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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의 묘는 어디에...?

설레임의 하루 2009. 4. 12. 05:27

*출처:다음카페-중국대련줘후이어학원   글쓴이: 대련

 

 

 

 

 

 

내몽고박물관의 관장인 소청륭에 따르면, 징기스칸 묘의 확실한 위치는 중국과 세계의 고고학계의 괸심의 촛점이다.

현재, 당, 송, 명, 청의 황릉은 이미 다 찾았고, 일부 묘는 발굴을 마쳤다.

그러나, 원의 황릉만은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징키스칸의 능묘를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징기스칸 유물은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여러해동안 징기스칸의 묘의 위치에 대하여는 네가지 정도로 견해가 나뉘어진다.

몽골의 컨터산의 남측; 어얼뚜어쓰 초원; 천리산; 알타이산.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장 주요한 이유는 원나라 황가에서 시행했던

비밀매장제도 때문이다.

즉, 제왕능묘의 매장지점에는 표지도 세우지 않고, 공포하지도 않으며,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다.

 

소청륭은 여러해 동안 관련사료와 문헌을 연구한 후, 징기스칸의 묘는 현재 몽골의 컨터산의 산자락의 남쪽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장소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는 컨터산의 범위는 매우 넓어서 약 이삼백킬로미터의 너비에, 1,000킬로미터의 길이를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징기스칸이 살아있을 때, 일찌기 컨터산위의 어느 나무아래 정좌하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긴 후에, 수하들에게

내가 죽은 후에 여기에 묻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송나라 문인의 글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징기스칸이 영하지방에서 사망한 후, 유체는 막북의 컨터산 아래의 모처로 옮겨졌고, 땅을 깊이 파고 비밀리에 매장했다.

그 유체는 하나의 독목관 안에 넣었다.

독목관(獨木棺)은 큰 나무를 잘라서 중간을 파내어가지고 만든 관을 의미한다.

독목관을 묻은 후, 흙으로 매우고, 만마리의 말로서 땅을 편평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흙을 파낸 흔적을 찾을 수 없도록 만마리의 말이 위를 달리게 해서 편평하게 만든 후에 장막으로 주위지구를 모두

둘러싸고, 묘장지점에 푸른 풀이 나오고 그 풀이 주변의 풀과 구분이 안될 때 장막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묻은 지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모든 매장작업이 끝난 후, 몽골인들은 매장지점에 한 마리의 새끼 낙타를 죽인다.

이 때 새끼 낙타를 따라온 어미 낙타는 슬프게 울부짖게 되고, 장소를 기억한다고 한다.

다음 해에 제사지낼 때, 이 어미 낙타를 끌고 오는데 멀리 떨어져서도 어미낙타는 슬피 울며 뛰어가고, 새끼낙타가 죽은 장소에서

슬피 울부짖는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제사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은 정확한 위치를 찾아낸다고 한다.

 

원나라때 제왕의 묘는 모두 이런 비밀매장방식을 취하였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원나라때의 황가능묘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징기스칸의 묘는 이미 전세계 고고학의 하나의 핫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징기스칸의 묘를 찾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고, 소요되는 비용과 인력은 가늠하기 힘들다.

 

소청륭의 말에 따르면, 7년전에 일본인이 징기스칸 묘를 찾기 위한 방대한 고고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12억엔을 사용하여, 컨터산 부근의 약 300개의 고묘를 발굴하였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다고 한다.

2002년에서 2003년까지는 미국인도 징기스칸의 묘에 대하여 대규모 조사작업을 벌였는데, 바깥을 돌담으로 둘러싼 능묘를 하나

찾아냈는데, 고고대에서는 징기스칸의 묘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흉노의 묘였다.

 

각국의 고고학계에서는 징기스칸의 묘를 찾는데 자신의 유리한 점을 활용하고 있다.

몽골국은 지리적인 위치에서 유리하고, 컨터산이 자기들 국경내에 있다.

중국은 사료에 있어서 우세한 점이 있다. 몽골문자이건 한문이건 자료가 많고 충실하다.

그러나 일본이나 미국은 자금이 풍부하다.

 

그렇다면,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원나라의 개국황제인 징기스칸의 능에는 도대체 무엇이 묻혀 있을까?

소청륭의 소개에 따르면 사료의 기재에는 징기스칸이 일생동안 전투를 하고 돌아다녔으며 생전의 생활은 사치스럽거나 호화롭지

않았다.

그가 500여명의 첩을 거느리기는 하였으나, 몽골인의 습속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후에 부장하는 물건은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이다. 황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징기스칸의 능에 부장된 것은 아마도 생전에 그가 쓴 말안장, 술잔, 미녀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수량은 알 수가 없다. 그는 생전에 병사를 많이 거느렸고, 원제국은 백전백승의 국가였으므로 그의 묘에는 분명히

대량의 병기가 부장되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용하였던 칼, 검, 활, 갑옷등의 물건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