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상고사,홍산문화

대륙문명의 계보 紅山文化 그리고 古朝鮮

설레임의 하루 2012. 3. 8. 03:51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心濟 2006.02.07.  http://cafe.daum.net/dobulwonin/GGII/9 

 

 

 

 

대륙문명의 계보 紅山文化 그리고 古朝鮮

 

 

 

흥륭화문화-신락문화-홍산문화-하가점하층문화(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와 북신문화-대문구문화-용산문화-악석문화로

이어지는 <산동문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의 선조인 <배달한국> -> <고조선>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고 <황하상류문명>보다 빠른

이러한 문명의 주인공이 <황하상류>유역으로 가서 <황하상류 문명>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

< 홍산문화 = 밝은산 = 白山문화 > 발견의 지나사학계 내부적 파장

발해북안의 신석기문화 중 가장 주목할 문화가 <홍산문화>이며,이 <홍산문화>는 실로 엄청난 문화로 알려지고 있다.

이 문화를 발굴하므로 인해서 중국은 '황하중심문화전파론'을 지양하고 이른바 '다중심문화론'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산동반도>

에서 발견 되는 <북신문화-대문구문화-산동용산문화>가 바로 이(홍산)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까지 나오게 되었다.


또한 이 <홍산문화>가 바로 고조선 중심지였다고 우리나라에서도 공식화되고 있는 요녕(요동,요서)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북경대 중국학자 <傅斯年;1896-1950 > 이 주장하였던 <夷夏東西說>의 주인공인 夷가 바로 고조선인이거나 그 선조였다는

이론으로까지 확산될 기미가 보이고 있다.

또 우리나라 학계의 일부에서도 이 문화를 가지고 고조선이 실제로 기원전 2333년에 건국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 하기도 하였고

기존의 고조선의 중심이 평양으로 주장하는 학자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문화는 또한 한단고기를 중심으로 하여 꾸준히 강단사학계를 한반도 중심의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했던 재야사학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홍산문화는 황하문명보다도 빨리 15세기 일찍이 고대국가를 형성한 유적이 보이며 성곽이나 왕궁터 등이 발견되어 고조선이

건국 되기 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근거까지 되었다.

한단고기에서 나오는 배달국이 바로 홍산문화(B.C.4500~B.C.2500),더 나아가 홍산문화의 전신인 흥륭화문화, 신락문화(B.C.6000

~B.C.5000)를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매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홍산문화>는 요녕지역과 내몽고 동부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약 6천년 전의 신석기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된다.


<한단고기>, 사마천의 <사기>등의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약 6천년 전에 우리 민족은 청동기를 사용하였다고 보여지고 실제로

평양 등지에서 발굴된 청동기 유물을 자기공명법에 의한 검사 결과도 연대가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약 4700년전 인물인 <치우한웅>에 대하여 사마천의 <사기> 에 < 치우천왕은 구리머리에 쇠 이마였다- 銅頭鐵額 > 는

기록이 있고, 실제로 평안도 평양에서 약 5천년 전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북한에서 발표하였다

<홍산문화>는 <앙소문화>의 <채도>와 이전 단계의 < 連續鼓扇紋系土器 >와 <세석기>등을 융합하여 한 단계 발전하여 전개되었는데 

후에 이 지역 <하가점 하층문화>에 연결되고 황하유역과 산동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동이족(東夷族)'의 활동지역을 문헌상으로 보면, 하북성 동북부와 산동일대, 양자강하류 유역 등 이다.

<산동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문화유적은 <北辛文化>인데,북신문화는 7천년 전까지 소급되어 지고 황하의 磁山, <裵李岡文化>

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B.C.4500년경의 이 지역 <大紋口文化>와도 직접적인 연원관계에 있다.

<북신문화 -> 대문구문화>

<대문구문화>는 하남성 서쪽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써 '東夷系문화'로 추정되고 있고 이후의 <용산문화>에 연결된다.


<홍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방식이다.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돌판을

잘라 묘실 벽을 짜는 석관묘(石棺墓-돌널무덤)가 대능하 상류지역 요녕성 우하량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을 장례 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夏族의 경우 '은(나라)'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고 있고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역사상에서 홍산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단계인

<홍산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 이후 夫餘, 고구려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고유의 산물이기도 하다 지나의

고전이나 사서에 나오는 <황제헌원씨>와 대결을 벌였던 <치우한웅>의 세력 근거지로도 지적이 되기도 하는데 황제헌원씨와

결전을 벌이며 하북과 산동일대를 개척하여 靑丘國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마천의)[사기]에 더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 蚩尤古天子 >
[치우는 옛 천자이다]
< 蚩尤受盧山之金 而作五兵 明非庶人 >
[ 치우가 노산(盧山)의 쇠(金)으로 오병을 만들었으니 분명히 보통사람이 아니다. ]
< 九黎君號蚩尤 >
[ 구려(九黎)의 임금을 치우라 불렀다.]

또한 <홍산문화> 이후 < 하가점 하층문화> (B.C.2000~B.C.1300)가 그 지역에 보다 광범하게 확산되어 등장하는데 <홍산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 하층문화>는 바로 고조선의 문화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홍산(紅山)문화>는 <소하연(小河沿)문화>를 거쳐 <하가점 하층문화>로 연결된다는 것은 중국학계에서 거의 공식화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하연문화>에 이어지는 <하가점 하층문화>, 구체적으로 풍하(豊下)문화에서는 고조선의 건국연대보다 조금 앞서는 서기

전 2400년경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면 화살촉, 칼, 창 등도 발굴되어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다.

이 요동, 요서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 동부지역에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홍산문화의 발견은 우리나라와 지나의 고대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파장이 실로 크다.

지나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로 보았었는데 <홍산문화>를 발견한

이후로 이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의 주인공으로 <홍산문화>를 들고 있다.

즉 <홍산문화>의 주인공을 고조선이나 그 선조로 파악하였을 경우에는 지나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산동등지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된다.

또한 북신문화-대문구문화-용산문화-악석문화로 이어지는 <산동문화>와 흥륭화문화-신락문화-홍산문화-하가점하층문화

(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의 선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의 학자들도 산동문화의 주인공인 동이족이 동북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민족이었나를

밝히기를 꺼려하고 < 전백찬 > 같은 중국학자의 일부가 史籍上에 보이는 辰國(고조선)이 동이족의 중심지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볼 때 고조선으로 이어지는 고대 신석기문화 및 그 문명에 대해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지나의 동북공정의

목적은 고구려사 편입이 아니라 고조선사 편입이 최종 목적이 되고 ,고조선사의 편입의 결과는 고대삼국의 역사가 지나에 빼앗겨버리게 되고 결국 달랑 남은 고려 이후의 역사만이 한국사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사학계의 연구태도로 보아서는 高麗가 한민족 最古의 국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생기는 까닭이다.  

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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