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세계 4대 발명의 진정한 종주국 3-종이의 기원과 배달겨레

설레임의 하루 2009. 8. 22. 03:18

*출처:다음카페-상촌 김자수 기념사업회  글쓴이: 금소영당/김현숙

                                                                   http://cafe.daum.net/hskk2005-5/VVl/1633
 
 
 
 

 

 

 

본 블로그의 /촌철살인/면에 있는 [허구의 짱골라, 중국이라는 환상을 벗어던지자!]을 참고하세요. 

이 게시물은 대용량이라 불러들이는데 1분 정도의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세계 4대 발명의 진정한 종주국 3

 

종이

기원전 50∼40년대의 전한시대(前漢時代)에 중국에서 발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05년경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에 의하여 품질이 좋은 종이가 생산되어 보급이 크게 확대되면서 종이제조기술이

향상되었다. 

초기의 종이는 삼베를 원료로 한 마지(麻紙)였다.

그것은 마지의 제조공정이 가장 간단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대(唐代) 이전의 종이의 대부분은 마지이며, 지금까지 출토된 한대(漢代)의 종이는 모두 마지라는 것이 실험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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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History ===

  

 

파피루스(사진 jinhee153).

 

구례 화엄사 오층탑에서 발견된 8세기 신라시대 종이유물.

 

닥나무. 닥나무 잎은 한줄기라도 그 형태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사진 encyber.com).

 

한지로 만든 부채.

 

 

   

백제의 '대팻밥 파피루스' 발견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6-12-06 08:26 |최종수정2006-12-06 08:26
 
'대팻밥 파피루스'
부여 능산리 절터 출토품서 확인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대팻밥을 종이처럼 사용한 유물이 사상 처음으로 발견됐다.

대패로 나무를 깎는 과정에서 발생한 대팻밥을 마치 종이처럼 활용해 그 위에 묵글씨를 쓴

유물이 실물로 출현한 것이다.

한국서예사 전공인 손환일 박사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2001년 출토되어 지금은 국립부여

박물관이 소장한 이 유물을 실물 검토하고, 거기에 적힌 글씨를 판독한 결과

"이런 유물은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서사(書寫. 필기) 재료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6일 말했다.

나아가 손 박사는 "대팻밥을 글을 적는 도구로 활용한 이 능산리 유물이야말로 6세기 무렵

백제인이 사용한 '파피루스'라 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이 '대팻밥 파피루스'는 2000년 1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국립부여박물관이 실시한 능산리 절터의 중문(中門) 남쪽 부분에 대한 제6ㆍ7차 발굴조사 결과 사비시대 백제 목간 23점과

함께 출토됐다. 크기는 길이 46㎝에 너비는 1.5-2.0㎝ 가량 되며, 두께는 1㎜ 안팎이다.

이 '대팻밥 파피루스'에서는 현재 묵글씨 10여 개가 확인되고 있으나, 양쪽 변을 따라 떨어져 나간 곳이 많아 글자 판독에는 곤란을 겪고 있다.

그런 가운데 손 박사는 이 대팻밥 종이에서 '大大廳成歲首肆○○○無' 정도로 읽힐 수 있는 글자를 판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손 박사는 "서체는 완연한 왕희지 체이며, 무엇보다 달필(達筆)"이라고 지적하면서, "물품 내역을 주로 기록하는 목간(木簡)과는 달리

책 같은 데서 뽑은 문장을 기록한 듯하다"고 추정했다.

부여박물관은 당초 이 유물 재료를 '목제수피'(木製樹皮), 즉 나무껍질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유물과 함께 출토된 백제목간들에서 '보희사'(寶憙寺)라든가 '자기사'(子基寺),
그리고 백제시대 관직 이름 등을 적은 글자들이 다수 확인되며 관심이 쏠리는 바람에 이 유물은 전혀 빛을 보지 못했으며관련 학계에서는 그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국립부여박물관이 내년 초에 발간된 능산리 절터 6ㆍ7차 발굴조사 보고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대팻밥 파피루스'에 적힌 문자 해독을 손 박사에게 의뢰하면서 그 존재가 새롭게 드러나게 됐다.

이 유물을 사진으로 검토한 목재조직학자 박상진 경북대 산림자원학과 명예교수는 "실물을 보지 못해 뭐라 단언할 수는 없으나,

껍질이 아니라 나무 속을 이용한 서사 도구일 가능성이 크다"면서 "만약 대팻밥을 이용한 것이라면, 잎이 넓은 활엽수를 제외한 다른

나무, 예컨대 소나무나 전나무, 일본 같으면 삼나무 등을 서사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조만간 이 '대팻밥 파피루스'에 대한 재질 분석을 실시할 예정이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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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콜]'종이' 어느 민족이 발명했나?
'종이'를 중국의 3대 발명품이라고 발표했으나 실상은...   심제(心濟)

 

우리는 서기 105년 후한(後漢)시대 채륜이 세계 역사상 획기적인 발명품인 <종이>를 발명하여 인류역사에 기여한것으로 배워 알고

있다.
종이와 채륜의 관계는 진(晉)나라 범엽이 편찬한 후한서 <채륜집(蔡侖傳)> 및 한나라 때 몇 편씩 편찬되었다는 동관한기(東觀漢記)에

기록되어 있다.
 
채륜이 상방(尙方)이라는 관서에 근무하면서 나무껍질, 어망, 넝마조각 등을 혼합하여 만든 종이를 후한 화제 원흥 원년(和帝 元興

AD105년) 에 한왕에게 진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대에 이를 이름하여 채후지(蔡候紙)라고 불렀다.

하지만 교과서에 10년전부터 채륜이 종이를 "만들었다"에서 "만든것으로 전하여 진다"라고 말꼬리가 바뀌어 진것은 어떠한 이유

때문인가 ?
최근 지나대륙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적어도 채륜이 만들은 종이 이전에 다른 종류의 종이가 이미 만들어져
있다고 하는것이다.

▲  2008 북경올림픽에서 종이를 중국의 3대 발명품으로 전세계에 소개하고 있다.


1.고대 종이 발굴의 역사  

1933년 탐험가 스벤헤딘을스웨덴  대장으로 하는 스웨덴,중국 연합학술조사단인 서북과학고사단의 지나측 멤버인 황문필(黃文弼

이  도곤이라 불리우는 롭노르 북쪽 한나라 봉수대 유적에서 4 x10 cm의 종이조각을 발견하였는데, 이 조각과 함께 한간(漢簡)에는

하평 4년(河平 BC25) 부터 황룡 원년(黃龍 BC49)이란 기록이 섞여있어 적어도 종이 조각은 기원후 105년이란 시기보다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롭노르紙라 부른다.

1957년 일본의 다노(田野)가 이끄는 고고학탐험대가 서안시 동곽 파교진(東郊 ?郊津)에서 전한의 무제
(BC 140~87)보다 오래된

무덤에서 고지(古紙)가 발견되었는데, 1964~67년사이에 성분을 분석한 결과 대마와 저마로 만든 종이임이 밝혀졌다.

이를 파교지(?郊紙)라 부른다.

1973년  감숙성 A32 유적지에서 두조각의 마로 만든 종이조각이 출토되었는데, 크기는 A4용지 크기로 상면과
하면의 매끄러움이

다른 지질이었으며 대마섬유가 포함되었다.

목간이 같이 출토된것으로 보아 연대는 한선제 감로2년(BC 52)과 애제 건평 연간으로 BC 3~2년 사이의
지층이다.

1979년 하서회랑 한대 봉수유적지에서 전한시대의 종이가 출토되었으며, 1986년 3월 감숙성 천수시 방마탄
(天水市 方馬灘)에서

13기의 진묘(秦墓)와  1기의 한묘(漢墓)가 발견되었는데 한묘의 수장기물에서 피장자의

가슴부위에서 종이재질의 지도가 발굴되었다.

1991년 감숙성 돈황부근의 하서회랑에서 2만여점의 간독과 500여점의 종이가 대량으로 발굴되었는데 놀랄만한

발굴로 우편 전달체계가 이미 성립되었다고 보이는 문자들이 발견되었다.  
 

▲  출토된 고대의 종이


2. 종이의 용도는?

이에 따라 반길성(潘吉星) 같은 이는 그의 저서 <중국제지기술사고(中國造紙技術史考)>에서  채륜이 종이를 만들었다는 기존설을

강력히 부인하고 후한서가 가진 의의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의견이 지금 학계의 대세라 볼수있다..

천수시 방마탄에서 발굴된 종이지도 위에는 선은 묘사되어 있어도 글씨는 쓰여지지 않았다.

문자가 확인되는 종이는 현천지에서 출토된 것 뿐이며 '전한의 종이'라고 말 할 수 있는것은 7매에 지나지 않는다.

발굴된 500매의 종이중에서 글자가 없는 종이가 압도적으로 많은것은 왜일까?

있다하여도 중앙부에 한두자 정도가 비스듬히 써있다.

이로서 초기의 종이는 글을 쓰기위한 목적보다는 다른 용도 즉 포장지의 용도로 쓰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종이는 천이나 구리거울(銅鏡)에 붙어서 함께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또한,다른 용도로는 부자, 훈력, 세신이란 한약제의 포장지가 아니였을까 하는 추론이다.

당대 두우(杜佑)가 편찬한 통전(通典) 권59 < 예전(禮典)>에 정중의 <백관육례사>라는 글이 실려있는데 종이를 이용하여 약을

포장하는 절차가 기록되어 있는데 정중(鄭衆)은 기원후 89년에 죽은이이므로 그 종이의 용도를 정확히 기술한 것 일수도 있다.

▲   종이를 제조하고 있는 채륜을 그린 그림.

그러나 이미 그 이전 동이에 의해 종이는 만들어졌다.


3.종이의 역사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전한시대의 목간에는 <오십일지 중오근(五十一紙 重五斤)>이라는 글이 있어 이미 종이가 전한시대 이전에 존재하였음을 또 한가지

방법으로 확신케 해준다.

후한시대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종이라 함은 서(絮)의 일점(一?)"이다 라 하였는데, 여기서 서(絮)란 누에고치

로서 뜨거운 물로 적시고 두드려서 부드럽게 비단 상태로 한 후 대자리에 걸러 말린 1매의 박편을 말하며, 허신이 설문해자를 완성한

시기가 AD 100년 이므로 이미 이전에 비단으로 혹은 면으로 종이를 완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 채륜전에 "其用帛者謂之爲紙 (기용금자위지위지)"라 했으므로, 이미 이전부터 누에를 이용하여 종이를 만들어 사용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누에가 많이나는 지방은 역사적으로 어느 지방인가?

바로 온난한 기온과 적당한 습도가 유지되고 뽕나무를 문제없이 재배 할수 있는 대륙 동부해안 또는 내륙 중남위도에 위치 하여야 한다.

적어도 전한시기 이전 부터 누에를 기를수 있는 지역은 알다시피 이미 동이족이 점거하고 있었던 대륙 동부 해안 지역 이었다.

즉 고조선 지역이라고 추정되는 지역들이다.
고조선의 후예국인 부여국에도 비단으로 복식을 하고 상당한 문화수준을 영위하며 지냈던 사서 기록으로
보아 고조선에서 이미

비단으로 된 종이를 만들어 사용하지 않았는까하는 추론이다.

비단의 기록들을 보기로 하자.

후한서 권 85 동이열전 (後漢書卷八十五 東夷列傳) - 고구려조
暮夜輒男女?聚?倡樂。好祠鬼神、社稷、零星,以十月祭天大會,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號?神,亦以十月迎而祭之。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  

시월이되면 하늘에 제사지내는 큰모임이 있는데 동맹이라 한다.
이 나라의 동쪽에는 큰 혈이 있고 수신이라 부르는데, 역시 시월에 영접하여 제를 지낸다.

이 모임에서는 참가자 모두가 비단옷을 입고 금은으로 몸치장을 한다.

주부나,대가 모두 머리에 두건을 두르는데 관을 쓰며 소가는 절풍으로 모습은 변한과 같다.

후한서 권 85 동이열전 - 동옥저조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東濱大海;北與?婁、夫余,南與濊貊接。
其地東西夾,南北長,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有
邑落長帥。人性質直?勇,便持矛步戰。言語、食?、居處、衣服有似句驪。

동옥저는 고구려개마대산의 동에 있다. 동으로 빈해가 있고 북으로 읍루,부여, 남으로 예맥과 접한다.

그 나라는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길다.
천리씩 나눌 수 있는데 땅은 비옥하고 오곡이 나며 밭곡식은 좋으며 읍락에는 장수가 있다, 성질은 강직하고 용기가 있으며 창으로

보병전을 잘 한다. 언어,음식,거처,의복이 구려와 같다.

후한서 권 85 동이열전 - 예(濊)조
其俗重山川,山川各有部界,不得妄相干涉。同姓不昏。多所忌諱,疾病死亡,輒捐棄舊宅,更造新居。知種麻,養蠶, 作撓布。

풍속은 산천이 험하여, 산천이 각각 부로 나뉘고 서로 범하고 간섭하지 않는다.
같은 성끼리는 결혼하지 않고, 꺼리는 것이 많다. 질병으로 죽으면 옛집에 버려두고 새로 거하는 곳을 지었다.

삼베 기르는 법을 알고 양잠을 하고 면포를 지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三國志 魏書 東夷傳 (2)) - 부여(夫餘)조
在國衣?白,白布大袂(몌),袍、?(고),履革?。
出國則?繒繡錦?(계),大人加狐狸(호리)、 혈백 黑貂之?(구),以金銀飾帽。譯人傳辭,皆?,手據地竊語。

나라에서는 흰옷을 숭상하여 입으며, 면포로된 소매, 저고리,바지,그리고 가죽신을 신으며 나라밖을 나설때에는 금실과 비단으로

수놓은 융단으로 치장하고 ,여우와 너구리 털로 두르며,성인은 여우, 너구리, 흑색담비 가죽으로 옷을 해 입으며,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三國志 魏書 東夷傳 (2)) - 고구려(高句麗)조
以十月祭天,國中大會,名曰東盟。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大加、主簿頭著?,如?而無餘,其小加著折風,形如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나라의 큰 모임으로 동맹이라고 한다.
공적인 모임 때의, 의복은 모두 비단이고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꾸민다.
대가나 주부는 머리에 두건을 하는데, 수건같이 생기고,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하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三國志 魏書 東夷傳 (2)) - 마한(馬韓)조
以瓔珠?財寶。或以綴衣?飾,或以縣頸垂耳,不以金銀錦繡?珍。其人性?勇,魁頭露?。

구슬 목걸이를 보배로 삼는데, 혹은 구슬을 옷에 꿰메어 꾸미고, 혹은 목에 매달기도 하고, 귀에 달기도 한다.

금은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의 성질은 강하고 용감하고, 상투를 트는데, 모양이 경병과 같다.

포로 옷을 해 입고, 신발은 가죽신을 신는다. 

▲   북경올림픽에서 동이의 발명품인 종이에 수묵화를 그리고 있다.


위에서 보듯이 이미 동이제국에서는 비단이 보편화되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이미 문명수준은 물산이 풍부했던 동이족지역인 대륙동부해안에서 서안에 기반을 둔 서토족보다 우월하였다는 것은 입증된 것이다.

따라서 종이의 연원은 갑골문에서 누에 종이로 그리고 문명이 덜 발달되었던 곳에서는 죽간이나 목간으로 , 섬유질을 이용한 종이로

발전되어 왔다고 볼수 있을것이다.

몇일 전 끝난 북경올림픽 개회식에서 중국인들이 자랑하던 세계3대 발명품의 주인공은 추론컨데 고조선의 후예인 부여나 예, 삼한, 

고구려에서는 이미 사용하던 유물인데도 들고나와 자랑하는 현장을 보니 서글프고도 한편의 코미디를 보는것 같다.
고조선,부여,고구려인의 후예들 일부가 한족에 포함되어서 그들 것이라는 것인가?

 

 

 

한국의 옛 옷 연구 책펴낸 박선희 상명대 교수  동아일보 / 기사입력 2003-01-06 18:24 

 

“한반도에서 면직물이 생산된 것은 고려 공민왕 때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이후가 아닙니다.

한반도에서는 적어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초면’으로 면직물을 생산했습니다.

문익점이 들여온 것과 품종이 달랐을 뿐입니다.”

상명대 사학과 박선희(·50) 교수는 고대 한국에서도 면직물을 생산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삼국사기(), 양서() 등 고문서를 보면 ‘백첩포()’라는 야생 면이 자생한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근거를 들었다.

박 교수는 최근 펴낸 ‘한국 고대복식, 그 원형과 정체’(지식산업사)에서 한국 고대복식의 기본 재료를 분석하고 바지 치마 관모 갑옷

등 고대복식의 기원을 밝혔다.

이 책은 학계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왔던 고대복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민족주의 관점’의 접근법.

지난 5년간 복식사 연구에만 매달렸다는 박 교수는 이 책을 통해 한국이 모, 마, 면직물 등을 가공하고 직조하기 시작한 연대가

중국과 비슷하거나 앞선다고 주장한다.

고조선이 뼈와 가죽, 청동 등을 재료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빨리 갑옷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덧붙인다.

“한민족의 고대복식 문화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못된 통설’입니다.

복식뿐 아니라 생활 문화 전반에서 고대 한국은 나름대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박 교수는 “그 동안 한국 고대복식사 연구는 1947년 출간된 이여성()의 ‘조선복식고’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전개해 왔다”고

지적했다.

복식사 연구 초기 단계에 쓰여졌던 ‘조선복식고’는 한국의 복식 문화가 중국이나 북방 민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국과 한국의 고문헌 유물을 조사, 정리한 내용을 제시했다.

그는 “복식을 매개로 삼아 고대 한국이 중국보다 앞선 문화를 영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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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종족 짱골라  

 

中교수 “순수한 漢族은 없다. 多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2007년 02월 16일

 글 | 베 이징=하종대 동아일보 특파원ㆍorionha@donga.com |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蘭州)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 회족(回族)인 그는 한족(漢族)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北狄·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甘肅) 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陝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山西) 성 남부와 장쑤(江蘇) 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客家族)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 (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발행일 : 2001 년 06 월 14 일 (288 호)
쪽수 : 62 ~ 62 쪽

 

  

 

양잠 [養蠶, sericulture] (출처 : 네이버의 두산백과사전)

누에를 사육(飼育)하여 고치를 생산하는 일.

 

 

누에가 사육되기 시작한 연대와 장소는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처음 시작된 곳은 기후가 온난하고 뽕나무가 잘 자라는 아시아

중앙부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BC 770~BC 221년인 춘추전국시대까지에는 이미 화베이[] 지방에 퍼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는 뽕나무·누에씨·명주를 나라 밖으로 반출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중국 이외에서는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

이것이 인도·이란을 거쳐 유럽에 전해진 것은 BC 200년쯤이라고 한다.

한국에는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고조선() 시대에 시작되었고, 삼한과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양잠을 장려하였다.

최근에는 노동력 부족으로 상당한 부분이 기계화 방향으로 바뀌고 있으나, 오늘날까지 다음과 같은 형태로 양잠이 실시되었다.

먼저 누에씨는 지종()이라 하여 자가제의 씨를 사용한다.

그것은 나이먹은 고치를 골라 자연부화시키고 교배시켜 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하여 만든 원지()에 산란시킨 것이다.

그러나 자가제의 씨를 사용하기를 3년 연속하면 씨를 얻지 못하게 되거나, 또 한번에 대량으로 사육하는경우에는 다른 곳에서 종지

()를 사들여야 한다.

누에를 소규모로 사육할 때는 쟁반 같은 데 놓고 방에서 병풍 따위로 바람을 막아주는 정도였는데, 규모가 커지게 되자 방에 가마니를 깔고 선반을 설치하여 누에방[]을 만들게 되었다.

또 화로 대신 지로()를 설치하게 되었다.

누에 사료에 대해서도 산뽕나무 잎이나 밭에 심은 뽕나무 잎을 따서 주던 시기가 길었다고 생각되지만 나중에는 뽕잎을 한장 한장

겹쳐서 작게 사각형으로 잘라서 그것을 채쳐서 개미누에[]에 주기도 하였다.

누에가 생장함에 따라 뽕잎도 큰 것을 주었는데, 전에는 뽕잎을 일일이 말려서 주었으므로 4령잠()쯤 되면 일손이 많이

필요하였다고 한다.

 

 

 

동예 [東濊] (출처 : 네이버의 두산백과사전)

고대 동해안 지역에 거주한 종족.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족속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의복만 약간 달랐을 뿐, 풍속과 언어는 고구려와 같았다.

3세기에도 읍락()이 산과 하천을 경계로 구분되었으며, 함부로 다른 구역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만약 다른 읍락민이 구역 내로 침범하면 곧바로 소 ·말을 물리는 책화()를 하거나 생구(:노예)가 되어야 했다.

이것은 읍락 내부에 아직도 공동체 단위의 생활이 주로 영위됨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따라 동예지역에서는 강력한 대군장()이 출현하지 못하고, 단지 후() ·읍군() ·삼노()가 각 읍락을 다스렸다.

일찍부터 낙랑군은 옥저()와 동예지역에 7개현을 설치하여 간접 통치하였는데, 이들 명칭은 그들이 각 읍락의 거수()에게

하사한 것이다.

현후()는 낙랑군 관리의 명칭을 빌어 휘하의 관리를 공조() ·주부(簿)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2세기 후반 이후 동예는 고구려 지배하에 있다가, 245년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낙랑군의 공격을 받고 다시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동예의 세력 가운데 가장 큰 불내예후()는 위나라가 침입하자 투항하였고, 247년에는 위나라에

조공을 바쳐 불내예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거처는 읍락민 사이에 섞여 있어 뚜렷이 구분되지 못할 정도로, 여전히 통치력이

미약하였다.

313년 낙랑군이 멸망된 뒤부터 다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광개토대왕 대에 대부분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농업을 주로 하였으며, 마포()와 양잠() 기술이 발달하였고, 풀솜(명주)을 만들기도 하였다.

동예인은 별자리를 관찰하여 그해 농사의 풍흉을 예고하였고, 매년 10월에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밤낮으로 음식과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제천행사를 행하였는데, 이를 무천()이라 한다.

특산물로는 반어피() ·표범가죽 ·과하마() ·단궁() 등이 알려졌다.

 

<<“제천행사 무천은 고조선 풍속" 클릭참조>>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클릭참조>>

 

 
"뉘조", 양잠과 비단

동이는 이미 기자때 B.C 1170 이전부터 하남성을 중심으로 "양잠"을 하였다 하였으며, 한과 예에서도 양잠을 하였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지역이 어디인가요?
바로 대륙 동부 그곳이 뽕나무밭 천지 황해가 고대에 아리수라는 큰강하나가 잇었을때 바로 "상전벽해"

즉 뽕나무 밭의 주인공이었다는 설(유왕기 설) (상전벽해 : 뽕나무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다)  

그 누에치기의 주인공이 바로 동이인 것입니다.
죽간에 글을 남긴것도 있지만 동이의 선조는 비단에 글을 남겼겠지요.

그래서 죽간은 남고 비단은 남아 있지 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단문화의 주인공은 바로 '동이'인 것입니다.

- 홈페이지 주소 : http://www.damool.net
- 민족사서 소개란 바로가지 : http://www.damool.net/mall/intro.asp











(지도자료 출처 : 유왕기 저 '한민족의 미래')



상전벽해(桑田碧海)

1) 음훈 : 桑田碧海(상전벽해)

2) 관련사항

① 창해상전(滄海桑田)
② [출전] 유정지(劉廷芝)〈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 《태평어람(太平御覽)》

3) 의미 : 뽕나무 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됨. 곧 세상사가 몰라볼 정도로 덧없이 바뀜.

4) 유래

초당(初唐)의 시인 劉廷芝가 지은 시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흰 머리를 슬퍼하는 노인을 대신하여)’의

제4련(聯)은 이렇게 되어있다.

송백도 찍혀서 땔감됨을 이미 봤고(已見松栢?爲薪)
뽕밭이 바뀌어서 바다됨을 또 들었네(更聞桑田變成海)

이 시로부터 ‘상전벽해’란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지만 ‘신선전(神仙傳)’이란 책에는 이런 기록도 전한다.

마고(麻姑)라는 선녀가 어느날 왕방평(王方平)이라는 신선에게 말했다.
“지금껏 곁에서 모셔오면서 저는 동해가 3번이나 뽕나무밭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에 봉래산(蓬萊山)에 가보았는데 도중의 바다가 다시 얇아져서 이전의 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또 육지가 되려는 것일까요.”

왕방평이 대답했다.
“그래서 성인들께서도 ‘바다의 녀석들이 먼지를 일으킨다’고 하지않 않던가.”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이런 이야기도 적고 있다.
옛날 어느 곳에서 노인 셋이 만나 서로 자기 나이가 많음을 허풍스럽게 자랑하는데
두 번째 노인의 주장이 이랬다.

“나는 푸른 바다가 뽕나무밭으로 바뀔 때마다 산(算)가지 한 개씩을 놓아 그것을 세어왔는데 이제 그 산가지가

열 채의 집에 가득 찰 정도 로 쌓여 있다네.”



"비단"과 마왕퇴 무덤










 

[특집] 우주를 새긴 한국의 색깔
한겨레21 / 2000년12월20일 제339호

.
오방정색 중심의 우리 민족 색채관념… 자연을 닮은 전통염색의 깊은 맛

 

 

 
(사진/만구대택굿이나 대동굿 등 큰 굿에서만 쓰던 오방영기)


두 사람이 같은 사물을 본다고 치자. 과연 두 사람이 완전히 똑같이 사물을 인식할 수 있을까?

똑같은 색을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온전한 눈으로 사물을 보더라도 보는 사람의 경험 등 복잡한 연상작용들에 의해 눈에

비치는 색과 그 색이 주는 이미지는 서로 다르게 해석하게 마련이다.

하물며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색을 서로 다르게 인식하고 이미지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색은 흔히 상징체계로 쓰인다.

교통신호에서 빨강, 파랑, 노랑은 정지, 진행 또는 주의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리고 이런 색들은 또한 나라별로 저마다의 상징을 지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중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색깔은 붉은색이다.

길조와 행운을 나타낸다는 이 색은 옛적부터 중국인이 선호해온 대표적인 색으로 일상생활은 물론 모든 선전 광고에도 즐겨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빨간색을 죽음의 색으로 보는 나라나 민족도 얼마든지 있다.

색의 이런 상징과 기호 기능은 논리의 틀을 가지고 각각 다른 문화권에서 각각 다른 의미로 문화의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한다.

 

 

우리 민족은 정말로 백의민족이었나

 

 
(사진/목화씨(9개),밤(3개),은행(3개),대추(3개),팥을 넣어 자손번창을 빌었던 오낭)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어떤 색을 어떤 상징으로 여기며 어떤 색감과 색철학을 가졌을까.

흔히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나타난 홍색·청색·황색·녹색 등 갖가지 색깔의 옷을 입은 생활풍속도나 백제에서 16품위의 관위를

색대로 표시한 제도, 신라에서도 품계에 따라 자색·비색·청색·황색의 옷을 입게 했던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면 우리 민족도

갖가지 색깔을 염색하는 기술이 발달해 있었고 다양한 색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우리 민족의 색채관념은 음향오행의 우주관과 방위관념에서 나온 오방정색(五方正色)이 핵심이다.

이 오방정색, 오방색은 좌청룡인 청색, 우백호인 백색, 남주작인 붉은색, 북현무인 검은색, 그리고 그 중간인 황색이다.

다섯 가지 색깔을 기본으로 사이 색인 홍(紅)·벽(碧)·녹(綠)·주황(朱黃)·자색 (紫色)이 더해졌다.

그리고 이런 여러가지 색들은 오행사상에 의해 또다시 많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파랑색(靑)은 오행 가운데 나무(木)에 해당되고, 계절로는 봄, 방위로는 동쪽이다.

파랑은 하늘의 빛, 바다의 빛, 그리고 물의 빛으로서 우리 신화의 우주론에서 큰몫을 차지하고 있다.

파랑이 동쪽이므로 해돋이, 밝음, 맑음 등과 연관되는 것이다.

신생(新生)과 약동하는 힘을 파랑이 상징하는 것도 천지개벽, 천지창조의 첫 순간의 빛을 상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광대 가면극 놀이에 나오는 청제장군은 오행설에서 봄을 맡은 신이다.

동시에 파랑은 소생, 기쁨, 어짊을 의미한다. 한국인이 태어날 때 엉덩이의 푸른 반점에서처럼 파랑은 탄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빨강색은 오행 중에는 불(火)에 해당되고, 계절로는 여름, 방위로는 남쪽이다.

옛 사람들은 붉은색이 잡귀를 쫓는 색깔이라고 믿었다.

동짓날 붉은 팥죽을 문짝에 뿌려 액운을 막던 것이라든지 붉은 모래나 붉은 부적 등을 귀신 쫓는데 사용했던 것도 이러한

붉은색의 상징에 따른 것이었다.

여자아이들이 봉선화로 손톱을 빨갛게 물들이는 것도, 왕의 정복인 곤룡포를 붉은 비단으로 지은 것도 바로 이 붉은색이 역시

벽사와 길상을 표상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파랑과 빨강은 물과 불처럼 대비되는 개념이기도 했지만 악귀를 쫓거나 예방하는 의식에 함께 사용되는 색이기도 했다.

 

동쪽의 색인 파랑과 만물이 무성하는 남방의 색인 빨강이 모두 양색(陽色)으로서 음기(陰氣)인 악귀를 쫓는 색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색을 벽사의 색이라고 한다.

아이가 출생하면 문전에 솔잎의 푸른 가지와 붉은 고추를 꽂고, 금침의 잇색으로 남색과 홍색을 쓰며, 사주보는 청색과 홍색

비단으로 한다.

또 서낭당을 지나 갈 때에는 돌이 푸른나무가지와 붉은 천을 꽂아 길하기를 바란다.

모두 파랑과 빨강은 벽사의 색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황색은 오행 중에는 흙(土)에 해당되고, 방위로는 중앙이고 서울을 상징한는 색깔이며, 풍요를 나타냈다.

노랑색은 삶에 대한 조명, 직관, 사물들을 포용하는 힘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색깔 속에 세계관을 닮으려 했다

 

 
(사진/다양한 식물염료로 염색한 색실)


흰색은 사신도의 백호에 해당되며, 오행 중에는 쇠(金)에 해당되고 계절로는 가을, 방위로는 서쪽이다.

신화적으로 흰색은 출산과 서기(瑞氣)를 상징한다. 그래서 흰색은 상서로운 징조를 표상하고 있다.

또한 신화에서 하늘과 관계 있는 흰 기운과 흰 새, 흰 동물이 등장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받은 왕이라고 믿는, 우리 민족의

신화적 의지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산에 대한 색채관도 흰색이 지배적이다. 백산(白山)은 우리나라 각지에 있고, 성산(聖山)으로 숭배된다.

그 큰 것을 태백산, 그 작은 것을 소백산, 또는 백산이라고 하였다.

단군이 개국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한 것은, 희고 깨끗하고 밝다는 태양숭배사상에서 연원한다.

흰색은 어떤 색으로도 물을 들일 수 있으나, 어떤 색으로도 물들지 않는 자존(自尊)과 견인불발(堅忍不拔)의 마음을 나타낸다.

실로 우리 민족은 이 흰색에서 지고의 미를 발견하였다.

 

흰색은 고적(孤寂)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사랑하는 흰색은 단순한 고적의 이미지가 아니라 고결한 아름다움이 내면에 서려 있는 고적이다.

존대의 고적이며, 절개의 고적이다.

마지막 검은색은 사신도의 현무에 해당되며 오행 중에는 물(水)에 해당되고, 계절로는 겨울, 방위로는 북쪽이다.

검은 빛은 밤, 공포, 불행, 파멸, 죽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검은 상장이나 조기는 죽음을 의미한다. 사람이 죽으면 지하에 묻혀 빛이 없는 영원한 암흑의 세계에 갇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은색은 동시에 정직과 명예의 표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법관의 법복은 검은색을 쓰는 것이다.

이러한 오방정색의 상징성과 의미를 중심으로 우리 민족은 전통적 색감체계를 이뤘다.

그리고 이 색감을 표현하는 방법은 바로 천연염색이었다.

자연의 재료로 물들인 옷을 입는 그 자체가 자연을 입는 것이었다.

전통 염색에 쓰이는 식물 염료는 단순히 물감의 의미만이 아니라 병의 치료약이기도 했다.

전통 생활 색깔은 또한 색상 자체의 아름다움과 함께 염색 천의 특징적인 재질감을 십분 살려준다.

그리고 섬유를 더욱 질기게 하며 좀벌레나 악취 등을 막아주기도 했다.

전통 염색 소재가 대부분 한약 의약재인 점으로 볼 때 이런 전통염색법은 건강까지 생각하는 지혜의 소산이었다.

쪽 역시 살균성이 있고, 염색재인 잇꽃과 치자는 위장병 치료 및 피부병 치료제로 쓰이기도 했다.

 

 

식물 염료는 병의 치료약으로도 쓰여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전통염색 옷들은 튀는 법이 없이 다른 색깔과도 잘 어울리는 색감이 있어서 지금의 화학염료가

따라갈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특징이다.

화학 염료로 물들인 옷은 빛깔이 좀 곱다 싶으면 서로 잘난 체하고 다른 색을 받아들이지 않고 서로 튄다.

그러나 자연의 빛깔은 아무리 화려할지라도 깊이가 있고 무게가 있어 결코 촐랑거리지 않으며 자기색깔을 유지하고 다른

색깔과 어울린다.

그래서 화학염료로 치장된 옷들은 눈을 따갑게 하지만 천연염료가 만들어내는 빛깔은 눈을 피로하게 하지 않는다.

화학염료는 햇볕을 받아 퇴색하기 시작하면 마치 퇴기(退妓)처럼 추해지게 마련인데 자연 염료의 빛깔은 나이를 먹어 갈수록

더욱 단아하고 깊어지는 것도 뛰어난 장점이다.

그래서 천연염료로 염색한 옷을 해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옷을 입는 수준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자연을 그대로 옮겨와 입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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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옷감의 재발견 ① 삼베

 

좀이 슬지 않고 시원한 무공해의 천연 옷감.  질기고 수명 길며 항균기능 탁월해 수의로 인기

 

"베틀 놓세 베틀 놓세 옥난간에 베틀 놓세, 베틀다리 네 다리요 나의 다리는 두 다리라..."

옛날 여인들이 베 짜는 고달품을 덜기 위해 불렀다는 길쌈 노래의 한 대목이다.

무공해 천연섬유인 삼베는 삼 씨앗을 뿌려서 거둬들여 베를 짜기까지 십여 차례의 공정을 거쳐야 완성되며 이 과정을 통틀어 길쌈이라

고 한다.
삼을 수확하는 7월 중순 시작되는 길쌈은 부녀자들의 가장 큰 일이었다.

오늘날 전해 내려오는 '물레노래', '베틀가', '삼삼기노래', '베짜기 소리' 등은 삼베 일의 고단함과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아낙네들이

불렀던 길쌈노래들이다.

삼베는 고조선 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신라시대부터 모시와 삼베로 분리돼 직조되었다고 한다.
삼은 온대와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삼과의 1년초 식물로 그 껍질의 안쪽에 있는 인피섬유를 이용해 삼베를 만든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삼은 품질이 우수해 아주 가늘게 쪼갤 수가 있어 극세사를 만들 수 있다.

여기에 여인들의 섬세한 솜씨가 보태져 중국. 일본, 인도 등에 비해 훨씬 고운 삼베를 짤 수가 있다.
삼베는 한 올의 가늘기에 따라 6승('세'라고도 함)에서 12승까지 나눠지는데 6∼7승은 적삼이나 고쟁이 등을 만드는 데 쓰이고 9승은

고급, 10승 이상은 최상품으로 꼽힌다.
산 사람, 죽은 사람 모두에게 요긴하게 쓰이는 삼베는 우리 조상들이 여름철 일상 의복감으로 가장 많이 사용한 직물이었다.

남자의 고의, 적삼과 조끼감을 비롯해 홑이불, 배갯잇, 욧잇 등으로 쓰였으며 옷을 마르고 베어낸 조각으로는 조각보를 만들어

활용했다.
삼베의 섬유는 또 자연섬유 가운데 가장 길어 면사보다 섬유의 강도가 10배 정도 강하다.

이에 따라 의류나 침구류 외에 로프, 그물, 모기장 등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특히 윤달이 되면 삼베 수의를 마련하는 사람이 부쩍 늘어나는데, 이는 삼베가 항균 기능을 지니고 있어 좀이 슬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항균처리된 다른 직물은 삶거나 세탁을 하면 본래의 항균 기능이 사라질 우려가 있는 데 비해 삼베는 섬유 자체에 곰팡이 균을

억제하는 기능이 있어 그럴 염려가 없다.
우리 조상들이 된장, 고추장 항아리 안을 삼베로 덮어두거나 생선을 말릴 때 삼베 보자기를 덮어두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삼베는 면 직물보다 20배나 빠른 수분 흡수력과 배출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통풍이 잘 되고 마찰에 대한 내구성이 커 질기고 수명이

긴 것이 강점이다.
또 자외선 차단 기능과 함께 바닥이 까칠까칠하고 힘이 있어 여름철 최고의 옷감으로 꼽힌다.
직물뿐 아니라 종이의 생산, 음식의 재료 등으로도 활용이 되는 삼은 줄기와 잎에 마취성 물질이 들어 있어 아무나 키울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1976년에 발효된 대마초관리법으로 인해 삼의 원료인 대마 재배와 취급이 규제되고 있고 현재 안동. 보성, 남해,

순창,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만 키우고 있다.
삼베 생산농가들은 대마 재배 면적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는 데다 1990년부터 값싼 중국산이 쏟아져 들어와 이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게다가 기능 보유자 대부분이 고령이어서 전승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이에 안동시를 비롯한 몇몇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삼베 살리기에 적극 나서고 있어 바람직한 현상으로

꼽히고 있다. 
한편 안동대 의류학과 김희숙 교수는 "안동포를 소재로 볼레로, 미니스커트 등을 만들어 입어보면 옷감의 결이 살아 있어 화학섬유로

만든 옷보다 훨씬 단아하고 멋이 있다"고 말했다.

 

 

전통옷감의 재발견 ② 모시

 

청초.단아하며 입을수록 윤이 나는 천연섬유. 올이 가늘고 질감이 까슬까슬한 여름철 옷감

 

"잠자리 날개 같이 곱고 눈처럼 희다"

우리 전통옷감인 모시의 섬세함과 색채를 일컬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다.

노리끼리한 생모시 치마에 흰 모시 적삼은 우리나라 여인들의 청초하고 단아한 옷매무새의 극치로 꼽힌다.
저마포(紵麻布), 또는 저포(紵布)라고도 하는 모시풀은 열대ㆍ아열대의 고온 다습한 지방에서 잘 자라며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일본, 필리핀. 인도,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전남북, 경남, 충남 지방에서 전량이 생산되며 특히 충남 서천 한산세모시가 유명하다.
남녀의 여름 한복감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모시는 신라 헌안왕과 경문왕 때 30승 저삼단(紵衫段)을 당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우리 민족과 오랜 세월을 같이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 여러 문헌에 저포(모시풀)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주로 의복,

진상, 하사, 교역품 등에 쓰였다고 한다.
속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고 가벼운 모시는 올이 가늘고 직조상태가 좋으며 통풍성과 땀 흡수력이 뛰어나 여름철 옷감으로 애용된다.
또 색깔이 희고 결이 고와 옷을 만들었을 때 고결하고 청아한 느낌을 주는가 하면 질감이 까슬까슬해 더위를 잊게 한다.
모시는 섬유질이 질겨 옷을 한번 지어 입으면 10년 이상 입어도 헤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빨아 입을수록 빛이 바래지 않고 더욱

희어지며 윤기가 난다.
특히 모시의 대명사로 꼽히는 한산세모시는 예부터 "옷을 입지 않는 것보다 한산세모시로 지은 옷을 입는 것이 더 개운하고 시원하다"

는 평판을 얻을 정도로 비단보다 비싸고 귀한 옷감으로 이름을 떨쳤다.
모시는 남자의 고의 적삼, 조끼, 두루마기 그리고 여인의 치마, 적삼, 두루마기감으로 두루 사용됐으며 모두홑것으로 박음질, 감침질을 해 만든다.
모시의 손질은 삼베와 비슷하나 베보다 더 정성을 들여야 모시의 특성이 살아난다.
인체에 해가 없는 천연섬유인 모시는 여름철 옷감으로 따라올 것이 없으나 관리가 힘든 것이 대중화의 걸림돌이다.

특히 세모시를 빨아 풀을 먹여 손질할 때는 아무리 정성을 기울여도 모시 올이 치게 되는 등 손이 많이 가 구입을 꺼리게 된다.
모시는 보통 7승에서 12승까지 있으며 10승 이상을 세모시라 하고 숫자가 높을수록 최상품으로 친다.

 

출처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 화성인 m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