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의 정벌로
광개토태왕이 전연을 정벌하기 전에 난하동쪽지역이 전연의 영역이고 발해만이 고구려 영해인데
백제의 관미성을 지나해역에다 비정하는 자들이 있다. 당시 각 나라의 영역과 정세도 이해못한 논리다.
당시 백제 한성이 서해로 나가는 한강지역이라는 사실만 알면 관미성이 교동도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광개토태왕 편]재위 9년 겨울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둘러 싸여 있었다. 왕이 일곱 방면으로 군사를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 만에 점령하였다.
2년 가을 8월,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하자, 장수에게 명령하여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평양(북한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3년 가을 7월, 백제가 침략하였다. 왕은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그들을 쳤다. 남은 적들이 밤에 달아났다.
8월, 남쪽 지역에 일곱 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침범에 대비하였다.
4년 가을 8월, 왕이 패수(=대동강/난하지역에도 위만이 건너 온 패수가 있다)에서 백제와 싸웠다. 왕은 그들을 대패시키고, 8천여 명을 생포하거나 목베었다.
[자료]고구려는 해군강국
충무공 이순신 이전에
일세의 여걸 연수영의 최후에 관해서는 오고성에서 발굴된 비석이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개화(開化) 12년 신해 8월 태대형 연정토, 을상 선도해, 대신 계진 등이 태대사자 연수영이
모반을 도모한다고 참소하니 태왕도 연수영이 다른 뜻을 품었다고 의심했다. 태왕이 고심하다가
연수영을 파면했다. 풍문에는 연수영이 반역을 꾀했다는 참소로 사사됐다고도 하고, 전리로 방출돼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다. 나라사람들은 연수영의 무죄를 믿었기에 이를 매우 통탄했다.… "
연수영이 처음 성주로 부임해 수군을 양성한 요동반도 남해안 석성 유적.
우리 역사에는 여왕도 있었다. 또 여왕에 못지않게 권력을 휘두른 태후와 왕비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남자들 못지않게 맹렬히 활약한 여장부도 많았다.
그러면 여성 장군도 있었을까? 대답은 ‘그렇다’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따르면 가야시대에는 여성으로만 구성된 여군부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가야시대 고분에서 투구와 갑옷을 입고 무장한 상태의 여성 시신이 발굴됨에 따라 이를 근거로 여성 군사지휘관의 존재를 추정하게 된 것이다.
추모성왕 고추모을 도와 고구려를 세우고 나중에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망명해 새 나라를 세운 한성백제(=십제/광개토태왕비문에서 백잔으로 비하표현) 소서노(召西努)도 여자의 몸으로 군사를 거느렸으며, 때로는 전투에 앞장섰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정규군 장수도 있었을까? 있었다. 고구려의 연수영(淵秀英)이 바로 그렇다. 그녀는 정규군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1300여 년 전에 당나라 해군을 모두 전멸시켜 버린 고구려 최고의 해군 총사령관이었다. 연수영은 다름 아닌 당시 고구려의 최고 집권자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누이 동생이었다. 비록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고구려 말기 해군기지가 있던 발해만의 비사성과 석성 등지에서 연수영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비석이 발굴된 것은 근래. 비록 금석문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고구려 말기에 연수영이란 여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요녕성 청석관 유적에서 연수영에 관한 비문을 처음 발굴한 사람은 1940년대에 개주 현장을 지낸 신광서라고 하며, 우리나라 학자로는 1995년에 건안성과 청석관 일대 연수영의 유적을 답사하고 비석의 사본 일부를 구해 온 고구려사 연구가인 한민족역사연구소 김금중(錦中) 소장으로 알려졌다. 이어서 당시 고구려연구회 이사장인 서경대 서길수(徐吉洙) 교수, 고구려 해양사를 연구한 동국대 윤명철(尹明喆) 교수 등이 현장을 답사했는데, 현장에 서 있는 것은 지나국 측에 의해 새로 세워진 안내판에 불과했다고 한다. 내용도 하나같이 이러저러한 전설이 있다는 식이었다.
연수영이란 존재를 우리 학계가 주목한 것은 2003년에 지나국이 청석관 유적지를 유네스코에 등록한 것이 계기였다. 그 동안 국내에선 연수영 관련 비문 발굴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유네스코 등록을 계기로 비로소 공론화한 것이다. 현지 전설이나 비문에 고구려와 당의 해전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심지어는 연수영의 사당까지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학계는 아직도 연수영의 존재를 우리나라와 지나국의 그 어떤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연수영 관련 유적은 현재 중국의 해군기지가 됐고, 비문 등도 지나국정부에서 기밀로 엄중하게 관리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접근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한편, 지나국의 야사인 ‘서곽잡록’과 ‘비망열기’라는 책에도 연수영의 전설이 실려 있다. 연수영의 이름이 연소정 또는 개수영으로 나오는 자료도 있다. 하지만 사서에 나오지 않는다고 엄연한 사실(史實)을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나국의 사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대표적인 정서로 인정하는 ‘삼국사기’에도 수많은 오류가 있지 않은가. 사서의 기록보다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인들의 손으로 새겨진 비문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도 고구려의 크고 작은 성들이 있던 요동지방에 가면 여러 곳에 연개소문과 연수영의 전설이 생생하게 서려 있다. 특히 연개소문과 연수영 남매가 머물던 곳에서는 우리 동포 조선족이 아닌 지나인들도 당태종보다 연개소문을 신장(神將)처럼 추앙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연수영은 610년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일설에는 연수영의 아래로도 연수진이란 여동생이 더 있었다고 전한다. 집안이 대대로 무장을 배출한 만큼 연수영도 어려서부터 무술을 수련했을 것으로 보인다.
연개소문이 비뚤어진 나라를 바로잡고자 혁명을 일으킨 것은 영류왕 25년(642) 9월이었다. 연수영도 오라비가 주도한 이 혁명에 자신이 거느린 낭자군(娘子軍)들을 이끌고 참여했을 것이다.
연수영이 고구려의 전략적 군사요충인 석성 도사(성주)로 부임한 것은 오빠와 함께 혁명을 일으키고 보장왕을 새 황제로 내세운 직후였다. 연수영이 중앙정계를 떠나 변경의 지방관으로 내려간 이유는 분명치 않다. 연수영이 도사로 있던 석성 소장루에서 발견된 비문 내용을 소개한다. ‘소장루는 연개소문이 자기 누이 개수영(연수영)을 위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원래 있던 누각은 없어졌고 지금 있는 것은 원래대로 고친 것이다.
연수영은 여자 장수라 다른 장령들과 내성에서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에 홀로 이 누각에서 산 것이다. 개수영은 문예·군략·무예가 뛰어났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으뜸 장수가 됐다. 연수영은 나라를 연 이래로 수군의 장수로는 다른 장수들을 능가해 가장 뛰어났다. 이곳 소장루는 날마다 군무를 처리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연수영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며, 활약상도 주로 642년에서 651년의 10년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고구려가 당에 멸망했고, 그 시기의 역사는 중국인의 손으로 쓰여 온전한 고구려의 역사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아 있는 명문(銘文)의 편린을 통해서나마 연수영이 남성 못지않게 문무의 재능이 탁월하고, 지략과 리더십이 출중했다는 사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혁명 이후 중앙의 요직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 자신의 지분(持分)을 포기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혹시 연개소문 (이복)남매 간에 무슨 내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평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적군(당군)이 쳐들어오면 육지보다 바다에서 막아야 한다. 바다는 하늘이 내린 요새이니 이 바다를 지키는 장수가 되고 싶다.”
그래서 그녀는 수군 장수가 됐고, 당나라와 전쟁이 벌어지자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연수영은 요동반도 남해안 장산군도 지역에 여러 성곽을 개축하고, 전함을 수리 건조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등 수군 양성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것이 643년 무렵. 이에 따라 고구려의 해군력은 이전보다 훨씬 증강하게 됐다.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켜 태왕을 바꾸고 최고 권력자가 됐다는 보고를 받은 이세민은 100만의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켰다. 보장태왕 4년(645) 4월에 요하를 건넌 당군은 요동성·개모성·백암성을 점령하고 안시성을 포위했다. 당시 안시성 성주는 지용을 겸비한 출중한 장수 양만춘(楊萬春)이었다.
그러면 고당전쟁(高唐戰爭)에서 연수영은 어떤 활약을 했던가?지금까지 알려진 금석문의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본다.보장태왕 1년(642)에 석성도사로 부임한 연수영은 당군의 침략에 대비, 수군의 증강부터 착수했다. 그녀는 5000명의 군사를 수군으로 양성했으며, 70여 척의 전함도 건조했다. 연수영은 실권자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이라는 후광이 아니라 남자 장수 못지않게 문무에서 탁월한 능력과 비상한 통솔력으로 부하 장졸의 신망을 받았다.
보장왕 4년(645)에 드디어 당군이 쳐들어 왔다. 전쟁이 터지자 연수영은 당군의 수군기지인 창려도로 진격해 적함 100여 척을 불태우고, 곧이어 성산성의 적군을 쳐서 무찌르니 죽은 당군이 2만 명에 이르렀다. 연수영은 이 군공으로 석성도사에서 수군장군 겸 모달로 승진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군사를 이끌고 대흠도와 광록도 등지에서 각각 적선 50여 척을 불사르고 8000여 명의 적군을 죽였다. 하지만 아군은 연수영의 빼어난 군략 덕분에 피해가 거의 없었다.
잇달아 노백성과 가시포에서도 적선 80여 척을 불태우고 적군 5000여 명을 죽이는 전공을 올렸다. 이 전공으로 연수영은 수군군주로 승진했으며, 본진을 광록도 부근 노백성으로 옮겼다.
이 시기의 지나국 측 사서인 ‘신당서’와 ‘구당서’에 당시의 해전 전황이 거의 백지상태인 것은 연수영에게 당한 참패가 너무나 치욕스러웠기 때문에 이를 은폐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나국의 역사가들이 자기네 치욕은 감추고 주변국의 빛나는 역사는 모두 깔아뭉개는 것을 역사서술의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시 해전에서 적장 설만철은 구사일생으로 달아났고, 전함 200여 척, 군사 1만5000명 이상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연수영의 빛나는 연승 행진은 계속됐다. 창려와 성산 전투에서 적선 100여 척을 격침하고 적군 2만여 명을 죽였으며, 대흠도와 광록도 해전에서도 적선 100여 척을 격침하고 적군 8000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다.
수군의 연전연패에 대노한 당 태종 이세민은 설만철·구행엄·왕대도 등 수군장수들에게 총공격령을 내렸다. 이에 당군이 가시포와 노백성을 침공했지만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에게 전선 80여 척과 군사 5000여 명을 잃고 퇴각했다.
사학자 서길수, 전영미 박사 등이 연구한 비사성 발굴 비문에는 보장태왕 4년 음력 8월 15일에 벌어진 요동반도 남해안 대장산도 해전에서 당군은 1000여 척의 전함에 10만여 대군을 동원했으나,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에게 대패해 총 군세의 절반인 수백 척의 전함과 3명의 대장을 비롯해 5만여 명의 병력을 잃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지역 전설에 따르면 당시 연수영이 거느린 고구려 수군의 병력은 당군의 5분의 1에 불과한 2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다음 달에 패전보고를 받은 이세민은 이렇게 소리쳤다고 ‘구당서’는 전한다.
“적보다 5배나 많은 군사로도 이기지 못했으니 장차 어찌하랴!”
그 이듬해인 보장태왕 5년(646)에는 산동반도 봉래포 해전이 있었다. 당나라 본국을 원정한 이 해전에서도 연수영은 대승을 거뒀고, 그 전공으로 수군원수가 됐다. 그러나 또 해가 바뀐 647년 7월. 이세민은 우진달을 청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산동성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공격토록 하고, 이세적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육로로 침공토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연수영과 고구려군의 맹렬한 반격에 아무 소득도 없이 패퇴했다. 그 이듬해에도 설만철이 청구도행군대총관이 되어 3만 명을 이끌고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을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결사적 응전에 퇴각했다. 연수영은 즉각 보복공격을 가해 적선 수백 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으나 군비(軍備)가 바닥나는 바람에 부득이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남을 시기하고 모략하는 부류의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연수영의 등에 비수를 박은 사람은 어이없게도 그녀의 둘째 이복오라비 연정토였다. 648년 7월, 연정토 일당의 참소로 연수영은 파직되고 부여성으로 유배당했다. 수군원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연정토였다. 연정토는 수군총수가 되자마자 군공을 탐내 그해 9월에 당의 수군기지인 신성도 협량곡을 공격했다가 참패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동생들의 군권 다툼에 노한 연개소문이 연정토를 파면해 옥에 가두고 그의 일당에게 철퇴를 가했다. 그리고 억울하게 귀양살이하던 연수영을 다시 등용해 수군군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고구려는 내분에 휩싸여 국론이 분열되고 국력이 약화된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나라가 망한 것은 예외 없이 내우외환 때문이다. 부국강병과 국리민복을 제쳐둔 채 집안싸움이나 하는 나라는 망한다는 진리를 역사는 교훈으로 일러주고 있다.
보장태왕 19년(660) 8월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그해 12월에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소득이 없었다. 보장태왕 21년에 당군은 정월부터 또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머리끝까지 노한 연개소문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해 사수싸움에서 당군 총사령관인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및 전군을 몰살시키고, 평양을 침공하던 소정방까지 패퇴시켰다.
연개소문은 보장태왕 23년(664)께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58세쯤 됐을 것이다. 연개소문은 아들들에게 화살10개가 하나로 묶이면 쉽게 부러뜨릴 수 없다며 물처럼 합심하여 이웃나라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겨우 3년도 안 되어 남생.남건 등 세아들이 권력투쟁을 벌여 결국 고구려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보장태왕 27년(668), 고구려의 내분을 둘도 없는 호기로 삼은 당은 반역자 남생을 길잡이 삼아 5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설상가상으로 연정토까지 12개 성을 들어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도 20만 대군을 동원해 당군과 합세, 고구려를 공격했다. 남건·남산 등이 죽을 힘을 다해 도성을 지켰지만 이미 때는 늦어 그해 9월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추모성왕이 개국한 대제국 고구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일세의 여걸 연수영의 최후에 관해서는 오고성에서 발굴된 비석이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개화(開化) 12년 신해 8월 태대형 연정토, 을상 선도해, 대신 계진 등이 태대사자 연수영이 모반을 도모한다고 참소하니 태왕도 연수영이 다른 뜻을 품었다고 의심했다. 태왕이 고심하다가 연수영을 파면했다. 풍문에는 연수영이 반역을 꾀했다는 참소로 사사됐다고도 하고, 전리로 방출돼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다. 나라사람들은 연수영의 무죄를 믿었기에 이를 매우 통탄했다.… "
이래도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다고 연수영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곤란하다. 지나국이 연개소문이나 연수영을 고구려의 인물로 인정해 그들의 숨결과 자취가 서린 청석관과 석성, 비사성 등 유적을 유네스코에 등록할 것으로 보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고구려는 ‘지나 변방의 지방정권’이고, 고구려인은 ‘소수민족’이라고 역사를 왜곡하고 탈취하기 위해서다.
사정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제 식민사관과 반도사관 소중화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이 그들을 맹종하며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또한 재야사학을 운운하는 정신나간 자들도 수.당나라와 고구려는 바다가 존재하지 않는 황하강 지역에서 전쟁을 했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내뱉는 민족적 자존심도 주체성도 없는 일부 사학자들이나 역사매니아들이 여전히 활개 치는 사실도 참으로 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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