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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2006년 홍산문명 발굴현장 이다.

설레임의 하루 2012. 3. 8. 04:58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응 흔적  글쓴이- 心濟 2006.10.20.  http://cafe.daum.net/dobulwonin/GGII/99 

 

 

 

이것이 2006년 홍산문명 발굴현장 이다.

요하문명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광활한 요하의 ‘홍산문화’가 국내 사학계에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과 함께 상고시대에 사라진 고조선과 단군의 진실을 밝혀줄 단초가 될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다.

이곳 유물은 중국이 국가적 명운을 걸고 진행중인 동북공정을 저지할 <한민족의 비기>라는 게 일부 재야학자의 주장이다.


 


홍산문화 지역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유물.

<국학원 제공>

 

기원전 3500년께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통상 청동기대에나 출현 가능한 흔적이다. 무엇보다 가면과 옥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됐다는 주장이 잇따라

이곳이 단군신화 속 곰 토템을 지닌 웅족(웅녀)과 고조선(청동기 시대) 이전 민족 원류 중 하나인 배달국(신석기 시대)이 자리했던

곳이란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청동기 문명을 갖고 이주한 환인족(부계사회)과 웅족(모계사회)의 결합을 통해 단군조선이 건국됐다는 설이다.

문제는 여지껏 이를 확증할 사료가 없다는 점.

하지만 재야학자들은 이를 대신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정황증거를 어느 정도 갖출 수 있다는 입장이다.

붉은산 인근의 후기 신석기문화


전형적인 고구려성벽의 치 이미 당시에 완성 및 제단터

 

이와 같은 주장에 불을 댕긴 대표적 학자는 우실하 항공대 교수.

 화·사상사를 통해 한민족 원류를 밝히는데 힘써온 그는 "홍산문화를 직접적으로 단군조선 원류로 거론하긴 아직 이르지만 우리

민족 정체성의 근거가 그곳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라며 조심스럽게 화두를 던졌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홍산문화 전문가도 "결국 중국은 이곳을 한민족 원류로 인정할 것”이라고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대체 홍산문화란 무엇인가.

홍산(紅山)은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의 동북방에 인접한 산의 이름. 몽골인은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데 이 역시

‘붉은 산’을 의미한다.

실제로 철 성분이 많은 바위산으로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이 붉은산 인근에서 중국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 적석총(塚) 등
삼위일체의 거대 후기 신석기문화가

발견됐다. 상식을 깨고 국가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흔적이다.

홍산문화란 명칭은 적봉시 홍산에서 비롯됐지만 이후 발견된 대규모 유적은 넓게 퍼져 있다.

요녕성, 내몽골, 하북성 경계 연산(燕山) 남북과 만리장성 일대를 포괄한다.

우 교수에 따르면 그 시작은 190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저명한 인류학자 겸 고고학자인 도리이 류조우(鳥居龍藏)가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우연찮게 많은 신석기 유적과

돌로 쌓은 묘(적석묘) 등을 발견한 것. 이것이 후대 세계를 놀라게 한 홍산문화 적석총 유적이다.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였다. 하지만 당대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중국 동북성 남부 평원을 가로지르는 길이 1400km의 요하 모습. 이 강을 중심으로 요서와 요동이 나뉜다. <국학 학술원 제공>

 

이후 20세기 초 중국에 온 프랑스 예수회 신부 에밀 리상(Emile Licent·1876~ 1952)도 22곳의 신석기 유적을 발견했지만 류조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글만 남겼다.

그러나 1920년대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중이던 고고학도 양사영(梁思永·철학자 양계초의 아들)은이 글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1930년 귀국한 양사영은 그해 겨울, 왜소한 체구로 동북지방 한파를 뚫고 적봉으로 향했다.

중국 중앙연구원 고고분과 담당자로서 내몽골 임서 일대와 흑룡강 등 동북지방에서 잇따른 신석기 유적 발견을 바탕으로 본격적

발굴작업을 계획한 것. 하지만 정세불안과 건강 악화로 발굴이 지연되다 1934년 ‘열하고고보고(熱河考古報告)’로 학계에 첫 보고를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보고서엔 "동북 4성(요녕·길림·흑룡·열하성) 발굴작업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썼다.

오늘날 동북공정의 첫 삽을 양사영이 뜬 셈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발굴은 일본인 손에 의해 이뤄졌다.

일본 고고학의 아버지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주인공. 대규모 발굴단을 끌고와 발굴을 진행했는데 만주족과 몽골족이 내몽골

동부에서 발원, 중국과 역사적으로 독립했음을 밝히는 게 목적이었다. 일본편입이 목표였다.

‘천부경’의 비밀 간직한 유적들


읍락의 돌벽과 곡식창고

 

처음 청동기 문명 발굴에 초점을 맞춘 발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시대 이전(신석기 시대)으로 옮아갔다.

신석기 주거지 31곳과 옥구슬 380여 기, 골기(骨器) 33점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광복 이후 1955년 홍산문화라 이름 붙일 당시까지도 별다른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1982년 능원현과 건평현(建平顯) 경계‘우하량(牛河梁)’에서 유물이 대거 발굴되며 세계 언론은 ‘미지의 왕국’이

등장했다고 요란을 떨었다.

일본 신문 ‘아사히’ ‘마이니치’도 ‘5000년 전 신비의 왕국이 베일을 벗었다’고 대서특필했다.발굴은 인근에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홍산문화의 특징은 새로운 신석기문화라는 것.  

황하 유역 앙소문화 등과 서로 영향을 미치며 경쟁관계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덕분에 세련된 채도문화와 거석문화, 세석기문화와

빗살무늬토기 등이 뒤섞여 있다. 무엇보다 요하지역은 만리장성 이북으로 전통적으로 이민족 역사의 장이었다.

우실하 교수는 "퉁구스계열 토착세력의 흔적으로 이를 웅족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며 "중국 측은 이를 전설의 인물 황제와 손자인

고양씨 전욱 계통 문명으로 설정해 억지로 중화문명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사실 누가 이 문명의 주인이라 단정하기보다 동북아 공동문명권의 모태문화로서 공동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럽이 에게해 문명을 그리스만의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고구려 축성방식의 원형도 발견



단군조선 건국의 밑바탕을 이룰 가능성이 농후한 홍산문화.

우 교수에 따르면 이곳에는 민족 최고 경전인 ‘천부경’의 비밀도 숨어 있다.

‘1, 3, 9, 81’을 내포한 유물이 수없이 발굴된다는 얘기다.

천제단과 무덤, 사당구조가 3층인 점, 용 모양 곡옥이 9개 한 세트를 이룬다는 점도 그렇다. 천제단구조도 그렇다.

이곳에서 발견된 천제단은 자금성의 천단과 구조가 동일한데 천단은 한족이 아닌 청나라 때

만주족이 건설한 것이다. 천단은 북방 샤머니즘 고유 사유체계인 ‘3수 분화의 세계관’을 형상화한 것으로 첫 번째 원이 9개의

대리석, 마지막 원이 81개 대리석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 원형제단도 비슷한 구조다.

이는 음양 2분법적 중국 고유 사유체계와 다르다.

무엇보다 적석총 무덤양식은 바로 고구려의 그것이다.

현재 일반인에게 유일하게 공개되는 우하량 제2지점에선 지금도 직경 20~30m에 이르는 거대한 제단과 적석총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이 때문인지 중국측도 홍산문화에 대한 관심의 끈을 늦추지 않고 있다.

1973년 장강 하류에서 앙소문화(황하문명)보다 이른 시기의 하모도문화가 발견되면서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하모도문화로

설정했지만 우하량유적(홍산문화) 발견 직후 이를 엮어 중국 3대 문화로 보고 있다.

특히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칭하며 중화문명의 새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요녕성 박물관 앞에 ‘3황5제 시대는 다민족 통일 국가를 형성하는 바탕을 이뤘다’고 적고 홍산문화를 고양씨 전욱 계통 문명으로

못박았다.

이는 동북공정의 하부공정인 웅녀공정, 고구려공정보다 진일보한 움직임이다.

주목할 점은 홍산문화 바로 위층 하가점 하층문화.

황제족(한족)의 황하문명보다 앞선 홍산문화층 위에 중국 최초 국가인 하나라보다 앞선 청동기 유물이 발견된다.

고조선의 자취를 좇는 학자들은 이를 고조선 출범과 연계시킨다.

청동기를 개발한 3000여 명 환웅세력이 웅족과 결합해 강력한 국가체제를 다진 것으로 추정하는 것.

고조선 건국연대인 기원전 2333년은 이 지역 청동기의 추정연대인 기원전 2400년 무렵과 거의 일치한다.

일단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곳이 고조선 초기 강역이었다는 점에선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다.

최근 홍산일대를 답사하고 돌아온 유임현 국학학술원 사무총장은
"일부 중국학자들은 ‘이곳 유적 중 일부를 대동강 일대에서도 봤다’

고 증언했다”며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진 않았지만 그들도 이곳이 기존 한족 문명권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또 "이곳은 중국 송대 이후에야 중국 양식의 무덤이 발견되는 고구려 비사성 자리였다”며"과연 중국의 역사 문화권인지 의심스럽다”

고 의문을 제기했다.

예로부터 중국 사서들이 외국인으로 분류했던 동이족의 원형이 이곳에 묻혀 있다는 게 유 사무총장의 해석이다.

그는 "중국측 교수가 ‘모호한 유적이 발굴되면 이전에는 그냥 덮어버리기도 했다’고 말했다”고 전해 이와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2006년 홍산의 모습

 

중국 하나라보다 앞선 청동기 유물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대목은 최근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음하 상류 ‘삼좌점 유적’. 하가점 하층문화로 추정되는 이곳의 발굴은

극비리에 이어져 올해 말 마무리될 예정이다. 유 사무총장이 국내에선 처음으로 보고 돌아와 전한 이곳 실상은 가위 충격적이다.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적석묘는 50~70㎝ 원을 중심으로 사방 20여m까지 확장될 만큼 거대해 제단과 구분되지 않는다.

완벽한 형태의 우물과 60여 채의 집터,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된 성곽은 고구려의 그것과 다름 없다.

부족회의 장소로 추정된 모임장소와 석회를 이용한 담벽 등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곡식창고와 문설주까지 완벽하게 보존돼 있는데 특히 내성 북쪽 성벽의 ‘치’가 눈길을 끈다.

성벽이 쑥 튀어나왔다 들어간 치는 적을 수비하는데 유리한 양식으로 고구려 특유의 것이라 한다.

축성방식도 초기 고구려 축성방식보다 살짝 뒤져 있다. 곳곳엔 해독되지 않은 상형문자들이 널려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진일보한 시각에 대한 기존 국내 사학계의 반응은 다소 조심스럽다.

노태돈 서울대 교수는 "객관적 사실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칫 민족적 이해가 엇갈려 극단주의로 흐를 수 있다.

개연성과 토대를 충분히 확립해야 한다”면서도 "정신사적 흐름 연구와 바른 역사인식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기존 연구로는 동북공정 못이겨”


반면 대표적 재야사학자로 분류되는 윤내현 단국대 교수는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면서도 "우리 역사학계

내부에서도 이견이 빈발하는데 어떻게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역사를 중국학자에게 이해시키겠느냐”고 질타했다.

그는 이어 "기존 사학계 연구로는 동북공정을 극복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윤 교수는 하가점 하층문화에 대해선 "독자적 문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만주와 요서·요동을 합한 공통의 문화”라며 "북경 근처

갈석산까지 고조선 영토였음을 감안하면 연관성을 추측할 수 있지만 한반도 내에서 발견되는 구석기 문화 등도 간과하면 안 된다”며

중립적 견해를 견지했다.

모두 취합해도 A4용지 한장을 넘기기 힘들다는 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기록들.
유일한 단서가 될 수 있는 유적들은 어떤 해결점을

제시할까.

한민족 기원과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비밀을 풀어주는 것은 물론 민족 정체성 확립과 남북한 통합, 나아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저지하는 가장 좋은 대처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운영자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