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R원고 ▶ 방송예정일: 2003년 3월 29일 / 담당PD: 리호경 / 작가: 김경민
V I D E O A U D I O
프롤로그
-큐슈 향추묘로 달려들어가는 5 762년, 일본 향추묘-
-안으로 줌인되는 8 한 때 신라를 정벌했다는 신공황후가 모셔진 이 곳에, 일본은 오랜 숙원을 이룰 특별한
-보고하는 일본인으로 팬 9 계획을 보고한다. 기필코 신라를 정벌하리라, 올해 신라를 침공해 반드시 승리하리라-
-기도하다, 종이 던지고 손뼉치는 9 (보고-)
-신라정벌 글씨로 줌인 6 762년, 일본은 신라를 침공할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불타는 그래픽 7 그 전쟁의 야욕을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음악 듣다가-)
역사발굴! 일본의 신라침공, 발해가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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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1 762년, 일본은 신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후쿠오카 지도와 거리 6 일본 큐슈의 후쿠오카시- 우리나라 부산과 자매도시를 맺을 만큼
-사람들 4 한반도 남해와 가까이 있는 도시다.
-이토성 가는 길 TR 6 그런데 이 도시의 서쪽 외곽 지역에 8세기의 중요한 유적이 하나 남아있다.
-정문터 앞에 서있는 취재진 팬 7 (좀 보다가-)
후쿠오카와 이웃도시인 마에바라시에 걸쳐 있는 오래된 성터-
-기념비의 속일본기로 줌인 4 성문터에 세워진 비석은 이 성이
-내용에 핀조명 (이토성 756년) 3 756년부터 쌓았던 이토성이라고 전한다.
-성따라가다가 취재진으로 11 이토성은 다양한 축성법으로 만들어진 성이다.
먼저 지형 지물을 이용할 수 있는 부분들은 그대로 산을 깎고,
-성위로 틸업 8 지반이 약한 곳은 돌을 사용했다. 그리고 평지나 산세가 낮은 지대는 흙을 다져 겹겹이 쌓아 올렸다
-우리우히데후미 인터뷰 =성벽 바깥을 15미터폭의 해자가 둘러싸고 있었다는 것이 조사
(마에바라시교육위원회) 결과 확인되었습니다. 깊이는 2-3미터 정도고요
=이 성벽은 산전체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성벽의 원래 높이는 10미터 정도고, 산정상에서 평지까지 빙 둘러싸는 성이었습니다.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7 10미터의 높이로 산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이토성-
-돌로 쌓여있는 부분 8 8세기, 현해탄과 접해있는 후쿠오카 서부에
이 성을 쌓았던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을까?
-우리우히데후미 인터뷰 =이토성의 북쪽에 '주선사'라는 지명이 남아있습니다.
한자로 주선사라고 해서 고대에는 군함을 집합시키는 관청이었습니다.
이토성 옆에 그런 관청을 설치했던 것은 전쟁수행을 위해서 였다고 추측됩니다.
-그래픽/이토성 있는 반도로 줌인 5 (보고-)
-성, 평지와 산을 둘러싸고 바다로 20 756년, 후쿠오카의 작은 반도에 세워진 이토성은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만들어진
병참기지였던 것이다.
-차 트래킹 6 그런데 6년전, 이토성에서 4km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이상한 유적이 발견됐다.
-모토오카 쿠와바라 유적발굴현장 7 발견당시, 일본 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모토오카 쿠와바라 유적 발굴현장-
-측정하는 모습 5 큐슈 최초의 제철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피디와 이야기하는 관계자 풀샷 4 발굴현장 곳곳에는 고대에 철을 만들었던
-제철로 TS (6+4) 10 흔적들이 확인된다. 사철을 녹여 철과 불순물을 분리하던 용광로들- 고대 이곳은 철을 대량으로 만들어내던
제철공장이었다.
-발굴작업하는 뒷모습 풀샷 3 이토성 가까이에서 발견된 제철유적-
-불순물 씻어내는 3 그런데 현장에서 발견된 불순물을 조사해본 결과,
-출토된 불순물 덩어리들 5 이토성의 축성시기와 동일한 것으로 확인됐다.
-스가와라 마사토 인터뷰 =6년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여러 가지 출토품이 발굴되고 (후쿠오카시 교육위원회) 있습니다.
이곳은 나라시대의 제철소가 있었던 곳으로 옆에 있는 이토성과 같은 시기의 유적입니다.
아마도 이곳에서 만든 철 로 무기를 만들어 이토성에 공급했던 걸로 판단됩니다.
-화살촉 출토유물 10 뿐만 아니라, 발굴현장에서는 화살촉이나 철검같은 무기류도 발견되어, 제철공장 옆에는 무기를 만들던 공장도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철검 9 추측된다. 당시 일본은 분명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시 지도와 동대사 5 이토성과 제철공장이 세워졌던 8세기는 일본의 나라시대-
-수학여행 온 아이들 5 지금의 나라시가 당시의 수도였다.
-평성궁터 트래킹 7 나라시대에 일본은 중국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을(나라시대 710-784의 수도) 본떠 평성경이라는 계획도시를
건설하였다.
-터에서 발굴현장으로 팬 8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평성궁터-
이곳은 지금도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발굴작업하는 사람들 풀샷 5 올해로 48년째- 하지만 일본은
-한사람 자세히 도안을 그리는 6 앞으로 5,60년을 더 내다보는 장기적인 발굴계획을 가지고 있다.
-나라문화재연구소 외경 4 평성궁터 옆에 자리잡은 나라문화재 연구소에는
-복원작업하는 사람들 8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발굴작업을 기획하고, 조사결과를 연구하고 있다.
-발굴현장에서 나온 유물들 6 (보다가-)
발굴현장에서 발견된 출토품은 아무리 작고
-콜라병 줌인 5 사고한 것이라도 그냥 버려지지 않는다.
-한 연구원 작업하는 5 평성궁 유적은 천삼백년전, 8세기 나라시대의
-목간 글씨 TS 6 비밀을 풀어줄 중요한 보고인 것이다.
-와타나베 아키히로 인터뷰 =이곳이 수도였던 시기는 710년부터 75년간입니다.
7세기 말부(나라문화재연구소 조사실장) 터 받아들인 율령제국가에 걸맞는 수도를 만들기 위해 당의 장 안성을 모델로 했습니다.
나라시대는 율령제하에서 화려한 귀족 문화를 꽃피운 시대로 유명합니다.
-주작문(평성궁의 정문) 10 나라시대는 율령정치를 선포하며 화려한 귀족문화를 꽃피웠다. 그 평화로운 시대에
-금색 풍경 흔들리는 4 일본은 왜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들고 있었던 것일까?
-트래킹 5 과연 그 전쟁은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
-일본 국회도서관 외경 4 (흘리고-)
-서고 달리 7 8세기 중반의 나라시대-
일본에서는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속일본기 찾는 9 당시의 사료들에서 그 단서를 찾아보기로 했다.
(이하 보고-)
-속일본기로 줌인 8 나라시대의 정통 역사서인 속일본기-
(697-791년의 역사서) 그런데 그 곳에서 이상한 기록들이 발견된다.
-761년정월, 미노, 무사시지역의 13 761년 정월, 일본은 갑자기 정부차원에서 소년 각각 20명씩에게 미노와 무사시 지역의
소년들을 선발해 신라어를 가르치게 하고 있다.
-759년8월, 배500척을 8 그리고 그보다 2년전인 759년에는 전국에 명해 만들도록 명령했다.
500척의 배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린바 있다.
-지역할당 기록 틸다운 7 지역마다 구체적인 수까지 할당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래픽/ 북륙도 89척, 21 7개의 도 가운데 북륙도에 89척, 산음도에 145척, 산음도 145척, 산양도 161척 산양도에 161척,
남해도에 105척 씩 5개 도에 남해도 105척 나누어 한가한 달마다 꾸준히 만들라고 했다.
-삼년지내(3년안에 완성하라) 6 그런데, 그 배들의 완성시기는 삼년 안이라고
못박고 있다. 759년부터 3년 후인, 762년-
-762년 자막 발생 5 일본은 그해 무슨 일을 벌이려고 했을까?
-교수실 문열고 들어가는 14(5) (잠시 보다가-)
-교수 만나는 당시 일본이 급하게 배를 만들었던 목적에 대해 알아보기위해 일본고대사 연구가인 사카요리 마사시 교수-를 만났다.
-사카요리 마사시 인터뷰 =500척을 만든다는 것은 일본 고대에서 예가 없었던 엄청난 계(국학원이바라기 대학) 획입니다.
국내에서 싸우기 위해 배를 500척이나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대외전쟁을 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만들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행군식/ 전쟁세부계획안 기록 9 사카요리 교수의 말대로 그 무렵, 속일본기에는일본이 전쟁세부계획안까지 만들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장차 신라를 정벌하기 위함이다 9 그리고 그 목적이 장차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명시돼 있다.
-인터뷰 =속일본기라는 역사책은 나라시대를 통해 국가에서 편찬한 책
으로서 신빙성이 높습니다. 특히 신라정벌계획은 내용이 자세하 고 준비단계도 확연해서 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픽/일본 배들 바닷가에 정열 30 (보다가-)
756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온 일본의 전쟁 프로젝트-
(한참 보다가-)
그것은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일본의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침공 준비는 -762년 자막 4 762년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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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2 일본은 왜 신라를 침공하려고 했나?
-후쿠오카 트래킹 5 속일본기에서 향추묘라 부르는 곳은 후쿠오카에
-향추궁 정문 5 남아있는 오래된 신사, 향추궁을 가리킨다.
-건물 풀샷 5 이곳은 3세기 전설의 영웅이었던 신공황후가 모셔진 신사다.
-귀신을 쫓듯 휘젓는 4 (보고-)
-악기 연주하는 19 (보다가-)
고대 일본은 신라와 크고 작은 분쟁이 생길 때마다 이곳 향추궁에 와서 일일이 보고하고 신라에 대한 처벌을 기원했다.
-제사 준비하는 풀샷 9 남장을 하고 신라를 정벌했다는 신공황후의 전설을 역사의 진실로 믿어왔기 때문이었다.
-신공황후 그림에 자막 9 신공황후가 병선을 이끌고 신라로 건너가자,
(신공황후가 바다를 건너자 겁먹은 겁먹은 신라왕이 싸우지도 않고 투항해왔다고
신라왕은 싸우지도 않고 투항해왔다) 전설-
-(그 소식을 들은 고구려 백제왕도 12 신라에 대한 일본의 적개심과 신라정벌이라는 찾아와 조공을 약속했다) 오랜 숙원이 만든
이야기는 아닐까? 하지만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이 전설은 역사적인 사실처럼 일본서기에 기록돼 있다.
-나무 앞에 세워진 팻말 8 향추궁의 앞뜰에 보존돼 있는 한 그루의 나무에도 신공황후의 전설이 내려온다.
-나무로 틸업 10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돌아와 이곳에 지팡이를 꽂자, 가지가 자라고, 뿌리가 생겨나, 지금의 우람한 나무가
됐다는 것이다.
-우에다 코우(향추궁궁사) =바다를 건너 신라에 갔을 때 신라 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도 찾아와 "잘부탁드립니다","잘오셨습니다"라고
신공황후를 반겼습 니다. 그때까지 일본은 외딴 섬나라로 대륙과의 교류는 없었습 니다.
신공황후대에 들어 비로소 대륙과 물꼬를 트이게 되었죠.
-의식을 행하는 9 오랫동안 신라 정벌을 꿈꿔왔던 일본인들에게 신공황후은 전설로나마 숙원을 이룬 영웅이었던 것이다.
-사토 마코토(도쿄대 일본사학과) =신공황후 이야기를 당시 사람들이 전설로 여겼는지 역사적 사실로 여겼는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다만 당시 일본인은 일본서 기를 국정역사교과서로서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다자이후 지도와 트래킹 8 (보다가-)
후쿠오카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다자이후시-
-오노성으로 올라가는(4초후자막) 11 이곳에는 신라에 대한 일본의 적대감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유적이 남아있다.
665년에 세워진 일본 최초의 산성인 오노성-
-돌로 쌓은 산성 팬 10 오노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세워진 일본 최초의산성이다.
석축과 토루를 쌓고 침입이 용이한 계곡에는 석단을 쌓는 기술-
-산성 풀샷 4 이 축성법은 이전의 일본성에서는 볼 수
-돌TS 4 없었는 백제만의 기술이다.
-다카하시 아키라 =665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일본연합군이 패배했을 때 이 (규슈역사자료관 조사과장) 오노성이 지어졌습니다. 전체 둘레 8미터에 걸쳐 흙으로 혹은 계곡이 있는 곳은 돌로 성벽을 둘렀습니다.
나당연합군이 일본 으로 오는 것을 두려워해서 성을 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노성 외 일본산성(10개)그래픽 12 오노성을 시작으로 일본 전역에는 모두 11개의백제식 산성들이 잇따라 세워졌다.
그것은 663년,한 전투에서 생긴 신라에 대한 앙금 때문이었다.
-한반도에서 금강으로 줌인 4 한반도 금강하구의 백촌강-
-663년 백촌강전투 이미지 바다 12 663년, 나당 연합군에게 함락 당한 백제가 일본과손을 잡고 백촌강에서 마지막 재기를 도모했다.
백촌강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은 모두 2만7천여명-
-붉은 바다 7 하지만 일본군은 나당연합군에게 무참하게 패하고신라에 대한 깊은 원한만 가지고 돌아왔다.
-김현구 교수 =663년에 백촌강 싸움에서 일본과 신라가 적대관계에 들어갔다
(고려대 역사교육학과) 가 668년에 고구려 멸망을 앞두고 일시 손을 잡습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된 후 동아시아 전체의 구도가 확정되고부터 신 라와 일본이 서로 긴장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다자이후(대재부)터 팬 11 백촌강 전투에서 패한 직후, 일본은 다자이후라는 지방관청을 설치했다.
다자이후는 신라와 당나라 등의 외국 사신들이 입국할 때 -터 풀샷 6 외교절차를 거치던 곳이다.
-속일본기로 줌인(3)하면 방 각 7 속일본기엔 이 곳에 왔던 신라사신들을 그냥 돌려보낸 몇 차례의 사건들이 기록돼 있다.
-"신라는 말에 믿음이 없고 10 사신을 돌려보낸 이유에 대해서 일본은 신라가 대한 예의가 없다" 말에 믿음이 없고 예의가 없기
때문이라고말한다.
-그래픽/신라사신 방환 10 특히 8세기, 신라와 일본 사이의(738년 방환) 외교마찰 문제는 극대화되고 있었다.
-일본사신 불납 7 신라로 간 일본사신들도 오만하고 무례하다는이유로 왕을 보지 못하고 돌아오기가 수차례-
-서로 쫓겨나는 5 서로 쫓아나고 쫓아내는 외교분쟁이 끊임없이(신라-743년, 760년/일본-753년) 불거졌다.
-경국집 펼쳐지고 8 일본 고대의 한시문집인 경국집- 신라에 대한당시 일본의 극단적인 감정이 담겨있다.
-관리임용시험 18 757년 11월에 시행됐던 관리 임용 시험 문제-
(요즘 신라가 버릇이 없다, 날뛰는 요즘 신라가 버릇이 없다. 날뛰는 고래와 고래와 멧돼지를 잡듯이 신라를 멧돼지를 잡듯이 싸우지
않고 신라를 굴복시킬잡으려고 하는데, 싸우지 않고서도 수 있는 방법을 논하라고 돼있다.
신라를 굴복시킬 수 있는 방법..)
-박석순교수(강원대 일본학과)
=당시 일본에는 중국에서 수입하고 편찬한 율령이라고 하는 이 데올로기적 토대가 있었고 이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신라에
대해서도 번국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신라사절에게도 번 국으로서의 예의를 요구했죠.
신라사절들은 이에 대해서 난 잘 모르겠다. 알바 아니다라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본의 요구에 맞춰주면서 상업적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게 아닌가 합니다.
어쨌든 일본조정은 신라에게 번국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고 신라를 조공국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은 일본조정에게 신라는 잠재 적인
극복 경계의 대상이었고 때로는 적대적인 감정으로 표출 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된다.
-파도치는 바다 17 신공황후의 전설이 내려올 만큼 신라 정벌에 대한 오랜 숙원을 가져온 일본- 백촌강전투와 외교마찰을 겪으며
762년, 마침내 신라를 침략할계획을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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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3 신라침공의 주모자는 후지와라 나카마로였다.
-나라시 풍경 5 (잠시 보다가-)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나라시에는
-정창원으로 들어가는 9 정창원이라는 일본 최대규모의 왕실 유물 창고가 있다.
-정창원 목조건물 풀샷 팬 9 이곳에는 역대 천황이 소장하고 있던 만여점의 유물들이 보관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문으로 틸업 7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외국의 귀중한 유물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유물 도록 함께 살피는 13 정창원은 일년에 백점씩, 단 일주일동안만 일본 황실의 유물을 세상에 공개한다.
취재진은 정창원의 도록을 살피던 중,
-보물 목록 넘기는 10 특이한 목록을 하나 발견했다. 나라시대 황실의 유물을 정창원에 처음으로 수납할 때, 모든 수장품을 일일이
기록해 놓은 목록이다.
-나카마로로 줌인되는 6 그런데 그 목록의 끝에 당시 최고 책임자의 사인이 남아있다.
-후지와라 나카마로 자막 5 바로 후지와라 나카마로라는 인물이다.
-이다 다케히코/정창원조사실 =보물 수장이라는 국가적인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후지와라 나카마로가 사인을 한 것입니다.
-속일본기 기록 11 당시 내상의 자리에 앉아있던, 내상->후지와라나카마로 후지와라나카마로는 일본 조정의 병권을 쥐고
->내외제병사를 장악 흔들만큼 최고의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흥복사 트래킹 8 후지와라 나카마로- 그렇다면 그는 당시 어느 정도의 권세를 떨쳤던 것일까?
-흥복사 5층탑 풀샷 5 평성궁터 바로 옆에 위치한 흥복사-
-불상 9 오직 후지와라 가문만의 번영을 위해 710년 궁궐과 함께 나란히 창건된 사찰이었다.
-츠지묘신 (흥복사) =요즘에야 세상이 좋아져 이렇게 관광객들이 돌아다니지만 옛날에는 일반인이 못 들어오는 후지와라 가문만의
절이었습니다. 오로지 후지와라 가문의 번영만을 위한 절이었습니다.
-건물들에서 팬하면 취재진들 10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집도 평성궁에서 1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나카마로의 집터가 발견된 것은 20년전-
-흑백 발굴 사진 8 거대한 규모의 집터를 발굴조사하며 일본학계는 이곳이 나카마로의 집터였다고 확신했다. 궁궐이나
-주춧돌 8 사찰에서만 사용되던 거대한 주춧돌을 사택에
(자막/후지와라나카마로의집터) 쓸 수 있었던 인물은 나카마로 뿐이었던 것이다.
-출토유물 중 기와하나 들고오는 15 당시 발굴현장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기와막새 문양 TS 7 화려한 연화문이 새겨진 기와막새- 나라시대 천황이 머물던 궁궐에서만 사용하던 문양으로,
-막새 2S 5 개인의 집에서는 감히 쓸 수 없었던 막새다.
-기록(나카마로의 집에서 천황의 9 천황의 처소를 내려다보며 살았다는 나카마로는 처소가 내려다 보인다.) 당시 어린 쥰닝천황을
완전히 휘잡고 있었던 것이다.
-스즈키 야스타미/국학원대학 =나카마로는 당시 쥰닝천황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어 천황을 등에 업고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인물입니다.
-기록/짐(쥰닝천황)은 나카마로를 11 쥰닝천황이 자신의 아버지라 여길만큼 나카마로의 위세가 극에 달하자, 당시 일본에는 그의
전제 독제를 비난하는 여론들이 들끓기 시작한다.
-사토 마코토(동경대 일본사학과) =당시 권력은 후지와라 나카마로에게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다른 씨족이나 후지와라 가문내의 다른 파 벌로부터 반발이 생깁니다. 그런 반발을 잠재우려고 나카마로는
신라정벌을 계획했던 거죠. 관심을 해외로 돌리려는 목적이었습 니다.
-그래픽/ 일본 지도위 등원중마려 20 등원중마려-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자신의 권세를위협하는 여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신라정벌
이라는 국가적인 숙원사업을 대대적으로 일으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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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4 신라는 일본의 침공계획을 모르고 있었나?
-경상북도 경주 트래킹 5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울산으로 달리다 보면
-팬하면 모벌산성 보이고 17 두 도시의 경계 지역인 모화리라는 마을이나온다.
이 곳에 산의 능선을 따라 만든 신라의 옛 산성이 하나 있다. (이하 보고-)
-모벌산성 TS 5 지금의 성벽은 훼손되지 않은 하부만 남겨두고
-성벽 따라 걸어가는 5 원형과 똑같이 복원해 놓은 것이다.
-성벽 보면서 설명 (12) =한단두단 세단까지는 원래 남아있던 거고, 그 이상은 복원한 겁니다.
-설명하는 TS =길죽한 돌을 놓고 여기서 3내지 4센티 정도 물려 쌓는 이런 물림쌓기 기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벽 달리 9 위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형태의 이 산성은 모화리의 옛이름을 따서 모벌군성이라 불렸다.
-박방룡(학예연구관) =이 성은 모벌군성으로 불리고 있는 산성입니다.
서기 722년 10 에 쌓았던 성으로 저기 산 중턱에서 시작해서 동쪽에서 서쪽으 로 길이 12키로 가량 되는 석성입니다.
당시의 왕경이었던 경주 를 방어하기 위해서 쌓은 긴 성 장성입니다만은, 울산하고 가까 이 있어서 울산으로 들어오는 일본 적들이
쳐들어왔을 때의 왕 경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입니다.
-이하 "일본적로"기록 TS 5 일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모벌군성-
-신당서로 팬 9 기록에 따르면 이 성에 특별한 군사들이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
-기록/신라의 노사 수천명이 8 수천명의 신라 노사들-
이곳을 지킨다. 모벌군성을 지키던 그들은 어떤 군사들이었을까?
-궁시박물관 풀샷에 노라는 자막 17 (잠시 보다가-) 노.
당시 신라에는 활의 일종인 노라는 비밀 병기가 있었다.
노는 삼국시대 때, 중국에서 처음 들어 왔지만, 신라의 기술이 더해져 신라를 대표하는 무기로 발전했다.
-노TS 6 기본적인 형태는 활의 모습이지만, 그 사용법과 위력은 다르다.
-노 윗부분 올라가면, 화살들 4 또 일단 노는 여러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쏠 수 있다.
-물레를 돌리는 9 그러기 위해선 일반적인 활과는 달리 물레와 같은 기계의 힘을 이용해 강력한 화살을 쏘기도 한다.
-화살 3개 TS 3 화살촉도 보통의 화살촉보다 세배 이상 무겁다.
-노 겨누는 궁사 7 활보다 명중률이 높고 누구나 손쉽게 조작할 수 있는 신라노는 천보를 날아간다는
-방아쇠 잡아당기는 TS 3 말이 생길 만큼 그 명성이 높았다.
-쏘명 과녁판에 박히는 5 (보고-)
-삼국사기 기록 팬하면 11 삼국사기에는 신라 노의 위력을 짐작할만한 (노사 구진천)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신라 노를 탐내던 당고종 의 요청으로 당나라로 건너갔던 노사 구진천-
-재연/구진천 노 바치는 8 어쩔 수 없이 노를 만들어 당고종에게 바치지만, 그것은 30보밖에 나가지 않는 형편없는 노였다.
-활보고 화난 당고종 11 천보를 간다는 신라노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당고종은 구진천이 만든 노를 보고 크게 화를 냈다.
-나무라는 풀샷 7 큰 벌을 주겠다며 당고종이 아무리 호통을 쳐도 구진천은 끝내 신라노의 비밀을 밝히지
-엎드리고 있는 구진천 8 않았다고 한다. 당시 신라의 노는 노사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던 일급 비밀 병기였다.
-모벌산성 8 모벌군성에는 이 신라노를 다루는 군사들이 오래 전부터 일본의 침입을 준비하고 있었던있었다.
-경덕왕릉으로 팬 12 일본의 신라 침공준비가 한창 진행되던 경덕왕 시절-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경덕왕은 -왕릉 TS 5 8세기 중반 대대적인 군사개편을 실시한다.
-금성에 육기정 설치 14 경덕왕은 중앙군을 육기정이라는(북,남,동,서,중,막기정) 하나의 시스템으로 재편해 왕경방어 체제를 더욱
강화시켰다.
-지방 9기주 설치 9 그리고 지방에는 새롭게 9주정을 설치하여 유사시에 대규모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해 놓았다.
-조이옥(영산대 교양학부) =신라 경덕왕대는 신라 중대 전제 왕권기에 있어서 가장 황금 기에 해당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내적으로 전반적 인 국내적인 개혁을 단행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해서도 강 력한 신라의 국력을 과시했던 그런 시기가
경덕왕대라고 할 수 가 있겠습니다.
-일본거리 스케치 7 그렇다면 일본의 신라 침공 준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을까?
-761년 11월 절도사 임명 11 신라를 침공하기 직전이던 761년 11월, 일본은 실제로 각 지역에 절도사를 임명하여
-배완성 기록으로 팬 6 전쟁에 동원할 선박과 선원, 그리고 군사의 수를 총 검열하고 있다.
-그래픽 18 최종적으로 보고된 수는 백촌강 전투에 동원된 군사력의 2배 수준이었다.
동해도, 남해도, 서해도에서 각각 마련한 배는 모두 394척, 군사의 수는 총 4만여명이었다.
-가쿠슈인대학 외경 4 그럼 그 군사력으로 신라를 침공했다면 어떤
-교수와 명함 주고 받는 5 결과가 나왔을까? 일본 고대 군사학의 최고 (사사야마 하루오 교수) 권위자인 사사야마 교수를 만나,
-책뒤지는 교수와 피디 7 그 가상 시나리오를 예측해 보았다.
-사사야마 하루오 교수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대륙국가처럼 실전의 경험을 쌓을 수 없었습니다.
고대에는 실전을 통해 군사력이 발전할 수 있었 는데 말이죠. 일본의 4만병사들이 바다를 건너갈 수는 있었을테 지만 실전경험이
없고 병법에 어두운 일본군이 신라를 상대로 제대로 싸울 수는 없었을 겁니다. 아마 백촌강 전투의 재탕이 될 가능성이 높죠
-동, 남, 서해도에서 후쿠오카로 8 762년, 만약 일본이 각 지역에서 동원한 4만명의 군사들와 4백척의 병선을 이끌고 신라를
-금성으로 들어가는 5 침공했다면, 이미 대대적인 개편을 거친 신라의
-금성을 공격하면 쳐부수는 5 중앙군과 지방군의 총반격을 받아 완패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모벌관성 7 상륙에 성공하더라도 노부대가 미리 주둔하고 있던 모벌관성을 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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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5 일본, 발해에게 협공을 제안하다.
-후쿠라 배로 들어가고 5 우리나라 동해가 바라보이는 후꾸라 항구-
-비석 세워져 있고 4 이곳은 1300년전 발해사신들이 동해를 건너
-<발해사절이 와서 머문곳>글귀 8 일본에 첫발을 내디뎠던 대표적인 항구다. (이하 보고-)
-항구 풀샷 5 발해사신이 처음 일본에 온 것은 727년-
-그래픽/ 국서 펼쳐지는 12 건국을 알리고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바라는 첫 국서를 들고 발해가 먼저 일본을 찾아왔던 것이다.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고 11 발해는 국서에 자신들은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한 부여의 옛풍습을 간직한 우리와 고구려 후손이며
일본과 가까웠던 부여의 옛 풍습을 우호관계를 맺기를 바라노라 간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규철(경성대 사학과) =신라와 발해가 대립하고 있던 그러한 부분이 있고 흑수말갈과 당나라가 접근할려는 분위기, 이러한
것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지금까지 당으로 접근하는데 있어서도 신라의 위험한 부분이 있었고 신라와 대 립적인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 발해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흐린 하늘, 758년 12 그런데 758년, 일본은 전례를 깨고 이례적인 사절단을 발해에 파견했다.
이 전까지는 발해에서 사신이 오면 배웅하는 형식으로 사신을 파견하던
-견발해사 오노 타모리로 줌인 7 일본이 그 해 처음으로 오노타모리라는 인물을 앞세운 사절단을 먼저 발해로 보낸 것이다.
-삼국사기로 팬 11 발해로 떠난 오노타모리로 말하자면, 오년 전, 신라에 일본사신으로 갔다가 수모를 겪고 돌아온 장본인이었다.
-일본국사신이 오만무례하여 10 753년, 오만하고 무례하다고 하여 왕을 만나지도 왕이 접견치 아니했다 못했던 오노타모리-
그가 발해사신으로 발탁된(경덕왕 12년) 데에는 숨겨진 이유가 있었다.
-스즈키 야스타미 교수 =오노 타모리는 신라 경덕왕으로부터 쫓겨난 적이 있는 인물입 니다.
그런 오노 타모리는 신라와 긴장관계에 있던 발해를 끌어 들여 신라를 남북으로 협공할 것을 제의했던 걸로 추정됩니다.
-바다 이미지 9 발해에 건너갔던 오노타모리는 특별한 손님들을 데리고 함께 귀국하였다.
-발해사신 양승경 기록 9 (잠시 보다가-)
바로 발해의 대장군이던 양승경을 대사로 하는 발해사절단이었다.
-주작문 8 일본에 초청된 발해사신 양승경은 평성경에 (758년12월, 양승경 평성궁도착) 머물며 이전에 없었던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집에서 7 특히 송별회라는 명목으로 나카마로의 집에 연회를 열어 초대되었을 때, 나카마로는 천황의
선물이라며-양승경에게 천황의 선물로 11 대궐의 무희와 1만둔의 솜을 양승경에게 주었다.
무희와 솜1만둔을 주었다. 당시 일본이 외국 사신에게 주던 솜은 3백둔- 양승경은 규정의 무려 30배가 넘는 양을 선물받은 것이다.
-사카요리 마사시 인터뷰 =천황으로부터 무회와 솜1만둔이 주어졌다는 것은 파격적입니
다. 더욱이 비단, 명주도 엄청난 양을 선물합니다. 이전에 없었 던 일이죠. 한마디로 엄청난 대우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의 신라협공에의 의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재연/나카마로 제안하는 17 아마도 나카마로는 양승경을 자신의 집에 초청했을 때, 신라 침공에 대한 일본의 계획을 털어놨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에 발해가 꼭 협조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을 것이다.
-일본 비행기 떠나는 11 일본의 간절한 요청을 안고, 양승경 일행은 759년 2월, 다시 발해로 떠났다.
-중국 영안시 지도와 거리 8 당시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수도를 지금의 영안시인 상경으로 옮긴 직후였다.
-상경성터/발해의 수도 팬 10 건국한지 60년이 되어가던 무렵,(755-785) 발해는 상경성이라는 계획 도시를 건설하며
-비석 3 고구려 계승국임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있었다.
-제1궁전터 4 당시 발해의 왕은 3대 문왕- 그렇다면 무왕은
-빈터에 문왕 자막 5 일본의 신라 협공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사카요리 마사시 =당시 발해의 왕은 3대 문왕이었습니다.
문왕이 일본의 협공 제안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사료에 전혀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속일본기에서 화이트로 8 단 한 권의 역사서도 전해지지 않는 발해-
속일본기에도 발해의 답변은 전해지지 않는다.
-762년 봄 자막 2 (보고-)
-무사시의 지방관 고려대산 10 그런데, 신라를 침공하려고 했던 762년- 일본은 견발해사로 임명 또 한번 발해로 먼저 사절단을
보낸다.
이번 사절단은 무사시의 지방관인 고려대산이라는 이에게 맡겨졌다.
-무사시로 가는 트래킹 8 고려대산- 고려라는 성씨와 그가 사신으로 선택된 데에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고려신사 9 고대 무사시는 지금 동경의 근처였다. 그곳에(사이타마현 히다카시) 고려신사라는 낯익은 이름의 신사가 있다.
-안내문 풀샷 3 고구려의 사신으로 일본에 머물던 중, 조국이
-고려왕 약광 5 멸망하자, 일본에 망명해버린 약광이라는 이를기리는 신사다.
-기도하는 젊은 남녀 13 오늘날 이 곳은 출세와 합격을 기원하는 신사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라는 성씨를 얻고 일본에서
살았던 고구려 후손들의 영혼이 깃든 곳이다.
-궁사 기도하는 6 (잠시 보고-)
고려신사의 제단에는 약광의 동상이 모셔져 있다.
-나무문으로 줌인되는 10 하지만 약광의 동상이 모셔진 문은 고려 성씨를 가진 약광의 직계 후손들만 볼 수 있다고 한다.
-고려가주택 외경 4 신사의 바로 옆에는 고려성씨 가문의 집이 있다.
-후손과 만나는 풀샷 10 취재진은 그곳에서 아직도 고려라는 성씨를 쓰고 있는 마지막 후손을 만날 수 있었다.
-고려가계도 펼치는 13 (잠시 보다가-)후손은 일본 고려 성씨의 족보를 꺼내 보였다.
이들은 모두 1300여년 동안 고려성씨를 이어온 고구려 후손들이다.
-코마후미야스(고려신사 60대궁사) =716년 당시 일본의 조정이 이곳에 고려군을 설치하고 관동지역의 고구려 유민 1799명을
이곳에 집단이주 시켰습니다.
고구려 유민중에서도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고려라는 성을 사용했습니다.
-고려가주택에서 하늘로 팬 14 762년, 발해로 떠난 고려대산은 바로 발해와 같은뿌리를 가진 고구려 후손이었다.
일본은 고려대산을 통해 발해를 마지막으로 설득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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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6 발해가 일본의 협공을 거절하다.
-일본 오사카, 아파트 7 발해의 답변에 대한 추적은 엉뚱한 곳에서 실마리가 풀렸다.
-부인 커피 들고 가져가는 13 일본 오사카-
(부인 커피 가져가는 거 보고-)
-노트북 사용하는 우에다 타케시 8 전직 고등학교 역사교사였던 우에다 타케시씨는 (71, 발해사 연구가) 은퇴한 후 발해사신에 대해
연구해 오고 있다.
-책들에서 발해국으로 팬 7 주로 발해사신이 일본에 남기고 간 흔적들을 모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하고 있는 발해사신의
-시 전체 풀샷 2 성격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가 특히 흥미로워
-왕효렴/814년의 발해사신 4 하는 것은 발해사신들이 남긴 한시들이다.
-시 자막 올라가고 19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왕효렴이라는 발해사신이 일본에 남긴 한시-
무관에서 문관으로 교체된 후기 발해사신들은 일본 대신들과 한시 대결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우에다 타케시 =발해가 일본에 보낸 사신들은 모두 장군직을 맡고 있는 무관들이었습니다.
애초 신라를 견제하려는 군사적인 목적 때문이었 으니까요.
그런데 762년 고려대산과 함께 온 왕신복이라는 사신 은 최초의 발해 문관입니다.
그리고 그후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문관만 파견하게 됩니다.
-속일본기 중 762년 10월로 줌인 7 발해사신이 무관에서 문관에서 갑자기 변한 시기는 바로 신라침공을 눈앞에 둔 762년-
고려대산이 발해에서 데려온
-왕신복에서 정당성 좌윤으로 12 발해사신 왕신복부터였다. 그는 정당성 좌윤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던 고위직 문관이었다.
발해는 그 해, 왜 문관을 사신으로 파견했던 걸까
-쥬오 대학교 외경 7 이 변화에 주목한 한 학자가 있다.
-이시이 마사토시 교수로 줌인 14 일본 쥬오 대학교의 이시이 마사토시 교수-
그는 762년, 발해사신을 무관에서 문관으로바꾼 조치에는 일본의 신라협공 제안과 깊은 -책, 일본발해관계사연구 책 6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연구가 최근 책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인터뷰 =고려대산은 마지막으로 발해에 신라협공을 재촉하기 위해 파 견된 사람입니다.
협공제안에 답하기 위해 온 발해사신이 왕신 복인데 무관출신이던 관례를 깨고 최초의 문관사신입니다.
왕신 복이 파견된 이유는 일본과 손잡을 수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였 다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속일본기로 줌인 화이트 11 문관 왕신복이 발해사신으로 온 이후, 속일본기에서는 신라침공을 준비하는 단 한줄의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764년 후지와라나카마로 기병작역 6 그리고 764년,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반란을 일으키다,
-관군이 쫓아 토벌하였다 11 관군에게 처형되고 만다. 그의 몰락과 함께 신라침공계획도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된다.
-도서관 달리에서 피디 책 집는 15 (잠시 보다가-)
그렇다면 발해는 왜 일본의 신라 협공 제안을 거절했던 것일까?
-조선유적유물도감 넘기는 11 그 단서를 찾기 위해 당시 발해의 흔적들을 추적해 보았다.
북한에서 발굴된 북청토성 유적지-
-북청토성터 사진들 9 북한은 북청토성을 발굴조사한 후, 이곳이 발해의남경남해부가 있던 자리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기와 막새 7 남경남해부는 발해의 오경 가운데,신라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신당서로 줌인,남경남해부 신라도 14 신당서에 따르면 발해에는 외국으로 가는 5개의 길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 가운데는 남경남해부를 지나는 신라도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픽/상경->동경->북청-> 13 당시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에서 시작됐을 신라도,천정군->금성 내려오다 북청 줌인 동경과
남경을 지나 신라의 국경지역이었던 천정군까지 이르는 길이었을 것이다.
-기록에서 틸다운하면 39개역 11 우리의 삼국사기에도 발해의 동경에서 신라의 천정군까지 서른 아홉 개의 역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래픽/동경까지 역들이 생기는 19 발해와 신라사이에 역들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이 기록은 두 나라 사이에는 분명 신라도라는
상설 교통로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 외경 5 발해와 신라가 내내 대립관계에만 있었다고
-송기호 교수 연구하는 14 주장하던 기존의 학설을 깨고, 송기호 교수는 신라도에 주목해 두 나라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밝혀냈다. 이뤄지고 있었다.
-송기호 교수 인터뷰 =국경선에 성을 쌓는다는 그런 기록은 있지만, 양국사이에 전쟁을 벌인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발해 와 신라 사이가 대립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대립적이 었다면 전투를 벌인 기록들이 나와야 될텐데, 전혀 나오지 않습 니다.
-탄항관문으로 줌인 14 송교수는 주목한 것은 경덕왕대,(경덕왕대에 탄항관문을 쌓았다) 신라 국경지역인 천정군에 쌓았다는
탄항관문의존재였다.
-장성에 탄항관문 생기는 그래픽 10 오래 전 발해를 경계해 쌓았던 장성에 비로소 문이 열린 것이다.
그것은 경덕왕대에 이르러 두나라의 관계가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송기호 인터뷰 =장성을 쌓은 곳에 관문을 쌓았다는 것은 관문은 상호 통로를 개설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결국은 발해와 신라 사이에 교류의 창구를 만들었다는 의미가 돼죠.
예를 든다면 만리장성에 산예 관이 있는데 이 산예관은 만주와 중원 사이에 교류 창구 역할 을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처럼 북쪽에 관문을 쌓음으로써 양 국사이의 통로를 개설한 의미가 있고 이것이 아마 신라도의 한 루트가 되겠죠.
-탄항관문 사이 신라도 지나는 12 신라도는 두나라 국경지대에 관문이 생겼을 때, 비로소 열린 교류의 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덕왕대 두 나라는 왜 교류를 시작하게 됐을까?
-조이옥 교수 인터뷰 =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발해와 신라가 아주 활발한 교류관계 가 이뤄지는 것 같애요.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첫째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침략이라든가 견제를 위해서는
발해와의 협력이 필요로 했던 것 같구요.
그래서 그 때 신라가 발해를 인식하는 것이 소위 삼 한일통의식에 의해서 동일민족이란 인식을 8세기 중엽 신라인 들이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식이란 것이 결국 천손족으로 나타나게 됐구요.
그것이 신라가 고구려 를 계승한 발해와의 교류라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탄항관문으 로 귀착됐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탄항관문 열리고 부감 20 경덕왕대 발해와 신라는 한민족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며 서로 손을 잡기 시작했다.
결국 일본의 야심찬 신라침공계획은 두 나라의 이러한 변화 속에서 거창한 청사진만 남기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