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스페셜·추적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금지곡이었다.

설레임의 하루 2011. 9. 24. 00:22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는 
                      금지곡이었다.


 

▣방송 : 2011. 9. 22(목) 22:00~22:5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임현진 PD
▣글, 구성 : 박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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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작곡된 최초의 근대음악이자
‘국가’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음악
대한제국애국가!

탄생한지 7년 만에
‘금지곡’이 되어버린 노래

가사도 멜로디도 철저하게 잊혀져버린 비운의 곡
‘대한제국 애국가’는 왜 불리지 못했던 것일까?

 

■ 우리나라에서 작곡된 최초의 국가! ‘대한제국 애국가’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 ‘대한제국애국가 악보’, 금박과 청홍색의

실끈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겉장을 넘기면 피콜로, 오보에, 클라리넷 등

18가지의 악기가 사용된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가 펼쳐진다.

110년 전 우리나라에서 작곡된 최초의 서양음악. 대한제국 애국가는

황제를 보위하던 당대 최고 석학들이 작사에 참여했고 파격적인

조건으로 초빙해온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작곡했다.

 

■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를 초빙하다!

 

▲프란츠 에케르트

▲대한제국과 에케르트의 계약서


1901년 한국에 초빙된 독일인 왕실악장 ‘프란츠 에케르트’, 쌀 한가마니가 5~6원하던 시절 그의 월급은 3백 원. 에케르트는 단순한 군악대장이

아닌 애국가 제정이라는 중차대한 임무가 주어졌고 그에 따라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특급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특급대우 속에 에케르트는 1902년 7월 1일 애국가의 작곡을

완성하였다.


-최초의 군악대 탄생하다!

 

▲The korea Review


날씬한 제복 번쩍거리는 악기 정확한 박자
흐르는 듯한 리듬과 하모니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청중들을 열광하게 하였다.
머지않아 이 악대는 동양에서 최고의 악대가 될 것이다.
-The korea Review

1901년 3월, 에케르트는 본격적으로 군악대원을 선발한다.

50명의 군악대원, 그들은 에케르트가 가져온 오보에, 클라리넷 등

총52점의 낯선 악기들과 마주해야했다.

그리고 4개월 후, 애초에 뽑았던 50명 중 27명이 신식복장과 악기를

갖춘 정규 ‘군악대’가 된다.

이들의 데뷔는 1901년 9월 7일 고종황제의 만수성절에 성공적인 데뷔를

치른다.

당시의 영문 잡지 는 악대의 데뷔무대는 신선하고 강렬했으며 그들의

연주는 청중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고 보도했다.

 

■ 대한제국, 독립 국가를 꿈꾸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약식 현장(인천광역시 화도진 공원)


1882년 5월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선이 근대 서양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이다.

당시 조선은 국기는 있었으나 애국가가 없었다.

조약식 현장엔 양국의 애국가 대신 미국 민요인 양키 두들이 울려 퍼졌다. 미국이 자국의 국가대신 민요를 연주하는 것으로 조약에 필요한 격식을

맞추고자 했던 것이다.

19세기 중엽 조선 사회는 격변하는 세계정세 속에 일대 전환기를 맞이한다. 세계 여러 나라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국가 상징물 즉, ‘애국가’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졌다.

1902년 마침내 애국가를 완성한 대한제국은 국기와 애국가를 가지고

근대국가로서 당당히 세계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 막 내린 근대화 프로젝트, 애국가 금지사건!

 

 

▲‘애국가 금지령’ 보도 (左조선일보 1928.10.27 右시대일보 1924.5.10)


한일의정서 체결이후, 사실상 고종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막을 내린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근대화작업을 중지시키고 그 성과를 자신들의 것으로

왜곡하기 시작한다.

대한제국 근대화의 상징이자 성과물이었던 대한제국애국가도 불리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한제국 애국가는 국내해산 이후 강등조치 되고 공식적인 채널들을

통해 애국가 금지가 보도 된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있기 전의 일이었다.


전라남도 관찰사 신응희(申應熙)
각 군(郡)에 훈령하여 각 학교에 기부금과 애국가 부르는 것을

엄금하라.
         - 대한제국신문 1909년 7월 8일 2면

그로부터 4년 후인 1914년 각급학교에 조선총독부에서 발행된 창가집이

전달된다.

창가집 앞면에는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가 자리 잡고 있었고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은 일본의 기미가요를 국가로서 배우고 익혀야 했다.

 

■ 부르지 못한 노래, 대한제국애국가

부르지 못한 노래 애국가, 그러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라를 빼앗겨 부를 수 없었지만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노래는

이어졌다.

대한제국 애국가는 애국심과 민족혼을 고취시키는 노래로, 때로는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독립운동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부국강병의

꿈을 노래하고자 했던 대한제국애국가는 힘든 시기를 지탱하는 진짜

애국가가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