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스페셜·추적

무령왕릉 어금니 한 개의 비밀

설레임의 하루 2011. 9. 21. 03:47

무령왕릉 어금니 한 개의 비밀  
방송일: 2003503    동영상 :  
줄거리:
<무령왕릉 어금니 한 개의 비밀>
2003/05/03] 무령왕릉 어금니 한 개의 비밀  
작성일: 2003/04/3

 


 

무령왕릉 어금니 한 개의 비밀  



 ** 무령왕릉 출토 어금니
고대사 미스터리의 베일을 벗긴다. **


▣ 방송일시 : 2003년 5월 3일 토요일 20:00-21:00 KBS 1TV

▣ 프로듀서 : 이기홍

▣ 기획의도

우리나라는 물론 동아시아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있는 
무령왕릉. 발굴된지 33년이 흘렀지만 무덤의 주인인

 

무령왕에 대해선 아직 베일에 가려있는 상태다.
무령왕과 함께 묻힌 왕비의 어금니가 17세 여인의 것으로 추정되어 관심이
모아졌는데...
62세로 승하한 무령왕은 과연 젊은 여인과 묻힌 것일까?
베일에 싸여있는 무령왕의 가족관계를 통해 잃어버린 왕국 백제史 연구에
걸음 다가가 본다.


▣ 세부내용

1. 62세 무령왕의 왕비. 17세였나?

무령왕의 왕비의 것으로 추정되는 어금니. 발굴된 어금니는 사랑니였고, 대략 17세 여성의 것으로 판정됐다.
62세 승하한 무령왕의 왕비가 과연 17세였을까?
어금니의 17세 판정의 이유는 잇몸 속에 묻혀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한 것. 그러나 현대로 갈수록 성인이 되어도 사랑니가

 

나지 않는 경우가 점점 증가하고 있고, 무령왕릉과 비슷한 시기인 부여 능산리 고분에서도 사랑니가 나지 않은 30대 여성의

골격이 출토되었던 바. 무령왕비가 17세였다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2. 잃어버린 왕국 백제. 무령왕비의 베일을 벗겨본다.

① 팔찌에 선명한 '大夫人' - 부인이란 칭호가 왕비를 가르켰는지에 주목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전지왕조에 "팔수부인을 왕비로 삼았다"는 기록을 통해'부인'이 왕비를 이르는 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大夫人'- 중국과 일본의 비슷한 시기를 비교해볼 때 왕자를 생산한 부인을
일컬었던 말이다.
무령왕릉 어금니의 주인은 왕족출신이 아닌 호족출신으로 왕자 융(성왕)을
생산한 무령왕비였다.


② 백제국 왕태비 수종 - 왕태비가 천수를 다해 돌아가셨다.

살아서는 왕비의 칭호를 받지 못했지만, 죽어서 태비라는 호칭으로 공식 표기되었다.
그러나 보통 왕비의 죽음은 훙(薨)으로 기록되는데, 무령왕비의 경우 薨이라
하지않고 수종이라 한 것.
역시 무령왕비가 왕족출신이 아닌 호족출신이었음을 뒷받침해주는 대목이다.



3. 무령왕릉에 묻힌 왕비는 첫째부인이 아니었다.

①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와 일본 천황가

지난 2001년 일본 천황이 환무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는 발언을 해 화제가 됐었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환무천황의 어머니 고야신립은 순타태자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일본 가카라시마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있는 무령왕.
가카라시마에는 무령왕이 태어타 첫목욕을 했던 우물과 탄생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40세까지 행적이 묘연한 무령왕. 순타태자는 무령왕이 일본에서 결혼해 낳은 아들이 아니었을까?



② 무령왕 첫째부인은 어디에 묻혔나?

무령왕릉 주변에는 삼각형 모양으로 세 개의 무덤이 함께 모여있다.
그중 무령왕릉과 구조와 건축방식이 가장 흡사한 6호분. 6호분은 무령왕릉보다 먼저 만들어졌다.
특이한 것은 무덤 입구를 막고있는 연화문벽돌은 무령왕릉에 사용된 벽돌이란 점이다.
무령왕릉을 만들면서 입구를 막아버린 것이다.
부부합장이 기본이었던 웅진시대 무덤양식. 화려한 벽화의 흔적으로 보아 예사롭지 않은 이 무덤에는 관대가 하나만
수습되었다.
6호분에는 무령왕릉의 첫째부인이 잠든 것으로 추정된다.



*** KBS 대전방송총국에서 제작한 역사스페셜.

《무령왕릉 어금니 한 개의 비밀》.
발굴된지 33년이 지났지만 아직 베일에 싸여있는 무령왕릉 어금니의
수수께끼.
무령왕릉 어금니의 비밀을 추적하여 백제사 미스터리의 베일을 벗긴다.


-방송일시:2003.5.3(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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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DEO A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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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석수12 지난 71년, 기록상으로만 존재하던 무령왕릉이 세상에 드러났다.
#왕관 천 오 백년 만의 일이었다.

유물들은
무령왕 부부의 삶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다리미스틸6 그 유물들 속에서
'이빨' 한 개가 발견됐다
(2초후)
무덤 속에 남겨진 유일한 유골이었다.

#이빨 올라올 때 많은 의문과 미스터리를 품고있는
이빨 한 개,

#석수8 이빨에 숨겨진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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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title】 무령왕릉 어금니 한 개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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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1>


화려한 연꽃무늬 벽돌로 아늑하게 둘러싸인 이곳이 바로
백제 제 25대 무령왕과 왕비가 잠든 무덤입니다.
이 왼쪽 관에는 왕비가, 그리고 오른쪽에는 왕이 누워 계셨습니다
삼국 중, 유일하게 주인이 밝혀진 이 무덤은
한국고대사의 비밀을 풀어주는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령왕릉에는 발굴된 지 3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하나 있습니다.

#어금니 한 개 나오고
바로 이 이빨입니다.
무령왕릉의 유물 중에서도 그 동안 이 이빨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적이 없었는데요
무덤에선 다른 유골과 치아는 하나도 없이
오직 이빨 한 개만 나와 그 의문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빨이 단 하나만 남는 것은 고고학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고 합니다..

#어금니 바라보고
이빨의 모양도 좀 이상하게 생겼죠?
아랫부분은 다 썩어 없어지고 위쪽 겉껍질만 남아있는 상탭니다. 그마저도 한쪽이 떨어져나가 완전한 모양이 아닙니다.
무령왕릉에서 천 오 백년 동안 썩지 않고 남은 유일한 이빨 하나,
이빨은 왜 하나만 남았던 것일까요? 또 이빨은 과연 왕의 것일까요?
아니면 왕비의 것일까요?
의문의 무령왕릉 이빨, 그 정체는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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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1>-의문의 무령왕릉 어금니 이빨 한 개, 그 정체는?


#공주박물관10 (2초후) 무령왕릉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는 공주박물관.

#걸어오고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이빨은 3천 여 점의 유물들과 함께전시되어 있다.
.
#비이커이빨그림 손톱보다 작은 이빨 한 개,

#보는 두사람 이 이빨 한 개를 보기 위해 멀리 외국에서 학자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무덤 속에서 이빨이 이렇게 하나만 나오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어금니자막나오면6 이빨은 어떻게 한 개만 발견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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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나오면13 충남 공주시 금성동,
야트막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송산리 고분은 백제 웅진시대의 왕족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세무덤8 이곳에서 무령왕릉의 발견은 우연이었다

#박용진박사int
(29호 분을 재조사하고 있었는데 곡괭이에 찍히는 소리가 이상하다 소리 듣고 와서 보니까 벽돌 한 장이 발견된 거예요.

벽돌 한 장이 바로 무령왕릉 연도 앞에 연도 입구를 막은 꼭대기 지붕 꼭대기 벽돌을 발견한 겁니다)

(음악)
#흑백사진,무덤입구12 자막나오면 우연히 발견된 벽돌,

그 벽돌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사건이 시작되고 있음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고사5 당연히 위령제도 조촐하기만 했다.

#박용진박사int
(만일 왕릉급의 무덤이었다고 한다면 수박하나 놓고 할 수 없었죠 아무도 왕릉이라고 생각을 못해...)

#대한뉴스effect (충청남도 공주에서 백제 25대 무령왕릉이 처음 발굴됐습니다)
(대한뉴스7)

#천정,틸다운7 무덤의 발굴은 우리의 고대사를 뒤흔드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진묘수,왕지석13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 앞에는 그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주는 지석이 있었다.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崩9
지석에는 무령왕의 어릴 적 이름, 사마왕이 62세로 돌아가셨다고 기록돼 있었다.

#왕비지석15
#百濟國王太妃壽終 왕비에 대한 기록도 있었다.
"백제국 왕태비 수종!"무령왕비가 천수를 다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고대 무덤의 주인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유물수습14 놀라움과 흥분 속에서 유물들이 수습됐다.
3천 여 점에 이르는 엄청난 유물이었다.

#유물발견그림스틸16 유물의 마지막 수습과정에서 이빨을 발견한 것은 행운이었다.

#어금니나온후 이빨은 무덤 속의 잔재물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2초후)
그런데 이빨은 어찌된 일인지 여러 개가 아닌 단 한 개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조유전박사int(전문화재연구소장, 발굴당시 참여)
(덜렁하니 하나만 남아있는 것이...그것도 불가사의죠. 근데 남아있는 걸 어쩝니까? 발견된 건 그거 하나뿐이고, 그리고 발굴을

잘 못해 가지고 다른 걸 다 없앤 것도 아니고 나머지는 현실바닥에 있는 걸 먼지까지 다 수거해서 정리했기 때문에 있었다면

남아있어야 되는 거죠.)

#이또,조용진관찰8 (3초후)
하나만 남은 무령왕릉 이빨, 이 이빨은 어떤 이빨일까?

#INT이또교수(장단폭이 뚜렷한 것으로 보아 왼쪽 아래 어금니입니다)

#줌인들어갈때23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이빨은 어금니였다
하지만 출토위치가 불분명했다. 그래서 왕의 것인지 왕비의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어금니는 과연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2초 쉬고)

#재는17 남녀 치아의 구별은 크기로 결정된다.
보통 남자보다는 여자의 치아가 작다.
일부가 파손되긴 했지만 어금니의 크기를 재서 현대 여성의 치아와 비교해 보기로 했다.

#어금니그래픽21 크기를 재본 결과, 무령왕릉 어금니는 이빨의 긴 부분인 장폭이 9.01mm였다.
이빨의 단폭은 8.05mm로 현대여성의 어금니보다도 작은 것이었다.

#치아위치바뀌고8 무령왕릉 어금니는 끝에 약간 깨져있으나 크기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

#복원된 치아7 어금니의 깨진 부분을 원형복원 해 봐도실제 크기에 영향을 줄만한 것은 아니었다.
고대인들의 치아는 현대인보다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점을 감안한다면 무령왕릉 어금니는 확실히 작은여자의 어금니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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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하단글자보이기 시작하면)10 어금니는 왕비의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왕비의 나이는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치과병원풀샷5 발굴당시, 어금니에 대한 분석을 의뢰한 곳은 서울대 치대였다

#연구모습8 무령왕릉 어금니 분석에는 이승우교수도 함께 했다.

#어금니타이트5 치아에 대한 감식은 주로 육안관찰에 의해서 이뤄졌다.
그 결과 17세 여성의 어금니로 추정했는데,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승우교수int
(17세 이하로 본 건... 그게 하악 제 3대구치라는 건 형태로 봐서 그렇게 판단을 했고, 여자라는 것도 그 크기로 봐서 남자 것 보다

작기 때문에 여자로 판단을 했고, 그 치아도 뿌리 부분에 있는 쪽은 다 없어지고 가장 단단한 에나멜 층만 남아서 종형만 남아있는데

그 부분은 하나도 충치가 생긴 흔적도 없고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악골에 매몰돼 있었다는 걸로 우선 나이를

그렇게 추정하고... 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현되려면 21세가 넘어야 되거든요.

출현되지 않았다 하는 걸로 21세 이하라고 판단이 되고, 평균 나이를 17세로 본 것이고 주변에 인골이 하나도 발견이 안됐다고

하니까 이 상태가 유지되려면 반드시 단단한 치밀골인 하악골에 매몰된 상태에 있었던 거다라고 추정을 한 거죠)

#무령왕릉풀샷3
#무덤내부팬7 무령왕릉에서는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무로 만든 유물까지도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다.

#어금니찾는3 그런데 유골은 오직 어금니 한 개뿐이었다.

#어금니타이트8 발굴당시 치과 전문의들은그 이유를 어금니가 턱뼈 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어금니두개골로13 턱뼈 속에 들어있던 어금니는 사랑니였다. 사랑니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17세로 추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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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2>

#사람의 얼굴형태와 치아구조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면서)17세라, 그 꽃다운 나이에 무령왕비가 죽다니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가리키고) 잠깐 사람의 치아구조를 좀 보실까요?

#왼쪽어금니 하나 들어가고 발굴당시 치과 전문의들의 검증에 의해 무령왕릉 어금니는 (가리키며) 아래턱, 제일 끝에 있던 어금니,
즉 사랑니로 밝혀졌습니다.
어금니의 주인공은 아직 사랑니가 잇몸 밖으로 나오지 않고 죽은, 17세 정도의 여성으로 추정됐습니다.

#발굴보고서/무덤내부 관련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령왕릉 발굴 보고서에는 이 어금니가30대 여성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치과 전문의들은 17세라고 했는데 왜 중간에 30대로 바뀌었는지 의문인데요.
그것은 62세로 승하한 왕의 정식부인으로 보기에는 나이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무령왕비는 왕이 승하하고 나서 삼 년 후에 세상을 떴습니다.
그렇다면 무령왕이 돌아가실 땐 왕비가 14세였다는 얘기가 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너무 어린 나인데요 과연 무령왕비는 17세였을까요?


<VCR-2>----------------------------------------------------------
정말 17세 여인의 어금니일까

#무령왕릉항공샷11(자막나오고)
무령왕릉은 계획적인 발굴이 아니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굴이 이뤄져 수많은 아쉬움과 의문점이 남게 됐다.

#내부 유물에 대한 수습도 10시간만에 급하게 이뤄졌다.
이런 과정에서 어금니가 발견되고, 17세 여성의 것으로 추정이 되자 많은 논란이 일었다.
무령왕비의 나이를 17세로 추정할만한고고학적 입증자료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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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진료17 무령왕비를 17세로 추정한 이유는의외로 단순한 것이었다. 바로 '사랑니'라는 것이다.

사랑니는 보통 17세를 전후에 잇몸 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촬영기계5 그러나 사랑니는 사람에 따라 잇몸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취재팀은 사랑니가 나오지 않은 40대 여성의 치아구조를 엑스레이 촬영해 보았다.

#엑스레이사진 이 여성의 경우, 잇몸 속에 사랑니가 들어있었다.
그렇다면 무령왕비도 사랑니가 잇몸 속에 들어있다고 17세로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이동근박사int
(일반적으로 사랑니는 13세에서 15세에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밖으로 나오는 것은 16세에서 18세 정도에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예전사람들은 현대인에 비해서 턱뼈의 구조가 컸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은 안 나오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당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니가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는7 어금니에 대한 좀 더 정확한 분석을 위해 백제시대 다른 여성의 치아는어떤지 살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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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현장6(자막나오면) 지난 98년, 부여 능산리에선 운동장을 만들다가 우연히 대규모 무덤군이 발견됐다.

#무덤내부틸다운,유골5 이 발굴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턱뼈,두골15 백제인들의 유골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무덤에서 발굴된 유골은 백제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능산리 고분에서 나온 이 유골의 실제인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용진교수연구실9 능산리 백제인의 얼굴모습을 복원해 보기 위해서 한서대학교 조용진 교수를 찾았다.
오랫동안 고대인들의 얼굴모습을 복원해 온 그는 특히 백제여인의 모습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여인상6 복원된 백제여성의 얼굴은 턱이 큰 서구적인 모습이었다.

#부부11 마치 형제처럼 닮아있는 두 부부.
남성 못지 않게 건강하고 커 보이는 이 백제 여성의 턱의 구조는 어떠했을까?

#조교수 설명
(이 얼굴이 6세기 경 능산리 여성의 얼굴... 현대인 남성보다 턱뼈가 크고.. 턱이 크고 두툼한 인상의 얼굴..

턱뼈로 봐서는 사랑니까지 충분히 날 수 있고, 또 턱뼈에 박혀있는 이빨이 큰 이빨형, 시베리아형 이빨로 볼 수 있습니다.)


#부여박물관5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백제인의 유골은 부여박물관에 보존되어있다.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에 박희경실장의 도움으로 백제여인의 턱의 구조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손가락 가리키고 30대 여성으로 추정된 이 여인의 아랫턱뼈에는 사랑니가 조금 밖에 나와있지 않았다.

#자막나오고 이 여인은 삼십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왜 사랑니가 잇몸 밖으로 완전히 나오지 않았던 것일까?

#치아3TS 턱이 좁아서 사랑니가 다른 치아에 걸려 완전히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모습이었다.
.

#가리키고 유골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던 중 취재팀은 이상한 점을 또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여인의 윗 턱에는 사랑니가 보이질 않았다. 턱뼈 속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화면전환,자막나오면 사랑니 하나로 그 사람의 나이를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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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기는10 공주박물관의 협조로 무령왕비의 어금니를 정밀 검사해 보기로 했다.

#현미경보는6 치아가 너무 작아 백 배율 이상의 현미경으로 어금니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했다.
(M)
#치아타이트6 왕비의 어금니는 한쪽이 파손되긴 했지만 비교적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였다.
(M)

#뒷면3 치아의 뒷면 역시 썩은 흔적이 전혀 없었다.

#앞면 그런데 치아의 윗면을 자세히 살펴본 결과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치아비교15(자막나오고) 보통 성인의 어금니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일반적으로 치아 윗면에 뾰족한 교두는 5개 정도인데, 무령왕비의 경우는 그 개수를 셀 수 없는 기형의 모습이었다.

#이승표박사int(서울대치대 구강해부학)
(형태를 보면 일반적인 정상적인 형태의 사람의 치아는 아닙니다.

제대로 성장이 되지 않은 말하자면 사랑니에 가까운 치아라고 보여집니다.)

#토론 무령왕릉 어금니가 사랑니라는 점은 대부분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어금니가 턱뼈 속에 들어있어서 하나만 남았다는 것에 대해 의문이 제기됐다.

#전문의INT(원래 다 남아있었는데 요것만 남아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클것같아요)
=M=

#뼈보이기시작하면13 사람이 죽고 나서, 가장 오랫동안 썩지 않고 남는 것이 뼈와 치아다.

#무덤 그 중에서도 치아가가장 오래 남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턱뼈11 치아는 같은 성분으로 되어 있다.그래서 남을 경우, 여러 개가 같이 남게된다.

#법랑질C/G 그 중에서도 법랑질이 가장 오래 남는 것으로 되어있다.
만일 무령왕릉에서 여러 개의 치아가 남았다면 무령왕비의 나이를 17세라고 추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승표박사INT(치아의 구조가 일반적인 뼈보다 더 강도가 높고.. 훨씬 더 오래 보존됩니다.

다른 여러 치아와 함께 남아있어야 될 것으로 생각이 되어지는데 이 치아도 보면은 상당히 심하게 훼손 되어져있고 아주 약한

상탭니다. 그래서 조금만 외력이 가해져도 물론 이 치아도 파손이 되어졌구요.

그래서 아마 다른 치아도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게 어떤 인위적인 힘에 의해서 손상이 되어진게 아닐까)

=M=
#치아,파손그래픽11 무령왕릉에선 이빨이 여러 개 남았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 쪽이 떨어져나간 무령왕비의 어금니라는 것이다.
무덤 속에서 법랑질만 남은 치아는 핀셋으로만 건드려도 쉽게 부서질 수 있는 것이었다.

만일 이빨이 여러 개 남아있었다면 잇몸 속에 남아있던 사랑니로 볼 수 없고 당연히 17세로 추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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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3>

#무덤에서 지석앞쪽으로 걸어나와 옆에 서고(25")
어금니를 정밀 분석한 결과, 무령왕비는 나이가 들어서도 사랑니가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령왕비의 나이를 17세로 보기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오히려 무령왕릉 발굴보고서처럼 30대일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무령왕비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는 다른 '단서'는 없는 것일까요?

#MC 옆에 지석 떠오르고그 하나의 단서가 바로 무덤에서 나온 '지석'입니다

#(MC, 지석 쳐다보고, 글자 '수종' 나오고/ 손으로 가리키며 멘트).
이 지석에는 왕비의 죽음을 '수종(壽終)'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종이란 어떤 경우에 쓰는 말일까요?

#노사왈수종, 글자나오고
10세기 경, 중국 후한시대의 용어 해설집, '석명'에는 '노사왈수종(老死曰壽終)', 즉 늙어 죽었을 경우에 수종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늙어 죽은 나이를 몇 살로 봐야할지는 정확하게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30세는 넘는 것으로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금니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VCR-3>----------------------------------------------------------
<어금니의 주인공은 성왕의 어머니였다.>

=M=
#무덤안개15 고대인들이 죽어서 그 흔적을 남기는 곳이 무덤이다.
죽은 자의 생활공간이었던 무덤 속에는 살아 생전 삶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기 마련이다.

#무덤안팬7 무령왕릉에도 무덤 주인의 생전의 모습과 신분을 말해주는 유물이 있다. 바로 지석이다.

#지석판글씨보이면 왕비의 신분과 내력을 말해주는 지석에는 "백제국 왕태비 수종", 즉 백제국 왕태비가 돌아가셨다고 적고 있다.
#태비노란글씨 여기서 '태비'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이도학교수INT
(무령왕비의 지석, 매지권에 보면 백제국 왕태비라고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태비라는 것은 백제 성왕의 어머니를 가르키는 호칭이 되겠구요. 백제왕을 태왕, 대왕이라고 불렀는데 왕비를 가리키는 호칭으로서

돌아가신 다음에 태비라는 호칭이 부여된 사실이 확인됨)


#무덤내부,관색바뀔때9 무령왕과 함께 묻힌 어금니의 주인공인 태비, 태비는 바로 성왕의 어머니였다.

#삼국사기20 삼국사기에는 성왕의 출신 내력을 알아 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빛들어가고 백제본기 성왕조에는 성왕을 무령왕의 '지자'라고 적고 있다.

왕의 뒤를 이은 성왕을 왜 장자나 태자라고 기록하지 않았던 것일까

#김인숙박사INT(일반적으로 장자, 적자로 얘기..

이것은 정식의 처에서 난 아들. 첩들의 아들은 서자. 정식의 처에서 난 첫째아들이 장자. 나머지 아들들이 지자)

#천둥10 (천둥듣고) 성왕은 무령왕의 장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령왕비의 큰 아들이 따로 존재했었던 것일까?

#장자20 또 다른 장자의 존재 여부는무령왕비의 나이를 추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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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황궁15(자막나온후멘트)
지난 2001년 12월, 일본 천황궁에서는이례적인 기자회견이 있었다.

뜻밖에도 무령왕의 후손에 대한 존재는 일본천황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다.


#아키히토 일본천황int
("나 자신으로서는 환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 인연을 느낍니다." )

=M=
#인사사진 천황의 혈통고백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천황가에 백제 무령왕 후손의 피가흐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M=


#속일본기9(자막) 무령왕의 장자로 추정되는 순타태자에 관한 기록은'속일본기'에 전한다.

#글씨나온후15 속일본기에는 순타태자를 무령왕의 후손이라고기록하고 있다.
순타가 태자라면 당연히 무령왕의 장자로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순타태자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마을5 도쿄 외곽에 있는 조그마한 주택단지. 바로 이곳에는 고야신립의 묘지를 알려주는 팻말이 있다.

#이근우교수현장음(환무천황의 어머니인...다가노 니가사의 무덤으로 가는길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대나무숲11 고야신립의 무덤으로 가는 길은 한적한 곳이었다.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조그만 야산, 이세코우산이의 정상에는 무령왕의 후손이 잠들어 있었다..

#묘지틸다운8 묘지에는 일본 49대 '광인천황의 황후가 고야신립'이라고 적혀있다.

#얘기하는20 이곳에서 만난 이노우에 교수, 일본 고대 정치사를 전공한 그는 무령왕의 후손인 고야신립에 관해서많은 연구를

해온 사람이다..

고야신립의 무덤은 오랫동안 방치됐다가 1800년 대 말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가 됐다고 한다.

#이노우에 교수 인터뷰(고야신립은 환무천황의 어머니입니다. 아버지는 광인천황인데요 아버지가 백제계 도래인입니다 )

#팬해서 대지신사모습보이면5 무령왕의 후손인 고야신립이 잠들어있는 곳은 옛지명으로 '대지'라는 곳이다.

#줌인 순타태자는 바로 이곳에서 후손을 남겼던 것일까?
그러나 이노우에 교수는 이 곳은 고야신립의 백제계 아버지가 아닌 일본계 어머니들이 살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령왕의 후손들은 어디에서 살았던 것일까?

#,찾아가는14 무령왕 후손의 존재와 거주지를 확인해보기
위해서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 우에다 마사아끼 교수를 찾았다..

#우에다, 신찬성씨록17 우에다 교수는 일본에서 두 권 밖에 없는 가장 오래 된 족보책, 신찬성씨록의 필사본을 가지고 있다.

#신찬성씨록책보이면 신찬성씨록은 고대 일본 귀족들의 출신내력을 상세히 적고있는 책이다.

#책내용보이면 신찬성씨록에는 고야신립의 아버지 성씨가 화씨이고 바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러나 어디에 거주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과연 무령왕의 후손들은 어디에서 살았던 것일까? .


#우에다교수INT
( 화씨의 근거지는 야마토지방이다. 즉 해구리군인데 이곳의 현재지명은 왕사정 오지역 부근이다.

그 주변엔 화씨들이 모시던 구도신이 있는데 일본에선 희귀한 신이다. 구도신이라는 것은 일본에선 화덕, 구들을 뜻한다.

아마도 구도신은 백제와 연관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도 구도신사가 존재합니다..)

#찾아가는10(자막나오면)
오사카에서 나라로 가는 교통의 길목에 자리한 왕사정, 이곳의 시내 한 복판엔 구도신사가 있다.

#신사내부 구도 신사는 주인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곳에서 무령왕과 관련된 것을 전해주는 것은아무것도 없었다.

#현판TS 단지 이 신사의 유래에 관한 것만이 현판에 적혀있었다.
이곳에선 모시던 신과 사람들이 모두 교토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덕유향22 신사의 이름까지도 '덕유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저녁 무렵, 직장에서 돌아온 관리인을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관리인에게 무령왕의 후손에 대해 물어봤으나 모든 것이 교토로 옮겨가서 이곳에선 전혀 알 수 없다고 한다.

=M=
#지도22
(구도신사->평성경->히라노신사)
무령왕의 후손들은 처음엔 구도신사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일본의 고대수도였던, 나라 지역의 평성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다시 교토의 히라노 신사로  옮겨갔던 것이다..

#히라노신사10(자막나올 때)
교토 도심에 자리한 히라노신사. 이곳은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중에 하나다.
무령왕의 후손 고야신립이 그 조상신을 모신 곳이다.
그런데 무령왕의 조상신이 어떻게 이곳에 모셔졌을까?

#사적기 7 히라노 신사의 유래를 말해주는 사적기는 총 5권으로 되어있었다.
이 신사의 사적기가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글씨보이면 사적기에는 이 곳에 신사가 있게된 연유가 적혀있었다.
8세기 초, 무령왕의 후손이었던 고야신립의 아들 환무천황이 수도를 옮기면서 모시게 된 것이었다.

#INT( 나라에서 이쪽으로 옮겨왔습니다. 황태자들이 직접 모시는 신으로 이곳엔 모두 4명의 신을 모시고 있다. .... )

#히라노신사,
히라노 신사에는 백제계 신들을 모시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넘어간 도래인을 나타내는 이마끼신을 모시고 있었고, 무령왕의 후손과 관련된 구도신을 모시고 있었다..


#고목 일본 천황가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백제인들의 존재,
무령왕은 어떻게 일본에 그 후손들을 남길 수 있었을까?

#일본서기 일본서기에는 무령왕의 출생에 관한 비밀이 담겨져있다.

#축자각라도글씨보이면 무령왕이 바로 일본땅, 가카라시마라는 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파도,지도 가카라시마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해상 교통로 상에 위치한 조그만 섬이다

#마을 백 여가구 남짓 모여 사는 가카라시마에는 지금도 무령왕이 태어난 전설을 말해주는 동굴이 있다.

#틸업해서 글자보이면 백제 25대왕 무령왕의 탄생지라는 팻말까지 만들어 놓은 가카라시마,
무령왕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무령왕이 가카라시마에서 태어난 후 40세까지의 행적은 묘연하다

#바위새 그런데 일본땅에 무령왕의 후손들이 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령왕은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하며 결혼해 후손을 남겼던 것일까

#김현구교수INT
(일본의 50대 환무천황의 어머니가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자손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순타태자는 ..뒤집어서 얘기하면 무령왕은 일본에서 자손을 얻었다.

일본에서 성장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겁니다.)

=M=
#일본서기 책속지 보이면 무령왕이 일본에서 성장하며 결혼해 첫째부인과의 사이에 자손을 남겼음을 말해주는 것이 바로

순타태자의 존재다.

#일본서기
일본서기에는 순타태자가 513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무령왕이 53세쯤에 태자 순타는 후손을 남기고 죽은 것이다.
죽었을 때 나이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적어도 30세쯤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순타태자는 무령왕이 20세 쯤에 결혼한 첫째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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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4>

#MC, 문쪽에서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그 동안, 무령왕이 왕이 되기 전 40세까지의 행적은 베일에 싸여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추적과정을 통해 무령왕이 일본에서 거주하면서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장자인 순타태자를 낳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계도 나오고

첫째부인=========??=========어금니 주인공
(- ?) (? - 526)
│ │
순타태자 성왕
(- 513년 사망) (? - 554사망)


자 무령왕의 가계를 한 번 정리해 볼까요?
무령왕이 젊은 시절에 결혼한 부인이 바로 첫째부인이고 그 아들이 순타태자입니다.

그리고 무령왕과 어금니의 주인공 사이에 난 아들이 성왕입니다.
이 어금니의 주인공이 첫째부인인지 아닌지는 아직까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순타가 태자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순타의 어머니가 첫째왕비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령왕비가 순타의 어머니였을까요?


<VCR-4>----------------------------------------------------------
무령왕비는 첫째부인일까

#성문 보이면26 무령왕비가 돌아가시던 해는 서기 523년 12월.겨울이었다.
무령왕이 승하하고 삼 년만의 일이었다. 돌아가셨을 때 나이에 대한 기록이 없어 무령왕의 첫째부인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왕비의 나이를 추정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일본서기14 일본서기에는 무령왕비의 아들 성왕의 죽음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다.
성왕은 554년, 관산성에서 위험에 처한 아들을 구하려다가 처절한 최후를 맞는다.

#여창29세글자나올때 이때 성왕의 아들 '창', 즉 위덕왕의 나이가 29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글자빠진후 보통 20세 정도에 자식을 낳았다고 보고 무령왕비의 나이를 추정해 봤다.

<도표>

무령왕비는 504년에 성왕을 낳았고돌아가실 때 나이는 42세 정도로,첫째부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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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촬영13(자막나오면)
무령왕비가 잠들어있는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비가 첫째부인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송산리 고분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은 다른 곳의 무덤과는 달리 독특한 모습을 하고있다
무덤이 아주 가깝게 모여있다는 점이다.

#고분군자막나오면 북쪽에 있는 무령왕릉을 중심으로 왕릉 주변에는 세 개의 무덤이 삼각형 모양으로 배치되어있다.
대략 10미터 간격으로 붙어있는데 왜 이 무덤들은 이렇게 가까이 모여있는 것일까?

#권오영교수int
(송산리 고분에 묻혀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왕족들로 생각됩니다. 가족묘다... 남조에서도 아주 흔하게 보이는 현상이 되겠습니다.)

#무덤줌인(16)(4초후) 무령왕릉과 함께 모여있는 이 세 개의 무덤은 무령왕과 혈연관계가 있는 가족들의 무덤이다.

#무령왕릉6호분자막나오면 그 중에서도 무령왕릉과 무덤의 구조나 만든 방식이 가장 흡사한 무덤이 있다. 바로 6호분이다.

#내부모습보이면 송산리 6호분의 내부를 들어가 보면 이곳 역시 무령왕릉처럼 벽돌로 쌓아 만든 무덤임을 알 수 있다.

#EFFECT(완전히 연꽃 무늬 벽돌...거의 전문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죠. 현실과 연도의 전문은)

#벽돌비교12 무령왕릉과 차이점이 있다면 벽돌의 문양이다.
연꽃무늬가 아닌 오수전 문양으로 만들어진 이 6호분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박용진박사INT
(중국의 경우도 전문전이 앞서고 연꽃 무늬 벽돌이 뒤에 쓰인 걸고 돼 있습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선 전문전과 연화문전을 같이 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딱히 어느 것이 앞이고 뒤냐는 어려워도...

무령왕릉에 오수전 하나 들어가 있어. ... 6호분이 먼저 만들어지고, 나중에 무령왕릉이 만들어진 걸로 구분해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내부 팬20 무령왕릉보다 먼저 만들어진 6호분은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왕의 무덤을 말해주는 사신도의 흔적까지 남아있다는 점이다.
벽화의 흔적까지 있는 것으로 봐 예사로운 무덤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6호분옛모습 그런데 6호 분은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부부합장을 위해 두 개의 관 대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만 있다는 점이다

#관대한개만 보일때 왜 이 무덤에는 관대가 하나만 남아있었던 것일까?

#이남석교수EFFECT
(묘실 내부에다가 관대를 만들 경우, 시신 숫자대로 만드는데 여기는 한 대만 한 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두 사람이 들어와야 되는데 우선 한 사람 여기에다 놓고 나머지는 다음에 들어올 사람을 위해 빈 공간으로 놔 둔 것입니다.

그런데 못 들어왔죠)


#무덤단면5 웅진 시대 무덤의 특징은 부부가 함께 묻히는 합장묘였다.

#글씨자막나오면13 무덤 구조를 자세히 보면 무덤방으로 들어가기 위한 길, 즉 연도가 있고, 관이 놓이는 현실에는 관 대가 두 개

있었다.

#문나오는17 부부합장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무덤의 입구에는 문이 있었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죽으면 먼저 관을 무덤 속에 넣고 문을 임시로 막아놓았다.
그리고 다음 사람이 죽으면 문을 열고 함께 시신을 안치했던 것이다

#관대하나14 그런데 6호분은 한 사람만 들어온 상태에서 입구가 폐쇄됐다
그래서 관대가 하나만 놓이게 된 것이다.
왜 6호분에는 부부 중 다른 한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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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촬영11(5초후) 6호분의 주인공을 알기 위해서는무령왕의 가족묘 외부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걸어오는17 무덤에서 묻힌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는 것은무덤의 위치이다.
(2초후)
무령왕릉은 가족묘 중에서도 뒤쪽에 자리하고 있어 무령왕이 신분이 제일 높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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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사진26 그런데 무령왕릉이 발굴되기 전 옛사진을 보면 그 중심이 되는 무덤은 6호 분이었다.

#화면옛사진으로 바뀌면 (음악)1940년대까지만 해도 풍수지리상 무령왕릉은 단일무덤이 아니라 6호 분을 보호하기 위한 배총으로

여겨졌다.

#전사진 당연히 최상의 자리는 6호 분이었고 왕이 묻힐 무덤이었던 것이다.
(음악)
#흑백사진+연화문전나온후13 무령왕과 6호분의 피장자를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는6호 분의 입구를 막은 벽돌이었다.

무령왕릉에서 사용된 연화문전으로 입구를 막은 것이다.
왜 입구를 무령왕릉의 연화문전으로 막은 것이었을까?

#이남석교수INT
(6호분의 내용 중에서 입구 막은 걸 보면 여긴 또 무령왕릉의 벽돌이 들어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6호분이 먼저 만들어진 상황에서 무령왕릉이 만들어진 겁니다. 무령왕릉 만들면서 6호분의 입구를 막아버렸다는거죠.

이건 6호분에 묻힌 사람하고 무령왕릉에 묻힌 사람하고 어떤 관계가 있어서 그 관계 속에서 6호분을 사용할려다가 안되니까

무령왕릉을 황급하게 만들어 놓고 6호분의 입구를 만들었기 때문에 무령왕릉은 좀 엉성하게 된거죠)

#갈라진 벽돌로14(자막빠진후)
화려한 연꽃무늬로 장식된 무령왕릉,그러나 자세히 보면 부실공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가리키고 벽돌이 깨지고 부서진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천정 무령왕릉은 왕의 무덤임에도 불구하고 급하게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왜 무령왕릉은 이렇게 급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6호분관대보이면27 무령왕릉이 급하게 만들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 6호분이다.

6호분은 무령왕릉처럼 화려함은 없지만 정성을 들여 쌓았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무령왕릉보다 더 일찍 만들어진 무덤임에도 불구하고 벽돌이 갈라지거나 깨진 흔적이 거의 없다.

무령왕은 혹시 자신과 첫째부인이 함께 묻힐 수 있도록 6호분에 정성을 들였던 것은 아닐까?


#이남석교수INT
(적어도 무령왕릉이나 6호분이 왕릉급 무덤인데 왕릉급 무덤은 정성들여 쌓아야 하는데, 하나는 쌓는 방식에 좀 문제가 있고,

하나는 정교하게 쌓았다.

시간적 관계에서도 문제가 생기는데, 여유를 가지고 쌓은 것이 앞부분에 무령왕이 자기의 어떤 관계에서 저는 부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부인의 무덤, 혹은 자기의 무덤이니까요

그래서 정성을 들여 쌓은 반면에 뒤는 무령왕 앞에 있는 6호분을 폐쇄하면서 황급히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구조적인 문제점이

발생하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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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초후)
#무덤군16 무령왕릉과 천 오 백년을 함께 해온세 개의 가족무덤, 원래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은 6호 분이었다

#화면디졸브 첫째부인은 6호분에 잠든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령왕비는 첫째부인이 아닐 것이다.

#시신7 523년 무령왕은 62세로 승하했다.
무령왕은 6호분에 묻히지 않고새로운 왕릉을 만들어 그 곳에 모셔졌다..

#6호분입구10 그리고 6호 분엔 관 대가 하나만 홀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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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5>

어금니의 주인공은 첫째부인이 아니었습니다.
첫째 부인이 언제 죽어 6호분에 묻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무덤을 만든 시기로 볼 때 무령왕보다 먼저 죽은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순타태자가 죽고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이 자신의 어머니와 무령왕을 합장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령왕과 함께 잠든 어금니의 주인공은 어떤 여인이었까요?
무령왕비의 신분을 말해주는 유물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생전에 끼던 팔찌입니다.

#탁자 위에 팔찌 들고아주 화려한 용문양이 새겨진 은팔찌인데요
제가 한 번 껴볼까요?(시도해보고)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상당히 작은 팔찌입니다.
이 팔찌로 보면 왕비는 손목이 아주 가는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부인' 글씨
그런데 팔찌 안쪽을 보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대부인'이라는 호칭이 눈에 띕니다.
무령왕비는 생전에 대부인으로 불렸다는 것을 말해주는데요
왜 '왕비'에게 '대부인'이라고 했던 것일까요?

<VCR-5>----------------------------------------------------------
(살아서는 대부인, 죽어서는 태비가 된 여인)

#무덤내부팬11 무령왕릉에선 왕과 왕비가 살아 생전에 사용하고 아끼던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왕관,팔찌9 그 중에 왕비의 신분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결정적인 하나의 단서가 있었다. 바로 '팔찌'였다.

#팔찌클로즈업26 용 두 마리가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는 팔찌의 안쪽에는팔찌를 만든 연유가 적혀있다.

(보고)
#글씨나온 후30 서기 520년, 경자년 2월에 <다리라는 장인이 '대부인'을 위해 만들었다>고 적혀있는 팔찌는 왕비가 돌아가시기

6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대부인글자12 살아 생전에 애용했던 이 팔찌에 '대부인'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무령왕비는 살아 생전에 왕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찌엔 대부인으로 적혀있다. 왜 대부인이라고 했던 것일까?

#성주탁교수int
(한서 왕망전에 보면 대부인이라는 뜻은 정실부인을 대부인이라 했고, 그것도 세자를 둔 부인을 대부인이라고 했다고 쓰여있다.)

#일본서기책내용 보이면5 '대부인'이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지는 일본서기에도 엿 볼 수가 있다.
.
#군대부인글자나온후18 (제명천황 6년 10월조) 일본서기 제명 6년조엔백제의 멸망의 원인을 군대부인 요녀가 무도해서라고 적고

있다. 군대부인은 의자왕이 정비가 죽고 나서 새로 얻은 왕비, 즉 계비였던 '은고'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대부인'은 어떤 의미였을까?

#김현구교수int
(군대부인의 '군'은 백제에서 군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유력한 호족을 얘기하는게 아닌가 생각되고 대부인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부인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대부인이라는 것을 쓴 것을 보면 부인 중에서 품계가 높은 부인, 즉 아들 왕자을 생산한 부인을

얘기하는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됩니다.

이 경우엔 아들 융을 생산했기 때문에 대부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문
#복도15 구중 궁궐의 안채를 차지했던 것은 왕의 부인들이었다.
여러 명의 부인 중에서도 대부인은 왕의 후계자를 낳은 부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팔찌에서 글자 나오고7 팔찌의 주인공인 무령왕비도 계비였다. 그리고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대부인으로

불렸던 것이다.

#궁궐, 왕비7 그렇다면 왜 성왕의 어머니는생전에 왕비로 불리지 않고 부인이라고 했던 것일까?

#고서9 왕비임에도 불구하고 부인으로 불린 사례를 찾아보기로 했다.

일본서기에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일본서기5 고대 일본에서는 왕비이면서도 '왕비'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못하고 '부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예가 있다.

#갈성한원14 청령천황의 어머니를 '황태부인'으로 적고 있는 것이다.
다른 천황의 어머니와는 달리 '황태후'라 하지 않고 '황태부인'이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서치별천황 그 답을 서치별 천황의 경우가 말해주고 있다.
서치별 천황은 '목'씨라는 호족출신의 딸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황부인'으로 한다고기록하고 있다.

#김현구교수INT(일본은 황족 출신은 '비'나 '후'로 쓰고 호족 출신의 왕비는 '부인'이었다.)

#팔찌5 무령왕비가생전에 대부인으로 불렸던 이유,

#왕비실루엣10 그것은 일본의 사례처럼,무령왕비가 신분상 호족 출신의 딸이었기 때문에 왕비라는 호칭을 쓰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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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11 왕비의 신분에 대해 또 하나 말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지석에 쓰인 '수종'이다.
'수종'은 천수를 다하고 늙어 돌아가셨다는 뜻이다.

#관빠지고23(3초후)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죽었을 때의 기록이다.

보통 황제의 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표현은 '붕',왕비의 죽음에는 '훙(薨)'으로 기록된다.
그리고 제후의 죽음은 '졸'을 쓰고 평민의 경우는 '사'를 써 그 표현에 있어서도 신분상 차등을 두었다.
(음악)



#화면움직이고18 지석에서는 무령왕의 죽음을 황제의 경우처럼 '붕'으로 기록했다.
그런데 무령왕비는 왕비의 죽음을 나타내는'훙'을 쓰지 않았다.
그 어떤 공식적인 죽음의 표현에 해당되지 않는'수종'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성주탁교수int
(수종이라고 하는의미는 붕자 못지 않게 가장 천수를 했다는 표현이어서 격이 높은 표현... 다만 문학적인 표현이다.

 이렇게 해석을 할수 있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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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여인정리그림30 여인의 신분은 남편과 아들에 의해서 달라진다.
무령왕비는 성왕의 어머니였다
무령왕이 40세 이후에 왕으로 등극한 후 얻은 아내였다.
무령왕비는 신분상 살아서는 왕비로 불리지 못하고 대부인으로 불렸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죽어서야 아들 성왕에 의해 '태비'로 기록됐던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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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6>【클로징】

백제 중흥을 이룩했던 무령왕,
그는 키가 8척 장신에다가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성품이 인자관후하여 백성들에게도 많은 신임을 얻었던 왕이었습니다.

그 무령왕과 함께 잠든 어금니의 주인공은무령왕의 둘째부인, 즉 성왕의 어머니로. 나이는 40대 초반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었습니다.
발굴 당시부터 논란이 돼 온 무령왕릉 어금니 한 개,
오늘 우리는 그 주인공을 추적하면서 이면에 숨겨진 무령왕의 가족사를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무령왕은 일본에서 태어나 백제의 왕이 되기까지 40년의 행적이 묘연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추적과정을 통해 흥미롭게도 무령왕은 일본에서 성장하고 결혼까지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황실에도 무령왕 후손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 한일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무령왕은 일본에서 왜왕으로 있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곤 했는데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좀 더 힘을 실어주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일고대사에 있어서 무령왕만큼 중요한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여전히 많은 의문과 미스터리로 얽혀 있는 한일 고대사의 진실, 무령왕의 가족관계가 제대로 밝혀진다면 그 실체가 좀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까요?
그것이 오늘 우리가 무령왕릉 어금니 한 개의 비밀을 풀어본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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