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도불원인
칭기즈칸과 몽골 세계제국의 등장 역사적으로 보면 유럽인들에게는 황색인종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특히 부여가 멸망한 후 기마족이동쪽인 일본으로 ,서쪽인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유럽을 초토화시키며 불가리아,헝가리 제1왕국등을 창설하였고 800년후에는 칭기즈칸이 유럽을 재 초토화시켜 黃禍論(yellow peril)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운영자 주)
동·서양 쥐고흔든 첫 세계제국 출현,칭기즈칸, 1206년 몽골 유목민 통일하고 초원 밖으로 교역 위한 원정전쟁이 세계 정복전쟁으로 확대,후계자 우구데이- 뭉케- 쿠빌라이로 이어지며 유라시아 대륙과 해상까지 휩쓸고 세계역사 바꿔...
몽골제국의 출현은 세계 역사상 대단히 경이로운 현상이다. 유럽의 한 역사가는 “사냥과 목축으로 살아가던 미개하고 가난하며 수적으로도 얼마 되지 않던 민족이 어떻게해서 무한한 인적 자원을 갖고 있던아시아의 강력한 문명국가들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물론 당시 몽골인이 그렇게 ‘미개’했는가 하는 문제는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1206년 칭기즈칸이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대집회(쿠릴타이)를 열어 ‘몽골국(Mongol Ulus)’의 탄생을 선포했을 때, 휘하에 들어온 유목민을 모두 천호(千戶)로 편성하였는데 그 총수는 95개였다. 만약 1호를 평균 5명으로 계산한다면 당시 칭기즈칸이 지휘한 몽골인은 남녀노소 다 합해봐야 50만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같은 시기 중국의 인구는 북쪽의 금나라와 남쪽의 송나라를 모두 합해서 이미 1억명을 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단순한 산술적 계산으로도 1 대 200이라는 비율이 나오는데, 1당 100이 아니라 1당 200의 기적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먼저 그들의 출현을 목격하고 그들과 싸우면서 그 힘을 실감한 당대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의문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우선 갑작스럽게 출현한 이들이 지닌 여러 가지 특징, 과거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미지의 집단이라는 신비성, 전쟁 시 적에게 가하는 엄청난 파괴력, 그와 함께 수반되는 잔인함…. 몽골의 또 다른 명칭이었던 ‘타타르(達丹·Tatar)’가 라틴어에서 ‘지옥’을 뜻하는 ‘타르타르(Tartar)’와 비슷한발음이었기 때문에 유럽인에게는 그 이름 자체가 이미 지옥의 사자, 악의 화신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혹은 신이 인간의 타락을 징벌하기 위해서 보낸 도구, 즉 일찍이 훈족의 아틸라를 가리켜 부르던 ‘신의채찍(Flagellum Dei)’이 다시 나타난 것처럼 여기기도 했다.
물론 오늘날의 학자들이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몽골 세계제국의 출현을 설명함에 곤혹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여러 가지 가설이 제시되었다. 우선 ‘기마전술의 탁월함’이 꼽힌다. 총과 화약이 널리 사용되기 전에는 기마전이 가장 신속하고 위력 있는 공격방법이었고, 다른 누구보다 유목민이 그것을 잘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즉 ‘어찌해서 그 전에는 그러한 대대적인 정복이 일어나지 않았는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몽골 지도층의 탁월한 능력, 특히 칭기즈칸의 리더십에 대한강조이다. 그는 부하들을 포용하고 그들로부터 헌신적인 봉사를 이끌어내는 탁월한 인간적 친화력, 군대를 조직하고 규율을 부여하며 실전에서 치밀한 작전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끌고 가는 전략적 능력까지 갖춘 인물로 평가되었다. 말하자면 ‘야만의 어둠’을 뚫고 빛나는 탁월한 ‘천재성’인 셈이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역할을 과도하게 평가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된 한 책의 저자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칭기즈칸의 업적을 미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자무식의 노예가 오로지 자신의 탁월한 개성과 카리스마와 결단력을 바탕으로 북미대륙을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미합중국을 창건했으며, 알파벳 문자를 창제하고 헌법을 기초했고, 보편적인 종교의 자유를 실현하고 새로운 방식의 전쟁술을 도입했으며, 군대를 이끌고 캐나다에서 브라질까지 진군했고, 아메리카대륙 전체를 포괄하는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어 교역을 활성화시켰다. ” 이 같은 단정은 전형적인 영웅사관의 발로가 아닐 수 없으며 많은 사람의 동의를 쉽게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칭기즈칸에 대해 우리가 갖는 대표적 오해의 하나는 그가 ‘세계정복자’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세계를 정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초원의 유목민으로 태어났으며 유목민으로 죽었다. 그의 세계관 속에서 초원이 아닌 다른 지역은 부차적인 의미밖에 없었고 그런 곳을 지배하고 호령할 생각도 별로 없었다. 아직 그의 정확한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1227년에 사망한 것은 확실하며 대략 65세 전후가 아니었나 추측된다.
그의 인생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어려서 아버지가 독살된 뒤 부르칸 칼둔 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온갖 고난을 경험한 유소년기, 부르테라는 여자와 혼인한 뒤 케레이트 부족의 수령 옹칸의 휘하에 들어가 자신의 세력을 키우다가 다른 부족을 하나씩 굴복시키고 마침내 초원의 맹주로 우뚝서게 되는 청장년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1206년 건국 이후 남쪽의 서하(西夏)와 금나라, 서쪽의 호레즘을원정하며 제국의 기틀을 닦은 노년기.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대부분 초원에서 벌어졌고 거기서 우러나온 체험이 그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형성하고 결정했다. 타타르 부족에 독살 당한 부친의 최후는 그에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혈수(血讐)의 원칙을 골수에사무치게 했고, 부친이 사망뒤 의지할 곳 없는 그의 일족을 야멸차게 버리고 가버린 타이치우트 씨족의 배신행위는 동족에 대한 불신을 그에게 심어주었다.
반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변함없는 의리와 충성으로 그의 ‘황금의 목숨’을 지켜주던 부하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주군과 종사 (從士) 사이에 존재하는 절대적 신뢰감을 알게 되었고, 초원의 패권을 두고 최후까지 자신과 경쟁한 죽마고우 자무카의 죽음에서 권력 투쟁의 비정함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메르키트나 타타르와 같이 집요하게 저항하던 부족을 굴복시킨 뒤 수레바퀴의 축보다 키가 더 큰 사람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잔혹함, 몽골 통일 후 만호·천호·백호·십호를 조직하여 무질서하고 자립적인 유목민을 명령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전쟁기계’로 전환시킨 조직력, 제국의 군대를 지휘하는 최고의 사령관에 동족을 배제한 채 자신에게 충성한 막우들을 기용한 포용력 등은 모두 그 같은 초원의 경험에서 우러나온것이었다. 1 206년 그는 드디어 눈길을 초원 밖으로 돌렸다. 남쪽으로는 조상 대대로 주군 노릇을 해온 여진족의금나라가 있었고, 서쪽에는 이슬람권의 신흥 강국 호레즘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들과 전쟁할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초원의 맹주로 만족할 수 있었다. 다만 이제 막 건설된 몽골국의 원활한 경영을 위해서는 이들 나라와 교역관계를 유지하고 초원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물자를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공급 받을 필요가 있었다. 후일 칭기즈칸이 금나라를 치고 호레즘을 원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그런 나라들을 정복하여 멸망시키고 지배하려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상호체결한 조약을 무시하거나 교역을 위해 파견한 상인단을 살해했기 때문에 그것을 응징하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정복하고 통치할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적국들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하자 응징과 보복의 강도는 더욱 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응징전에서 정복전으로 본격적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상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우구데이 (재위 1229~1241)의 시대부터다. 금나라가 조약 이행을 거부하고 수도를 옮겨서 황하라는 물의 장벽을 이용해 항전을 결정하자 우구데이도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구데이는 1230년 군대를 삼분하여 북중국으로 밀고 내려갔고, 섬서·하남 등지를 공략한 뒤 1233년에는 개봉을 함락하였다. 금의 마지막 황제는 다음 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러나 몽골과 연합한 남송이 대가를 요구하며 개봉과 낙양을 점령하자 몽골은 다시 남송과 전쟁에 휘말리게되었다.
또한 우구데이는 1234년 큰형 주치의 아들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몽골군 15만명을 편성하여 서방원정을 단행, 러시아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몽골의 세계 정복은 제4대 칸인 뭉케(1251~1259)의 즉위와 함께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그는 먼저이슬람권의 압바스조를 치고 나아가 시아파에 속하는 소위 ‘암살자단’을 제거하기 위해 자기 동생인 훌레구를 파견하였다. 그는 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마침내 1258년에는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서아시아에 몽골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런데 당시 가장 난적은 남송이었다.
왜냐하면 강과 운하와 호수가 많은 회하(淮河) 이남에서 강력한 수군을 보유한 남송을 굴복시키려면 몽골의 기마병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왕실이 강화도로 피신했을 때 몽골군이 그것을 어쩌지 못하고 30년을 허비한 것을 생각한다면 ‘바다같이’ 넓은양자강의 저지효과는 불문가지일 것이다. 1257년 뭉케는 군대를 나누어 자신이 직접 중앙군을지휘하고사천 방면으로 들어갔고, 동생 쿠빌라이에게 좌익군을 맡겨 회하를 건너서 양자강 연안의 악주(鄂州)에 가도록 했다. 그러나 여름에도 쉬지 않고 공격을 강행하던 뭉케는 1259년 여름 사천의 조어산(釣魚山)에서 전염병으로 급사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남송 경략의 대업은 그의 계승자인 쿠빌라이(1260~1294)의 몫이 되었다. 그의 시대에 몽골군은 일대 변신을 보였다. 초원의 기마군대가 견고한 성채를 함락하는 공성술을 결합하게 된 것이다.
양자강의 지류인 한수(漢水) 유역의 쌍둥이 도시인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던 몽골군은 1273년 새로운 병기를 도입했다. ‘회회포(回回砲)’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중동의 무슬림이 만든 거대한 투석기였다.
바위덩어리가 700~800m 날아 한수를 건너 성벽을 내리치면서 부수어 나갔고 결국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그러나 몽골군의 변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양양의 함락과 함께 투항한 남송의 수군을 흡수하면서 점차 양자강을 제압하게 되었고, 남송이 무너진 뒤에는 거기에 있던 해군을 받아들였다.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일본과 남중국해 지역에 대한 원정은 해군으로서 몽골군대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대몽골 울루스’, 즉 몽골제국은 초원의 유목국가에서 출발하여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대부분과 해상까지 장악하는 세계제국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이제 다시 원래의 의문으로 되돌아가자. 어떻게 해서 초원 한구석의 ‘미개한’ 몽골인이 이런 일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단순히 기마군대의 힘 혹은 칭기즈칸의 천재성에 의한 것이 아님은 분명해졌을 것이다. 물론 출발은 거기부터였다.
그러나 그들은 놀라운 학습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주변지역과의 전쟁 과정에서 빠른 속도로 하나씩 배워갔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가진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만큼 새로운것에 대해 개방적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라고 고집하며 다른 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 새로운집단, 새로운 이념을 어려움 없이 받아들여 소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나갔다. ‘대몽골 울루스’의 군대가 기마전은 물론이지만 공성전, 나아가 수상전까지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무엇을 말하는가. 또 몽골 군대의 일부를 구성하며 정복전에 동참한 수많은 다양한 집단의 존재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몽골의 정복전이 결코 몽골인만의 성취가 아니라, 몽골을 핵심으로 하는대통합력의 추동이었음을 입증한다.
몽골제국의 지배층을 구성하던 ‘색목인(色目人)’이라는 집단이 그 점을 단적으로 말해주는데,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라는 뜻을 지닌 그 말이 바로 몽골제국의 핵심적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몽골제국은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제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치즘이 표방하던 게르만 민족우월주의나 유대인이 내세우는 배타적 선민의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몽골의 군주들은 자신들이 ‘영원한 텡그리’로부터 힘(k?ch?n)을 부여 받았다고 믿었지만, 그것이 곧 몽골지상주의나 텡그리 지상주의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몽골제국은 칭기즈칸 일족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인정하는 가운데 다양한 집단과 문화가 공존하는 다원주의적 질서였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질서를 바탕으로 팍스 몽골리카가 실현된 것이다. ▒
각 집안의 큰아들만 징발해서 편성했다고 하여 ‘장자원정군’으로 알려진 이 군대의 총사령관은 칭기즈칸의 큰아들인 주치의 장자 바투였다. 원정군은 유라시아 초원을 가로질러 볼가강에 이르렀고, 그 부근에서 유목하던 불가르와 킵차크인을 격파하고, 1237년에는 ‘루씨 (Rus’)’의 땅, 즉 러시아로 들어갔다. 당시러시아는 여러 공국으로 나뉘어져 서로 유기적인 협력체제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몽골군의 침공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다. 콜롬나,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등의 도시가 차례로 유린되었고, 1240년 겨울에는 수도 키에프가 함락되었다. 도시 전체가 잿더미로 바뀌는 참상과 함께 죽은 사람들을 위해 “울어줄 눈물도 남지 않았다”고 할 정도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 몽골군은 다음 해에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헝가리를 공격했고, 폴란드로 들어간 선봉대는 리그니츠 벌판에서 2만명의 폴란드와 독일 기사단을 괴멸시켰다. 이렇게 해서 몽골군은 전군을 집결하여 서유럽으로 진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이를 저지할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럽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러나 1242년 여름 몽골군은 모든 작전을 중지하고 철군을 시작했다. 그것은 동쪽 멀리 몽골고원에서그들의 대칸인 우구데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누가 후계자가 되느냐는 초미의 관심사를 두고 한가롭게 전쟁을 계속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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