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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왕팔발자(만발발자) 유지에 관한 고고학적 관찰

설레임의 하루 2012. 3. 8. 05:12

*출처: 근초고왕의 적통이자 미나모토 요시츠네의 후손 청림책사풍후  kjv1189.egloos.com

         글쓴이-by 킹제임스성경 2010/11/18     kjv1189.egloos.com/1939570

 

 

 

 

 

 

통화 왕팔발자(만발발자) 유지에 관한 고고학적 관찰

여명문화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길림성 통화의 ‘王八脖子’ 유적은 중국학계에 의해 발굴 정리되면서 ‘萬發撥子’ 유적으로 명칭이 확정됨.


이 글은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중국에서 발표된 자료와 고고, 민족학의 관점에서 왕팔발자 유적의 문화유존 현상 및 고구려,

부여 문화와의 관계 등에 대한 초보적 고찰임.


발표자는 이 글에서 고구려의 선세문화를 설명하기를

“이 문화를 형성하였던 역사적인 기초는 서쪽과 남쪽(산동반도)으로부터 온 華夏先民 문화의 영향을 받은 현지의 高夷(예맥) 위주의

초기 “동북이” 문화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며 여실히 고구려 이전 고조선 부여시대에 이룩된 요동지역의 문화를 그 당시

접근도 없었던 중원 땅 화하족 선민의 영향이라 확정한다. 역시 동북공정의 관점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또한 고조선 후계문화와의 관련성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천산산맥 이남의 청동기문화와 고조선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고고학적 증명이 결여된 상태임.

개인적 생각으로는, 천산 이남의 문화는 유형적으로 산동반도의 용산 또는 악석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반면, 고조선 지역은 기자의

동천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 다만, 고조선의 문화는 “殷문화”,“燕문화”와 “東夷”문화가 결합된 것으로서 그 정치

중심이 한반도 북부의 평양 일대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며 고조선 직접 관련성에 관해서는 한발을 빼고 있고, 산동반도 등지의

동이문화권, 은상문화와의 관련성 만은 긍정하면서도 고조선 중심지 재평양설만은 고수하고 있다.


몇가지 빼닥한 중화주의적 시각을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발표된 중요한 자료임을 생각하여 강호제현에게 도움이 될까하여 소개합니다.


만주 지역의 이 중요한 유지에 대한 국내 학계의 무관심을 지탄하면서 다시 한번 중요성을 환기코자 함.    


아래 글은 2001년에 국내 학회에서 발표된 길림 통화의 왕팔발자 유적에 대한 국내 논문 중 유일한 것으로 논지를 요약함.




왕면후(요령성 박물관학회 부이사장)


 

(2강<압록강 혼강>, 2하<혼하 태자하> 지역)


1. 만발발자 유지의 민족 지리학적 추단


만발발자 유적은 혼강 중․상류 지방의 독득한 특색을 가진 신석기 후기부터 청동기 및 초기 철기시대까지의 고고 유적이다.

이 유적지는 모두 7개 시기의 문화층으로 나뉘는데, 1기는 신석기시대 후기(BC4,000 ∼ 3,000년)로 전 후기로 나눠지며,

2기는 중원의 상주시대, 3기는 춘추시대, 4기는 전국시대, 서한시대, 5기는 위진시대, 6기는 명나라 시대에 견주어 짐.


분포시기는 문헌과 혼강 유역 고민족 분포지역으로 보아 2강(압록강, 혼강)과 2하(태자하, 혼하) 상류를  중심으로 한, 동북 예맥

계통의 ‘맥’족이 집중적으로 분포된 시기임.

이는 혼강 유역을 중심으로 환인, 신빈, 통화, 집안, 임강지구를 포괄한 고구려 선대의 청동기 유적이 서한 이전의 문헌에 나타나는

요동 ‘맥’의 문화유지 이기 때문임.


2, 3, 4기의 전형적인 거주지는 반움집식의 길고 둥근 유형으로 돌로 쌓은 건물에 불구덩이(火坑)와 방고래(烟道)가 구비됨.

고분형식은 대석개묘, 석개적석묘, 토갱석곽묘, 석관묘이고 후기에 들어서는 계단적석묘가 나타남.

청동기는 청동단검, 청동방추, 청동창, 청동포, 청동고리, 청동도끼임. 도기는 2기의 대족력(袋足鬲) 누공권족두(鏤孔圈足豆)를

제외하고, 3, 4, 5층에서는 도관(陶罐)이 주를 이루며 질그릇단지 고리모양 주발, 바리 등이 기본을 이룸.


3, 4, 5층은 2강 유역의 환인, 신빈, 관전, 집안, 임강 지역의 서주 춘추 서한 이전의 석관(개)묘와 청동단검을 주요 특징으로 한

청동기 문화와 같고, 고구려 선대 동북 맥족 청동기문화의 기본특징을 갖고 있음.




2. 土坑石槨墓, 石棺墓와 大石蓋墓, 大石蓋積石墓, 階壇積石墓의 공존은 혼강 중상류에  맥족과 다른 문화가 남북에서

교차되었다는 것을 반영


이곳의 고고유적은 고구려 건국 이전 2강 2하 중심의 맥족 유적이며, 부수된 문화층은 옛 예(濊)족의 유적으로 이는 이웃한 송화강

상류 ‘서단산문화’의 영향임.


4기 이후에 이르면 거주지와 묘지가 분명해지고 각각의 분포지역이 있음. 4기 고분과 3기 고분의 큰 차이점은 사람뼈를 모두

태웠다는 것. 화장묘(석실화장묘)는 전국말기부터 한 초기시대에 길림성 남부 고분에 나타난 보편적인 특징임. 적석묘, 계단적석묘는

고구려 시기의 특수한 장례습속의 반영임.


또한 대석개묘, 석관묘, 적석묘와 화장습속 등의 고분형식은 혼강 중상류의 길림성 남부뿐 아니라 압록강 부근의 혼강 하류와 혼하,

태자하 상류인 집안, 임강과 요동 산지에도 보편적으로 존재함.

예를 들어, 집안 태평향 오도령의 적석묘(1978년)의 청동단검을 부장한 정방형 계단식 묘는 3, 4기 고분의 구조와 동일하고 출토품인

동단검, 동포, 동부와 기본적으로 같음.

 

혼강 중하류, 태자하, 혼하 상류 요동지구에서 큰 고인돌(대석붕)을 이어 대석개묘, 석개적석묘, 석관묘를 위주로 한 단검이 있는

청동기시대 고분이 근래에 많이 발견됨. 대표적 장소로는 신빈현 남잡수, 영릉향 포가촌의 석관묘, 환인 사도하자향 대전자 석관묘

무덤떼, 본계 이도하자 석관묘, 봉성 서혁가보 석관묘 등임.


위의 유적들은 3기부터 나타난 대석개묘, 대석개적석묘, 초기의 方壇적석묘는 2강 2하 유역과 상응하는 시기의 석묘 및 출토한

유물들과 동일한 성질에 속하며, 이는 맥(高夷)의 유적으로 고구려 선대문화 혹은 전고구려 시기의 문화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와 공존한 토갱묘 혹은 토갱석관묘를 위주로 한 화장식은 북쪽의 송화강 중상류의 옛 예족 즉 서단산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제임.


토갱묘의 경우 3기에는 앙신곡지장(仰身曲肢葬)이 성행하고 4기는 화장의 형태임.

따라서 3기 전의 토갱묘와 토갱석관묘를 대표로 한 仰身曲肢, 화장습속의 적음,

소량의 삼족도기 등등 초기 고분의 형태는 주로 중원의 춘추전국 전에 해당하는 송화강 유역 예족(서단산문화)의 영향이 반영된

것임. 그러나 4기와 그 전인 춘추전국 한나라 초기에 해당하는 석개묘, 적석묘의 방식은 고구려 초기 유적에 해당하며, 엄밀하게

말하면 고구려 건국 전의 맥족의 유적임.




3. 만발발자의 도기는 맥족계 위주이고 예족계가 가미된 특징을 갖는다.

 

3, 4, 5기의 도기(陶器)의 주요 특징으로는

첫째, 도질은 협사조갈도(夾沙粗褐陶)가 전형적임.

둘째, 조형은 통형관(筒形罐)을 위주로 함. 관(罐 항아리)은 다수가 평저이고 豆는 高足이 있음. 50년대 발굴에서는 환상이(環狀耳)와

교이(橋耳), 특히 수이관(竪耳罐)과 단파배(單把杯)가 있는데 오녀산성의 초기유물에서도 발견됨.

셋째, 도기제작법은 니조접축법(泥條接筑法) 혹은 반축법(盤筑法) 위주로 요동지역 청동기시기의 비교적 원시적인 도기예술 특징을

구비함.

넷째, 도기의 태질은 두텁고 조잡하여 대부분 소도성이 낮음. 무늬는 지자문(之), 인자문(人) 혹은 새긴 인자문, 망문(網), 기하문을

새긴 것이 제일 많음.

      

만발발자 2기(商周시기)에서 발견된 삼족격(력)(三足鬲)은 이 지역이 청동시기 ‘맥’계의 협사갈도 평저 수제도(水制陶)가 통치적

지위를 받기 전에 북쪽에 이웃한 ‘서단산문화’ 도예의 모종의 영향과 전파를 받은 것이고, 제2기에 삼족각이 존재하고 3기 이후에는

대량의 협사갈도 평저 다이기(多耳器)가 존재하는 데 이것은 대석개묘, 적석묘, 토갱석관묘가 공존하는 현상과 마찬가지임.

민족학적으로 맥족이 주체이고 송화강 유역 예족 문화의 받은 청동문화를 특징으로 함.


천산산맥 남쪽의 여대지구는 산동 용산문화와 그 후의 ‘동이 악석문화’의 영향을 받아 삼족기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중원문화

영향이 미친 결과임. 천산 북쪽의 2강 2하 유역은 전형적인 토착 ‘맥’계 문화지구임. 만발발자 유지에서 출토한 초기 삼족기와

천산산맥 이남 여대지구의 삼족기는 공통으로 ‘서단산문화’의 모종 영향을 갖추고 있음.




4. 만발발자의 환산위구(環山圍溝)는 혼강유역에서 고구려 초기 산성이 나타나기 전의 맥족 씨족취락의 대표적 유형이다.


만발발자 유지 4기의 환산위구는 중요한 유지로, 오늘까지 2강 2하 상류를 중심으로 한 ‘고구려 선대’ 청동기 문화구에서 고인돌

(石棚), 대석개묘, 적석묘, 석관묘를 위주로 한 무덤과 거주지는 대량으로 발견됐지만 명확한 ‘위호(圍壕-해자)’ 혹은 ‘위원(圍垣-담)’

유지가 있는 중심 취락지는 별로 발견되지 못함. 이런 유형은 1962 집안 장천에서 발견한 ‘대석원’ 뿐이었다.


혼강과 압록강 유역에 건립한 초기 고구려 민족정권은 그 부족의 기초가 선진시대 요동맥(高夷)의 조기 씨족취락을 바탕으로

발전해왔다고 함.


만발발자와 장천의 유지를 분석하면, 고구려 건국 초기 2강유역에 분포된 초기 맥족 씨족취락의 기본 형태는 강 골짜기 높은

대지위에 세운 ‘환산위구’와 ‘석원취락’을 주요 형식으로 한 거주지 임. 이런 씨족 취락은 서한 중기 고구려가 나라를 세운 뒤

‘성읍취락(주로 산성)의 직접적인 기원임.


서한 전 청동기 요동 ‘맥’족은 씨족부락이 위주이고 사회발전은 아직 도시건축단계에 진입하지 못하였다.

이점은 2강 유역의 고고발견과 선진문헌에도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맹자 告子 下에 ‘夫*(貊)은 오곡을 심지 않고 기장을

심어 먹는다. 성곽, 궁실, 절간, 제사 등이 없었다.

’ 여씨춘추에도 ‘이맥 마을에는 .... 왕이 없는 곳이 많다.’ 한 고수 주에 ‘동방 민족은 이 없다’고 쓰여 있음.


위 문헌들이 증명하기를 ‘고구려 선대’가 거주한 혼강, 압록강 일대의 옛 ‘맥’족과 ‘예’족은 전부 동기와 석기를 함께 사용하고 ‘성곽,

궁실이 없는’ 씨족취락 시기에 머물러 있었고 도시국가에 진입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바로 만발발자 유지의 제3시기 ‘환산위구’ 유적이 반영한 고구려 건국 전 혼하의 실제사회 상황임.

주몽의 건국 이전에 이미 옛 구려국 하나가 존재하였다는 논리는 문헌근거와 고고학적 증명이 부족한 것임.

 

 

 (비교 적봉 영금하 음하 유역 인근 삼좌점 석성)

 

 

5. 2강 2하 상류 ‘고구려 선대문화’의 발굴과 연구를 중시해야 한다.


적석묘등을 위주로 하고 화장습속을 동반한 협사조갈도 계의 청동문화는 근년에 이르러 환인 오녀산성, 통화의 만발발자와 집안 장천

등 여러 곳에서 ‘전 고구려 시기’ 고고유적이 연속해서 발견됨에 따라 점차 인정되고 있음.


이지역의 청동기 고고문화는 천산산맥 남쪽의 여대지구, 합달령지구, 용강산맥 북쪽 송화강 상류의 ‘서단산문화’가 모두 선진

‘동이’문화 계통에 속하지만 깊숙한 문화 내함을 보면 비교적 큰 차이가 존재한다.



이 청동문화는 몇 가지에서 국내외의 주목을 끈다. 즉,


(1) 2강 2하 상류를 준심으로 한 청동문화는 고대 문헌에 기록된 ‘대수맥’, ‘소수맥’, ‘양맥’과 지역적으로 부합하며, 문화적으로 선후

계승관계를 가지고 있음. 시대는 商周로부터 춘추, 전국, 서한 이전의 청동시대 발전기를 경과하였음. 유적상 전기는 동석병용이고,

후기는 요동식 청동단검과 마제석검, 돌촉, 석관묘를 대표로 한 비교적 발달한 청동문화임.


(2) 도기 동기와 장례습속을 볼 때 토착문화의 성질이 뚜렷함. 고인돌, 적석묘에서 발전한 대석개묘, 석개적석묘, 적석을 덮개로 한

초기 석관묘와 석실묘, 협사갈도를 위주로 하고 삼족기 없는 평저 다이비문과(多耳篦紋罐)과 주전자, 장법과적석묘가 공존하는

화장습속 및 독특한 요동 ‘맥계’ 청동단검, 쌍공석도(雙孔石刀) 등임.


(3)  2강 2하 유역의 ‘환산위구’와 ‘석원취락’은 고구려가 공식적으로 산성을 수축하기 전, 이 지역 초기 예맥부족(맥족 위주)이 산에서

거주하는 “씨족부락”에서 정식 산성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식 또는 원형임. 요서 “하가점하층문화”의 부족 가운데 예를 들면

 대전자(大甸子), 사분지(四分地), 적봉 동산저(東山咀) 같은 유지에서 이미 분산된 “환호취락”과 집중적인 초기 산성이 동시

존재하는 현상이 많이 발견됐음.     




다음은 이 논문발표에 따른 동국대 윤명철교수의 질문에 왕면후가 답한 내용임.


1. 6,000년 ∼ 5,000년 전의 문화유적은 의미가 있다. 이 지역이 초기부터 문화가 발달하게 된 자연적, 역사적 토대는

무엇인가?


답) 요동 2강 유역에서 신석기 말기(약 5,000년전)에서 청동기에 이르는 유적지가 발견된 것은 뚜렷한 지역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문화를 형성하였던 역사적인 기초는 서쪽과 남쪽(산동반도)으로부터 온 화하선민 문화의 영향을 받은 현지의 高夷(예맥) 위주의

초기 “동북이” 문화인 것으로 여겨진다.


2. 이 지역 신석기 청동기 철기, 각각의 문화층은 전단계 문화층과 어떤 정도의 계승성을 지니고 있는가?

또한 담당 주민의 종족적 계승성이 있는가?


답) 이 유적들은 지층으로 보았을 때, 뚜렷한 전후 계승과 교대관계가 발견되지만, 민족문화의 계승성 관점에서는 단순한 계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유적의 지층에 나타나는 濊 1 2기는 주로 서단산문화(예)의 영향이 많은 편이지만 주류를 이루고 있는 3, 4, 5기

이후는 요동(맥)족 고문화 요소가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았는데, 이것이 ‘고구려 선세문화’이다.


3. 이 지역 발굴을 통해 제4기 층이 소위 2강 2하 주변지역을 독득한 하나의 문화권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고구려의

토대단계(先世)로 설정하려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고구려와는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는가?


답) 만발발자 3, 4기는 시대적으로 적어도 이미 “고구려 선세”문화에 진입한 것으로 보임.

이 문화에 나타나는 적석묘, 협사 갈색토기, 화장풍습 등이 고구려가 현토군에 건국한 뒤에도 지속적으로 계승과 발전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승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음.   


4. 이 유지는 그 주변지역 문화(발표자의 견해대로라면 완달산맥 이동)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함. 그렇다면,

1) 고구려 건국 직전에 이 지역에서 발전했던 문화단계는 어느정도 인가?


답) 고구려 건국 이전, 이 지역의 문화단계는 예맥계통의 東夷민족의 “씨족단계”임.


2) 일정 능력을 갖춘 정치세력 이었나? 그것이 본문의 언급처럼 씨족이란 표현을 쓸 수 있나?


답) 이 지역의 씨족취락은 상당한 정치세력을 보유한 씨족사회 중에서도 비교적 높은 단계임. 그 표현형식이 ‘환산위호’,

‘석원촌락’으로 나타나는데, 문명국가 단계로는 진입하지 못 함.


3) 천산산맥 이남의 문화 혹은 고조선과의 연관성은 어느 정도인가?


답) 천산산맥 이남의 청동기문화와 고조선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고고학적 증명이 결여된 상태임.

개인적 생각으로는, 천산 이남의 문화는 유형적으로 산동반도의 용산 또는 악석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반면, 고조선 지역은 기자의

동천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 다만, 고조선의 문화는 “殷문화”,“燕문화”와 “東夷”문화가 결합된 것으로서 그 정치

중심이 한반도 북부의 평양 일대였던 것은 분명함.   


5. 맥쪽계 위주에 예족계가 겸해졌다고 했다. 특히 삼족기 등의 비교를 통해 송화강변의 예족문화가 영향을 주었다 함.

1) 예와 맥의 구분이 지역적 차이, 문화적 차이를 근거로 한 것인가? 아니면 종족적 차이, 정치적 차이를 근거로 한 것인가?

2) 이런 문화의 습합현상은 고주몽의 남천과 관련되나?

문헌 중 고구려의 출자를 부여로 한 관점은 고고학적 의의가 부족하다고 했다. 그런데 습학을 계속 언급하고 있음.


답) 예와 맥의 문화비교를 아래 두가지로 지적코자 함.

① 예와 맥은 동북지역의 가장 이른 시기의 “동이”계통 민족으로서 문화적으로 상관관계와 상이점이 있음.

지역적으로 예는 강 하천을 낀 북부에 거주, 맥은 주로 산이 있는 남쪽과 서쪽에 거주함. 문화적으로 묘장의 형태에 있어 예족계는

竪穴土坑石棺묘가 주류이고, 남부 맥계는 적석묘와 석개묘 위주로 차이가 뚜렷함. 다만 사회형태와 풍습문화는 공통적 전통이 있음.


② 주몽의 남천은 예 지역인 “북부여”에서 맥 지역인 “졸본천”으로 남천한 것이기 때문에 고구려 문화는 예와 맥 문화를 겸하는

이중적 특징임. 다만 고구려 문화의 주체 족원은 2강 유역의 맥족임.


6. 환산위구, 석원취락이 발전하여 산성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답) 설명한 고구려 산성은 환산위구와 석원취락이 발전헌 것으로, 주로 부족사회의 발전단계와 정도의 관점에서 설명한 것임.

환(산위)호를 보유한 씨족취락이 ‘성읍’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중국과 세계의 많은 민족에게 보편적인 현상임.

다만, 2강 유역의 예맥 환산위호가 고구려의 초기 산성으로 발전해 나간 것은 매우 뚜렷한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하겠음.(끝)



참고논문 : 왕면후, ‘통화 만발발자 유지에 관한 고고학적 관찰’, 고구려연구12집,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