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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돌하는 고대제국 - 흉노와 漢

설레임의 하루 2009. 3. 31. 13:35

*출처: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도불원인

 

 

 

 

 

 격돌하는 고대제국 - 흉노와 漢

 

본 글을 쓴 저자도 약간의 慕華思想이 있는 듯. 이면의 역사를 모르고 중국사를 식민사관 그대로 교육받았으니 그렇게 저술을 하게된

것.실제 흉노에 대하여 <흉노족>은 있는데 <흉노라는 국가>가 없는 이유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배워왔으니 습관성으로 보아야 또 

유목민이라서 그렇다는 古踏的인 이유를 붙입니다만,실제를 보면 묵특선우 등 흉노의 大群長 후예는 대조직은 있되 태생적 지역으로 

보았을때..

그리고 지금 처럼통신과 문물이 발달된기준으로 흉노가 거처했던 지역을 보면 동몽골,몽골초원, 신강지역그 서쪽으로 투르크메니스탄,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등 ..스탄국.. 유목민이 주축으로 혼성된유목민족으로서 들에게 물어보면 옛날 고조선,고구려의 후예들이라고 지금도 이야기 하는사실로 보아 실제를 유츄하면 그들도 결국은 古朝鮮의 一派였음을 인지할수 있습니다.

 

흉노는 고조선의 발생지역이 요서지역(=오르도스) 으로 서쪽으로 중앙아시아까지 분포된 거대 집단으로 고조선은 중앙집권체제보다는 느슨한 연맹체국가로 보아야 한다는것이 운영자의 論指 입니다.  

라서 흉노를 폄훼하는것은 漢族우월주의 史家들의 史筆장난의 결과로서 이당시 漢나라는 고조선의 연맹체인 흉노와 대치하고

위만조선과 兩지역전쟁에서 기록과 다르게 고조선부족에게 패했던것.따라서 기원전 600년전서부터 활동한 흉노는 바로 고조선,

기원전 2세기에 漢과 대치한 흉노는 고조선 해체후 분열과정을 거친 부여,고구려의 일파로 보아야 합니다.

그 일례가 지나사가들이 제시하는 고대영역지도 ...거기에선 고조선이란 말을 안하고 숙신,험윤,견융등 비속어로 유목민족을 불렀던것. 흉노의 대군장은 칸(汗)이라 함.단군왕검에 대한유목민들의 호칭은 탱글리칸 (단군칸)이었습니다.

漢나라는 이 당시만 해도 산서성 지역 바깥으로는 나오지 못했다는것이 정설입니다. 그 증거로 사마천의 史記와 반고의 漢書地理誌를 

읽어보면 위치를 알수있습니다.(운영자 주)

 

 

흉노 VS 漢, 전쟁과 평화의 300년史 유라시아 역사를 바꾸다
기원전 200년 항우 이긴 유방, 흉노족 공격했다 되레 죽을 위기 굴욕적 조약 맺고 공주·조공 바쳐..

한 무제 때 강공책 급선회 왕소군의 恨’등 숱한 고사 남겨,이릉의 화’등 비사 남긴 반세기 전쟁으로 두 제국 국력 쇠퇴 서역·

한반도까지 넘나들며 유라시아 문명교류에 큰 공헌

▲ 흉노 전사의 모습 스케치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고조선을 숙신,험윤,견융(흉노)그들의 비속어로 붙여놓았다. 얼마나 꼴보기 싫었기에...

 

 

우리는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격돌하는 초한쟁패(楚漢爭覇)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지만, 역발산의 기개세를 자랑하던 항우를

꺾고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그 당시 흉노(匈奴)라는 유목민전쟁하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온 사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위대한 한제국의 건국자가 당한 수치스러운 사건, 그것도 북방의 ‘야만인’에게당한 것이라면 알려져서 무엇이

좋았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고 그것은 엄연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 고조(高祖), 즉 유방은 천하통일의 기세를 몰아 기원전 200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방의 강호(强胡·강한 오랑캐라는 뜻) 흉노를

치러 나섰다. 마침 겨울에 큰 추위와 함께 많은 눈이 내려 병졸열 명에 두셋은 동상으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그러나 묵특이라는 이름을 가진 흉노의 선우(單于·군주의 칭호)는 짐짓 패한 척 도망치며 한나라군사를 유인하였다.

유방은 ‘32만명’의 대군을 데리고 추격에 나서 마침내 산서성 평성(平城)의 백등산(白登山)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그는

미처 주력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흉노의 정예 ‘40만 기병’에 포위되고 말았다.

 

유방은 한겨울에 일주일을 꼬박 갇혀서 식량도 떨어진 채 죽기만 기다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묵특의 부인에게 몰래 최고급 모피코트를 뇌물로 건네주었고, 이를 받은 그녀가 묵특에게 “당신이 지금 한나라 땅을

차지한다고 해서 거기서 살 것도 아니지 않소?” 라고 하며 유방을 풀어줄 것을 권유했고, 이를 받아들인 묵특은 포위망의 한쪽

귀퉁이를 열어서 그를 보내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시작된 한과 흉노 제국의 전쟁과 화평의 관계는 이후 약 300년간 지속된다.

 

이러한 내용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흉노열전’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으니, 비록 군대의 수에 다소 과장이 있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신뢰할 만한 보고이다.

포위에서 풀려난 유방은 사신보내 흉노와 ‘화친(和親)’이라는 이름의 조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것은 네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1) 만리장성을 양국의 경계로 삼는다

(2) 상호 형제관계를 맺는다

(3) 한나라 공주를 흉노 왕에게 시집보낸다

(4) 매년 흉노에게 옷감과 음식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앞의 두 항목으로 보아서 양국이 평등한 관계인 듯하지만 한나라가 흉노에게 일방적으로 공주와 물자를 바치는 형편이라서,

말이 ‘화친’이지 실제로는 불평등 조약이나 다름없었다.

그 같은 사정은유방의 미망인 여후(呂后)와 묵특 사이에서 벌어진 소위 ‘농서(弄書)’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유방이 죽은 뒤 묵특은 여후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인즉 “나는 외로운 군주로서 습한소택지에서 태어나 소와 말이 가득한

들판에서 자라났소. 여러 차례 변경에 가보았는데 중국에가서 놀고 싶은 희망이 있었소.

이제 그대도 홀로 되어 외롭게 지내고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모두 즐겁지 않고 무엇인가 즐길 것이 없는 듯하오.

그러니 각자 갖고 있는 것으로 서로의 없는것을 메워 봄이 어떻겠소?”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질이 강퍅하기로 소문난 여후는 이 편지를 받고 모욕과 수치심으로 펄펄 뛰면서즉각 전쟁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백등산의 치욕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많은 대신이 만류했고, 이에 하는 수 없이 부드러운 내용으로 묵특을 달래는

답장을 써서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 내용도 가관이어서 “폐하께서 저희 조그만 고장을 잊지 않고 글을 내려주시니 저희는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물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저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쇠하고 머리카락과 이도 빠졌으며 걸음걸이도 주체가 안됩니다.

폐하께서 누군가의 말을 잘못 들으신 듯 한데, 저와 같이 지내봐야 공연히 힘드시기만 할 것입니다.

저희 고장이 지은 죄가 없으니 널리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의 전용수레 2대에 말을 같이 붙여 보내드릴 테니 항상 타고 다니는데 쓰옵소서”라는 것이었다.

 

 

▲ 중국 전국시대 흉노의 금관 /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초상화

 

 

그러나 한제국으로서는 이처럼 치욕적인 상황을 계속해서 끌고 나갈 수 없었다.

 

더구나 서서히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아 가던 유가사상의 관점에서 천하의 중심이자 덕치의 상징인 천자야만의

군주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건국된 지 반세이상의 세월이 흐르면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에 힘입어 국력도 훨씬 더 신장되어있었다.

이러한 변화를 배경으로 기원전 140년에 즉위한 한 무제는 외교정책을 급선회하여 흉노에대한 강공책을  채택하였다.

 

전쟁의 서막은 변경의 조그만 마을 마읍(馬邑)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 한 무제는 흉노와 정면 대결을 가능하면 피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기원전 133년 선우를 마읍으로 유인하여 잡으려는 계략을 세우고 수십만의 병사를 그 부근에  배치시켰다.

그러나 계획은 들통이 나버렸고 무제는 할 수 없이 전면전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제는 위청, 공손오,공손하, 이광과 같은 장군을 일제히 장성 북방으로 출격시켰고, 이로써 한과 흉노 두 제국 사이에서

50년을 끌게 되는 전쟁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전쟁은 뚜렷한 승자도 패자도 없이 일진일퇴의 양상을 보이며 계속되었다.

그때까지 내몽골을본거지로 삼고 있던 흉노는 거듭된 한나라의 공격으로 인해 고비사막을 건너 북몽골로 근거를 옮겼다.

무제가 파견한 군대도 이들을 추격하여 북몽골 초원을 전전하였지만 확실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농민들로 충원된 보병이 주력을 이루던 한나라 군대가 기동력을 주무기로 삼는 유목민을 잡는다는 것은 역시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절망에 빠진 무제는 사신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천자가 직접 병사를 지휘하고 변경에서 기다릴 테니 만약 선우가 대항할 수 없거든 남면(南面)하고 신하를 칭하도록 하시오.

어찌해서 멀리 도망만 다니면서 북방의 춥고 물도 풀도 없는 곳에 숨어 있단 말이오?”

한 무제는 흉노를 측면에서 제압하기 위해 서역으로 진출하여 무위, 장액, 주천, 돈황 등 하서사(河西四郡)을 설치하고

동방으로는 한반도에 한사군(漢四郡)을 두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당한 패배는 참담하기 그지없었고, 조파노(趙破奴), 이릉(李陵), 이광리(李廣利)등의장군이 잇따라 흉노에

투항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연루된저 유명한 ‘이릉(李陵)의 화(禍)’는 당시의 상황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기원전 99년 장군 이릉은 보졸 5000명을 이끌고 가다가 흉노의 기병 3만명에게 졸지에 포위되고 말았다.

사방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화살을 세 번 맞은 사람은 수레에 싣고  두 번 맞은 사람은

수레를 끌며 한 번만 맞은 사람은 전투를 계속했지만, 부하를 몰살시키지 않기 위해 결국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투항 소식을 들은 무제는 불같이 화를 냈고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사마천은 이릉이 처했던 상황을 설명하며 이해를

호소했다가 오히려 무제의 분노를 사서 궁형(宮刑)을 당하고 말았다.

한나라가 자신을 배신자로 규정하고 고향에 남은 노모와 처자를 포함한 일족을 참살시켰다는 말을 전해 들은 이릉은 비통의

눈물을 흘리며 북방의 ‘이역인(異域人)’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세기에 걸쳐 계속된 전쟁은 두 강대국을 모두 피폐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기동력이 떨어지는 한나라 군대였지만 해마다 계속되는 원정군의 공격은 흉노인에게 초원의 정상적인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한나라는 매년 막대한 수의 원정군을 파견함으로써 엄청난 재정지출을 감당해야 했고 그로 인한 백성의 곤핍은 극에 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기원전 89년 무제는 “이제터는 가혹한 정치를 중지하고 지나친 세금을 걷지 말며 농사에 힘쓰도록하라”는 소위 ‘윤대

(輪臺)의 조칙’을 내림으로써 흉노와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한이 건국한 이후 흉노와 가졌던 화친과 전쟁의 역사는 원거리 외교, 인적 교류, 기술과 지식의 전파를 통해서 유라시아의

문명교류사에 큰 유산을 남기게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장건(張騫)의 서역방문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릉과

같은 ‘이역인’의 모습을 추적해 보기로 하자.  

 

먼저 ‘화번공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여인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자 그대로 ‘화번(和蕃)’즉 변방 민족과의 화평을

위해 시집 보낸 ‘공주’인데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놓고는 황제의 친딸이 보내진  적은 없고 종실의 여자를 ‘공주’라고 꾸며

보낸 것이다.

그 대표적 예가 왕소군(王昭君)이었다.

그녀는 기원전 33년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 보내져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흉노의 우익을 담당한 제후왕이 되기까지 하였으니

나름대로는 잘살았던 셈인데, 어쩐 일인지 그녀는  비운의 여인으로 여겨져 수많은 중국 문인의 심금을 울렸고 급기야 중국 4대

미인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미화’되기에 이르렀다.

한 예로 당나라 때의 시인 동방규(東方叫)는 ‘왕소군의 (昭君怨)’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저절로 옷띠가 느슨해지니

결코 허리 몸매 위함은 아닐세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오늘날 우리가 자주 쓰는 ‘춘래불사춘’이라는 말도 바로 이 시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실과는 거리먼 이처럼 왜곡된 왕소군의 이야기는 원나라 때 마치원(馬致元)이라는 작가가 쓴 ‘한궁추 (漢宮秋)’라는

희곡에서 절정을 이룬다.

 

초원의 유목민에게 시집보내진 화번공주들은 종종 천막에 살면서 이동생활을 했던 것 같다.

이는 ‘오손공주’가 남긴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녀는 한 무제가 흉노에 대항할 연맹세력을 구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오손

(烏孫)이라는 유목국가의 임금에게 시집보낸 여인인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천막을 방으로 삼고 펠트를 담장으로

여기면서, 고기를 밥으로 발효한 젖을 장으로 먹는다”고 읊었던 것이다.

화번공주들은 물론 홀몸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많은 수행원과 몸종이 따라갔는데 북방의 낯선 땅으로 가기 싫은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중항열(中行說)이라는 인물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는 화번공주의 수행원으로 강제로 끌려가면서

“내가 반드시 한나라에 화를 입히리라!”라고 했다고 한다. 사실 그는 한나라에 화를 입히위해서 흉노를  강국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흉노왕에게 문서를 기록하는 방법과 사람가축의 수를 헤아려 세금을걷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한나라와 외교서신을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문서의 형식과 내용을 바꾸어, 종래

 

‘흉노의 대선우’라는 단순칭호를 ‘하늘과 땅이 탄생시키고 해와 달이 즉위시킨 흉노의 대선우’라는 거창한타이틀로 바꾸도록

했다.

 

다시 말해 중항열은 결과적으로 중국에서 발달된 통치방식과 천자 개념까지도 흉노 국가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고대 유라시아 대륙의 동부세계는 한과 흉노가 대립하는 남북체제를 기본적인 구조로 갖고 있었다.

이 두 제국은 ‘화친’과 ‘조공’이라는 외교적 틀을 유지했다. 평화가 유지될 때에 거대한 규모의 물자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물론,

쟁에 돌입해서 서로 대치할 때에도 포로와 투항자를 매개로 한 광범위한 인적 교류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 두 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격렬한 접촉은 장성을 사이에 둔 남북 두 나라는 물론 동쪽으로는 한반도에, 서쪽으로는

서역지방에 깊고 큰 파장을 남겼던 것이다. ▒

 


 

王小君을 주제로 한 희곡 ‘한궁추’의 古事 

한나라 원제 때 흉노에 팔려간 비운의 궁녀

 
▲ 내몽골 후흐호트에 있는 왕소군 묘.

 

한나라 원제(元帝) 때에 모연수(毛延壽)라는 이름의 화공이 있었는데, 황제의 후궁이 될 만한 여인들의  모습을 그려서 궁정에

치는 일을 맡았다.

그는 뇌물을 받고 얼굴을 예쁘게 그려주곤 했는데, 가난한 농부의 딸인 왕소군이 돈을 주지 않자 그녀의  눈밑에 흉터를

그려넣었다.

 

래서 소군은 황궁에 들어온 뒤에도 총애를 얻지 못하고 홀로 지냈는데, 어느 날 밤 그녀가 비파를 타며 울적함을 달래다가

마침 뒤뜰을 거닐던 원제의 눈에 뜨여 사랑을 받게 되었다.

사실이 발각되어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한 모연수는 흉노에게 도망쳐 왕소군의 진짜 초상화를 선우에게 바치자, 절세의 미모에

놀란 그는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소군을 부인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흉노의 군사력을 당할 수 없었던 한나라는 거부하지 못하고 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원제도 애통해하며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흉노로 팔려 시집가던 도중 국경에 이르자 소군은 흑수(黑水)라는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흉노의 선우는 소군의 일편단심에 감동하여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었고, 모연수는 압송되어 한나라로 보내져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