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풍습

종이는 지역적으로 고조선에서 제작 가능성이 크다.

설레임의 하루 2009. 3. 14. 01:45

출처: 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글쓴이: 心濟

 

 

 

 

 종이는 지역적으로 고조선에서 제작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서기 105년 後漢시대 채륜이 세계역사상 획기적인 발명품인 <종이>를 발명하여 인류역사에 기여한것으로 알고 있다.

종이와 채륜의 관계는 晉나라 범엽이 편찬한 후한서 <蔡侖傳> 및 한나라 때 몇 편씩 편찬되었다는 東觀漢記 에 기록되어 있다.

 

채륜이 尙方이라는 관서에 근무하면서 나무껍질,어망,넝마조각 등을 혼합하여 만든 종이를 후한和帝 元興 元年(ad 105)에 한왕에게

진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대에 이를 이름하여 蔡候紙 라고 불렀다.

하지만 교과서에 10년전부터 채륜이 종이를 "만들었다"에서 "만든것으로 전하여 진다"라고 말꼬리가 바뀌어 진것은 어떠한 이유

때문인가 ?

 

최근 지나대륙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적어도 채륜이 만들은 종이 이전에 다른 종류의 종이가 이미 만들어져 있다고 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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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대종이 발굴의 역사 

 

1933년 스웨덴 탐험가 스벤헤딘을 대장으로 하는 스웨덴,중국 연합학술조사단 서북과학고사단의 지나측 멤버인 黃文弼이 

도곤이라 불리우는 롭노르 북쪽 한나라 봉수대 유적에서 4 x10 cm의 종이조각을 발견하였는데 이 조각과 함께 漢簡 에는 河平 4年

(bc 25) 부터 黃龍 元年(bc49)이란 기록이 섞여있어 어도 종이 조각은 기원후 105년이란 시기보다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 진것으로

볼수 있다.

 

이를 롭노르紙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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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일본의 田野가 이끄는 고고학탐험대가 서안시 東郊 ?郊津 에서
전한의 무제(bc 140~87)보다 오래된 무덤에서 古紙가

발견되었는데  1964~67년사이에 성분을 분석한 결과 대마와 저마로 만든 종이임이 밝혀졌다.

이를 ? 郊 紙라 부른다.


1973년  감숙성 A32 유적지에서 두조각의 마로 만든 종이조각이 출토되었는데 크기는 A4용지 크기로 상면과 하면의 매끄러움이

다른 지질이었으며 대마섬유포함되었다.

목간이 같이 출토된것으로 보아 연대는 한선제 감로2년(bc 52) 과 애제 건평 연간으로 기원3~2년 사이의 지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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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하서회랑 한대 봉수유적지에서 전한시대의 종이가 출토되었으며
1986년 3월 감숙성 天水市 方馬灘에서 13기의 秦墓와 

1기의 漢墓가 발견되었는데 한묘의 수장기물에서 피장자의 슴부위에서 종이재질의 지도가 발굴되었다.

1991년 감숙성 돈황부근의 하서회랑에서 2만여점의 간독과 500여점의 종이가 대량으로 발굴되었는데놀랄만한 발굴로 우편

전달체계가 이미 성립되었다고 보이는 문자들이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전한시대에 만든 종이에 대한 기록이 왜 후한까지 이어지지 않았을까,

150년도 안되는 그 짧은 기간동안 ?   


 

2. 종이의 용도는 ?


이에 따라 潘吉星 같은 이는 그의 저서 <中國造紙技術史考>에서  채륜이 종이를 만들었다는 기존설을 강력히 부인하고 후한서가

 가진 의의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의견이 지금 학계의 대세라 볼수있다..


천수시 방미탄에서 발굴된 종이지도 위에는 선은 묘사되어 있어도 글씨는 쓰여지지 않았다.

문자가 확인되는 종이는 현천지에서 출토된 것 뿐이며 전한의 종이라고 말 할 수 있는것7매에 지나지 않는다.

발굴된 500매의 종이중에서 글자가 없는 종이가 압도적으로 많은것은 왜일까?

 있다하여도 중앙부에 한두자 정도가 비스듬히 써있다.

 

이로서 초기의 종이는 글을 쓰기위한 목적보다는 다른 용도 즉 포장지의 용도로 쓰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종이는 布나 銅鏡에 붙어서 함께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또한,다른 용도로는 부자,훈력,세신이란 한약제의 포장지가 아니였을까 하는 추론이다.

당대 杜佑가 편찬한 通典 권59 < 禮典 >에 정중의 <백관육례사>라는 글이 실려있는데 종이를 용하여 약을 포장하는 절차가

 기록되어 있는데 鄭衆은 기원후 89년에 죽은이이므로 그 종이의 용도를 정확히 기술한 것 일수도 있다.


 

3.종이의 역사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전한시대의 목간에는 五十一紙 重五斤 이라는 글이 있어 이미 종이가 전한시대 이전에 존재 하였음을 또 한가지 방법으로 확신케

해준다.


후한시대 許愼이 지은 <說文解字>에는 <종이라 함은 絮의 一고>이다 라 하였는데 여기서 絮(여)란 누에고치로서 뜨거운 물로 적시고

 두드려서 부드럽게 비단상태로 한 후 대자리에 걸러 말린 1매의 박편을 말하며 허신이 설문해자를 완성한 시기가 ad 100년 이므로

이미 이전에 비단으로 혹은 면으로 종이를 완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 채륜전에 其用帛者謂之爲紙 

(기용금자위지위지)라 했으므로 이미 이전부터 누에를 이용하여 종이를 만들어 사용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누에가 많이나는 지방은 역사적으로 어느 지방인가?

바로 온난한 기온과 적당한 습도가 유지되고 뽕나무를 문제없이 재배 할수있는 대륙 동부해안 또는 내륙 중남위도에 위치 하여야 한다.

적어도 전한시기 이전에 누에를 기를수 있는 지역은 알다시피 이미 동이족이 점거하고 있었던 대륙동부 해안지역 이었다.

 

즉 고조선 지역이라고 추정되는 지역들이다.

 고조선의 후예국인 부여국에도 비단으로 복식을 하고 상당한 문화수준을 영위하며

지냈던 사서기록으로 보아 고조선에서 이미 비단으로 된 종이를 만들어 사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론이다.

비단의 기록들을 보자.


後漢書卷八十五 東夷列傳 -고구려조


暮夜輒男女?聚?倡樂。好祠鬼神、社稷、零星,以十月祭天大會,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號?神,亦以十月迎而祭之。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

 

시월이되면 하늘에 제사지내는 큰모임이 있는데 동맹이라 한다.

이 나라의 동쪽에는 큰 혈이 있고 수신이라 부르는데, 역시 시월에 영접하여 제를 지낸다.

이 모임에서는 참가자 모두가 비단옷을 입고 금은으로 몸치장을 한다.

주부나,대가 모두 머리에 두건을 두르는데 관을 쓰며 소가는 절풍으로 모습은 변한과 같다.


後漢書卷八十五 東夷列傳 -동옥저조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東濱大海;北與?婁、夫余,南與濊貊接。

其地東西夾,南北長,可折方千里。土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

邑落長帥。人性質直?勇,便持矛步戰。言語、食?、居處、衣服有似句驪。


동옥저는 고구려개마대산의 동에 있다.

동으로 빈해가 있고 북으로 읍루,부여, 남으로 예맥과 접한다.

그 나라는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길다.

천리씩 나눌 수 있는데 땅은 비옥하고 오곡이 나며 밭곡식은 좋으며 읍락에는 장수가 있다, 성질은 강직하고 용기가 있으며 창으로

보병전을 잘 한다.

언어,음식,거처,의복이 구려와 같다.


後漢書卷八十五 東夷列傳 - 濊조

 

其俗重山川,山川各有部界,不得妄相干涉。同姓不昏。

 多所忌諱,疾病死亡,輒捐棄舊宅,更造新居。知種麻,養蠶, 作撓布。

 

그 풍속은 산천이 험하여, 산천이 각각 부로 나뉘고 서로 범하고 간섭하지 않는다.

같은 성끼리는 결혼하지 않고, 꺼리는 것이 많다.

질병으로 죽으면 옛집에 버려두고 새로 거하는 곳을 지었다.

삼베 기르는법을 알고 양잠을 하고 면포를 지었다.


三國志 卷30 魏書 30 烏丸鮮卑 東夷傳 (2) -夫餘조


在國衣?白,白布大袂(몌),袍、?(고),履革?

出國則?繒繡錦?(계),大人加狐狸(호리)、 혈백 黑貂之?(구),以金銀飾帽。譯人傳辭,皆?,手據地竊語。


나라에서는 흰옷을 숭상하여 입으며 면포로된 소매, 저고리,바지,그리고

가죽신을 신으며 나라밖을 나설때에는 금실과 비단으로 수놓은 융단으로 치장하고 , 여우와 너구리 털로 두르며, 성인은 여우,

너구리, 흑색담비 가죽으로 옷을 해 입으며,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


三國志 卷30 魏書 30 烏丸鮮卑 東夷傳 (2) -高句麗조


以十月祭天,國中大會,名曰東盟。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自

飾。大加、主簿頭著?,如?而無餘,其小加著折風,形如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나라의 큰 모임으로 동맹이라고 한다.

공적인 모임 때의, 의복은 모두 비단이고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꾸민다.

대가나 주부는 머리에 두건을 하는데, 수건같이 생기고,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하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다.


三國志 卷30 魏書 30 烏丸鮮卑 東夷傳 (2) -馬韓조

以瓔珠?財寶。或以綴衣?飾,或以縣頸垂耳,不以金銀錦繡?珍。 人性?勇,魁頭露?。

 

구슬 목걸이를 보배로 삼는데, 혹은 구슬을 옷에 꿰메어 꾸미고, 혹은 목에 매달기도 하고, 귀에 달기도 한다.

금은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의 성질은 강하고 용감하고, 상투를 트는데, 모양이 경병과 같다.

포로 옷을 해 입고, 신발은 가죽신을 신는다.


위에서 보듯이 이미 동이제국에서는 비단이 보편화되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이미 문명수준은 물산이 풍부햇던 동이족지역인 대륙동부해안에서 서안에 기반을 둔 서토족보다 우월하였다는 것은 입증된 것이다.

 

따라서 종이의 연원은 갑골문에서 누에종이로 그리고 문명이 덜 발달되었던 곳에서는 죽간이나 목간으로 ,마섬유질을 이용한 종이로

발전되어 왔다고 볼수 있을것이다.

 

요즘 인기드라마 <주몽>에 보이는 왕실안의 탁자위의 죽간은 추론컨데 고조선의 후예인 부여나 예, 삼한, 고구려에서는 이미

없어졌던 유물일것인데 한편의 코미디를 보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