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카페-잃어버린 역사... 글쓴이: 도불원인 http://cafe.daum.net/dobulwonin/IFP1/16
몽골제국이 남긴 최대 유산은 세계사의 탄생 동·서양이 비로소 세계사에 눈을 뜨다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신세계 소개하며 유럽인 세계관 바꿔 , 몽골은 14세기초에 인류최초의 세계사 책인 ‘집사’ 펴내기도‘동방견문록’에 심취한 콜럼버스, 인도 찾다 신대륙 발견, 1402년 조선시대 지도에 아프리카 처음 등장
1324년 마르코 폴로가 고향 베네치아(영어명 베니스)에서 숨을 거둘 때 그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 친구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이제까지 한 이야기들 가운데 진실된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잘못하면 죽어서 지옥에 갈지도 모르니 어서 회개하게나!” 그러나 마르코 폴로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이제껏 내가 본 것 가운데 아직 반도 다 이야기하지 못했어.” 사실 마르코 폴로의 별명은 ‘백만’을 뜻하는 ‘일 밀리오네(I l Milione)’였다. 이것은 그가 백만장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입만 벌리면 ‘백만, 백만’했기 때문에, 말하자면 ‘허풍쟁이, 떠벌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린 것이다.
그가 남긴 ‘동방견문록’에는이처럼 사실과는 거리가 먼 과장이나 환상적으로 꾸며진 이야기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자료들을 꼼꼼하게 비교연구한 학자들은 그가 말한 내용의 대부분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13세기 후반 중국인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긴요한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그의 임종 때 일화는 역설적이긴 하지만 중세 유럽인들이 유럽 이외의 바깥세상에 대해 그만큼 무지했다는 점을 방증해주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13~14세기 유럽인의 세계관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은 역할을 한 것이다.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으로 콘스탄티노플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니콜로 폴로와 마페오 폴로라는 형제,
그리고 니콜로의 아들 마르코는 몽골 지배하의 동아시아를 방문해 그곳에서 무려 17년간 머물다가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마르코 폴로는 그 뒤 지중해의 패권을 둘러싸고 베네치아와 제노바(영어명 제노아) 사이에 벌어진 해전에 참가했다가 포로로 잡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피사 출신의 작가 루스티켈로를 만나 자신이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구술해서 완성한 것이 ‘동방견문록’인 것이다. 이 책은 원래 이탈리아 방언이 강하게 섞인 프랑스어로 쓰였으며 원제목은 ‘세계의 서술 (Divisament dou Monde)’이었다. 그런데 서구와 미국에서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동방견문록’이라 칭하였는데, 우리는 일본식 명칭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글은 마르코 폴로의 여행에 기초했으면서도 서술의 순서나
체재를 보면 결코 ‘여행기’나 ‘견문록’이라고 하기 어렵고, 유럽과 지중해 연안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에
대한 ‘체계적 서술’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원래 제목인 ‘세계의 서술’은 책의 내용과 성격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동방견문록’은 성경 다음 가는 베스트셀러였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의 글이 남긴 영향은
정말로 지대하였다. 그의 글에 묘사된 ‘카타이(Cathay)’라는 나라는 유럽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곳은 온갖 재화와 물산이 넘쳐나고 위대한 군주 쿠빌라이가 지배하는 무한히 넓은 왕국이었고 캄발룩
(Cambaluc·대도·베이징), 자나두(Xanadu·상도·원나라의 여름 수도·현 네이멍구자치구 소재), 자이툰
(Zaitun·천주·푸젠성 소재)과 같은 도시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 뒤 수많은 상인과 선교사가 ‘카타이’를 찾으러 나섰는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콜럼버스였다. 그는 평소 마르코 폴로의 글을 접하고 읽으면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으면 그 옆에 특별히 메모를 남길 정도로 탐독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의 대칸이 지배하는 영역이 대인도, 중인도, 소인도 등 ‘세 개의 인도’로 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페르디난드 국왕과 이사벨라 여왕의 친서를 받아 1492년 이 ‘인도’를 향해 출항한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은 콜럼버스의 ‘인도’가 우리의 ‘인도’와는 완전히 다른 실체였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아무튼 그가 휴대한 친서의 수신인은 ‘인도’를 지배하는 몽골의 ‘그랑 칸’, 즉‘위대한 칸’이었다. 그는 자기가 기착한 곳이 대칸이 통치하는 대륙에서 아주 가까운 섬이며, 근처에는 은이 풍부한 나라로 묘사된 ‘지팡구’, 즉 일본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르코 폴로의 글이 유럽인의 지리 지식과 세계관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1375년
지중해 서부의 마요르카(Mallorca)라는 섬에서 제작된 카탈루니아 지도(Catalan Atlas)로, 이것은 유럽
최초의 ‘근대적’ 지도로 유명하다. 이 지도에는 ‘동방견문록’에 의해 처음 알려지게 된 지명들이 세밀하게기록되어 있으며, 지도의 원래 제목이 라틴어로 ‘세계의 지도(Mapa Mondi)’라 붙여진 것도 ‘동방견문록’의 원제목인 ‘세계의 서술’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모두 8장으로 이루어진 이 지도는 동방 세계에 4장을 할애하였다. 동방 세계에 대한 유럽인의 지리 지식이 얼마나 풍부해지고 사실적이 되었는가 하는 것은 이제까지 기독교적 세계관에 근거한 소위 ‘OT지도’라는 중세적 지도와 비교해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서 카탈루니아 지도 제작에 이르기까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남긴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고 할 수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바로 ‘동방견문록’과 같은 책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몽골제국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유라시아 여러 지역 간 교류가 활성화되고 미증유의 문화적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런 현상들은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팍스 몽골리카’, 즉 몽골의 세계 지배가 없었다면 유럽의 근대가 없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상당히 지체되었거나 혹은 유럽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유럽이 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자기가 속해 있는 지역과 문화의 협소함을 극복하고 세계 전체를 시야에 넣는 넓은 관점을 획득한 것이 유럽인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럽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세계’와 ‘세계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잘 보여주는 예가 14세기 초
서아시아에서 편찬된 ‘집사(集史·Jami at-tavarikh)’라는 책이다. 이것은 원래 가잔 칸(1295~1304년)이라는 몽골군주의 지시에 의해 당시 재상이던 라시드 앗 딘 (Rashid ad-Din)이 찬술한 것이다. 그는 먼저 몽골인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는가 하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칭기즈칸의 조상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와 그의 후손이 수행한 정복전과 통치의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것이 바로 ‘집사’의 제1부를 이루게 된 ‘몽골제국사’이다. 그런데 가잔 칸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울제이투 칸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지금까지 어느 시대에도 세계 전역의 모든 사람과 인류의 갖가지 계층에 대한 정황과 설명을 담고 있는 역사서는 집필되지 않았다. … 이 시대에는 지상의 여러 지방과 나라가 칭기즈칸 일족의 칙령을 받들고 있다. 또한 키타이(북중국), 마친(남중국), 인도, 카쉬미르, 티베트, 위구르 및 기타 투르크 종족, 아랍, 프랑크 등과 같은 여러 민족의 현자와 점성가·학자·역사가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위용을 자랑하는 군주의 어전에 모여 있다”고 강조하면서 지구상에 있는 세계 각 민족의 역사와 지리도 저술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라시드 앗 딘은 제2부 ‘세계민족사’와 제3부 ‘세계지리지’를 편찬하였고, 이를 모두 합해서 ‘집사’라고 부른 것이다. 그때까지 역사상 이 같은 규모와 비전으로 집필된 역사서는 없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미 몽골이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을 서술하는 제1부가 ‘세계사’적인 스케일로 서술될 수밖에 없었지
만, 제2부에서 이러한 시야는 더욱 확대되어 페르시아 고대제국과 이슬람 출현 이후 칼리프들의 역사는
물론 중국인·투르크인·유대인·프랑크인·인도인의 역사가 별도로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 일례로 중국사를 들어보면, 전설상의 인물 반고(盤古)에서 시작해 복희·신농·황제를 거쳐 중국의 역대 36개 왕조와 최후로 몽골에 의해 멸망한 금나라의 역사까지 설명되어 있다. 그가 집필한 중국사 부분은 당시 중국에서 입수한 저서를 근거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같은 시대에 중국에서 읽혀지던 것과 동일한 질과 수준의 글이 페르시아어로도 번역된 것이다. 이 같은 사정은 단지 중국사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사의 서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의 발견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1402년에 바로 우리나라에서 그려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라는 지도이다. 이것은 권근(權近)과 김사형(金士衡) 등이 원대의 이택민(李澤民)이 제작한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청준(淸濬)의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를 합하여 만든 것인데, 현재 원본은 존재하지 않고 두 종류의 복사본만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지도 중앙에는 중국이 크게 자리잡고 있고 그 동쪽 아래쪽으로 한반도가 실제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는 반면 일본은 작고 왜곡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중국의 서쪽으로는 인도, 아라비아, 유럽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놀라운 사실은 역사상 처음으로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지도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지도는 세계의 중심으로서 ‘중국=중화’를 가운데에 위치시키고 그 옆에 적지 않은 크기의 ‘조선=소중화’를 배치함으로써 전통적으로 뿌리깊은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대한 묘사에서 사실성이 억압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유럽과 아프리카 같은 지역의 전모가 드러날 수 있게 된 것은 13~14세기 몽골시대에 문명 간 교류와 대화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의 마지막 법전인 ‘지정조격(至正條格)’의 세계 유일본이 경주에서 발견된 것도 바로 이 같은 긴밀한 문화적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처럼 몽골제국의 출현은 그 전에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구대륙의 여러 문명지역을 통합하였다.
전쟁과 정복은 수많은 군대와 주민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고 그 결과 민족적 혼합과 문화적 혼효
(混淆)가 일어났다. 일단 정복의 태풍이 가라앉자 몽골인은 제국의 통치와 행정을 위해 여러 장치를 만들어냈다. 원활한 교통을 위해 역참제를 대대적으로 확충하여 운영했고, 이러한 교통시설을 기반으로 국제 상인들이 주축이 된 활발한 경제활동이 추진되었으며, 또 기독교와 이슬람교 선교사들이 각지로 오가며 자기들의 종교를 전파했다. 심지어 병균도 같이 이동하면서 흑사병 같은 대재앙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이러한 교류는 13~14세기 유라시아의 각 문명권에 있던 사람들의 의식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문명들에 더 이상 고립이 허용되지 않았고, 타 문명에 대한 무의미한 오해나 근거 없는 환상도 설 땅을 잃어버렸다. 외부 세계에 대해 극히 무지하던 서구인의 지식이 얼마나 폭발적으로 팽창했는가는 카르피니, 루브룩, 마르코 폴로의 글들이 웅변해주고 있고, 그것은 결국 콜럼버스 같은 인물의 모험과 대항해의 시대로까지 연결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서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문명의 역사와 민족에 대해 서구보다 더 심도 있고, 의미 있는 이해가 몽골제국 본령 안에서 이루어졌다. 14세기 초에 저술된 라시드 앗 딘의 ‘집사’는 그 규모의 팽대함, 기획의 방대함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였고, 주요한 모든 민족과 지역의 역사를 포괄하고 나아가 세계 전역의 지리지까지 기록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집사’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 최초의 ‘세계사’였다고 말할 수 있으니, 그것은 곧 몽골시대에 유라시아 각 문명에 공통적으로 일어난 변화, 즉 ‘세계사의 탄생’을 말해주는 것이다. ▒ ‘지정조격’의 발견과 출판
‘지정조격(至正條格)’은 1345년 말에 완성되어 그 다음 해 봄에 반포된 원나라 최후의 법전이다. ‘지정’이란 마지막 황제인 토곤 테무르(順帝·1333~1367년)가 사용한 연호(1341~1367년)이고, ‘조격’이란 법적·행정적 결정이 담긴 조문과 규정을 뜻한다. 이 법전은 반포된 지 20년 만에 원이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섰기 때문에 폐지되었고 중국에서도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2002년 경주의 손씨(孫氏) 종가에서 원나라 때 간행된 ‘지정조격’의 잔권(殘卷)이 발견된 것이다. 조선 세종 때 승문원 박사를 역임한 손사성(孫士晟)이 소장한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세계 유일본이다. ‘지정조격’의 텍스트는 원대의 다른 법전과 마찬가지로 몽골어 직역체(直譯體)와 이문체(吏文體)가 섞여 있어 고전 한문과는 매우 다르며 상당히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국내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방점이 찍히고 주석이 달린 교주본(校註本)과 영인본(影印本)이 출간되어, 세계 학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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