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강역은 서북으로는 광녕, 금주, 의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해성, 개주, 동남쪽으로는 조선의 황해, 충청, 전라도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의 강역은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길었다.
또 위(魏)나라 때 물길(勿吉)과 도모해 고구려 땅을 빼앗아 동북으로는 물길과도 이웃해
있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또 신라의 60~70성을 취하여 그 강토가 더욱 넓어졌다.”
이것은 ‘흠정만주원류고’에 나오는 당시 백제의 강역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백제는 융성기에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대륙의 서북과 동북쪽에
걸쳐 광활한 영토를 소유했고 이런 기초 위에서 왕과 제후를 거느리는 제국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신라는 백제의 속국이었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서력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경주 평야에 신라를 세웠고,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압록강 중류의 동가강 유역에서 건립했으며,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온조가 한강유역에 터잡고 출발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국 중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됐고 20년 후 고구려, 그로부터 다시 1
9년 후 백제가 성립됐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의 기록을 ‘흠정만주원류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는 처음에 백제의 부용(附庸) 국가였는데 나중에 가라, 임나 등 여러 나라를 겸병하여
백제와 대등한 이웃나라가 됐다.”
‘흠정만주원류고’는 무슨 근거로 이러한 논리를 전개한 것일까.
아마 북사(北史)의 다음 기록을 참고한 듯하다. “신라는 백제에 부용되어 있던 국가다
.” 여기서 ‘부용’이란 큰 나라에 부속된 작은 나라, 즉 독자적으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국가를 말한다. ‘맹자’에는 ‘강역이 50리가 안 되어 제후에게 부속된 작은 국가를 부용국이라 한다’는 설명이 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신라는 원래 독립국가가 아니라 백제의 부속국가로 있다가 나중에 차츰 발전하여 독립국이 된다.
그렇다면 백제보다 먼저 신라가 건국했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신라와 백제의 출발을 놓고 한국과 중국의 역사 기록이 이처럼 현격한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민족의 역사를 주로 한반도 이주 이후의 역사로 한정한데
반해 중국의 고대사료는 그 이전 대륙시대 역사까지 포괄하여 다룬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 것이다.
삼국 중 가장 생명력이 길었던 백제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 이르렀고 소정방이 이끈 당군은 금강하류로 침입했다.
이로써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함락됐다.’
이것은 백제 멸망에 대해 우리나라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기록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고구려는 668년, 신라는 935년에 멸망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상식이다.
따라서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패망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흠정만주원류고’의 기록을 통해서 본 백제의 패망 시기는 이와 전혀 다르다.
아마 ‘북사(北史)’와 ‘구당서(舊唐書)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참고한 듯하다.
‘북사(北史)’에는 “백제에는 5방(五方)이 있고 방은 10군(郡)을 관리한다”라고 했고,
‘구당서(舊唐書)’ 에는 “6방이 각각 10개군을 관리한다”라고 했다.
두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군이 50개 내지 60개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해 빼앗은 것은 37군이다.
빼앗지 못한 군이 5분의 2나 된다. 이것은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상당 부분 그대로 보존됐음을 뜻한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멸망한 백제는 일부분에 불과하며 절반 가까운 세력이
그대로 남아 백제라는 이름으로 존속했다는 것이 ‘흠정만주원류고’의 주장이다.
또한 삼국 중 백제가 최후까지 남았다는 사실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후당 시기에 백제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이 사서에 실려 있고 원(元)나라 때도
백제가 중국과 내왕한 사실이 사서에 등장한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1280~1367년까지 존속했다.
이를 근거로 추정하면 백제는 935년에 멸망한 신라보다 최소한 수백년 가량 더 존속했고,
따라서 백제는 삼국 중 최후까지 남아 있었던 나라였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느 민족이나 자기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미화하고 과장하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속성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미화나 과장은커녕 오히려 축소되고 폄훼된 경향이 짙다.
중화 중심의 사대(事大)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