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心濟 2012.01.28. http://cafe.daum.net/dobulwonin/MJRv/112
후기 신라왕성의 위치를 밝히는 기록 신당서지리지 가탐도리기
登州東北海行,過大謝島、龜歆島、末島、烏湖島三百里。北渡烏湖海,至馬石山東之都里鎮二百里。東傍海壖,過青泥浦、桃花浦、杏花浦、石人汪、橐駝灣、烏骨江八百里。乃南傍海壖,過烏牧島、貝江口、椒島,得新羅西北之長口鎮。又過秦王石橋、麻田島、古寺島、得物島,千里至鴨淥江唐恩浦口。乃東南陸行,七百里至新羅王城。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乃小舫泝(溯)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得渤海之境。又泝(溯)流五百里,至丸都縣城,故高麗王都。又東北泝(溯)流二百里,至神州。又陸行四百里,至顯州,天寶中王所都。又正北如東六百里,至渤海王城。 <新唐書 卷四十三下 志 第三十三下>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바다로 나아가, 대사도(大謝島), 귀흠도(龜歆島), 말도(末島), 오호도(烏湖島)를 지나 300리이다. 북쪽으로 오호해(烏湖海)를 건너, 마석산(馬石山) 동쪽의 도리진(都里鎮)에 이르기까지 200리이다. 동쪽으로 바닷가로 접근하여, 청니포(青泥浦), 도화포(桃花浦), 행화포(杏花浦), 석인왕(石人汪), 탁타만(橐駝灣혹 낙타만), 오골강 (烏骨江)를 지나 800리이다. 이내 남쪽으로 바닷가로 접근하여, 오목도(烏牧島), 패강구(貝江口), 초도(椒島)를 지나, 신라 서북쪽의 장구진(長口鎮)에 이른다. 또 진왕석교(秦王石橋), 마전도(麻田島), 고사도(古寺島), 득물도(得物島)를 지나, 1,000리는 압록강 당은포구(唐恩浦口)에 이른다. 이내 동남쪽으로 육로로 가서, 700리는 신라왕성(新羅王城)에 이른다.
압록강 어귀에서 배를 타고 100여리를 가고, 이내 작은 배를 타고 동북쪽으로 3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박작구(泊汋口)에 이르는데, 발해의 경계가 된다. 다시 5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현성(丸都縣城)에 이르는데, 옛 고구려 왕도(故高麗王都)이다. 다시 동북쪽으로 2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이른다. 또 육지로 400리를 가면 현주(顯州)에 이르는데, 천보중(天寶,당 현종,742년 ~ 756년)에 왕이 도읍한 곳이다. 다시 정북쪽으로, 동쪽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왕성(渤海王城)에 이른다.
沙門島爲解宋寨界 單山爲黃縣界 桑島爲馬停寨界 龜島爲昌邑縣界 歆末島爲壽光界 都里鎭爲蒲臺界 靑島爲利津界 黃島爲賓州界 直沽口爲寶低縣界 塔山爲盧龍衛寨界 南半洋山爲昌黎縣界 計一千二百里,抵遼東北半. 洋山爲山海衛界 蔬萊島爲中前所界 牛車島爲中後所界 孤山爲中右所界 向陽島羅兒島爲金州衛界 石灘島爲左所界東雲島 黃駝島爲蓋州衛界 屛風山爲復州衛界 鳳凰山爲中左所界 女兒河爲中屯衛右屯衛界 遼河渡古寺島爲廣寧衛界 麻田島平島爲海州衛界 湯站堡爲鎭遼所界 臨江爲義州界 計一千三百餘里爲鴨綠朝鮮界 <章潢(장황 : 1527一1608年)의, 도서편(圖書編 권 57)>
11세기 송나라 초기에 쓰여진 신당서는 구당서를 모체로 만들어졌는데 명과 청나라를 거치면서 명나라기준으로 개작된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수 없다. 기본적으로 출발지인 등주는 고려도경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빈주 체주와 서로 바라다 보인다고 했으며 해운루트가 서해가 아닌 산동 거야택에서 하북으로 가는 물길로 이곳을 바다라고 하였음이 송사지리지를 분석한 결과이다.
운영자가 밝혔듯이,고려시대에 거란과 마주했던 경계인 압록수는 조선전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이 지역이 현 하북 白河임을 운영자가 밝혔다. 또한 조선 전기까지의 기록에도 패수가 현재의 하북성 중부에 위치한 호타하 수계임을 여러 기록에서 볼수가 있는데 국사학계의 정의대로 패수가 현 대동강이라면 대동강앞에 초도가 있어야하나 현 대동강 앞에 초도는 없다 그러므로 신당서지리지의 거리와 여정은 여지없이 흐트러지게 되니 분명히 패수는 현 대동강이 아니라는것이고 후대에 지리변화와 왕조의 구색에 맞추어 개작되었다고 본다. 조직적으로 개작되었을 경우 중심점을 찾기는 난해 해질 것이다.
하나 윗 고지도상으로 본다면 도리진은 빈주의 리진현과 포대현을 지나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소청하와 대청하와 가까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 이지역은 바로 청나라때 제작된 대청광여도에 정확히 기록되어있다.
도리진은 산동성 북부의 빈주의 근방에 있으니 그 원문과 해안선지도를 비교해 보면
乃南傍海壖,過烏牧島、貝江口、椒島,得新羅西北之長口鎮。又過秦王石橋、麻田島、古寺島、得物島,千里至鴨淥江唐恩浦口。
오목도,패강구,초도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계인 장구진을 만나고,진왕석교,마전도,고사도,득물도를 지나면 천리가 압록강 당은포구에 다다른다라고 해석이된다면 지리적인 도착지는 당연히 오목도->패강구->초도->마전도->고사도->득물도->압록강 당은포구가 되어야하는데 위의 해안선지도를 보면 초도를 지나 득물도로 가는 방향은 바로 조선의 압록강에서 멀어져 산해관으로 가는 방향이니 산해관방향에 압록이있다고 하겠다.
명대 해안선지도에는 해석상 트릭이 있다.
운영자가 지적한대로 압록강은 현 하북성 백하이고 가탐도리기에 신라로 가는방향은 패강구에서 득물도 그리고 압록강 당은포구로 가는 여정인데 조선계라 해놓고 후대에 해안선지도에는 <여기서 부터 조선계>라고 한줄을 써놓는 바람에 가탐도리기에 기록된 송초의 여정을 흐트러 놓았던 것이다. 즉 가탐도리기에 기록된 싯점의 신라영역과 후대의 조선의 영역이 달라진것을 간과하고 해석했던 오류였다고 본다.
乃東南陸行,七百里至新羅王城 .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乃小舫泝(溯)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 得渤海之境。又泝(溯)流五百里,至丸都縣城,故高麗王都.
또 동남으로 육지를 따라가 700리를 가면 신라왕성이고 ,압록강구에서 배를타고 100여리를 가면 작은 배가 다닐수있는 강이 흐르는데 이곳에서 동북으로 30여리에 이르면 박작구이고 발해경계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500여리를 배를 타고가면 환도현성이고 옜 고구려 도읍이다. 즉 아래의 고지도에서 압록수계를 고려한다면 박작구와 발해경계가 하북북부에 있었음을 인지하게 될것이다.
결국 통일신라왕성은 하북의 백하북부이며 운영자가 지목한 예맥고지의 풍윤일 가능성이 높은것이다. 즉 후대의 우리는 해류의 진행방향을 무시한 고대의 해로를 모르고 사서 해석한 결과와 후대의 명나라해안선지도를 고려초기(송나라 초기)에 제작된 신당서 가탐도리기를 오역했던것이며 그 해운도는 해류를 고려하여 현대지도에 아래와 같이 그려본다.
현 봉성의 봉황성은 송초에 신라와의 관계를 기록하지 않은것으로 보아 신라의 성곽이 아니라 고려의 성곽으로 운영자는 비정한다.
|
'최초의 나라 한(환)국 > 사국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한 춘추전국시대지도 (0) | 2012.02.09 |
---|---|
[스크랩] 정직한[환단고기],박혁거세 출생비밀 기록/신라.가야의 지배세력 (0) | 2012.01.31 |
(2)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헬레니즘의 물결 (0) | 2012.01.20 |
[스크랩] 고구려는 해군 강국이였다/불패신화!연수영 해군제독 (0) | 2012.01.16 |
광개토태왕비문,"四海(=사방)을 掃除(=평정)" (0) | 2012.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