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풍습

명도전이라는 화폐 단군조선의것-관련모든견해 총 집합

설레임의 하루 2009. 3. 5. 04:53

*출처: 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 소서노

 

 

 

 

 

 

#중국전에서 가려내야 할 고조선 화폐

2007년 11월 06일 (화) 한영달 .

   
▲ 한 영 달
한국고전연구감정위원회장
고조선시대 청동제품인 비파형동검과 다뉴세문경은 동이족의 트레이드 마크가 될 정도로 세계 고고학계에 인식되었다. 비파형 동검의 특징은 칼날이 비파악기처럼 구부러져 있고, 칼몸에 등대(等臺)가 있어 휘기 쉬운 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중국식과는 완연히 달라 요령식 또는 만주식 동검으로도 부른다.

그 시대 청동유물은 구리+주석+아연의 합금으로 이루어진 첨단기술로 아연을 섞는 기술(용해 450℃)이 다른 나라에서는 개발되지 않았을 때였다. 우리 민족만이 알아내어 주조하기 쉽고, 표면이 금빛 처리되는 검과 거울을 만들어 냈다.

이같은 청동과 아연 합금 성분은 고조선화폐에도 똑같이 나타났고 잡물이 엽전에 적었던 조선시대 중기까지도 전통적으로 이어졌다.

고조선의 야금, 주물기술 거푸집 제조, 제철 제강 기술 등은 인접국가들이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또 현대의 과학기술로도 세문경 도안의 노하우를 따라가지 못할 만큼 신비하고 훌륭한 독창적 기량이었다.

청동기에 나타난 기하문양인 동심원과 삼각형 등 세문은 아름다운 미지의 우주세계 좌표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고조선 후기에는 문자를 넣은 명문 청동기도 보인다.

고조선의 유적과 유물을 다룬 북한 발행, 「조선유적유물도감」을 보면 이따금식 보이는 금세공품도 신라시대 찬란한 왕관급에 못지않는 것이 발견되어 놀라게 된다.

주물로 된 청동기 장식품에 사람과 동식물 그림을 깔끔하게 주입시킨 유물에서는 조선시대 열쇠패(別錢을 대형화시킨 민속공예품) 제작 수준에 뒤지지 않는 작품들로 보인다.

고조선의 선조들이 마음만 먹었으면 지금부터 4천여년 전 그 시대에도 아름답고 훌륭한 열쇠패와 별전(기념화폐의 일종인 민속품)을 만들고도 남았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고조선의 금속 공예품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 시대 실물화폐가 적고 역사기록에 있는 것마저 나타나지 않고 있어 안타까울 때가 많다. 고조선의 별전이나 열쇠패도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고조선에 해당할 하, 은, 주시대~춘추전국~진·한시대까지 중국화폐는 수백 종이 제조되었고 많은 것은 가마니떼기로 나타나고 있는데 비해 우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종수, 수량이 모두 적다.

그 시대 역사에 기록된 국력이나 교역, 경제, 사회활동을 보아도 최소한 수십종 정도로 고조선 화폐가 더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데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생각해보면 첫째, 나라가 패망하여 역사기록조차 깡그리 없어진 데다가 그 강역의 백성까지 노예로 끌려갔거나 볼모로 잡혀 화폐뿐 아니라 모든 것의 소유권을 주장할 만한 항민(抗民)조차 없어진 것이다.

중국 길림대 장박천 교수(역사학)는 이제까지 중국화폐로 보아온 명도전(明刀錢:접는칼, 모양에 ‘明’자가 비슷한 글자가 새겨져 있음)이 고조선시대 제조된 화폐일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유고를 남기고 몇해 전 별세했다. 아시아의 고대 청동기 연구가인 러시아의 유·엠부찐 교수는 명도전이 출토된 곳을 표시한 지도를 보고 타당성이 있다고 평가, 장 교수의 연구에 손을 들어 주었다.

또한 북한 역사학자들은 최근 중국 전국시대 동전에 한자가 한 두자씩 들어 있고 엽전의 초기단계로 사각 구멍대신 원공(圓孔)으로 된 원전 중 일부가 고조선 화폐일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상대국 전문가가 인정하고 양보하지 않는한 한닢의 화폐역사를 놓고 끊임없는 학술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더구나 동북공정으로 없는 문화영역도 확장하려는 음모까지 배어 있는 중국이 이런 일에 쉽게 양보할리 없다. 비록 작은 엽전이지만 외국에 있는 국보급 문화재 송환보다 더 어려운 면도 있다.

한국의 고전연구가들은 때로는 북한학자들과도 손을 잡고 고조선 화폐를 찾아내어 정리할 것이 많아 보인다. 그 시대 문화예술의 총아인 화폐는 귀중한 역사적 산물이다.

선조들이 남겨준 유물을 우리 것으로 찾아오는 것은 후손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 강원도민일보(http://www.kado.net)

 

 

 

 

#“ 원절식 명도전 고조선때 제작된 한국화폐”
고대 화폐 국적 논쟁
2008년 02월 27일 (수) 전제훈

교과서에서 이제까지 중국화폐로 표시된 접는 칼모양의 명도전(明刀錢)을 남북한 고고학자들이 고조선시대 우리 화폐라고 주장, 중국측은 반대입장이며 일본은 우리 주장을 긍정 , 동양3국의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또 북한 학자들은 이제까지 중국 전국시대~한대 화폐로 보아온 일화전(一化錢) 및 명화전(明化錢)이 고조선시대 또는 고구려초기 우리화폐일 것이라는 주장을 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은 작년 12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강사 박선미 박사가 학위취득논문 ‘화폐유적을 통해본 고조선의 교역’에서 밝힌 것으로, 이를 토대로 고대화폐의 국적을 소고 (小考)해본다.

고조선 강역 50곳서 출토… 표면 문양 ‘明’서 기원
한·일 ‘고조선 화폐’ 인정… 중 ‘전면 부정’ 쟁점화


중국의 고대화폐 유적을 내몽고 자치구 등 5개 원역으로 나누어볼 때 압록강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부에 이르는 권역은 그 옛날 고조선 강역으로 그곳에서 명도전(明刀錢)이 50개소에서 출토되는 등 다른 권역에 비해 가장 많았다.

다음은 포전(布錢) 8곳,일화전(一化錢) 8곳, 반량전( 半兩錢) 8곳으로 같았으며 오수전(五銖錢) 6곳의 순위였다.

명화전(明化錢) 한곳도 출토되었다. 일화전은 대부분 포전 명도전과 함께 매장된 상태에서 나왔다.

포전 명도전은 전국시대(B.C 475~B.C 221년)것이 30곳, 일화전은 전국시대 말기 4곳, 반량전은 진(秦·B.C 221~207년), 한(漢)초기 6곳, 오수전서한 (西漢·B.C 206~A.D8년)중기 6곳이었다.

시대적으로 우리나라 고조선과 고구려 초기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또한 요동반도에서는 일화전 출토량이 가장 많았다.

1960년 북한 학계와 중국 고고학계는 요동반도 일대의 유적에서 공동발굴작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중국 요령성과 한반도 서북부에서 출토된 화폐중 일화전과 명화전은 고조선의 고유화폐로 파악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북공정을 거치면서 이런 견해들은 중국의 부정으로 깨지고 말았다. 평양 토성동 성안에서 고조선 유민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반량(半兩)거푸집(용범·鎔范)이 발견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 명도전

1990년 ‘북한고고민속론집’에서 손량구씨는 요동과 서북 조선에서 출토된 명도전은 고조선주민들이 남긴 화폐라는 주장을 폈다. ‘한국사’에서 윤무명위원은 청천강을 경계로 그 이북에는 명도전을 대표하는 연의 문화가, 그 이남에는 세형동검을 대표하는 고조선의 명도전 등 청동문화가 발달한 것으로 보았다.

장박천 전 길림대교수(2002년 별세)는 칼이 약간 굽은 형태의 원절식 명도전은 고조선에서 제조 사용된 것이라고 밝혔다.

연나라가 요동을 상실하기 전 조선후국(朝鮮侯國)이 제작 사용한 것이며 모양이 직선인 방절식 명도전은 연나라가 고조선을 치고 요동에 진출한 후 제작 사용한 것이라고 했다.

(명도폐 연구 속설) = 화동뉴스 3월호 게재

원절식 명도전 표면에는 “ ”자 문양이 방절식에는 “ ”자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 ”문양은 갑골문 “明”자에서 기원한 것이라 했다.

▨ 제명도폐

장교수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제명도폐(齊明刀幣)도 조선후국(고조선)이 제나라와 상거래를 하면서 남긴 화폐라는 주장을 했다.

제명도의 옛이름은 박산도(博山刀). 칼모양의 전면에 “ ”부호가 새겨졌다. 중국은 연나라가 제나라의 수도 임치를 점령했던 기원전 284~기원전 279년에 만들어졌다는 엇갈린 주장이다.

▨ 반량전 용범

평양 동성동 토성에서 서한초의 4수반량전과 함께 나온 활석제인 반량전거푸집 3점의 출토는 고고학팀에 의한 발굴이 아니고 농부가 발견한 것을 일본인이 수집한 것이다.

한매는 전문(錢文)이 조각된 것이고 2매는 전배면 합형편(合型片)인데 테두리가 손상된 것으로 두께는 1.17㎝~1.93㎝였다.

주화의 거푸집이 발견되면 그런 주화를 그 지역에서 제조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고고학계의 상례였다.

그러나 그 시대는 화폐제조가 문란했던 시기였고 동이나 연이 아닌 석이라는 점을 미루어볼 때 사주(私鑄)제작용 거푸집일 가능성이 있다. 또 고조선이 교역을 강화했던 점을 미루어 타지역으로부터 유입되었을 것으로도 보고 있다. 그러나 출토품을 놓고 연구해 볼만한 과제이다.

▨ 일화전· 명화전

중국은 명사전(明四錢), 명화전(明化錢),일화전(一化錢)을 연나라말 제조된 3대 원전

(圓錢)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화폐의 출토분포는 중국 중원지역보다 오히려 고조선 강역이었던 동북부와 압록강북안에 많았다.

독자적으로 나타나기보다 명도전 또는 후대의 반량 오수전과 함께 동반 출토되어 함께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크기가 작은 일화전은 모양이 큰 명도전의 보조화폐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북한 학계는 이 돈이 고조선에서 주조유통된 화폐로 보고 있다.

중국은 내몽고 자치구에서 거푸집이 발견됨에 따라 이 지역에서 주조된 것이라고 반대

견해다.

▨ 중국반응

명도전이나 반량전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명도전은 연의 강역 출토라는 도식이 굳어져 있다.

또 동북공정을 거치면서 고조선의 화폐제작 주장을 전면 부정하는 견해를 학술지에 발표, 정설화하고 있다.

이는 화폐가 갖는 특성을 전연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중화(中華)중심, 자국중심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다.

▨ 일본

1994년 다무라고이치(고고학자)는 종전까지 명도전 유적을 한족(漢族)문화로 본 일본

고고학계의 학설을 뒤집고 요하 이동의 명도전 유적은 세죽리-연화 보유형과 선(先)고구려족이 남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 지역을 화이잡거(華夷雜居)지역으로 불렀다. 이는 명도전이 연과 고조선의 화폐라는 주장이나 다름없다.

러시아 고고학자 부찐이 최근에 작성한 명도전 출토지역의 지도도 거의 같은 내용으로

같은 견해이다.

중국이 특정화폐를 다각적인 검토없이 한정치체제의 전유물로 보는 것은 잘못 평가된

것이다.

과거의 역사, 지난날 강역의 경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현재 영토안의 유물을 모두 자기나라 제작품으로 보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화폐는 하나의 국가 단위를 초월하여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특히 명도전이 만들어진 전국시대는 고조선과 연의 잦은 전쟁, 동호의 퇴각 등으로 혼란한 시대상황을 감안할 때 화폐의 출토를 곧바로 특정한 정치체제 내지 연과 같은 국가에만 연결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국제적인 학술세미나 등을 자주 개최하여 반대 의견을 잠재우고 설득 이해시킬 수 있는 단계로 발전시켜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자를 잘 몰라 외면하고 있는 젊은층들에게 고화폐 수집연구를 장려하고 몇 안되는 고고학 화폐연구층을 적극 육성, 그 층이 두터워져야 한다.

또 글로벌시대에 맞는 그 분야의 학술연구가 활발해져 고화폐에 대한 실제와 연구결과가 타국을 능가하는 선진수준의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것이다.

고조선 초~중기 동아족인 한족(韓)의 야금술과 주조기술 등은 중국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수백년이 앞서고 있었다.

주화 제조에서도 엽전의 동그라미에 네모구멍(形圓孔方)을 가장 먼저 낸 선조들의 혁신적인 선진기술(B.C642년) 등은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자신감의 역사적 배경이 될 것이다.

글 / 한영달 언론인·한국 고전연구감정위원회장

   
   
   
   

▲ 고대의 화폐 ‘도전(刀錢)’ 사진 위쪽부터 첨수도(尖首刀), 북한 학자들이 고조선 화폐로 주장하는 원절식 명도전, 원수도(圓首刀), 반수도(反首刀)

 ⓒ 강원도민일보(http://www.kado.net)

 

 

#삼국지역본과 고조선의 화폐 그리고 명도전(明刀錢)의 비밀

(출처 http://cafe.daum.net/hanryulove)

 

 

(위. 다음백과 명도전 사진 - 평북 위원군 용연동 국립중앙박물관)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 명도전 사진 .아래)

 


 어제 서울 시내 양재역 부근의 한 은행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대기하는 동안에 잠시 의자에 앉아서 열람용으로 비치되어 있던 잡지를 한 권 꺼내 들었습니다.

<<교육마당21>>으로 기억하는데 내용 중에 명도전(明刀錢)에 대한 기사가 보이더군요.

명도전이 바로 고조선의 화폐였다는 주장입니다.
 
그때 내용을 대강 보고는 바로 은행을 나서는 바람에 메모를 해두지 않아서 필자와 연재 관련 서지사항을 세부적으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여하간 명도전에 대한 글이 분명했습니다.

나중에 이 부분을 확인해보니 교육부 공무원 성삼제의 글로 드러났습니다.

연재호는 2006년 8월호 <<교육마당21>>입니다.
 
해방후 세대인 저는 국사와 세계사 교과서 등에서 명도전은 중국 전국시대 연나라의 화폐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라는 주장에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동안 배워온 명도전에 대한 상식은 무엇일까요?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의 설명입니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사용되던 화폐. 언도(匽刀) ·이도(易刀)라고도 한다.

첨수도(尖首刀)에서 전화된 것이며, 표면에 ‘명(明)’자 비슷한 표지가 주출(鑄出)되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자루에는 3줄의

직선무늬가 있고 끝에는 고리 모양으로 되어 있다.

연(燕) · 제(齊) ·  조(趙)에서 사용되었고, 한국에서는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위원군(渭原郡) 용연동(龍淵洞) 퇴장유적(退藏遺蹟)과

평양 정백동(貞栢洞) 덧널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아래는 다음(daum) 백과사전의 설명입니다.
 
 "청동 도자(刀子)를 본떠서 만든 도자형 동제화폐로 중국 허베이 성[河北省]과 한국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다.

전국시대 초기 도전(刀錢)인 첨수도(尖首刀)에서 전화된 것으로 연(燕)나라 때 주조된 화폐이며,

표면에 명(明)자 또는 역(易)자 비슷하게 표시되어 있어 명도전이라 불린다. 뒷면에는 숫자·간지(干支)·좌(左)·우(右)·행(行)·제화

(齊化) 등의 문자가 있는데, 그 종류는 다양하다.

길이 12.4~13.5㎝, 너비 1.5~1.9㎝, 무게 12~19g 정도이며 손잡이 끝에는 3줄의 직선문양이 길이로 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시중 노남리 집자리유적, 평양 정백동 무덤유적에서 적은 양이 출토되었고 영변 세죽리, 위원 용연동, 강계 길다동

유적 등에서 수백·수천 매씩 묶어 항아리 속에 넣어 둔 것이 출토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유적이 대체로 청천강 이북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연나라 세력의 동방 진출과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명도전은 돗자리 무늬 항아리 및 철제품과 함께 발견되고 있어 유적 연대 추정에 좋은 자료가 된다."
 

'연나라 세력의 동방 진출과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는 말처럼 기존의 명도전에 대한 설명은 중국 연나라의 화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제식민사학의 영향도 그렇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이 학설은 큰 도전을 받고 있지 않는 편입니다.

 

이홍식 편저의 <<새국사사전>>(교학사)에도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고대 중국의 청동 화폐의 하나. 표면에다 명(明)자를 새겼는데 그 뜻은 자세히 알 수 없으며 뒷면에도 여러가지 글자를 새겨 수백

종에 달하는데 특히 우(右)자, 좌(左)자, 행(行)자가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제가 이것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연의 <<삼국지>>를 읽다가 생긴 것입니다.

<삼국지>>를 읽다보면 우리나라 고대사의 강역에 관심이 가고 그러다보면 진수의 정사 <<삼국지>>의 동이전 항목을 유심히 보게

되지요.

 

그 과정에서 궁금증이 생겨난 것입니다.

중국고대사와 한국고대사의 접경 지대가 어디인지, 고조선의 강역은 어떻게 되는지 등에 대해 관심을 지니게 되는데 명도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단국대 윤내현 교수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고대사를 연구하다 보니 한국고대사의 진실을 추적하게 되었고 그 결과 고조선의 강역을 만주 일대로 새롭게 그려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교육마당21>>의 명도전 기사는 교육부 자료를 확인해서 보완하기로 하고 그 와중에 블로그 자료를 찾아보니 다음 블로그

<세상 속에 가려진 또 다른 세상>에 명도전 관련 글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그 출처를 찾아보니 송준희 운영의 <우리 역사의 비밀>이었습니다.

송준희의 인터넷 명도전 기사를 일부 수정 인용해 보겠습니다. 

 

                    

명도전은 고조선에서 통용된 연나라 화폐인가? 

(출전:www.coo2.net) 도불원인

 

명도전은 1920년대 일본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요령성 부근에서 발굴되어 시대적 상황과 그들의 사관(史觀)에 의해 요령성 일부 및

이북 평양(?)까지 세력을 뻗친 국가의 화폐로 지금까지 인지되어 왔다.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정의(Definition)가 불분명한 시기를 거쳐 고조선의 강역이 지금 하북성 및 요령성 그리고 동북3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이르렀었다는 이론의 발전이 있는 지금에도 우리는 명도전이 춘추전국시대의 고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왔던 연나라와

제나라의 화폐였다고 알고 있었다.


1. 첫째, 고조선의 영역은 어디인가?

 

 일제 식민사학자 주장 이래로 고조선의 영역은 이북 평양 및 요동반도를 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그 서북쪽에 위치하였던 연(燕) 나라의 명도전이 고조선의 경제적 물물대체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꾸준이 제기되어 오고 확인된 바로 고조선 강역은 평양 이북으로부터 동북3성 그리고 하북성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통치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다면 연의 영역이 요동까지가 아닐진대 그곳에서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이 대량으로 발굴되리란 쉽지 않은 사실이며 거짓

가설이다.

즉 연나라는 연(燕) 장성(長城, 현 하북성 서부)까지 넘어오지 못했으므로 연나라가 주체가 되어 명도전을 통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 둘째, 시공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타당한 이론인가?

 

 경제의 법칙은 고대나 지금이나 규모와 방식만 달라졌을뿐 물건을 사고파는 데 대체수단으로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만약 고조선에서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이 사용되었다면 고조선의 경제는 연나라의 경제에 예속되었어야 하고 연나라는 명도전을

찍어내는 일만으로 고조선의 모든 재화를 구매하고 통용시킬 수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현재의 만원짜리 화폐의 제작비용이 천원이라고 한다면 천원으로 만원가치의 물건을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다?

연나라와 고조선이 특수관계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연나라와 고조선은 자주 전쟁을 치른 나라이고 연나라가 고조선을 지배한 적이 없다.

 

3. 셋째, 청동주조술이 고조선이 주변국에 비해 떨어지는가?

 

 고조선은 대륙에서 제일 오래된 신석기 문화를 기본으로 하는 <홍산문화>의 후예로 추정이 되며 현재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로 보면

청동기시대의 국가생성설을 뛰어 넘는 나라로 판명되고 있다.

무릇 고조선의 청동기는 기원전 25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한국사학계는 과거부터 한국 청동기의 연대는 기원전 7세기를

넘을 수 없다고 단정하여 왔다. 하지만 최근 북한의 평양지역에서 발견되는 청동기는 기원전 4,000년 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되었다.

다뉴세문경의 경우 뿐만 아니라 발견되는 세문경의 무늬는 지금 사람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주조 기술이 동원되었다.

예를 든다면 청동거울의 뒷면에 폭 0.3mm 의 선이 일만 개 이상이 새겨진 주물 거울도 있다.

이러한 기술을 가진 고조선 사회가 명도전이라는 화폐주조 기술이 없었다면 하는 가정은 의미가 없어진다.

 

4. 넷째, 한사군이 고조선지역에 설치되었다면 한나라 화폐인 반량전이 왜 안나오는가?

 

 위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한나라의 도량형과 화폐구조는 진나라의 진시황이 도량형을 통일한 이후로 그 체제를 답습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가 고조선을 굴복시키고 고조선 지역에 한사군을 수 백 년간 두었다면 왜 평양 일대와 그들이 주장하는 요동성과 

동북부에  한나라의 화폐가 보이지 않을까?


5. 다섯째, 명도전의 출토량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연의 존속 기간은 기원전323-기원전 220으로 기껏 100년이나 될까?

 

 연의 존속 기간 동안에 통용되었다고 할 수 없을 무수한 명도전이 동북3성과 요동, 하북에서 가마니로 발굴되어 굴러다닌다.

2,000여 년전 화폐가 기념품 가게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한화로 1000원 정도에 팔렸다.

연나라가 경제대국이 아닌 한 당시 기준 2000여 년 전부터 내려왔던 고조선의 화폐경제를 100년 동안에 바꾸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6. 여섯째, 명도전의 발굴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명도전의 발굴범위는 고조선의 영역과 정확히 일치한다.

평안남도 이북에서 시라무렌강,요하, 천진, 산동 북부까지이다.

이는 러시아학자 부찐이 주장하는 고조선의 강역과 신기하게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강하구보다는 내륙지방에서 더 많이 발굴 출토된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지나고고학자가 명도전의 연구에 직격탄을 날리는데 중국사화과학원 張博泉 (장보추안)교수가 2004년 후반

<<북방문물>>이라는 학술지에서 그의 논문【 明刀幣硏究續說 】에서 위의 그림과 같은 명도전 <원절식>은 고조선의 화폐라고

발표하였다.

결론은 명도전은 고조선에서 고조선 경제를 위해 만들어 사용한 고조선 화폐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고리가 둥근 형태의 명도전은 중국 연나라 것이 아닌 고조선의 화폐라는 것이지요.

중국의 역사학자는 되도록 이면 자국의 것으로 포함시키려는 유혹이 따르게 마련인데 고조선의 것이라고 했으니 기존의 명도전이

중국 연나라의 화폐라는 학설은 학계에서 검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위 셋째 항목에서 한국의 청동기 연대와 관련하여 기원전 7세기론 운운한 부분은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현행 국사 교과서에서 이미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 만주에서는 이보다 앞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명도전과 관련해서 인터넷 자료를 추가로 확인해보니 역사평론가 이덕일도 <<조선일보>>에서 유사한 글을 소개한 적이 있더군요.    

 

 "현행 국사교과서에 ‘중국 춘추시대에 연나라와 제나라에서 사용한 청동 화폐’라고 설명하고 있는 명도전(明刀錢)은 표면에 명(明)자

비슷한 글씨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칼 모양의 이 화폐는 네이멍구 츠펑(赤峯)에서부터 대릉하 상류의 랴오양(遼陽)은 물론 평북 영변군 세죽리(細竹里), 평북 위원군

(渭原郡) 용연동(龍淵洞) 등 한반도 북부에서도 수백·수천 점씩 대규모로 출토된다.

만주와 한반도의 명도전은 연나라 세력이 고조선을 공략한 증거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랴오양과 츠펑도 기원전 3세기까지는 고조선 영토라고 보는 러시아의 고조선 연구가 유엠 부찐의 견해에 따르면 의문이 생긴다.

이 시기 고조선은 연나라와 수차례 전쟁을 치르는데,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라면 고조선은 적국의 화폐를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 출간된 ‘고조선, 사라진 역사’는 이런 모순 해결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저자 성삼제씨는 지린(吉林)대학 역사학과 교수였던 장보취안(張博泉)의 ‘명도폐연구속설(明刀幣硏究續說)’인용해 명도전이

고조선 화폐임을 밝혀냈다.

명도전 손잡이 끝의 구멍이 사각형인 방절식(方切式)은 연나라 화폐지만 원형인 원절식(圓折式)은 고조선 화폐라는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출토된 많은 명도전이 원절식인 이유가 자연스레 이해된다."

 

그러니까 명도전 가운데 구멍의 형태가 사각형인 것을 방절식이라 하고 구멍이 둥근 것을 원절식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원절식의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라는 것입니다.

 

방절식은 "方折式 " 즉 구멍이 모나게 꺾어진 스타일을 말하는 것으로 고리 내부가 네모난 형태의 화폐로 보면 되겠습니다.

참고로 위 <<조선일보>> 인용 이덕일의 글에서 방절식의 절(切)은 절(折)의 오기로 보입니다. 
 
 <<고조선 사라진 역사>>(동아일보사)의 저자 성삼제의 글을 찾아서 확인해보니 중국 학자 장보촨(張博泉)의 논문을 인용, 명도전이

고조선 화폐가 아니었을까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동아일보사)

- 최근 '고조선'이라는 표지 서체가 개정된 책이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명도전은 고대 연나라의 화폐다.’ 이 명제는 참일까, 거짓일까. ....

명도전이 고조선의 청동 화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2003년 2월 송호정 교수가 쓴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에서

'명도전 출토 유적의 위치' 그림을 보고나서이다.
 
명도전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는 서울시립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박선미 연구원이 2000년에 발표한 석사학위 논문 '기원전 3~2세기

고조선의 문화와 명도전 유적'에도 나온다. 박 연구원의 논문에서 지도를 보는 순간 필자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명도전 유적 분포와 러시아 학자 부찐이 그린 '고조선의 영역'이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다.
 
중국 흑룡강성에서 발행하는 고고학계 학술지 <북방문물北方文物> 2004년 제4기 논문집에 장박천張博泉교수가 쓴 '명도폐연구속설

明刀幣硏究續說'이 실려 있었다. 장 교수는 길림대학 역사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초기 만주사 연구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유명하다.

"(출전: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명도전은 고조선 화폐가 아닐까>137~157쪽)
 
 
그렇다면 중국의 장 교수는 명도전에 대해 뭐라고 발표를 한 것일까요? 먼저 성삼제의 저서에 인용된 사항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무렵까지 만주 지역에는 3종의 화폐가 있었다.

즉 첨수도, 원절식도폐, 방절식도폐가 그것이다.

첨수도는 끝이 뾰족한 것이고 원절식은 화폐를 묶기 위해 구멍을 원으로 낸 것, 방절식은 구멍이 사각형으로 된 것을 말한다.

이들 화폐 가운데는 첨수도는 고죽 또는 기자고 관련족이고 원절식은 (고)조선의 화폐이며 방절식은 연나라 화폐이다. "

(성삼제의 위 저서, 156쪽)

                                            

 

 

<고리의 구멍이 둥근 원절식 명도전>
 

그런데 원절식 명도전이 고조선 화폐라는 주장이 보다 설득력을 얻으려면 한국 고대사 청동기 연대와 명도전의 제조 및 구성 성분에

대한 연구 그리고 고조선 강역에 대한 면밀한 검토 등 과제가 많습니다.

한국 고대 화폐사의 심층 연구도 동반된 연구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한국 청동기의 연대가 계속해서 올라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난관이 많지요.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흔히 고조선 연구에 매달리는 이들의 대부분이 재야사학자로 불리는데, 이 책의 저자 성삼제 역시 약력을 보면

역사학 전공자는 아닙니다.
 
저자 성삼제 - 교육인적자원부 지방교육 재정담당관(46세). 연세대 교육학과 졸업, 영국 쉐필드대(Univ. of Sheffield)에서 <잉글랜드

 웨일즈의 학교운영위원회에 관한 연구>(A Study of School Governing Body of England and Wales)로 교육학 석사학위(MEd) 취득.

제35회 행정고시 합격후 서울시 교육청, 서울대학교, 교육인적자원부에서 근무. 2001년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대책반 실무반장을 담당.
 
그러나 재야로 분류되는 이들의 다양한 문제 제기를 우리 사학계가 긍정적으로 검토 활용할 여지는 있다고 보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엄밀한 검증이 뒷받침되어야 하지요.
 
제가 보는 견해로는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하여 고조선 강역을 둘러싼 주변국의 정세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부분에 대한

연구도 보다 진전이 있어야 결과가 도출될 것 같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비파형 동검의 출토 유적지와 명도전 출토 유적지의 지도상 표시 부분에 특이한 점이 발견되는데,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승덕, 적봉, 조양의 트라이앵글 동부쪽의 출토 유적이 상당히 비중있게 밀집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적봉은 명도전의 출토가 많은 곳으로 그 밀집도가 대단히 높으며 조양 일대 역시 밀집도가 높습니다.

이들 지역의 비파형 동검과 명도전 사용의 주체가 누구인지 그 검토가 절실히 요청된다 하겠습니다.
 
적봉은 하가점 하층문화의 중심지로 청동기 연대가 기원전 24세기에서 기원전 15세기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기원전 14세기에서 기원전 7세기로 보이는 하가점 상층문화가 새로이 나타났으므로 주의가 요망되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양자의 계승 관계가 보이지 않으므로 다른 문화로 보여지며 따라서 새로운 거주층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들과 연계되는 문화의 하나로 위영자 문화가 발굴보고된 바 있습니다.
 
하가점 하층문화의 주체는 적봉과 북을 오고간 다른 부족일 수도 있지만 우리로서는 동으로 이동한 고조선의 일족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경우 고조선의 기원전 2333년 건국설과 청동기 연대의 기원전 23세기설의 상관성을 고려할 때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적봉은 물론이지만 현재의 요령성 요동반도 남단인 대련, 여순 등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곳은 발해연안의 요충지로 이 일대의 선박 항해가 빈번했을 것으로 보여지며 인구밀도가 높았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지역에서 명도전이 대량으로 출토된 것은 가볍게 보아 넘기기 어려운 대목인데 왜냐하면 건너편에 위치한 나라가 바로

강성한 제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이 방면으로는 고대 해양사 연구에 천착하고 있는 윤명철 교수의 연구를 접합시키면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가 예상된다고 할 수

있는데, 저는 요동반도 남단과 산동반도를 연결하는 해상 루트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질 것으로 봅니다. 
 요동과 산동을 연결하는 마오[廟] 군도에 대한 탐색은 앞으로 고고학상의 새로운 발견으로 역사의 비밀을 해결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고대의 발해만은 지중해 이상가는 최고의 항해 루트였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명도전 관련 논문의 작성자인 중국 역사학자 "張博泉"은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장박천"이며 C.K 시스템(최영애-김용옥

중국어 표기법)으로 표기하면 "장 - 취앤"(가운데 博자의 한국음 표기 상태 불능, 참고 "뿌 + ㅓ")으로 표기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제가 인용한 표기가 인용자에 따라 다르므로 일관된 표기를 위해 C.K 시스템을 예로 제시하였습니다.
 
또 장 교수의 논문 제목은 한국 한자음으로 <명도폐연구속설>인데, <明刀幣硏究續說>에서 명도(明刀)는 명(明)자 문양이 새겨진 칼

[刀]이라는 뜻이며, 폐(幣)는 화폐로 우리의 경우 전에 해당하므로 명도폐는 바로 명도전을 말합니다.
 
속설도 속설(俗說)이 아닌 기존의 것에 연속, 부가된 주장이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정확하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어떤 작품의

<속편>이라고 사용할 때의 <속설續說>로 또 명도전연구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 학자의 명도전 관련 연구 논문을 입수해서 번역 소개하는 일입니다.

이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명도전이 단순히 한 종류만 있지 않았다는 것뿐 아니라 형태를 달리한 원절식 방절식의 두 가지가 사용자

측에 따라 보다 구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장 교수가 언급한 명도전 원절식이 우리가 생각하는 고조선의 것이라면 <<한서 지리지>>의 기록대로 고조선에서 화폐가 사용되었고

그 화폐는 바로 원절식 명도전이 되는 셈입니다.
 
참고로 현행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고조선의 법률 8개 조항 가운데 오늘날 전하는 세 가지 조항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에 

"도둑질한 자는 종으로 삼는다. 용서를 받으려면 많은 돈을 내야 한다."고 한 대목이 있습니다.
 
원래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는 남자의 경우 노(奴)로 여자의 경우 비(婢)로 한다고 했으니 결국 도둑질한 자는 남녀를 노비로

삼는다는 것이고 이를 대속하려면 각 1인당 50만(萬)의 가치[돈]로 한다고 했습니다.   
 
 
* 출전 및 참고자료 
 
<<三國遺事>><<漢書>> <<三國志>>
 
 교육인적자원부, <<교육마당21(8월호)>>(2006. 8)
           -          , <<중학교 국사>>(교학사, 2002초판, 2005년)
 박선미, <<기원전 3~2세기 고조선 문화와 명도전 유적>>(서울시립대 석사, 2000)
    -    , <요하 이동의 명도전 유적과 연의 관련성 문제 검토><<전농사론典農史論>>(6집)(2000)
 복기대, <<요서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연구>>(백산자료원, 2002)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동아일보사, 2005)
    -     , <명도전은 고조선 청동 화폐><<교육마당21(8월호)>>(교육인적자원부, 2006.8)
 송호정,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푸른 역사, 2003)
 윤내현外, <고조선의 도읍지는 어디였을까?> 고조선의 후기의 강역도 <지도 1>
 이덕일, <로제타 스톤과 명도전(明刀錢)>(조선일보사, 2005)
 張博泉(장박천), <明刀幣硏究續說><<北方文物(第4期)>>(2004)
 송준희, <우리 역사의 비밀>(www.coo2.net)
 홍병진, <역사21>(www.history21.org)
 국립중앙박물관 명도전 사진 자료
 다음 백과 인터넷 글 및 사진 및 자료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 사진 자료

 

 

#명도전은 연나라가 아닌 고조선의 화폐 (출처 烈帝의 21세기 한국역사)

 

우리가 일상 생활을 살아가는데 있어 돈은 필요하다. 돈이 있어야 맛있는 음식과, 멋진 옷을 살 수 있고,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폐가 있다는 것은 그 나라 경제 수준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물교환이 있던 고대 시기에 있어 화폐의 중요성과 가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물물교환으로는 원하는 물건을 사기가 힘들지만, 화폐가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물품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폐는 거래비용을 낮춘다. 물물교환하는 것에 비해 화폐를 사용하는 것의 이점은 매우 크다.

화폐는 사회에서 교환과정을 돕는다.

교환과정에서 화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교환을 조정하는 비용은 매우 클 것이고, 이에 따라 부(wealth)는 매우 줄어들 것이다.

모든 거래가 물물교환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제는 교환을 통해 상호이익이 될 사람을 찾는데 엄청난 시간을 써야 할 것이다.

화폐는 이외에 또 다른 장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 바로 화폐로 인해 거래의 크기에 관계없이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물교환에 한정된 사회는 분업 및 전문화가 발달할 수 없을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훨씬 가난해 질 것이다.

어떤 사회든지 화폐제도가 어떤 형태로건 진보하고 존재하여 왔다는 사실은 화폐의 이용이 상당히 편리함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민족의 첫 고대국가인 고조선 역시 화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폐를 사용했다는 것은 고조선이 시장 경제 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치윤의 『해동역사』를 보면 고조선 흥평왕 원년인 기원전 957년 자모전이라는 주조 화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단고기에는 기원전 2133년 4세 오사구 단군 때 패전이라는 화폐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이러한 기록은 고조선에서 화폐를 사용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외에도 고조선의 범금 8조에는 "도둑질한 자는 노예로 삼는데 재물을 바치고 죄를 면하고자 하는 자는 50만 전을 내야한다"는

내용이 있는 걸로 보아 고조선에서 화폐를 사용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고조선 화폐는 바로 명도전이다.

명도전은 칼 모양의 화폐로 표면에 明자가 새겨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명도전에 대해 국사교과서에서는 연나라, 제나라에서 사용한 청동화폐라는 설명이 있다.

 

 

 

그러나 이 명도전이 과연 연나라의 화폐일까?

이상한 것은 연나라의 도성인 계현(북경 부근)에서는 소량으로 출토되고, 오히려 난하 동쪽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고조선의 영토에

집중적으로 출토된다는 점이다.

명도전이 연나라에서 만든 화폐라면 당연히 연나라 도성인 계현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야 하는데 왜 고조선 지방에만 집중적으로

출토가 되는 것일까?

 

1. 고조선과 연나라는 적국 - 경제적 이론으로 볼 때 타당하지 못하다

 

고조선과 연은 적대국이었다. 그런데 그런 연의 화폐를 고조선에서 사용했다는 것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역사를 살펴보면 자국민이 외국 화폐의 사용을 꺼려하는 예가 많다.

게다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후 취한 조치가 바로 후세인 정권 때 사용한 화폐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이 화폐를 만들지 않고 연나라의 화폐를 사용했다면 두 나라 사이에는 엄청난 경제적 불균형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만약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라면, 연나라는 화폐만 찍어 고조선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올 수 있는데, 고조선과 연은 서로를 적대시하고

전쟁을 치뤘다.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막대한 물자를 조달해야 하는데 명도전이 연나라 화폐라면 고조선이 전쟁 중인 연나라의

화폐를 받고 물자를 공급했다는 말도 안되는 얘기가 되버린다.

 

고조선에서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이 사용되었다면 고조선의 경제는 연나라의 경제에 예속 되었어야 하고 연나라는 명도전을

찍어내는 일만으로서 고조선의 모든 재화를 구매하고 통용시킬 수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보았을 때 이는 말도 안되는 이론이다.

현재의 만원짜리 화폐의 제작비용이 천원이라고 한다면 천원으로 만원가치의 물건을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는가?

연나라와 고조선이 특수관계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명도전이 고조선 화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 않는가?

 

2. 원절식 명도전은 고조선의 화폐

 

명도전은 손잡이 끝의 구멍이 사각형인 방절식(方切式)과 원형인 원절식(圓切式)이 있다.

그런데 이 중 원절식이 바로 고조선의 화폐라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한 인물은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라는데 놀랍다.

그 사람은 바로 길림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장박천 교수이다.

그는 중국 흑룡강성에서 발행하는 고고학계 학술지 북방문물에서 다음과 같이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임을 주장했다.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무렵 만주 지역에는 3종의 화폐가 있었다.

즉 첨수도, 원절식도폐, 방절식도폐가 그것이다.

첨수도는 끝이 뾰족한 것이고 원절식은 화폐를 묶기 위해 구멍을 원으로 낸 것, 방절식은 구멍이 사각형으로 된 것을 말한다.

이들 화폐 가운데 첨수도는 고죽, 또는 기자고 관련 족의 화폐이고, 원절식은 조선의 화폐이며, 방절식은 연나라 화폐이다."

 

이 뿐만 아니라 명도전의 출토 범위는 고조선의 영역과 정확히 일치한다.

조선의 영토는 평안남도 이북에서 시라무렌강,요하,천진,산동 북부인데, 이는 고조선을 연구한 러시아 학자 유엠 부 찐의 견해와

일치한다.

작고한 러시아 학자 유엠 부 찐이 기술한 책에서 고조선의 영토와 명도전의 출토 분포가 일치한 점, 명도전이 연의 중심지인 북경이

아닌 난하 동쪽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점 역시 명도전이 연나라가 아닌 조선의 화폐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3. 고조선 옛 지역에는 왜 반량전이 출토되지 않는가?

 

혼란한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도량형의 통일이다.

이는 중앙집권적 황제 지배 체제를 완성하기 위한 통일 정책의 일환이다.

진시황은 각 지방마다 달랐던 화폐를 통일했는데 이 화폐가 바로 반량전이다.

진을 이은 한나라 역시 진나라의 화폐와 도량형의 기준을 따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나라가 고조선을 굴복시키고 그 땅에 사군을 설치했음에도 왜 요동과 한반도 북부 지방에는 한나라의 화폐가

출토되지 않았냐 하는 점이다.

 

           

 

고조선이 연의 화폐인 명도전을 경제수단으로 삼았다면, 한사군 통치 하에서는 진시황의 화폐정책을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한사군이 설치된 지역에 반량전이 명도전보다 많이 출토되어야 함에도 그런 예가 없다.

 

4. 고조선은 중국보다 뛰어난 청동제조술을 갖춘 문명국가였다

 

고조선은 대륙에서 제일 오래된 신석기 문화를 기본으로 하는 <홍산문화>의 후예로 추정이되며 현재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로 보면

청동기시대의 국가생성설을 뛰어 넘는 나라로 판명되고 있다.

무릇 고조선의 청동기는 기원전 25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한국사학계는 과거부터 한국청동기의 연대는 기원전 7세기를

넘을 수 없다고 단정하여 왔다.

하지만 최근 북한의 평양지역에서 발견되는 청동기는 기원전 4,000년 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되었다.

이 사실에 대해 한국사학계는 진짜냐 가짜냐 논쟁 그리고 체제선전이다 라고 에만 관심이 있을뿐 실체를 확인하려는 교류는 없었다.


 

 


 

고조선은 매우 정교한 청동거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고도의 기술력도 갖추었다.

이러한 기술을 가진 고조선 사회가 명도전이라는 화폐주조 기술이 없었을까?

없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다 여겨지지 않는가?

 

5. 명도전을 연나라 화폐로 보기 어려운 이유 - 출토량

 

명도전을 연나라의 화폐로 보기 어려운 이유로는 엄청난 출토량을 들수 있다.

연나라가 존속했던 기간은 불과 100여 년 남짓인데(기원전 323 - 220) 비해 출토되는 화폐량이 너무 많은 것이다. 

현지를 답사한 학자들에 의하면 고조선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유적지에서 자루 한가득 명도전을 쌓아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너무 흔해서 유적지 주변에 방치해둘 정도라 한다.  

여담이지만, 1990년대 초까지 관광 기념품점에서 명도전 한 개당 1000원에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명도전이 수백 년에 걸쳐 다량 유통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연나라가 경제대국이 아닌 한 당시 기준 2000여년 전부터 내려왔던 고조선의 화폐경제를 100년동안에 바꾸기란 불가능하다.

 

          

 

이상의 예로 보아 명도전은 연나라보다는 고조선에서 만든 화폐일 가능성이 높다.

일제의 식민사관을 못 벗어난 강단 학계에서는 국사 교과서에 버젓이 명도전을 연나라의 화폐이고, 이것을 고조선이 썼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경제적 이론, 출토량, 역사적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이는 재고되어야 한다.

 

그러함에도 아직도 일제의 식민사관의 망상에 벗어나지 못해 우리 스스로를 자학하고 우리민족을 능동적이 아닌 피동적,

수동적이었다고 가르치는 건 분명히 비판받아야 한다.

 

이런 단편적인 사실 하나 하나를 제대로 밝히는 것이야 말로 우리 역사를 재정립하는데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조선의 화폐인 명도전이 연나라의 화폐이고, 고조선이 그런 연나라의 화폐를 사용했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출발점을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라고 가르치는 식민사관과 다를 바 없다.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든 연나라 화폐든 그것이 뭔 상관이냐는 사고를 가졌다면 당장 그 사고를 버려야 한다.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라는 것은 고조선이 화폐를 사용한 시장경제 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이고, 이는 고조선의 국가적 역량이

상당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 역사의 출발점인 고조선이 남의 나라 동전이나 쓰는 원시적인 국가가 아니라 화폐를 만들고 그걸 생활에 필요한

수단으로 사용할 정도로 발달된 국가였다는 것을 뜻한다.

 

참고: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이덕일,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이종호, 『신토불이 우리문화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