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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광개토태왕비][중원고구려비]신라는100여년간 고구려 식민지

설레임의 하루 2012. 2. 13. 00:18

 

 

[광개토태왕비문]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從 男居城至 新羅城 倭滿其中 官兵方至 倭賊退□來 背急追至任那加羅從 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拔 昔新羅寐錦未有身來朝□開土境好太□□新羅寐錦□□僕勾□□□□朝貢

해석-"영락10년 庚子(경자)에 敎書(교서)를 내려 騎馬步兵(기마보병) 5만 명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기로 하고 신라의 男居城(남거성)까지 쫓아 갔더니 신라성에 倭兵(왜병)이 가득차 있었다. 관병이 그 성중에 도착하자 왜적들은 후퇴하기에 황급히 달아나는 적을 등 뒤까지 바짝 추격하여 任那加羅(임나가라:대마도)까지 쫓아가 항복시키고, 安羅人(안라인)으로 하여금 군대를 관리하게 하였다.신라왕(매금)은 지금까지 몸소 조공을 바치는 일이 없었는데,광개토태왕께서 신라왕으로 하여금 조공朝貢을 바치게 되었다. "

 

 

 

 

 


 

[삼국사기]기록을 보면 법흥왕이 법령공포.사병철폐.국가재정을 축내는 황금장식 금지.무덤규모 축소 등 중앙집권국가를 실현하기 전까지 신라는 왜와 고구려에 인질을 보낼 정도로 왜.백제.가야의 공격에 시달리는 허약한 국가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구려에 의존하여 백제와 왜와 가야의 공격을 막고 광개토태왕의 백제.왜.가야 정벌로 장수태왕 시기까지 100여년간 고구려의 군대가 경주에 주둔하는  속국으로 살아야 했다.경주에서 출토된 제사용 청동솥이 그 증거다.

 


삼국사기 3권 신라본기 18.실성 이사금

 

18대 실성 이사금 (實聖尼師今  402~417  재위기간 15)

실성 이사금 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알지의 후손이며, 대서지 이찬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리부인['' ''라고도 한다.]은 석등보 아간의 딸이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다. 실성은 키가 7 5촌이요, 총명하여 미래를 예견하는 식견이 있었다. 내물이 붕어하였으나 그의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원년 3,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

2년 봄 정월,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임명하고, 군사와 정치에 관한 일을 맡겼다.
가을 7,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3년 봄 2, 왕이 직접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4년 여름 4,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왕이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 남쪽에서 요격하였으며, 다시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3백여 명을 죽였다.

5년 가을 7, 서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겨울 10,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
11
, 얼음이 얼지 않았다.

6년 봄 3월에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략하고, 여름 6월에 다시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1백 명을 잡아갔다.

7년 봄 2, 왕은,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하여 우리 나라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공격해오기 전에 먼저 정병을 뽑아 그들의 군사 시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했다.
"
저는 '병기란 흉물스런 도구요, 전쟁이란 위험한 일이다'라고 들었습니다. 황차 큰 바다를 건너 타국을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이보다 더할 것입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니, 차라리 험난한 지형을 찾아 요새를 설치하였다가, 적이 올 때 이를 막아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에게 유리할 때 나가서 사로잡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내가 남을 끌어 당길지언정 남에게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니 책략 중에는 상책입니다
."
왕이 이 의견을 따랐다.

11,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삼국사기 3권 신라본기 19.눌지 마립간

19대 눌지 마립간 (訥祗 麻立干  417~458  재위기간 41)

눌지 마립간[김 대문은 "'마립'은 방언으로는 '말뚝'인데, 말뚝은 곧 함조를 뜻한다. 이는 직위에 따라 놓는 것이니 즉, 왕 말뚝이 중심이 되고 신하 말뚝은 그 아래에 나열한다. 이를 빌어와 왕의 명칭으로 삼았다"라고 말했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내물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보반부인[내례길포라고도 한다.]이며, 미추왕의 딸이다. 왕비는 실성왕의 딸이다.

내물왕 37년에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는데,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고나서 내물이 자기를 외국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망하였다. 그는 내물의 아들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원한을 풀고자 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 고구려에 있을 때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을 불러와 은밀히 그에게 "눌지를 보거든 죽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눌지를 가게하여 도중에서 그와 마주치도록 하였다. 고구려 사람이 눌지를 보니 외모가 쾌활하고 정신이 고상하여 군자의 기풍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그대의 국왕이 나로 하여금 그대를 죽이도록 하였으나 이제 그대를 보니 차마 죽일 수 없다"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눌지가 이를 원망하여 도리어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 마을 입구에 서있는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중원고구려비는, 장수태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그 기념으로 세웠을 것으로 추측되며, 고구려가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한 눈에도 광개토태왕비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이 석비의 높이는 2m3cm, 너비는 55cm으로 형태는 석주형(石柱形)이며 자연석을 각자면(刻字面)을 간 다음 비문을 새겼다.

비문의 한 글자의 크기는 대략 3~5cm정도이며, 사면에 새겨진 글자의 총 수는 730여 자로 추정되고, 판독 가능한 글자는 270여 자 정도이지만, 광개토태왕의 비문의 내용 중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이어서 조공을 바쳐 왔었다(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를 증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비문의 내용은 광개토호태왕비의 나와 있는 하평양에 대한 기록, ‘백잔위서 여왜화통 왕순하평양(白殘緯誓 與倭和通 王巡下平壤)’을 뒷받침 한다. 하평양은 지금의 북한 평양성임이 증명된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 비의 건립시점을 광개토태왕비가 세워진 50여 년 후인 장수왕 69년(481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냥 선돌이라고 불렀고 그에 따라 마을 이름도 입석(立石) 부락이었다.

마을 어귀에 강물을 굽어보는 요지에 2m가 넘는 선돌이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비석을 마을 지키는 수호석으로 생각하고, 소중하게 여겨 수시로 찾아와 치성을 드리기도 했다.


천년이 넘는 세월의 풍상으로 비의 겉면에 끼어 있는 이끼가 비문을 가리고 있었음으로, 그 누구도 이 비가 고구려비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마을의 경계표시를 위해 세워둔 비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게 마련인가. 이 비의 비밀이 밝혀진 것은 역사의식이 투철한 충주의 문화재 애호인들의 모임인 ‘예성동호인’에서 시작되었다.

역사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 작은 모임의 관심이 없었으면, 아마 중원 고구려비는 아직도 그렇게 선돌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이 모임에서는, 이 비에 관심을 갖고 조사를 했으나 비면에 새겨진 글자를 판독을 할 수가 없어서, 단순한 백비로 생각을 하고 넘어 갔었다.


그러던 것이 회원 중 ‘충주 북여중의 역사교사였던 장준식’ 의해서, 드디어 이 비는 천년이 넘는 세월의 베일을 벗는다.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을 공부하던 그는, 이 비에 대해서 당시 단국대 박물관장이었던 정영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마침내 1979년 4월 8일 그 천년이 넘는 역사가 오늘에 드러나게 된다.


정영호를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은 석비 앞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이틀 동안 비문에 낀 이끼를 벗겨낸 후 조심스럽게 탁본을 시작한다. 이 비를 본 교수단들은 분명 “고구려비일 것이다”라는 의견을 나누면서 탁본과정을 숨죽이며 지켜본다.


이윽고 1차 탁본에서 ‘前部大使者’ ‘節敎賜’ ‘諸位上下’ ‘十二月甘三’ ‘募人三白新羅土內幢主下部授位使者’ ‘蓋盧供○募人新羅土內衆人’ 등의 글귀가 전면(前面)에서 나타났고, 좌측면에서는 ‘辛酉年’ ‘大王國土’ ‘東夷寐錦王’ ‘共軍至于’ ‘古牟婁城守事下部’ 등의 명문이 뚜렷하였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정단장이나 교수단은 순간 숨이 멎었다. 바로 ‘광개토호태왕비문’의 ‘고모루성(古牟婁城)’에 대한 부분과 고구려의 관직명인 ‘전부대사자 제위(前部大使者 諸位)’ ‘하부사자(下部使者)’ 등이 선명하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나타난 탁본의 글귀로, 이 땅에서의 고구려비가 처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감격은 가슴을 터지게 했으나,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음 작업을 초초하게 기다렸다.


바로 석비 서두 부분의 이끼가 너무 심하여 탁본에서 나타난 ‘○○대왕’이 누구인지와 ‘고구려’라는 명문(銘文)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끓인 물을 심하게 낀 이끼위에다 부운 후, 불린 이끼부위를 30분 간 손톱으로 한 획 한 획 긁으니 ‘고려대왕’이라고 선명하게 나타났고, 탁본을 지휘한 정단장은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중원고구려비는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이 땅에서 발견된 최초의 고구려비며, ‘광개토호태왕비’의 발견에 비견될 수 있는 최대의 발견이었다.


1979년 6월 12일자〈한국일보〉의 중원고구려비에 대한 보도내용이다.『당대의 학자 100여 명은 단국대에서 중원고구려비에 관한 첫 학술회의를 열고 해방 후 최대 수확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고구려 석비의 신비를 풀어 나갔다.』(중략)


전면의 비문은 거의 모두 판독되었는데 그중 중요한 부분은 서두로 다음과 같다.


"고려건흥 4년 5월중(高麗建興 四年 五月中) 고려대왕조왕(高麗大王祖王) 령환신라매금야(令還新羅寐錦也) 세위원여형여제(世爲願如兄如弟) 상하상지수천(上下相知守天) 동이지매금기태자공(東夷之寐錦忌太子共)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


중원고구려비문을 통하여 천자국을 내세우며 '건흥'(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기 전에 편찬된 '한단고기' 기록과 일치)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던 고구려의 공식국호는 한자로 고려(고리)이며, 광개토태왕을 제외하고 고구려 왕의 공식칭호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대왕이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도 중앙집권국가를 실현한 법흥왕 이후부터 대왕이란 칭호를 사용했다.그리고 장수대왕 당시 신라지역에 고구려군이 주둔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광개토태왕에서 장수대왕에 이르기까지 100여년 고구려의 속국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건흥 4년 5월에 고구려대왕(文咨王)의 조왕(장수왕)이 신라의 자비왕(慈悲王)을 돌려 보낼 때 대대로 형제와 같이 지내기를 원하고, 상하(上下)가 수천(守天 : 하늘의 도리)할 것을 서로 약속해야 한다는 말에, 동이의 매금(寐錦 : 신라왕)이 공손히 응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전부(前府 : 소속부명) 대사자(大使者 : 직명) 등과 주부(主簿 : 직명) 등에게 명하여 신라 경내에서 300인을 모집케 하였더니, 고구려의 당주(幢主 : 고구려의 무관직)로서 그 하부의 사자로 있던 자가 백제왕 개로(蓋盧 : 蓋鹵)와 서로 공모하고 신라 경내에서 사람들을 모집 동원하였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광개토태왕 능비에 나온 문자들이 그대로 이 석비에 나오고 있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고구려왕이 신라왕을 ‘매금’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매금’이라 함은 문자 그대로 ‘잠자리’라는 뜻으로 상대를 낮춰 부르는 용어인데, 한술 더 떠 동쪽의 오랑캐(東夷) ‘매금’이라며 분명히 문자로 못 박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문 서두에서 보이듯 고구려왕은 형(兄)으로, 신라왕은 아우로, 상하를 분명하게 구분 명기하였다.

결국 중원 고구려비에서 나타난 사실은 오랫동안 신라군의 영내에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일본서기〉에서도 ‘웅략(雄略) 8년, 즉 장수왕 52년(464년)이 정병 100인을 보내어 신라를 지키도록 하였다.’ (중략) ‘고구려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내의 유성(流城)에 주둔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고구려가 근 100년이 넘도록 신라를 점령하고 신라의 모든 부분에서 직.간접적으로 통제를 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보여 진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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