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혁거세 모자,부여를 떠나 동해을 따라 진한으로 망명하다
[한단고기]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사로(斯盧)의 시왕(始王:혁거세)은 선도산(仙桃山)성모(1)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夫餘) 제실(帝室)의 딸 파소(婆蘇)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수(嫩水)(2)로부터 도망쳐 동옥저(東沃沮)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辰韓)의 내을촌(奈乙村)에 와 닿았다.
이 때에 소벌도리(蘇伐都利)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다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 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는지라, 진한 6부(3)의 사람들이 존경하여 거세칸(居世干)(4)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徐羅伐)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辰韓)으로 하고, 또한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1) 선도산(仙桃山) 성모 : 제사장으로 현대의 무당
2) 눈수(嫩水) : 만주 흑룡강성의 가운데를 세로 흐리는 강
3) 진한 6부: 이곳은 오래전부터 조선의 유민으로 여섯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알천양산촌, 돌산고허촌, 취산진지촌, 무산대수촌, 금산가리촌, 명산산고야촌으로 후에 진한 6부가 된다.
4)거세칸(居世干) : 진한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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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면 흑룡강 지역의 부여 황실의 공주(파소) 출신으로 선도산 여사제가 있었는데(그래서 사로국을 신국이라 함), 혼전임신을 하여 부여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니 부여를 떠나 동옥저를 거쳐 배를 타고 동해를 따라 진한6촌이 있는 경주지역으로 들어와 아이을 낳자, 소벌도리가 길렀고, 아이가 크자 부여황실의 아이임으로 6촌장들이 모여 진한6촌의 왕으로 세우고 도읍을 경주로 정하고 사로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다.
정말 명쾌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출생의 비밀을 기록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박혁거세의 불편한 출생의 비밀을 신라사관들은 신화적 기법으로 감춰 미화하여 신화한 것이다.
3신 1체 사상을 가진 단군조선(부여)의 세발 청동솥-발해만 연안 출토
단군3조선 연방이후 한반도 남한에 세운 마한중심의 3한체제
[삼국사기-신라본기-박혁거세왕 편]박혁거세에 이르러 마한에 바치는 조공을 끊다.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했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 나라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소.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이와 같은가요?"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에 두 분의 성인이 출현하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천시가 조화를 이루어, 창고가 가득 차고, 백성들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한의 유민들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두려워하고 심복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임금이 겸손하여 저를 보내 귀국을 예방하게 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지나친 예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크게 성을 내고 무력으로 위협하시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匏公)이라고 불렀다.
39년, 마한왕이 붕어하였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말했다.
"
왕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재난을 우리의 행복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행위이다."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곧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끝]
'신라'라는 공식국호를 정한 시기는 4세기 고구려와 전쟁 중에 북부전선에서 고국원태왕의 동생 고무가 지휘하는 고구려에 크게 패하여 동해안을 타고 들어 와 김알지 김씨로 개명하고 사로국을 무너뜨리고 김씨왕조를 세운 모용선비왕족의 지증왕 시기다. 그리고 김씨왕조를 신화적 기법으로 석탈해 왕조와 연결시키는 족보만들기는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한 진흥왕 시기라 할 것이다.
사로국 석탈해 왕조를 무너뜨리고 신라 김씨왕조를 세운 오리지날 기마족의 모습(매부리코의 투르크계 선비족)
2세기이후 한나라와 연합하여 초원에서 흉노족을 궤멸,분열시키고 초원의 주인으로 등장하여 지나대륙에서 5호16국 시대를 열었던 선비족은 흉노족을 대거 흡수하여 흉노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경주지역의 거대한 적석목곽분의 주인 또한 흉노족을 흡수한 모용선비족이라 할 것이다.
경주지역 신라고분 고령지역 가야 고분
모용선비족이 동해안을 타고 영남지역으로 유입된 시기인 400년대 들어 크게 발전한 가야의 거대 고분도 신라권력에서 소외되어 가야의 지배세력이 된 모용선비족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래서 경주.가야 고분에서 초원세력의 유물들이 출토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윤복현 분석정리
고구려에 붙은 신라와 백제에 붙은 가야가 대립하고 전쟁하게 된 배경은 신라권력에서 소외된 모용선비족이 가야지배세력이 되었기 때문에 가야가 신라와 패권다툼을 했다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라가 의지한 고구려와 가야가 의지한 백제와 전쟁에서 결국 백제가 고구려에 패배함으로써 백제연방에 속했던 가야까지 멸망당하는 비운을 맞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가야세력 또한 멸망 후에 백제와 마찬가지로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해 갔다.
[고고학 자료]초원문화의 특징을 가진 신라와 가야 기마유물들

도르릭나르스 흉노무덤군은 러시아와 프랑스팀에 의해 발굴조사된 노용-올(Noyon-Uul, 북몽골 최대 흉노고분군) 무덤군이나 골-모드(Gol-Mod, 중부몽골 최대 흉노고분군) 무덤군과 함께 흉노문화의 성격을 밝힐 수 있는 중요 유적으로 전세계의 흉노 고고학자들이 발굴결과에 초미의 관심을 갖고 있는 유적이다. 도르릭나르스에서 나타나는 흉노무덤의 형태는 묘도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으며, 가장 큰 무덤은 24×21m의 묘광에 30m의 묘도가 달린 것(추정깊이 20m이상)이다.
[도르릭나르스 4호 무덤 출토] 청동솥[銅鍑] =신라 기마상의 청동솥과 동일한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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