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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헬레니즘의 물결

설레임의 하루 2012. 1. 20. 18:34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도불원인  2007.10.14.http://cafe.daum.net/dobulwonin/IFP1/2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이 페르시아의 멸망을 낳았고 페르시아의 멸망은 이란계 인종의 인도대륙 유입을 가속화시켰습니다.

인더스,갠지스강을 가로지르는 인도유러피안의 유입으로 황인종이 우세했던 인도북부는 인종상 남북으로 갈려져.즉 남부는

인도유러피언 혼혈(현 인도인) ,북부는 몽골리언의 비율이 높습니다.

경전에 보는 코타마 싯탈타(부처)는 샤카족의 왕족으로서 몽골리언..

따라서 부처는 우리와 같이 생긴 몽골리언이니,山海經에 부처는 天毒國(天竺)출신이고 고조선인이다라는 말이 一理가 있음.

(운영자 주)  

 

▲ 탁티바히의 간다라식 불상

 

이집트에서인도까지 광대한 영토를 연결한 간선도로 건설 페르시아 멸망시킨 알렉산더 동방원정헬레니즘 전파 아프가니스탄 \고지대에서도 그리스식 도시 발견돼.

석가모니 사망 후 500년 동안은 불상 없어 간다라 지방 불상의 옷·자세 등 그리스 신상과 비슷 중국 서북부 둔황 지역 넘어 한반도까지 영향 끼쳐 무엇보다도 부처의 얼굴 모습이 그러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가 걸치고 있는 승복도 그리스·로마인의 토가를

그대로 본뜬 듯하며, 서 있는 자세 또한 그리스 신상에서 흔히 보이는 콘트라포스토, 즉 한쪽 다리를 살짝 구부린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세기 초 중국의 가장 서북쪽인 신장(新疆)에서 타클라마칸사막 아래에 묻혀 있던 폐허의 도시 미란(Miran)이 발견되었다.

거기서 주민의 주거지, 불교 사원의 흔적과 함께 고대인의 생활을 추측케 하는 많은 자료가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로마풍 인물이 묘사된 벽화였다.

거기에는 ‘티타(Tita)’라는 화가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름으로 미루어볼 때 그가 서방계통순회화가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사실 신장 지방에서는 이 벽화 외에도 그리스의 신상이 조각된 인장(seal)도 상당수 발견되어, 여기서 수천 ㎞나 떨어진 지중해를

본산지로 하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도대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헬레니즘의 물결이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파미르고원을 넘어지금의 중국 서북부 지방에까지

이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물론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일 것이다.

비록 그에게 무너져버리긴 했지만 소아시아 반도에서부터 중앙아시아 변경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한 페르시아 제국이

없었다면 헬레니즘의 광범위하고도 신속한 확산은 어려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헬레니즘을 운운하기에 앞서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이란의 서북부 케르만샤 지방에 가면 비스툰 비문을 볼 수 있다. 높이 105m의 깎아지른 절벽가로 22m, 세로 7.8m의 면적에

새겨져 보는 이를 압도하는 이 비문은 ‘비문들의 여왕’이라는 별명에 손색이 없다.

중앙에는 등신대 사이즈(1.72m)의 다리우스(Darius) 대제가 위로는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의 축복을 받으며, 발 아래로는 찬탈자

가우마타(Gaumata)를 짓누르고, 뒤에서 궁수와 창수의 호위를 받으며 반란을 일으킨 수령들 9명을 사슬에 묶어 부리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그 주위로는 다리우스의 업적을 칭송하는 명문이 설형문자로 새겨져 있고, 내용은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아카드어 등 모두 세

가지 다른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주인공은 사실 다리우스가 아니라 퀴로스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기원전 539년 바빌론을 무너뜨리고

서아시아의 주인이 되었지만, 기원전 530년 중앙아시아 초원지역을 호령하던 마사게테(Massagetae)라는 부족과의 전투에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퀴로스가 죽은제위를 이은 그의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원정해 영토를 확장시키기도 했으나 기원전 522사망하고 말았고,

캄비세스의 아들을 참칭(僭稱)한 가우마타가 등장하면서 제국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혼란을 수습한 인물이 바로 황족 출신의 다리우스였으며, 내란을 평정직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스툰 비문을 새겼으니

기원전 519년의 일이었다.

 

다리우스에 의해 설계된 통치의 기본 구조는 ‘성(省)’제도였다. 전국을 20개 정도의 성으로 분할하각각에 총독(kshatrapa, 영어 satrap의 기원)을 임명했는데, 그에게는 군사권을 제외한 사법·징세·행정 등 광범위한 민정권이 부여되었다.

각 성은 매년 은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행정을 원활히 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잇는 주요 간선도로를 건설했다.

특히 소아시아의 사르디스에서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 이르는 2470㎞ ‘제왕의 길’에는 111개의 역참이 설치되었고, 신속을 요하는

사항은 하루 300㎞ 이상 달려 일주일 만에 전 구간을 주파했다고 한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통일을 기해 아람어·문자를 제국의 공용언어·문자로 정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 이수스의 전투를 묘사한 폼페이의 모자이크.

 

이처럼 이집트와 소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아우르던 대제국 페르시아의 영화도 계속될 수는 없었다. 

당시에는 변방에 불과하던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약관 24세의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에게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기원전 334년 약 4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다넬즈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들어온 그는 먼저 그라니쿠스(Granicus)와 이수

(Issus)에서 페르시아군을 연파하고, 마침내 기원전 331년에는 티그리스강 동쪽에 위치한 가우가멜라(Gaugamela)라는 대평원에서

5배가 넘는 적군에게 괴멸적 타격을 주었다.

도주하던 마지막 황제는 피살되었고 이로써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수사·페르세폴리스에 무혈입성하면서 제국의 중심부를 그대로 접수했지만, 뒤이어 터진 반란을 진압하고

제국의 변경을 넓히기 위해서 아프간·중앙아시아·인도를 전전해야 했다.

고향을 떠나 10년이 다 돼가도록 계속되는 원정에 지친 그리스 병사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세계 정복의 꿈을 접고

귀환길에 올랐으나 바빌론에서 33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으로 이제 갓 탄생하려던 제국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의 지휘관들은 제국을 셋으로 분할해 통치하였다.

그리스 본토에 마케도니아 왕국, 이집트 방면에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지에 들어선 셀레우코스 왕국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두 왕국은 후일 로마제국에 병합되었지만 셀레우코스 왕국은 헬레니즘 문화를 동방에 확산·정착시키는 데 크

기여했다.

 

헬레니즘 문화의 정착과 확산은 도시를 거점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리스인이 도시(polis)를 중시한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도시들을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러한 전통은 셀레우코스에 의해서도

계승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은 물론 부인과 아들의 이름으로 도시를 건설했다. 이 같은 헬레니즘 도시의 실상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 아프가니스탄 북단에서 발견된 아이 하눔(Ay Khanum) 유적지이다.

 

이 도시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 직후 아무다리아강과 콕차강이 만나는 곳의 삼각형 고지대(높이 60m, 넓이 1800×

1500m)에 세워졌다.

도로는 그리스 도시 특유의 격자형으로 만들어졌고, 도시 중앙에는 137×108m의 넓은 광장이 있었으며 거기에서 도리아식·

이오니아식·코린트식으로 장식된 108개의 열주(列柱)가 발견되었다.

그리스인의 도시생활에 필수로 여겨지던 시설들, 즉 체력 단련을 위한 김나지온(gymnasion)과 5000명 수용 가능한 극장도 있었다.

플루타크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동방에서는 소포클레스나 유리피테스의 비극 대사들을 외워서 공연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한 가지 흥미로운 유물이 발견되었다. 즉 클레아르코스(Clearchos)라는 사람이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 있던 150조의

잠언을 석주(石柱)에 새겼는데 석주는 없어지고 그 받침만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이 클레아르코스라는 인물이 3세기 후반에 활동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즉 솔리(Soli) 출신의 클레아르코스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인이 주로 거주하던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한 헬레니즘 문화는 비(非)그리스인 주민에게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인도를 지배하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기원전 274~236년)이남긴 석각칙령이 좋은 예이다.

칸다하르에서 발견된 이 석각에는 불교로 개종한 그가 스스로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이 아람어와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었다.

박트리아를 무너뜨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인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한 쿠샨 왕국은 북방유목민인 월지(月氏)인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역시 헬레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들은 카로슈티(Kharoshti)라는 인도 고유의 문자와 더불어 그리스 문자를 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발행한 금화나 은화의

한쪽 면에는 제우스 ·헤라클레스·아테나·아틀라스·디오니소스 등 수많은 그리스 계통의 신이 부조되어 있었다.

 

 

▲ 비스툰 비문

 

헬레니즘이 동방세계에 미친 영향을 말할 때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불상의 출현이라고 할수 있다.

석가모니의 入滅 부터 불상의 出現까지 약 500년 동안은 무(無)佛像의 시대였다.

석가모니는 한 사람의 ‘위대한 각자(覺者)’로 여겨졌고, 회화적으로 그의 존재는 보리수나 발자국 혹은 빈 대좌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암시될 뿐 그를 어떤 신적 존재로 여겨 숭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 변화가 생겨났고 드디어 기원후 1세기경에 불상이 탄생한 것이다.

불상의 기원과 관련해 소위 간다라·그리스 기원설과 마투라·인도 기원설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고,

이에 관한논쟁은 아직도 분명한 해결점을 찾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간다라에서 만들어진 불상이나 보살상의 모습에서 헬레니즘의 영향도외시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부처의 얼굴 모습이 그러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가 걸치고 있는 승복도 그리스·로마인의 토가(toga)를

그대로 본뜬 듯하며, 서있는 자세 또한 그리스 신상에서 흔히 보이는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

즉 한쪽 다리를 살짝구부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심지어 사자가죽을 걸치고 몽둥이를 손에 든 헤라클레스가 부처를협시하는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고, 번개를 휘두르는

제우스를 모방한 듯한 집금강(執金剛·Vajrapani)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헬레니즘의 문화적 영감과 연관되어 탄생한 간다라식 불상의 도상적 표현은 중앙아시아중국의 불상 제작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반가상과 교각상 같은 독특한 자세의 불상·보살상이 계속 만들어졌고, 석가모니의 생애, 즉 ‘불전(佛傳)’을 주제로 하여

만들어진 예술적 표현도 아주 빈번하게 나타났다.

중앙아시아 쿠차의 키질이나 중국 서북부의 둔황 등지에서 간다라 양식의 입김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그 입김은 동쪽으로 올수록 점점 약해진 것이 사실이며 우리나라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내기가 더욱 어려워지지만,

불상이 지닌 기본적인 도상적 요소들이 그대로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헬레니즘의 물결은 한반도에까지 그 파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가우가멜라 전투

 

이 전투는 전쟁사에 대서특필되는 유명한 전투이다. 횡대로 뻗은 전열의 길이만 30㎞가 넘었다고 하는 20만 대군을 맞아

알렉산드로스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길이가 3~7m에 달하는 긴 창으로 무장한 밀집보병대(phalanx)가 적의 기병대를 저지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지만, 후대의 전쟁사가들은 무엇보다도 알렉산드로스천재적인 전술을 지적하였다.

밤중에 기습공격을 하자는 제안에 대해서 “나는 승리를 훔치러 오지 않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그는 결코 혈기만 넘치는

무모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군 좌ㆍ우익을 중심으로 전투를 전개시킴으로써 적의 막강 기마부대의 주력군을 양쪽으로 갈라지게 하고, 자신은

직속 최정예 컴패니언 기병대를 이끌고 허약해진 적의 중앙을 돌파하여 곧바로 황제의 목숨을 노린 것이다.

폼페이에 남아 있는 거대한 모자이크는 이수스의 전투를 묘사한 것이지만, 적의 정중앙을 파고드는 젊은 영웅과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응시하는 무너지는 제국의 군주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