? 외래종족의 탓인 것을 알수 있겠다. 

한의 기록을 보아도 풍속이 좋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본다.

 

韓 한(馬韓 마한)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無 拜之禮. 居處作草屋土室,

形如 , 其戶在上, 擧家共在中, 無長幼男女之別.

 

그 풍속은 기강이 적어, 나라의 읍에 비록 주인이 있지만, 읍락에 섞여 살고, 능히 제도하거나 다스림에 능하지 못하다.

꿇어 앉아 엎드려 절하는 예의도 없다.

거처는 흙으로 만든 집에 풀로 지붕을 올리는데, 형태가 무덤과 같다.

그 문은 위로 내고, 가족이 함께 그 가운데 있다. 어른과 아이와 남녀의 구별이 없다.

기강도 문란하고 예의도 없으며 장유와 남녀의 구별도 없으니 질서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는 말은 도대체 왜 했고, 공자(孔子)도 예(禮)의 나라라고 하면서 살고 싶다고 한 것이

말이 되는가? 

또 중국이 예를 잃으면 사이에서 예를 구한다는 기록은 왜 생겼나?(中國失禮,求之四夷)

 

동이전의 기록이 조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위서 열전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는데 삼국지와 동일하게 공통점이 있고 강조하는 점이 있다.

 

魏書 열전

 

고구려

其俗淫, 好歌舞, 夜則男女 聚而戱, 無貴賤之節, 然潔淨自喜. 其王好治宮室.

 

그 풍속이 음란하고, 노래와 춤을 좋아하며, 밤이 되면 곧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 즐기니, 귀한과 천함의 절도가 없다.

그러하여, 깨끗함을 스스로 즐기니, 왕도 그 궁실을 다스리길 좋아한다.

 

 

豆莫婁國 (두막루국) 

其人長大, 性强勇, 謹厚, 不寇抄. ; 俗淫, 尤惡妬婦, 妬者殺之, 尸其國南山上至腐.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或言本<穢貊>之地也.

 

사람은 크고, 성질은 강하고 용감며, 삼가고, 후하니 도둑이 없다.

풍속은 음란하지만, 특히 투기하는 부인은 미워하여, 투기하는 자는 죽이는데, 시체를그 나라 남쪽 산 위에 버리는데, 여자 집에서

이를 얻을 수가 없다. 소나 말을 받치면, 이를 얻을 수가 있다. 혹은 말하길 본래 근본은 '예맥'의 땅이라 한다.

위서 열전의 고구려 역시 풍속이 음란하고 절도가 없다고 하고 있지만, 또 깨끗함을 스스로 즐긴다고 하니 앞뒤가 안맞지만 삼국지

열전의 고구려와 동일하게 고구려의 인성(人性)은 그다지 훌륭하지 못하다.

 

그러나 두막루국을 보면 사람이 크고 성품이 강하고 용감하다고 하고 삼가면서 후하다고 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것은 군자

(君子)의 풍모(風貌)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풍속이 음란하다고 하고 있으니 이것이 말이 맞는가?

또 앞부분의 군자의 풍모를 말하면서 근본은 예맥의 땅이라고 하고 있으니 앞에 삼국지 예(濊)조와 마찬가지로 예맥을 높이고 연결지으

려 하고 있다.

 

 

진서 동이전을 보면 또 특이하다.

 

夫餘國 (부여국)

<夫餘國>在<玄 >北千餘里, 南接<鮮卑>,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戶八萬, 有城邑宮室,

地宜五穀. 其人强勇, 會同揖讓之儀有似中國. 其出使, 乃衣錦 , 以金銀飾腰. 其法, 殺人

者死, 沒入其家; 盜者一責十二; 男女淫, 婦人妬, 皆殺之. 若有軍事, 殺牛祭天, 以其蹄占

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 死者以生人殉葬, 有 無棺. 其居喪, 男女皆衣純白, 婦人著布

面衣, 去玉佩. 出善馬及貂 ·美珠, 珠大如酸棗.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被破. 其王印

文稱[<穢王>之印]. ㉡國中有古<穢城>, 本<穢貊>之城也.

 

'부여국'은 '현토' 북방 천여리에 있다. 남쪽은 '선비'에 접하고, 북쪽은 '약수'에 있고, 그 땅은 이천여리이며, 호는 팔만호이다.

성읍과 궁실이 있으며, 땅은 오곡에 마땅하다, 그 사람들이 강하고, 용감하며 모임에서 서로 읍하고, 사양의 예의로 중국과 같음이

있다. 나타날때는 옷은 비단으로 하고, 금은으로 허리띠를 꾸민다.

그 법은 살인한자는 죽이고, 그 집을 압수한다. 도둑질한 자는 하나로 인해 열두사람을 꾸짓고, 남녀가 음탕하고 부인이 시샘하면

모두 이를 죽인다.

만일 군사를 일으키면, 소를 죽여 하늘에 제사하고, 그 굽을 보아 길흉을 점치는데, 굽이 흩어지면 흉하고, 합해지면 길하다.

죽은자는 산사람을 순장하고,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상을 당하면, 남녀는 모두 순백색의 옷을 입고, 부인은 베를 짜서 얼굴을 가리고, 옥노리개를 땐다. 좋은 말과, 담비, 아름다운 진주가 나온다.

진주는 크기가 대추만 하다. 나라가 성하고, 부유하니, 스스로 선대부터 내려오니, 아직까지 이르러 깨뜨리지 못하였다.

그 왕의 도장 무늬를 '예왕'의 도장이라 일컷는다.

 

 

한서와 후한서의 기록을 보면,

 

 

新校本後漢書/列傳/卷八十五 東夷列傳第七十五/ ﹡夫餘 - 2810 -

㉢夫餘國,在玄菟北千里.南與高句驪,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

地方二千里,本濊地也.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천리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고구려가 있고 동쪽으로는 읍루, 서쪽으로는 선비와 접한다.

북쪽에는 약수가 있으며 땅은 방(方) 2천리인데 본래 예의 땅이다.

 

新校本後漢書/列傳/卷八十五 東夷列傳第七十五/ ﹡濊 - 2817 -

㉣濊北與高句驪、沃沮,南與辰韓接,東窮大海,西至樂浪.濊及沃沮、句驪,

本皆朝鮮之地也.昔武王封箕子於朝鮮,箕子教以禮義田蠶,又制八條之教

 

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가 있으며 ,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한다, 동쪽으로는 대해(大海)로 막히고, 서쪽으로는 낙랑에 이른다,

예와 옥저,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다.

옛날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가지가 예의와 전삼을 가르치고, 또 팔조의 가르침을 만들었다.

언듯보면 부여가 예의 땅인 것처럼 보이지만 틀린 말이다.

 

부여가 예의 땅이라고 하였는데 부여의 남쪽에는 고구려가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예의 북쪽에 있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보면 예의 북쪽에 고구려, 옥저가 있다고 하였으로, 예는 고구려의 남쪽에 있는 것이 되어서 기록과 정반대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날조라는 것을 알수 있다. 

진서 마한과 동이전 한의 기록과 유사하게 기강이 문란하고 장유와 남녀의 구별이 없다고 하고 있다.

예의라고는 도통 모르는 족속으로 만들어 두었다.

 

馬韓 (마한)

俗少綱紀, 無 拜之禮. 居處作土室, 形如 , 其戶向上, 擧家共在其中, 無長幼男女之別.

 

풍속은 그 기강이 적고, 꿇어 앉아 절하는 예는 없다.

토실을 지어 거하는데, 형태는 무덤과 같다. 그 문은 위를 향하고 있고, 그 가운데에 집안 사람이 함께 거하니,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

 

 

진서 숙신씨를 보면 ,

 

肅愼氏 (숙신씨)

婦貞而女淫,; 性凶悍, 以無憂哀相尙. 父母死, 男子不哭泣, 哭者謂之不壯.

 

부인은 정조를 지키지만, 여자는 음란하고, 성질은 포악하고 사나우며 근심하고 슬퍼하지 않음을 높힌다.

부모가 죽어도 남자는 울지 않고 우는 자는 씩씩하지 아니하다고 이른다. 

산해경에는 삼황오제가 숙신에서 취하여 나온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삼황오제를 욕되게 하는 이 기록은 왜 만들어 두었을까?

(大荒地中 有山名曰不咸 有肅愼之國 在北白民有樹(樹人物指稱)名曰雄 常先八代帝於此

取之) 

또 숙신이 <周><武王>時, 獻其 矢·石 . 逮於<周公>輔<成王>, 復遣使入賀.

 

주 '무왕'때 화살과 돌화살촉을 받쳤다. '주공'에게 보내어 '성왕'을 돕게 했다.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하례하였다. 

이 기록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북사 열전에 보면 더 대단히 왜곡된 것을 보게 된다.

 

北史列傳

 

고구려

用刑旣峻, 罕有犯者. ; 俗潔淨自喜, 尙容止, 以趨走爲敬. ;性多詭伏, 言辭鄙穢,

不簡親疏. 風俗尙淫, 不以爲愧, 俗多游女, 夫無常人, 夜則男女 聚而戱, 無有貴賤之節.

 

형벌은 엄하여, 범하는 자가 드물다. ;

풍속에 깨끗함을 좋아하고, 절제함을 숭상하고, 달리는 것을 공경한다.

성격은 속임이 많고, 언사는 더럽고 추악하며,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풍속에 음란함을 좋아하여,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풍속으로 유녀가 많아, 지아비로 아무나 삼는다.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노는데, 귀천의 절도가 있지 않았다.이것은 정말 막 되먹은 족속이다.

 

남사열전에는 고구려가,

 

高句麗(고구려)

人性凶急, 喜寇 .

俗喜歌 , 國中邑落, 男女每夜 聚歌戱. 其人潔淨自喜, 其俗好淫, 男女多相奔誘.

 

사람들은 흉폭하고, 급하며, 노략질 하길 좋아한다.

풍속에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의 읍락에서 남녀가 매양 밤에 무리를 이루어 노래하며 즐긴다.

사람들은 깨끗함을 좋아하고, 풍속에 음란함을 좋아하여 남녀가 서로 꼬시어 예를 갖추지 않고, 결혼함이 많다. 

렇게 보면,  

부여와 예의 풍속은 군자(君子)이고 , 고구려와 한은 완전히 후레자식들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이라고 하였고, 예도 부여의 지역에 있었다고 해 두었으니고구려와 예가 모두 부여의 족속이기는 한데

고구려와 한(韓)은 후레자식이고, 부여와 예(濊)는 군자라는 말이 이치에 맞는가?

은 족속이 어찌 이렇게 다를수 있겠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六十六年, 春二月, 地震. 夏六月, 王與<穢貊>襲<漢><玄 >, 攻<華麗城>.

 

66년 봄 2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6월, 왕이 예맥과 함께 한 나라 현토를 습격하여 화려성을 쳤다

 

六十九年, 春, <漢><幽州>刺史<馮煥>·<玄菟>大守<姚光>·<遼東>太守<蔡諷{蔡風}> 等,

 將兵來侵, 擊殺<穢貊>渠帥, 盡獲兵馬財物. 王乃遣弟<遂成>, 領兵二千餘人, 逆<煥>·

<光>等. <遂成>遣使詐降, <煥>等信之. <遂成>因據險以遮大軍, 潛遣三千人, 攻<玄菟>·

<遼東>二郡, 焚其城郭, 殺獲二千餘人. 夏四月, 王與<鮮卑>八千人, 往攻<遼隊縣{遼隧縣}

> . <遼東>太守<蔡諷{蔡風} >, 將兵出於<新昌>, 戰沒. 功{兵} 曹 <龍端>·兵馬 

<公孫 >, 以身 <諷>, 俱沒{歿} 於陣, 死者百餘人. 冬十月, 王幸<扶餘>, 杞{祀} 大后

{太后} 廟. 存問百姓窮困者, 賜物有差. <肅愼>使來, 獻紫狐 及白鷹·白馬, 王宴勞以遣

之. 十一月, 王至自<扶餘>. 王以<遂成>統軍國事. 十二月,,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扶餘>王遣子<尉仇台>,領兵二萬,<漢>兵幷力拒戰, 軍大敗.

 

69년 봄, 한 나라 유주 자사 풍 환·현토 태수 요 광·요동 태수 채 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예맥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병기와

마필과 재물을 모두 약탈하였다.

왕이 아우 수성에게 군사 2천여 명을 주어서, 풍 환·요 광 등과 싸우게 하였다.

수성이 한 나라 군영에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풍 환 등은 이 말을 믿었다. 수성이 곧 험한 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는 한편 비밀리에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토·요동의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지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12월, 왕이 마한과 예맥의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시켜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 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대항케 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七十年,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馬韓>以<百濟><溫祚王>

二十七年, 滅, 今與<麗>王行兵者,盖滅而復興者歟?

 

70년, 왕이 마한·예맥과 함께 요동을 공격하였다.

부여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한 나라를 구원하고,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였다.

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하였다 하니, 멸망하였다가 다시 일어난 것인가?

기록에서는 고구려가 예맥의 군사를 동원할수 있으며, 예맥이 공격당하자 고구려가 예맥을 지원하여 준다. 

고구려가 또 마한과 예맥의 군사를 동원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예맥은 고구려에 종속된 종족이라는 것을 알수 있게 하는 것이다.

 

25사의 동이의 기록에서 고구려가 흉악(凶惡)하게 기록되고 고구려, 한과 같은 족속인 부여,예(濊)의 기록이 군자(君子)처럼 기록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예맥의 위치도 또 부여지역인것처럼 25사 기록해 두었지만 이것은 날조에 불과한 것이다.

고구려가 예맥의 군사를 동원하여 현토를 공격하려면 예(濊)가 고구려 북쪽 1천여리에 있다는 부여의 땅에 있을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예맥(濊貊)이라고 통칭되는 것을 고려해 부면 예와 맥은 인접지역에 있어서 같이 불려졌었던 것을 알수 있게 하는데 산해경

(山海經) 해내서경(海內西經)에 보면 , 맥국은 한수의 동북쪽에 있다.

나라가 연에 가까웠으므로 연이 이를 멸망시켰다.

(貊國在漢水東北 地近于燕濊之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결국 요동지역에 있었던 것을 알수 있는 것이고, 그 지역에 예도 있어서

예맥으로 불리며, 고구려가 예맥을 동원하여 현토군을 공격할수 있었던 기록이 맞게 된다. 

그런데 한수(漢水)는 섬서성에 출발하여 한중(漢中)을 거쳐 양자강의 한 지류가 되니 결국 낙랑현토,조선지역은 섬서성 지역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지역에 현 한반도 중부지역의 지명과 동일한 명칭인, 한양, 단양,강릉 등이 널려 있는 것을 볼수 있다.

또 서경 우공에서 청주(靑州), 우이(嵎夷), 지역을 설명하면서 조선,구려의 여러 나라가 우임금 시대에 실제 모두 청주지역에 있었다고

(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 하고 있는 것에서 우리는 실질적으로 가릉강(嘉陵江), 한수(漢水)를 무대로 벌어진 낙랑,현토,조선,

구려 등의 역사가 모두 날조된 것도 알게 된다.

 

 

그렇다면 현 한국사람들은 도대체 뭔가?

 

현 특성을 보면 본래의 동이(東夷)의 성품인, 천성이 유순하고 예의(禮義)바른, 군자

(君子)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데, 앞에 25사의 기록이 예(濊)를 강조하고, 고구려는 비하하는 것과

연관되어 생각하고 또, 기타 기록과 연관시켜 생각하면 , 이런 결론을 얻게 된다.

예와 맥 등의 족속은 본래 동이족의 예속 종족이었으므로 , 본래의 한민족의 족속과의 성품과는 차이가 있다. 

한민족의 힘이 강성하였을때는 한민족의 홍익인간 정신의 인의(仁義)가 우월하여

예(濊)나 맥도 예의가 있었는데 연,제 등과 교통을 하고 한(漢)과의 전쟁이 계속되면서,품성이 변화를 하게 된다.

 

그런데 역사날조를 근세에 들어 갑작스럽게 하면서 예와 맥족이 한민족의 종속종족이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생기고, 그것은 한민족의 영토, 아시아 전체, 지명 기록과 앞에 있는 기록으로 봐도 섬서성, 감숙성까지도 한민족의 영토였던 역사를 날조하고 강토를 축소하면서, 한반도로 이주를 하여 반도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지금도 수행하고 있다.이런 추론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중부지역의 명칭이 섬서성, 한수 유역의 지명과 동일한 명칭을 옮겨 와서 살고 있는 예와 맥족이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예맥족이 한민족의 주류민족인 것처럼 한민족을 날조하려고 하는 일을 지금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도사관을 수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예맥이 자랑스러운 1만년 역사, 아시아 전체를 영토로 하는 한민족의 주류였다면 반도사관에 집착할까?

인터넷에서 반도사관을 바로잡자는 글들에 험악한 댓글이 달리는 것이나 또는 기타 인터넷의 각종 악플러 등의 이야기도 그같은

동일한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일부에서는 무슨 개인적인 심리 분석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 있을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바쁜 세상에 혼자 있건 둘이 있건 악플을 다는 것과 무슨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헛소리들 하는 사람들도 예맥족이나 화하의 잡종피가 섞인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 그럴 것이다.)

 

 

지금도 각종 서구의 종교, 철학, 윤리에 경도된 사람들은 반도사관에 집착하고, 한민족을 스스로 비하하고, 사대주의로 몰아가는 일을

하고, 국가를 허약하게 만드는 일을 하며, 민족을 없애자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같은 이유가 아닐까 돌이켜 추측한다. 만일 어떤 것이

내 것이라면 아끼고 사랑할텐데,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소홀히 다르고 파괴하기 까지 한다.

이른바 주인(主人)의식(意識)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호랑이를 강조하고, 예맥을 강조하는 것, 또 반도사관에 집착하는 것은 한민족의 혈통에서 거리가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래서 날조역사에 지속적으로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고, 또 바로잡는다

고 하면서도 축소하는 일을 자행하고 있다고 본다.

역사 날조는 지금도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 날조를 시작한 漢나라 족속과 그들의 후손에 의해서..... 인용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