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삼국사기> 初期기록

설레임의 하루 2009. 2. 27. 12:58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道不遠人

 

 

 

 

<삼국사기> 初期기록

개인적으로 판단할때 상당히 정확한 위치비정이라고 생각합니다.(운영자 주)

 

(#) 제1장 한사군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각급 학교에서 고대사에 대해, 대륙의 한(漢)이 서기전 2세기말에 위만조선과의
전쟁에서 이긴 후에 그곳

네 군을 설치하였다고 배워왔다.

이 군들의 위치는 대체로 지금의 요동반도에서부터 한반도 중부 황해도와 강원도 북부까지였고, 이들 군현보다 수 세기나 늦게

삼국이 생겨났다고 한다.

네 군들 중 진번과 임둔은 일찍 소멸되고 후에 고구려의 성장과 더불어 4세기초에 마지막으로 평안도황해도에 남아 있던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소멸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학계의 통설은 여러 가지 의문점을 가지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군현이 설치되었다는 영역이 실사와는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의도적이든 오해이든 학자들이 사서의 관련기록을 잘못 해석한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이 조선을 멸하고 설치했다는 군현들의 위치를 사서기록의 과학적인 해석을 통해 추적해 결과, 이들 군현들은 지금의

요하 이동에는 설치된 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요하 이동에 설치된 적이 없는 것을 전부 요동반도에서부터 한반도 중부지방까지 설치되어 무려 4세기 가까이나 유지되었다는 듯이 가르치고 배우며 그렇게 알아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륙국가의 군현들은 근본적으로 지금의 요하 이동에 설치된 적이 없다는 것을 아래와 같이
밝히면서 하루빨리 기존의

잘못된 학설들이 바로 잡히기를 바라는 바이다.  

1. 3세기 위의 낙랑군과 대방군의 위치  




  [후한서] 한전에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吊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 小者數千家 各在山海閒 地合方四千餘里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

한은 삼종이 있는데 마한·진한·변진이라 한다.

마한은 서에 위치하는데 54국이 있고 북으로는 낙랑, 남으로는 왜와 접한다.

한은 동에 위치하는데 12국이 있고 북으로 예맥과 접한다.

변진은 진한의 남에 위치하는데 역시 12국이 있고 남으로 왜와 접한.

모두 78국인데 백제(伯濟)는 그 중 한 나라이다.

대국은 만여 호, 소국은 수천 가인데 각각 산과 바다 사이에 있고 땅은 합쳐 사방 4천여 리이며 동서가 바다로 막히고 모두 옛

진국이다』

  [삼국지] 한전에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

한은 대방의 남에 있고 동서가 바다로 막히고 남으로 왜와 접하며 사방 4천 리나 된다.

3종이 있는데 마한·진한·변한이라 한다. 진한은 옛 진국이다』 

  위의 [후한서]와 [삼국지] 한전에서 보면, 사방 4천 리에 동서가 바다로 막히고 남으로 열도의 왜
(倭)와 가까운 곳은 분명히 반도

남부를 가리키고 있고, 그곳을 한(韓)이라 간주하고 쓴 것임을 알 있다.

마한은 반도 남부의 서쪽 충청·전라 정도로, 진한은 경북 정도로, 예맥은 강원도 정도로, 변진은 경남 정도로 간주하고, 이런 삼한의

북에 각 낙랑·대방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후한서]의 「地合方四千餘里」나 [삼국지]의 「方可四千里」라는 것은 동서·남북 각 2천리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경남 동남단에서 전남 서남단까지 동서 2천 리, 전남 서남단에서 경기만(황해도)까지 남북 2천리로 보았다는 뜻이.  
  

[후한서] 왜전에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島為居 凡百餘國. 自武帝滅朝鮮 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 國皆稱王 世世傳統. 其大倭王居邪馬臺國 樂浪郡徼

去其國萬二千里 去其西北界拘邪韓國七千餘里. 其地大較在會稽東冶之東 與朱崖儋耳相近 故其法俗多同』  

  [삼국지] 왜인전에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 依山島爲國邑 舊百餘國. 漢時有朝見者 今使譯所通

三十國.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裏. 始度一海 千餘裏至對馬

其大官曰卑狗 副曰卑奴母離 所居絶島 方可四百餘裏 土地山險 多深林 道路如禽鹿徑 有千餘戶

無良田 食海物自活 乖船南北巿糴. 又南渡一海千餘裏 名曰瀚海 至一大國 官亦曰卑狗 副曰卑奴母離

方可三百多竹木叢林 有三千許家 差有田地 耕田猶不足食 亦南北巿糴. 又渡一海 千餘裏至末盧國

有四千餘濱山海居 草木茂盛 行不見前人 好捕魚鰒 水無深淺 皆沈沒取之. 東南陸行五百裏 到伊都國

官曰爾支 副曰泄謨觚 柄渠觚 有千餘戶 世有王 皆統屬女王國 郡使往來常所駐. 東南至奴國百裏 官曰兕

馬觚 副曰卑奴母離 有二萬餘戶. 東行至不彌國百裏 官曰多模 副曰卑奴母離 有千餘家. 南至投馬國 水行

二十日 官曰彌彌 副曰彌彌那利 可五萬餘戶. 南至邪馬壹國 女王之所都 水行十日 陸行一月 官有伊支馬

次曰彌馬升 次曰彌馬獲支 次曰奴佳鞮 可七萬餘戶. 自女王國以北 其戶數道裏可得略載 其餘旁國遠絶 不可得詳.

次有斯馬國 次有已百支國 次有伊邪國 次有都支國 次有彌奴國 次有好古都國 次有不呼國

次有姐奴國 次有對蘇國 次有蘇奴國 次有呼邑國 次有華奴蘇奴國 次有鬼國 次有爲吾國 次有鬼奴國

次有邪馬國 次有躬臣國 次有巴利國 次有支惟國 次有烏奴國 次有奴國 此女王境界所盡. 其南有狗奴國 男子爲王 其官有狗古智卑狗

不屬女王. 自郡至女王國萬二千餘裏』 

 위의 [삼국지] 왜인전에서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중략).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 七千餘裏 〉

왜인은 대방의 동남 큰 바다 가운데 있다...(중략)...군에서 왜까지 해안을 따라 물길로 간다.

韓國을거쳐 가는데 남으로 잠깐 동으로 잠깐 가면 그 북안의 구야한국에 이르는데 7천여 리이다」

라고 하므로, 위의 [후한서[삼국지]의 한전과 [삼국지]의 왜인전을 비교해 보면 한전의 '韓(한)'이 왜인전의 韓國(한국)'과 같은

의미로 대응된다.

그리고 반도에서 대마도로 건너가기 직전의 구야한국은 경남의 동남단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韓'은 남북 2천 리, 동서 2천리이므로 왜인전의「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이란 구절과 비교할 때 사남(乍南)은

경기만에서 전남 서남단까지의 남북 2천 리에 대응되고, 사동(乍東)은 전남 서남단에서 경남 동남단 狗邪韓國(구야한국)까지의

동서 2천 리에 정확히 대응된다.

구야한국은 변진 소국들 중 弁辰狗邪國(변진구야국)에 해당하는데 대마도로 건너가기 직전이므로 대체로 지금의 경남 김해 정도로

보고 있다.

사신행정에 대방군에서 경기만까지의 과정은 설명이 생략되어 있다.  

그런데 대방에서 구야한국까지는 7리라하고, 경기만(황해도)에서 경남 동남단 구야한국까지는 4천 리이므로 나머지 3천 리가

대방에서 경기만까지의 거리라는 뜻이다. 


「狗邪韓國」 다음으로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반도 동남단 이곳에서 「始度一海 千餘裏至對馬國 〉 처음으로 한 바다를 건너 천여

가면 대마국이다」라고 했는데 이 바다는 대한해협을 가리키고 반도 동남단에서 지금의 대마도까지 천 리 정도로 보았다는 뜻이다

  「又南渡一海千餘裏 名曰瀚海 至一大國 〉 또 남으로 한 바다를 천여 리 건너가면 일대국에 이른다」고 하였다.

바다는 瀚海(한해)라 하는데 지금의 대마해협이고, 일대국은 지금의 일기도(壹岐島)를 가리킨다.   又渡一海 千餘裏至末盧國 〉

또 한 바다를 건너 천여 리 가면 말로국(末盧國)에 이른다」고 하였고 말로국은 지금의 구주 서북단 마쯔우라[松浦]에 해당한다.

마쯔로[末盧]는 마쯔라[松浦]와 같은데 '〉라·로'로서 '斯羅(사라)=斯盧(사로)'와 같은 음운현상이다.

  그 다음이 「東南陸行五百裏 到伊都國 〉 동남으로 육로 오백 리를 가면 이도국(伊都國)에 이른다고 하였고 이도국은 지금

후꾸오까[福岡] 서쪽 사도반도(糸島半島)에 해당하여 전부 구주 서북부지역이다. 이도(伊都)는 이도[糸]와 같다.  

대방에서 12,000리라 하였는데 여기까지 10,500리이므로 나머지 1,500리는 이도국에서 야마다의 중심지였던 구주 (주1)야쯔시로

[八代]까지로 보면 될 것이다.

이렇게 위의 대방군에서 왜의 야마다까지 12,000리라고 구간별로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  

주1; 〈춤추는 신녀/이종기/동아일보사/1997년〉에 의하면 야마다 수도가 八代市였다 한다. 
                  
  [양서] 왜전에

『倭者 自雲太伯之後 俗皆文身. 去帶方萬二千餘裏 大抵在會稽之東 相去絶遠. 從帶方至倭 循海水行 歷韓國 乍東乍南 七千餘裏

始度一海 海闊千餘裏 名瀚海 至一支國 又度一海千餘裏 名未盧國 又東南陸行五百裏 至伊都國 又東南行百裏 至奴國 又東行百裏

至不彌國 又南水行二十日 至投馬國 又南水行十日 陸行一月日 至邪馬臺國 即倭王所居

 

왜는 자칭 백의 후예라 하고 문신을 하는 습속이 있다.

대방을 떠나 만 이천여 리 되고, 대략 회계의 동쪽에 있는데 멀리 떨어져 있다.

대방에서 왜로 가는데 바다를 따라 물길로 한국을 거쳐 동으로 잠깐 남으로 잠깐 칠천여 리를 가서 처음으로 한 바다를 건너, 너비

천여 리의 한해라 하며, 일지국에 이른다.

다시 한 바다를 천여 리 건너가면 말로국이다.

다시 동남으로 육로 오백리를 가면 이도국에 이르고, 다시 동남으로 백 리 가면 노국에 이르고, 다시 동으로 백 리 가면 불미국에

이르고, 다시 남으로 물길 20일을 가면 투마국에 이르고, 다시 남으로 물길 10일과 뭍길 한 달을 가면 야마다국에 이르는데 왜왕이

거하는 곳이다』    

  [구당서] 왜국전에

 『倭國者 古倭奴國也. 去京師一萬四千裏 在新羅東南大海中 依山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世與中國通. 其國 居無城郭

以木爲柵 以草爲屋 四面小島五十餘國 皆附屬焉. 其王姓阿每氏 置一大率 檢察諸國 皆畏附之 設官有十二等 〉

왜국은 옛날 왜노국이다. 수도를 떠나 만 사천 리이고 신라의 동남 대해 중에 있다.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거한다..(후략)』
    
  [구당서] 일본국전에

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或曰 倭國自惡其名不改爲日本. 或云 日本舊小國 倂倭國之地 〉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그 나라가 해 뜨는 곳에 있었으므로 일본을 이름으로 했다.

혹 이르기를 왜국 스스로 그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 일본으로 바꾸었다 한다.

혹은 이르기를 일본은 옛날 소국이었는데 왜국땅을 병합하였다 한다』            

  [신당서] 일본전에

 『日本古倭奴也. 去京師萬四千裏 直新羅東南 在海中 島而居. 東西五月行 南北三月行. 國無城郛 聯木爲柵

以草茨屋 左右小島五十餘 皆自名國 而臣附之. 置本率一人 檢察諸部 其俗多女少男 有文字 尚浮屠法 其官十有二等 其王姓阿每氏

일본은 옛 왜노이다. 수도를 떠나 만 사천 리, 신라의 바로 동남 바다 속 섬에 거한다...(후략)』  

  [양서]에는

「大抵會稽之東 相去絕遠 〉 대략 회계의 동쪽이고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는데 회계의 위치는 양자강 하구(河口)의 바로

남쪽으로서 대륙에서 동지나해 쪽으로 가장 돌출한 곳이다.

「會稽之東 〉 회계의 동쪽」이란 단순히 방향만을 가리키고, 위치는 「相去絕遠 〉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오늘날의 정밀한 지도로 보면 회계를 지나는 위도가 대략 구주 남단보다 약간 아래쪽에 있는 섬들을 지나가는 것을 확인할

있다.

[후한서]에도 「其地大較在會稽東冶之東」이라 하여 같은 내용이다.

즉 당시 왜는 구주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양서]의 왜전은 [삼국지] 왜인전의 사신행정과 같은데 [삼국지]의 풍물기사는 생략하고 사신행정은 옮긴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삼국지]의 내용 중에서 ‘대마국’ 관련한 내용이 누락되어 있는 정도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대방군에서 왜까지의 거리 12,000리는 대방군에서 여왕이 다스리던 야마다의 수도까지의 거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후한서] 왜전의

「其大倭王居邪馬臺國 樂浪郡徼 去其國萬二千里 去其西北界拘邪韓國七千餘里」,

[삼국지] 왜인전의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중략)...從郡至倭...(중략)...自郡至女王國萬二千餘裏」,

[양서] 왜전의 「倭者...(중략)...去帶方萬二千餘裏 大抵在會稽之東...(중략)...從帶方至倭...

(중략)...至邪馬臺國 即倭王所라는 구절들은 같은 내용인 것이다.      
 [후한서]에 「光武賜以印綬 〉 광무가 인수를 주었다」고 하여 광무제가 왜노국왕에게 준, '漢委奴國王(한위노국왕)'이란 글이

새겨진 금인(金印)이 서기 1,784년 후꾸오까[福岡] 지하도(志賀島)에서 발견되었고 委는 倭와 같으므로 [구당서]의 왜노

(倭奴國)은 구주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륙사서에서 왜의 위치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서] 지리지에

『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한서]의 [위략] 소인 주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皆倭種』   

[후한서] 건무중원2년(57년) 정월조 『東夷倭奴國王遣使奉獻』의 주에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為國』,

영초원년(107년) 10월조 『倭國遣使奉獻』의 주에 『倭國去樂浪萬二千里 男子黥面文身 以其文左右大小別尊卑之差 見本傳』,

왜전에 『倭在韓東南大海中 依山島為居 凡百餘國』  


  [진서] 왜인전에 『倭人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為國 地多山林 無良田 食海物 舊有百餘小國相接』 
  [송서] 왜국전에 『倭國在高驪東南大海中 世修貢職』
  [남제서] 왜국전에 『倭國 在帶方東南大海島中』
  [북사] 왜국전에 『倭國在百濟新羅東南 水陸三千裏 於大海中依山島而居』   
  [통전] 변방전 왜전에 『其王理邪馬臺國 或云邪摩堆 去遼東萬二千里 在百濟 新羅東南』

 대륙사서에서 한과 왜를 기술할 때 가장 자주 사용한 기준지명이 ‘대방’과 ‘신라’인데, [삼국지]에는 왜의 여왕이 위에 사신을 보내면

반드시 대방군에서 내리고 이때 대방태수가 대방관리를 붙여 수도 낙양으로 보내고 있다(주2). 왜로 가는 위의 사신도 역시 대방에서

출발하여 해로로 왜에 가고 있다.

이를 볼 때 대방은 바다를 낀 군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대륙사서 왜의 위치를 말할 때도 대방을 기준으로 기술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판단되며, (경주)신라를 자주 기준 삼은 것은 왜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후한서] 왜전에는

「其大倭王居邪馬臺國 樂浪郡徼 去其國萬二千里 去其西北界拘邪韓國七千餘里 〉

그 대왜왕은 야마다국에 거한다.

낙랑군 변방에서 그 나라에 가는데 12,000리 되고, 그 서북계 구야한국에 가는데 7,000리 된다」 하고, 영초원년(107년) 10월조

주에는 「倭國去樂浪萬二千里 〉 왜국은 낙랑군과 12,000리 떨어져 있다」고 하여 낙랑 기준으로 기술하였는데, 대방군은 [삼국지]

한전에 의하면 후한말 건안중(196~219년) 공손강이 낙랑군의 남부를 분할하여 설치하였으므로, 후한세의 낙랑군은 3세기 위의

대방군과 같고 후한세나 위세나 외교사신이 드나든 항구가 동일한 곳이었다는 뜻이다.  
        
주2; [삼국지] 왜인전에

 『王遣使詣京都帶方郡諸韓國及郡使倭國 皆臨津搜露 傳送文書賜遺之物詣女王...(중략)...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求詣天子朝獻 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중략)...

正始元年 太守弓遵遣建中校尉梯俊等奉詔書印綬詣倭國 拜仮倭王 幷齎詔賜金帛錦罽刀鏡采物 倭王因使上表答謝恩詔』
  [후한서] 왜전에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 光武賜以印綬 安帝永初元年 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 願請見』 

  [후한서]·[삼국지]·[양서]에는 대방(낙랑)에서 왜국(구주의 야마다 수도)까지 12,000리 되고, [구당서][신당서]에는 공히 '倭=

日本'이 倭奴國(왜노국)이 있던 곳이라 하는데, 왜노국은 [후한서] 왜전에 「光武賜以印綬」라고 한 광무제의 금인이 후꾸오까에서

발견되었으므로 구주의 委奴國(위노국)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후한서]·[삼국지]·[양서]의 「去帶方(樂浪)萬二千餘裏를 [구당서]·[신당서]의 「去京師一萬四千裏」와 비교하면 대륙국가의 

수도에서 대방(낙랑)까지 육로로 2,000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양서] 왜전과 [구당서] 왜국전, [신당서] 일본전의 왜국과의 거리를 보면 그 전 [삼국지]의 내용을 관용적으로 요약하여

기록한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수도에서 대방까지의 거리도 위의 수도 낙양에서 대방까지의 거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방에서 당의 수도 장안은 낙양보다 더 멀다.   

위의 기사들을 분석해 본 결과, 대륙에서 열도로 갈 때는 반드시 고대 대방이란 곳에서 출발하여 반도 서남부 해안을 거쳐 반도

동남단에서 대마도로 건너다닌 것을 알 수 있다.

  그 행정(行程)의 구간별 거리를 계산해 보면,

《낙양(조위수도) --- 대방 --- 반도 동남단(구야한국) --- 왜(구주·야마다)》 ==> 《낙양 -- 2,000리 -- 대방 -- 7,000리

 -- 반도 동남단(구야한국) -- 5,000리 -- 왜(야마다·九州八代)》로 간주한 것이다.

그런데 [후한서]·[삼국지]에서 반도의 서남부 해안의 거리가 동서·남북 각 2,000리, 합 4,000리로 간주되었으므로 《대방 --

3천리 -- 경기만 -- 4천리 -- 구야한국》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을 보면 3세기 위의 수도 낙양에서 대방까지는 2,000리이고, 대방에서 경기만까지는 3,000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3세기 위의 대방군의 위치는〈낙양에서 2,000리, 경기만에서 3,000리〉라는 조건이 동시에 만족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다시 [후한서] 군국지에 실린 수도 낙양에서 각 군까지의 거리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涿郡高帝置 雒陽東北千八百里 七城 戶十萬二千二百一十八 口六十三萬三千七百五十四 涿 迺侯國 故安易水出雹水出 范陽侯國

良鄉 北新城有汾水門 方城故屬廣陽有臨鄉有督[亢]亭.  

廣陽郡高帝置為燕國 昭帝更名為郡 世祖省并上谷 永平(元)八年復 五城 戶四萬四千五百五十 口二十八萬六百 薊本燕國刺史治[1]

廣陽 昌平故屬上谷 軍都故屬上谷 安次故屬勃海. [1]漢官曰 雒陽東北二千里. 

漁陽郡秦置 雒陽東北二千里 九城 戶六萬八千四百五十六 口四十三萬五千七百四十

漁陽有鐵 狐奴 潞 雍奴 泉州有鐵 平谷 安樂 傂奚 獷平. 右北平郡秦置 雒陽東北二千三百里 四城 戶

九千一百七十 口五萬三千四百七十五 土垠 徐無 俊靡 無終.  勃海郡高帝置 雒陽北千六百里 八城 戶

十三萬二千三百八十九 口百一十萬六千五百 南皮 高城侯國 重合侯國 浮陽侯國 東光 武 陽信延光元年復 脩故屬信都』   

  탁군(涿郡)은 지금의 북경 남쪽에 해당하고 그 속현 이름들이 지금도 여럿 남아 있다.

탁(涿)은 탁주(涿州)에 해당하고, 고안(故安)은 고안(固安)으로 남아 있고, 양향(良鄕)은 북경시내 서남에 지금도 남아 있고, 북신성

(北新城)도 북경 남쪽에 신성(新城)으로 남아 있다.   

광양군(廣陽郡)은 지금의 북경 정도로 볼 수 있는데, 계(薊)는 지금도 천진시내 북 계현(薊縣)으로 남아 있고, 창평(昌平)은 북경시내 

서북에 있으며, 발해의 안차(安次)는 지금도 북경과 천진 사이에 랑방시(廊坊市) 안차구(安次區)로 남아 있다.

 어양군(漁陽郡)은 광양군의 동북으로 볼 수 있는데 평곡(平谷)이 북경시내 동쪽에 지금도 남아 있다.
우북평군(右北平郡)은 이 기사대로 보면 광양군에 인접한 동쪽으로 볼 수 있고, 무종(無終)이 옥전(玉田)으로 바뀌었다는데 옥전은

지금도 천진시 동북 인근에 남아 있다.  

발해군(勃海郡)은 천진의 남방으로 황하 하류[東河;동하]를 끼고 있는 지역이다.

그 속현 남피(南皮)·동광(東光) 등이 지금도 창주(滄州)와 형수(衡水) 사이에 있고, 무(武) 역시 그 일대에 지금도 무읍(武邑)으로

남아 있다.  

각 군별 거리를 보면 북경 남쪽의 탁군이 1,800리, 북경·천진 일대의 광양군이 2,000리, 북경시내 동쪽의 어양군이 2,000리,

천진의 동쪽 우북평군이 2,300리, 천진 남방의 발해군이 1,600리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낙양에서 지금의 북경·천진 일대까지를 당시에는 2,000리 정도로 보았다는 뜻이다.   

대방군에 항구가 있으므로 낙양에서 2,000리 떨어졌다던 이 항구는 지금의 천진항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천진 일대가 3세기 위의 대방군이라면 낙랑군 역시 이 대방군과 인접해 있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삼국지] 한전에 의하면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

환제·영제 말기에 한예가 강성하여 군현이 통제할 수 없어 민이 한국으로 많이 흘러 들어갔다.

안중에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 황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으로 삼았다」고 하여, 낙랑군의 남부지역을 나누어 대방군을 설치했다

하였기 때문이다.


이 결과를 보면 지금의 천진 일대의 대방군을 분할하고 난 나머지 낙랑군이 [후한서]의 우북평군과 위치가 겹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낙랑군은 대략 천진~난하 정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후한서] 군국지 우유주자사부(右幽州刺史部)조에 수도 낙양에서 각 군까지 거리들을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 )의 이름들은 지금도 남아 있는 지명들이다.  






지금의 천진 남방, 황하 하류 서북(남피·무·동광)에 해당하는 발해군은 낙양 북 1,600리
지금의 북경 남쪽(탁·고안·북신성·양향)에 해당하는 탁군은 낙양 동북 1,800리
지금의 북경·천진 일대(계·창평·안차)에 해당하는 광양군은 낙양 동북 2,000리
지금의 산서성 동북부(대)에 해당하는 대군은 낙양 동북 2,500리  
지금의 북경 서쪽(거용·탁록)에 해당하는 상곡군은 낙양 동북 3,200리
지금의 북경시 동부(평곡)에 해당하는 어양군은 낙양 동북 2,000리
지금의 천진 동북(무종〉옥전)에 해당하는 우북평군은 낙양 동북 2,300리  
지금의 난하 하류 동편으로 설정된 요서군은 낙양 동북 3,300리  
지금의 요하 하류 동편으로 설정된 요동군은 낙양 동북 3,600리  
전한세의 요서·요동군의 현을 3개씩 분할하여 만든 요동속국은 낙양 동북 3,260리
지금의 요하 하류 동편의 요동보다 멀게 설정된 현토군은 낙양 동북 4,000리
지금의 천진~난하에 해당하는 낙랑군은, 현토군보더 멀게 설정되어 낙양 동북 5,000리  

  여기서 보면 발해·탁·광양·어양·우북평군 등의 경우는 거리에 무리가 없으나 대·상곡군 등은 거리가 잘못된 것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요서·요동군의 경우는 겉보기로 보면 지금의 요하를 기준으로 동서에 위치한 듯하여 대체로 부합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위치는 작위적으로 설정된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위사인 것이다.   

위나라 대방군 위치는 〈낙양에서 2천 리, 경기만에서 3천 리〉로서 지금의 천진 일대에 해당하고 따라서 낙양에서 경기만까지 5천

리가 되는 셈인데, 경로가 일부 다르기는 하지만 역시 낙랑군이 낙양 동북 5천 리라는 [후한서] 지리지의 거리와 일치하고 있다.

즉 낙양에서 천진(대방)까지는 육로 2천리로 같고, 거기서 왜로 가는 사신길은 해로로 경기만(황해도)까지 3천 리인데, 지리지의

낙랑군 거리는 육로로 3천 리라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원래는 하북성 동북부 천진~난하에 있던 낙랑군을, 반도 남부로 간주한 삼한의 북에 있다고[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미리 설정하고 [후한서] 한전과 지리지를 썼다는 것이다.

[삼국지] 한전에는 낙랑군의 남부를 분할하여 만든 대방의 남에 삼한이 있다 하여[韓在帶方之南], 대방이 영락없이 황해도로 보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진 일대였던 대방군을 황해도까지 동으로 3천 리나 밀어내기를 한 것이다.  
  
지도1; [후한서] 군국도(현대지명과 군국명)  

  각도를 달리하여 보면, [후한서] 군국지 낙랑군조에 속현들이

「朝鮮 䛁邯 浿水 含資 占蟬 遂城 增地 帶方 駟望 海冥 列口[1]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樂都. [1]郭璞注山海經曰 列 水名 列水在遼東」

으로 나오는데, [진서] 지리지 平州(평주)조에는 낙랑군 속현으로 「朝鮮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등 6현이고, 대방군 속현은 「帶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冥」 등 7현인데 대방군의 경우 南新(남신)을 제외하고는 전부 후한의

낙랑군 속현들 그대로임을 확인 할 수 있다.      
        
  [한서] 조선전

『... 左將軍已并兩軍 即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唊 相與謀曰 始欲降樓船 樓船今執 獨左將軍并將 戰益急

恐不能與 王又不肯降 陶 唊 路人 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已又反

復攻吏 左將軍使右渠子長 降相路人子最 告諭其民 誅成已 故遂定朝鮮爲真番臨屯樂浪玄菟四郡 封參爲澅清侯 陶爲秋苴侯 唊爲平州侯

長爲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沮陽侯 左將軍徵至 坐爭功相嫉乖計 棄市 樓船將軍亦坐兵至列口當待左將軍 擅先縱 失亡多 當誅 贖爲庶人』

  여기서, 원봉3년 여름 조선인 尼谿相(니계상) 參(삼)이 「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살해하고 항복해 왔다」

고 하였고, 그 후 「遂定朝鮮爲真番臨屯樂浪玄菟四郡 〉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임둔·낙랑·현토 네 군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 기이1 이부조에

「前漢書 昭帝始元五年己亥 置二外府 謂朝鮮舊地 平那及玄菟郡等 爲平州都督府 臨屯樂浪等兩郡之地 置東部都尉府[私曰

朝鮮傳 則眞番玄菟臨屯樂浪等四 今有平那無眞番 蓋一地二名也] 〉

전한서에 이르기를

소제 시원5년(서기전 82년)에 두 외부를 두었는데 이것은 조선구지에, 평나 및 현토군 등을 평주도독부로 하고 임둔·낙랑 등

군지에 동부도위부를 둔 것을 말한다[보기에, 조선전에는 진번·현토·임둔·낙랑 등 넷인데 지금 평나는 있고 진번은 없으니 아마도

곳에 이름이 둘일 것이다]」라고 한다.

이것을 보면 일연국사는 평나를 선대의 진번으로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현토군에 대한 응소(應劭)의 주에 「故真番 朝鮮胡國」이라 하여 진번이 현토군에 흡수된 것으로 되어 있고,

[한서] 무제 원봉3년 4군 (주3)설치기사에 ‘武陵書(무릉서)’를 인용한 신찬(臣瓚)의 주에 의하면 진번이 임둔보다 1,500리나 먼

것으로 되어 있다.

응소의 주에 의하면 낙랑의 북 난하 중류 일대에 있던 현토군지의 일부이므로 난하 중류 동편 어딘가에 진번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최근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封泥)가 발견된 금서시(錦西市)를 중심한 지금의 난하 하류 동편 요서 일대를 임둔군으로

비정하면 최초 한사군의 동방한계는 임둔군이 된다.

왜냐하면 네 곳 중에 두 곳씩을 묶어 하나를 ‘동부(東部)’로 했다는 것은 나머지 하나가 이 동부도위부의 서쪽에 위치했던 것으
로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낙랑+임둔=동부도위부”로, “평나+현토군=평주도독부”로 했다는 뜻이다.

그러면 낙랑은 역시 지금의 난하부터 천진까지로 볼 수 있다.

 낙랑군의 남부를 분할하여 설치한 대방군의 항구가 지금의 천진항으로 비정되므로, 낙랑은 난하 하류 동편의 임둔과 대방 사이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후한의 북·동북부를 차지하고 성립된 3세기 위나라의 대방군이 지금의 천진 일대였고, 위나라의 동방한계였던
낙랑군은

대방군과 동북으로 인접한 ‘난하以西’에 존재했던 것이다.

후한의 낙랑군 동계(東界)는 난하에 해당하고, 원래 난하의 동부는 낙랑군 영동칠현(領東七縣)이었는데 전한말에 고구려가 차지하여

오래도록 중심부로 삼았던 곳이다.

  전한말 고구려가 차지한 낙랑군 영동칠현에 대해서는 [후한서]와 [삼국지] 예·동옥저전에 상세히 나온다.

이 ‘領(嶺)’은 단단대령(單單大領)을 가리키는데, 전한시의 낙랑군 영역에 포함되어야 하고, 후한시의 낙랑군(천진~난하)과는

인접해야 하므로, 난하 일대 낙랑군의 북쪽이자 적봉의 서쪽에 대체로 서북에서 동남으로 달리는 지금의 칠로도산(七老圖山)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주3; [한서] 무제 원봉3년

夏 朝鮮斬其王右渠降[1]. 以其地爲樂浪臨屯玄菟真番郡[2]. [1]師古曰 右渠 朝鮮王名.

[2]臣瓚曰

茂陵書臨屯郡治東■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 十五縣 真番郡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十五縣. 師古曰 樂音洛 浪音郎

番音普安反 ■音弋支反 霅音丈甲反』                

  [한서] 무제 원봉6년

『秋 蝗 先是 兩將軍征朝鮮[1]. 開三郡[2]. [1]師古曰 二年 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彘將應募罪人擊之.

[2]師古曰 武紀云以其地爲樂浪臨屯玄菟真番郡 是四郡也 而此云三 蓋傳寫志者誤』 
 

 [한서] 지리지 현토군조

玄菟郡 武帝元封四年開 高句驪 莽曰下句驪.屬幽州[1] 戶四萬五千六 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 縣三 高句驪 遼山 遼水所出

西南至遼隊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2] 上殷台 莽曰下殷[3] 西蓋馬 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二千一百里 莽曰玄菟亭. [1]應劭曰 故真番 朝鮮胡國. [2]應劭曰 故句驪胡. [3]如淳曰 台音鮐 師古曰 音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