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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대사비의 증언 |
▣방송 : 2011. 11. 24 (목) 22:00~22:5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나영 PD
▣글, 구성 : 최미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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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사 선각대사비문의 재해석으로 |
■ 두 얼굴의 궁예, 그는 과연 폭군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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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위사 선각대사비 |
▲ 선각대사비문에 새겨진 ‘大王 (대왕)‘ |
묘사되고 있다. 역사 속 궁예는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미치광이 폭군’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최근 궁예에 대한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단서가 발견됐다. 전라남도 강진 무위사에 세워진 선각대사비에는 베일에 싸인 궁예의 행적이 담겨 있다. <고려사>로만 전해졌던 후삼국 통일과 고려 건국의 비화가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왕을 지칭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금상(今上)과 대왕(大王)이다. 금상은 현재의 왕인 왕건을 가리키는 것. 논란이 되고 있는 표현은 대왕 (大王)이다.
그간 일반적으로 대왕을 왕건으로 해석해왔다. 그런데 최근 목포대 최연식 교수가 이 해석을 뒤집었다. 대왕이 궁예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대왕이 912년 나주를 공격했다고 한다. 비문의 또 다른 표현, 나주귀명(羅州歸命)도 이 해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로써 왕건이 고려를 창건하는데 초석이 된 ‘912년 나주공략’은 궁예의 지휘 아래 이뤄졌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
■ 912년 나주 경략(經略)은 궁예가 주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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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는 후삼국시대 군사 요충지였다 |
▲ 궁예는 나주경략으로 삼한의 절반을 장악한다. |
왕건은 912년 나주를 점령하고, 이 성과를 기반으로 승승장구한다. 그리고 마침내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다. 나주 정벌은 곧 왕건의 정치, 군사적 역량을 의미한다. 그러나 선각대사비는 궁예가 직접 나주 경략을 지휘했다고 입증한다.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바뀌는 셈이다. 절반을 장악하는 대업을 이룬 것이다. |
■ 궁예는 왜 미륵신앙과 관심법에 빠져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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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미륵’으로 불리는 미륵불. | |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하며 관심법을 이용해 공포 정치를 실시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부인과 두 아들을 살해하는 비극을 저지른다. 아전들과 아래로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매우 자주 있었다” 형미는 궁예의 최측근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나라에서 10년 간 유학하고 돌아온 선각대사를 눈여겨보고 그를 철원으로 초빙한다. 궁예가 후삼국시대 큰 사상적 영향을 미친 선종불교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 또한 이번에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왕건에 의해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것을 우려해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지만 이 과정에서 신하와 백성은 그에게 등을 돌린다. |
■ ‘담대한 정복 군주’, 궁예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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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예의 나라, ‘태봉’의 도읍지였던 철원 |
▲ 3D로 복원한 태봉도성 |
끝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때문에 궁예가 한반도의 중원을 차지하고, 서남해 지역을 장악한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대왕’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다. 목포대 최연식 교수는 궁예의 업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를 대왕으로 존칭했다고 해석한다. ‘정복 군주’ 궁예를 재조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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