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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돌궐>제국

설레임의 하루 2009. 3. 31. 14:20

 *출처:카페-잃어버린 역사...  글쓴이: 도불원인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돌궐>제국

▲ 몽골 체체를렉 박물관의 부구트 비석

돌궐·위구르로 이어진 유목제국, 유라시아의 무역·군사 초강국 군림 흉노 붕괴 500년 만에 유연 멸망시키고 초원의

유목민 통합. 돌궐, 세부족 반란으로 무너진 후 위구르가 새 제국 건설,돌궐, 정체성 지키기 위해 중국의 불교·도교 배척하고

고유의 ‘탱그리(단군)’신앙 숭배 위구르, 唐 반란 제압해주고 비단 헐값에 독점매입

 

6세기 중반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는 만주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강력한 유목제국이 출현했다.

이 제국을 건설한 사람은 스스로를 ‘튀르크(T?rk)’라고 불렀고,중국 측 자료에는 ‘돌궐(突厥)’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오늘날 터키(Turkey)라는 나라의 이름그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이 ‘튀르크’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돌궐제국은 기원후 1세기 중반경 흉노가 붕괴된 뒤 실로 500년 만에 초원의 유목민을 통합하고 출현한 국가였다.

그런데 그 영역은 훨씬 더 커졌다.

과거 흉노의 경우 서쪽 경계가 대체로 파미르고원 정도까지였는데, 돌궐의 범위는 서쪽으로 더욱 확장되어 카스피해와 흑해까지

미쳤으니 실로 유라시아 규모의 대제국이었고 당시 동아시아의 당제국, 서아시아의 압바스 칼리프조, 유럽동로마제국과 함께

유라시아의 국제질서를 좌지우지했던 큰 기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료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돌궐’이라는 부족은 원래 알타이 산맥 부근에서 유목하면

거기서 철을 캐내어, 몽골리아 초원의 맹주 유연(柔然)에게 공납을 바치던 일개 미약한 부족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문으로 된 사료에는 돌궐인의 조상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고난으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적 기억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즉, 언젠가 돌궐인이 주변의 강력한 국가의 공격을 받아 주민 모두가 살해되고 어린 사내아이 하나만 겨우 살아 남았는데, 암늑대 한

마리가 그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고기를 물어다 주어 키웠다.

후일 이 아이가 커서 암늑대와 혼인을 하고 거기서 10명의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가운데 막내아들의 이름이 ‘아사나(阿史那)’였고,

그가 바로 돌궐제국의 카간(qaghan·황제)을 배출하는 씨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아사나’라는 말이 튀르크어로 ‘늑대’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통상 ‘낭생설화(狼生說話)’라고 불리는 이러한 전설은 돌궐뿐만 아니라 몽골인에게도 보인다.

칭기즈칸의 계보와 그의 일대기를 기록한 ‘몽골비사’라는 책을 보면 맨 처음에 ‘잿빛 늑대’와 ‘흰빛사슴’이 만나서 아이를 낳고 그 후손

가운데 칭기즈칸이 출현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물론 늑대가 이들의 조상일 수는 없고, 다만 초원의 약탈자적 강인함의 상징인 늑대를 토템동물로 숭배던 유목부족의 관습에서

비롯된 설화일 텐데,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돌궐인이 이같은 낭생설화를 실제로 믿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발견된 것이다.


▲ 빌개 카간의 황금왕관

 

오늘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400㎞ 정도 떨어진 곳에 체체를렉이라는 도시가 있다.

현지어로는 ‘꽃이 만발한 곳’이라는 의미인데, 사실 이 도시는 항가이라는 이름의 산맥 북사면에 있으며 해발 1700m의 비교적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봄이 되면 푸른 초원에 아름다운 야생화들이 만발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던 것 같다.

이 도시의 중앙에 박물관이 있고 정원 한가운데에 높이 2.45m의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기단 부분에는 거북이 모양을 조각한

귀부(龜趺·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가 있다.

이수(首·뿔 없는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에 해당되는 부분은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는데, 흔히 이수에 새기는 용은 보이지

않고 대신 어린아이가 늑대의 젖을 빨아먹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비석의 삼면에는 모두 중앙아시아에서 사용되던 소그드(Soghd) 문자가 새겨져 있고 마지막 한 면에는

인도에서 사용되던 브라흐미 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원래 체체를렉 근교에 위치한 부구트(Bugut)산에서 발견되어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기 때문에 통상 ‘부구트비’로 부른다.

 

비문을 판독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제작연도는 대체로 580년대이며, 비석은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돌궐왕족에 속하는 마한

테긴(Mahan Tegin)이라는 인물의 기념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돌궐제국의 지배집단은 자기들 조상이 늑대의 젖을 먹고 살아남은 ‘아사나=늑대’의 후손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처럼 비석의

머리 부분에 자신들의 뿌리를 보여주는 내용을 부조해 넣은 것이다.

 

늑대와 아이가 조각된 것은 퀼 테긴이라는 왕자의 비석 상단에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사나 일족이 모두 믿고 있던 설화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돌궐의 건국은 553년의 일이었다. 그 해에 투멘(Tumen 만호장)이라는 이름수령이 몽골리아에 있던 유연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일릭 카간(Ilig Qaghan)’이라는 칭호를 갖고 즉위했다고 한다.

‘일릭’은 ‘나라를 건설한’이라는 의미의 튀르크어이지만, ‘카간’은 돌궐인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유목민의 군주를 뜻하는 명칭인 ‘카간’ 혹은 ‘칸’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지는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늦어도 5세기

중반경이 되면 선비·유연 계통의 유목민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라에서 4세기 중반경 처음 출현하는 ‘마립간(麻立干)’이라 는 칭호에서 ‘간’을 ‘칸’과 동일한 단어로 보는 견해도 있다.

 

6세기 중반 몽골리아를 장악한 돌궐은 곧바로 대외원정에 나서기 시작한다.

제2대 카간은 서쪽으로는 헤프탈(Hephtal)을 쳐서 사산조 페르시아와 접경을 이루고, 동쪽으로는 거란족을 복속시켰으며, 북으로는

바이칼호에 이르고, 남으로는 고비사막을 넘어 당시 북주·북제로 나뉘어져 있던

 

북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당시 이 두 나라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의 돌궐잘 보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재물을

갖다 바쳤으니, 돌궐의 제3대 카간은 “남쪽에 효성이 지극두 아이들이 있는데, 내게 물자가 부족할까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라고

호언장담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서고 당태종이 대북방 강경책으로 선회하면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특히 지배층 내부의 갈등이 격화되고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돌궐은 급속하게 쇠약해졌고, 결국 630년 태종은 북방의 또 다른 유목세력 연합작전을 펼쳐 돌궐의 카간을 생포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로써 초원의 대제국은 일거에 무너져버렸고, 유라시아의 유목민은 졸지에 당제국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634년 당태종은 포로가 되어 끌려온 돌궐의 카간과 남월(南越)의 수령에게 자신의 궁정에서 한 사람은 시를 읊게 하고 한 사람은

춤을 추게 하면서 “이제 호(胡)와 월(越)이 한 집안이 되었으니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하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는 중원의 통치자인 ‘황제’이면서 동시에 북방 유목민의 지배자로서 ‘천가한(天可汗)’이라고 불렸으니, 이는 ‘하늘 같은 카간’이라는

뜻이다.

 

물론 당나라의 북방지배는 현지의 부족장이나 씨족장을 도독(都督)과 자사(刺史)로 임명하여 다스리게하는 간접적인 지배형태를

취하였다.

 

당시에는 이를 두고 ‘기미
(羈)’라고 불렀으니 ‘소와 말의 고삐’를 뜻한다.

꼼짝 못하게 꽉 묶어두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마음대로 풀어주는 것도 아닌 느슨한 통제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돌궐>인은 중국의 지배를 받은 지 반세기 만에 놀랍게도 제국의 부흥을 이룩하였다.

 

만리장성 주변의 내몽골 지방에 살면서 당나라의 감시와 통제를 받던 부족민 사이에서 570년대 후반부터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나타나다가, 682년에는 쿠틀룩(Qutluq)과 톤육쿡(Tonyuquq)이라두 사람의 지도자가 이끄는 돌궐인이 고비사막을 넘어서

북방으로 갔고, 마침내 687년에는 자신들의성산(聖山)인 외튀캔(한국어= 우뚝한) 산지를 회복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재건된 나라를 돌궐 제2제국이라 부르며,당의 지배를 받기 전, 즉 553년부터 630년까지 존재했던 국가를 제1제국이라

부른다.

 

쿠틀룩은 ‘일테리시 카간(Ilterish Qaghan)’이라는 칭호를 취하였는데 이는 ‘(흩어진)백성을 모은 군주’라는 뜻이다.

그를 도운 건국공신 톤육쿡은 재상이 되었고 두 사람은 자녀들의 혼인을 통해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반세기에 걸친 중국의 지배는 그들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식민의 기억이었지만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역사적 교훈이기도 했다.

제국을 부흥시킨 그들은 돌궐인이 어떠한 굴욕을 감내했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같은 각성을 통해서 돌궐 유목민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중국적’ 종교인 불교와 도교를 경계하고 그 대신 유목민 고유의‘탱그리(tangri=하늘=단군)를 강조했다.

 

돌궐의 카간은 ‘탱그리에서 태어나’ ‘탱그리와 닮고’ ‘탱그리가 세운’ 군주로 묘사되었다.

 

돌궐의 지배층은 이같은 사실을 일반 유목민에게 각인시키기위해 거대한 비석을 초원 여러 곳에 세우기 시작했다.

비석을 세우는 전통은 부구트비를 세운 제1제국 때부터 있었지만, 제2제국이 되면 전에 없던 중요한 변화가 하나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돌궐인 자신이 창제한 고유한 문자에 의해 비문이 새겨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제2제국이 존속했던 680년경부터 8세기 중반까지 소위 ‘고대 투르크문자’로 새겨진 비문이 처음으발견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비문의 탁본은 학계에 소개된 지 불과 몇 년 만에 해독되었다.

 

그 결과 이 문자는 돌궐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이 사용하던 소그드문자를 고쳐서 만들었고 표음문자의

원리를 받아들여 35개 내외의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동시에 이란계 소그드어와는 달리 돌궐인이 사용하던 튀르크어의 언어적

특성에 적합한 체계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는 보통 유목민이라고 하면 가축을 치고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쟁은 잘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미개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글이 창제되기 무려 750년 전에 이들 유목민이 자신의 언어적 특징을 잘 나타내는 표음문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제주도 돌하루방과 비슷한 고대 튀르크인 석인상(石人像).

돌궐제국은 752년 그 지배하에 있던 세 부족의 반란으로 무너졌고, 이들 가운데 하나였던 위구르(Uyghur)가 몽골리아의 모든 유목민을

제압하고 돌궐의 뒤를 이은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위구르때마침 중국에서 터진 안사의 난(755)에 개입하여 당 왕조를 대신해서 반란군을 토벌하고 수도장안과낙양을 수복해주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양귀비에 빠져 반란을 자초한 현종 대신 즉위한 숙종은 위구르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758년 자신의 어린 딸을 ‘영국공주(寧國公主·나라에 안녕을 가져다 주는 공주)’라 이름하여 나이 많은 카간에게 보내야 했다.

 

중국 역사상 황제가 이민족의 강요에 의해 친딸을 시집보낸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물론 후일몽골의쿠빌라이가 친딸을 고려 왕실의 태자에게 시집보냈지만 그것은 경우가 달랐다.

아무튼 숙종은 국경까지 친히 배웅 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딸을 보냈는데, 시집간 그 다음 해에 카간은 죽었고 어린 딸은 유목민의

풍습에 따라 얼굴을 칼로 그으면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후일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소박’을 맞고 중국으로 돌아오는 신세가 되었으니, 오히려 그녀에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위구르의 위세에 눌린 당나라는 그들에게 비단을 헐값에 매도할 수밖에 없었다.

위구르인은 자신들과 연맹했던 국제상인 소그드인에게 말떼를 넘겨주고 그것을 비단과 교환해 오도록 했다.

원래 말 1필에 비단 1필 하던 것이 나중에는 비단 40필을 요구할 정도가 되었으니, 당나라가 이런 불공정한 교역조건에 대해 항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를 시정할 힘은 없었으니 그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엄청난 규모의 중국산 비단이 위구르·소그드인의 손으로 들어갔고, 이들은 서아시아나 유럽과 원거리 비단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거둘수 있었던것이다.

 
이처럼 6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몽골리아에 등장한 돌궐·위구르와 같은 유목제국은 미증유의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면서 유라시아

대륙 여러 지역의 문명권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들의 이같은 번영과 발전은 물론 유목민족의 기동성과 그에 기초한 기마군단의 탁월한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그들과

손을 잡고 일했던 국제상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는지도 모른다.

이들 중앙아시아 출신의 소그드인은 유목민에게 농경지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물자, 비단 교역을 통해서 획득한 거대한 재화,

마니교와 같은 종교는 물론 자신들의 문자까지 전달해 주었고, 나아가 유목민의 세계관을 유라시아 전체로 넓혀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고대 튀르크 비문과 그 내용

현재까지 고대 튀르크문자가 새겨진 다수의 크고 작은 비문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도 규모가 큰 것으로는 제3대 군주였던 빌개 카간의 비, 그의 동생인 퀼 테긴의 비, 그리고 건국공신이자 빌개 카간의

장인인 톤육쿡의 비가 있다.

이들 비문에 적힌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처음으로 한문자료라는 이방인의 프리즘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목민 자신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육성, 초원의 바람처럼 거칠면서도 솔직하고 수식없는 진솔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늘과 같고 하늘에서 태어난 튀르크의 빌개 카간, 나 이제 보좌에 앉았노라. …

너희는 내 말을 잘 듣고 단단히 귀를 기울여라!”로 시작되는 빌개 카간의 비문은 중국인이 달콤한 말과 나긋나긋한 비단으로 어떻게

돌궐인을 유혹해서 변경 가까운 곳으로 끌고 가서 절멸시켰는가,

그 후에 자신의 아버지 일테리시 카간이 어떻게 백성을 이끌고 나라를 재건하고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입혔으며, 군대를

이끌고 사방의 적들을 모두 쳐부수고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게 하였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돌궐의 건국은 553년의 일이었다. 그 해에 투멘(Tumen 만호장)이라는 이름수령이 몽골리아에 있던 유연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일릭 카간(Ilig Qaghan)’이라는 칭호를 갖고 즉위했다고 한다.

‘일릭’은 ‘나라를 건설한’이라는 의미의 튀르크어이지만, ‘카간’은 돌궐인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유목민의 군주를 뜻하는 명칭인 ‘카간’ 혹은 ‘칸’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지는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늦어도 5세기

중반경이 되면 선비·유연 계통의 유목민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라에서 4세기 중반경 처음 출현하는 ‘마립간(麻立干)’이라 는 칭호에서 ‘간’을 ‘칸’과 동일한 단어로 보는 견해도 있다.

 

6세기 중반 몽골리아를 장악한 돌궐은 곧바로 대외원정에 나서기 시작한다.

제2대 카간은 서쪽으로는 헤프탈(Hephtal)을 쳐서 사산조 페르시아와 접경을 이루고, 동쪽으로는 거란족을 복속시켰으며, 북으로는

바이칼호에 이르고, 남으로는 고비사막을 넘어 당시 북주·북제로 나뉘어져 있던

 

북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당시 이 두 나라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의 돌궐잘 보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재물을

갖다 바쳤으니, 돌궐의 제3대 카간은 “남쪽에 효성이 지극두 아이들이 있는데, 내게 물자가 부족할까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라고

호언장담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서고 당태종이 대북방 강경책으로 선회하면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특히 지배층 내부의 갈등이 격화되고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돌궐은 급속하게 쇠약해졌고, 결국 630년 태종은 북방의 또 다른 유목세력과 연합작전을 펼쳐 돌궐의 카간을 생포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로써 초원의 대제국은 일거에 무너져버렸고, 유라시아의 유목민은 졸지에 당제국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634년 당태종은 포로가 되어 끌려온 돌궐의 카간과 남월(南越)의 수령에게 자신의 궁정에서 한 사람은 시를 읊게 하고 한 사람은

춤을 추게 하면서 “이제 호(胡)와 월(越)이 한 집안이 되었으니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하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는 중원의 통치자인 ‘황제’이면서 동시에 북방 유목민의 지배자로서 ‘천가한(天可汗)’이라고 불렸으니, 이는 ‘하늘 같은 카간’이라는

뜻이다.

 

물론 당나라의 북방지배는 현지의 부족장이나 씨족장을 도독(都督)과 자사(刺史)로 임명하여 다스리게하는 간접적인 지배형태를

취하였다.

 

당시에는 이를 두고 ‘기미
(羈)’라고 불렀으니 ‘소와 말의 고삐’를 뜻한다.

꼼짝 못하게 꽉 묶어두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마음대로 풀어주는 것도 아닌 느슨한 통제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돌궐>인은 중국의 지배를 받은 지 반세기 만에 놀랍게도 제국의 부흥을 이룩하였다.

 

만리장성 주변의 내몽골 지방에 살면서 당나라의 감시와 통제를 받던 부족민 사이에서 570년대 후반부터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나타나다가, 682년에는 쿠틀룩(Qutluq)과 톤육쿡(Tonyuquq)이라두 사람의 지도자가 이끄는 돌궐인이 고비사막을 넘어서

북방으로 갔고, 마침내 687년에는 자신들의성산(聖山)인 외튀캔(한국어= 우뚝한) 산지를 회복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재건된 나라를 돌궐 제2제국이라 부르며,당의 지배를 받기 전, 즉 553년부터 630년까지 존재했던 국가를 제1제국이라

부른다.

 

쿠틀룩은 ‘일테리시 카간(Ilterish Qaghan)’이라는 칭호를 취하였는데 이는 ‘(흩어진)백성을 모은 군주’라는 뜻이다.

그를 도운 건국공신 톤육쿡은 재상이 되었고 두 사람은 자녀들의 혼인을 통해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반세기에 걸친 중국의 지배는 그들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식민의 기억이었지만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역사적 교훈이기도 했다.

제국을 부흥시킨 그들은 돌궐인이 어떠한 굴욕을 감내했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같은 각성을 통해서 돌궐 유목민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중국적’ 종교인 불교와 도교를 경계하고 그 대신 유목민 고유의‘탱그리(tangri=하늘=단군)를 강조했다.

 

돌궐의 카간은 ‘탱그리에서 태어나’ ‘탱그리와 닮고’ ‘탱그리가 세운’ 군주로 묘사되었다.

 

돌궐의 지배층은 이같은 사실을 일반 유목민에게 각인시키기위해 거대한 비석을 초원 여러 곳에 세우기 시작했다.

비석을 세우는 전통은 부구트비를 세운 제1제국 때부터 있었지만, 제2제국이 되면 전에 없던 중요한 변화가 하나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돌궐인 자신이 창제한 고유한 문자에 의해 비문이 새겨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제2제국이 존속했던 680년경부터 8세기 중반까지 소위 ‘고대 투르크문자’로 새겨진 비문이 처음으발견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비문의 탁본은 학계에 소개된 지 불과 몇 년 만에 해독되었다.

 

그 결과 이 문자는 돌궐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이 사용하던 소그드문자를 고쳐서 만들었고 표음문자의

원리를 받아들여 35개 내외의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동시에 이란계 소그드어와는 달리 돌궐인이 사용하던 튀르크어의 언어적

특성에 적합한 체계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는 보통 유목민이라고 하면 가축을 치고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쟁은 잘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미개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글이 창제되기 무려 750년 전에 이들 유목민이 자신의 언어적 특징을 잘 나타내는 표음문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제주도 돌하루방과 비슷한 고대 튀르크인 석인상(石人像).

돌궐제국은 752년 그 지배하에 있던 세 부족의 반란으로 무너졌고, 이들 가운데 하나였던 위구르(Uyghur)가 몽골리아의 모든 유목민을

제압하고 돌궐의 뒤를 이은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위구르때마침 중국에서 터진 안사의 난(755)에 개입하여 당 왕조를 대신해서 반란군을 토벌하고 수도장안과낙양을 수복해주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양귀비에 빠져 반란을 자초한 현종 대신 즉위한 숙종은 위구르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758년 자신의 어린 딸을 ‘영국공주(寧國公主·나라에 안녕을 가져다 주는 공주)’라 이름하여 나이 많은 카간에게 보내야 했다.

 

중국 역사상 황제가 이민족의 강요에 의해 친딸을 시집보낸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물론 후일몽골의쿠빌라이가 친딸을 고려 왕실의 태자에게 시집보냈지만 그것은 경우가 달랐다.

아무튼 숙종은 국경까지 친히 배웅 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딸을 보냈는데, 시집간 그 다음 해에 카간은 죽었고 어린 딸은 유목민의

풍습에 따라 얼굴을 칼로 그으면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후일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소박’을 맞고 중국으로 돌아오는 신세가 되었으니, 오히려 그녀에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위구르의 위세에 눌린 당나라는 그들에게 비단을 헐값에 매도할 수밖에 없었다.

위구르인은 자신들과 연맹했던 국제상인 소그드인에게 말떼를 넘겨주고 그것을 비단과 교환해 오도록 했다.

원래 말 1필에 비단 1필 하던 것이 나중에는 비단 40필을 요구할 정도가 되었으니, 당나라가 이런 불공정한 교역조건에 대해 항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를 시정할 힘은 없었으니 그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엄청난 규모의 중국산 비단이 위구르·소그드인의 손으로 들어갔고, 이들은 서아시아나 유럽과 원거리 비단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거둘수 있었던것이다.

 
이처럼 6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몽골리아에 등장한 돌궐·위구르와 같은 유목제국은 미증유의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면서 유라시아

대륙 여러 지역의 문명권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들의 이같은 번영과 발전은 물론 유목민족의 기동성과 그에 기초한 기마군단의 탁월한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그들과

손을 잡고 일했던 국제상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는지도 모른다.

이들 중앙아시아 출신의 소그드인은 유목민에게 농경지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물자, 비단 교역을 통해서 획득한 거대한 재화,

마니교와 같은 종교는 물론 자신들의 문자까지 전달해 주었고, 나아가 유목민의 세계관을 유라시아 전체로 넓혀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고대 튀르크 비문과 그 내용

현재까지 고대 튀르크문자가 새겨진 다수의 크고 작은 비문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도 규모가 큰 것으로는 제3대 군주였던 빌개 카간의 비, 그의 동생인 퀼 테긴의 비, 그리고 건국공신이자 빌개 카간의

장인인 톤육쿡의 비가 있다.

이들 비문에 적힌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처음으로 한문자료라는 이방인의 프리즘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목민 자신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육성, 초원의 바람처럼 거칠면서도 솔직하고 수식없는 진솔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늘과 같고 하늘에서 태어난 튀르크의 빌개 카간, 나 이제 보좌에 앉았노라. …

너희는 내 말을 잘 듣고 단단히 귀를 기울여라!”로 시작되는 빌개 카간의 비문은 중국인이 달콤한 말과 나긋나긋한 비단으로 어떻게

돌궐인을 유혹해서 변경 가까운 곳으로 끌고 가서 절멸시켰는가,

그 후에 자신의 아버지 일테리시 카간이 어떻게 백성을 이끌고 나라를 재건하고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입혔으며, 군대를

이끌고 사방의 적들을 모두 쳐부수고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게 하였는가를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