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대륙백제, 백제가 하북성 유역을 점유" 국회청문회- 임승국

설레임의 하루 2009. 2. 27. 12:37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심제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대륙백제에 대해서 청문회 자료를 올립니다. 정사의 기록입니다.
이 정사의 기록을 보면서도 애써 부정하고"아닐 것이다"라는 증거들을 찾기에 혈안들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찾으면 찾을수록 대륙백제의 흔적들이 더욱 더 많이 발견될 것이 남제서 백제전의 "공백으로 남아있는 사라진 백제역사"를

찾을 즈음엔 기존 OOOO는 전부 OO물을 찾아야 할 것 입니다.
그런 날이 빨리 올수 있기를....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중국 정사인 25사 기록마저도 부인한다면 차라리 역사를 논하지 말자.)

나의 사학은 중국의 정사인 25사를 토대로 하여 성립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도하는 학회는 "한국정사힉회"입니다.

백제를 규명하는데 있어 제가 동원한 사료는 중국의 정사인 "25사"입니다.
중국의 정사인 25사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진서""송서""양서"......등등
이렇게 해서 명나라의 역사책인 "명사"까지 25개왕조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중국 25사 가운데 "백제전"이라고 하는 기록을 공식적으로 기록한 사서는 사기, 전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 다음의 "송서"입니다. 즉. 25사중 6번째입니다. 그 다음에 "양서, 남제서, 북제서, 주서...."
이렇게 해서 "명나라 역사"까지 이것이 중국25사의 체계인데 우선 송서의 기록부터 한번 소개하겠습니다.
"송서, 양서"의 기록은 꼭 같습니다.
저는 정사의 기록을 가지고 얘기하지 결코 야사나 비정규사료를 들지 않겠어요.
중국역사의 기록도 부인한다면 학문하지 말자는 얘기나 마찬가지예요.

 

(중국정사 송서(宋書)에는 백제가 하북성 유역에 있다고 하였다)
(유성과 북평지간 : 진평이군 점유) 송서의 백제전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어요.

"백제자 후점강대 겸제소국 百濟者 後漸强大 兼諸小國
기국 본여구려 재요동지동 진세 구려기략유요동 其國 本與句麗 在遼東之東 晋世 句麗旣略有遼東

백제전거유요서진평이군의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금유성북평지간今柳城北平之間

자치백제군" (송서.백제전)自治百濟郡
제가 이렇게 원전을 읽어 봤자 잘 이해하지 못할(처음 보니까?) 것이므로  간단하게 해설하겠습니다.

즉,
"백제라고 하는 나라는 후에 점정 강하고 커져서 여러 작은 나라를 병합하고 그 나라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는데

진나라 때 (3세기 중엽)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고 백제 역시 요서진평의 2군을 점령하니 지금의 유성과 북평사이로다."

(유성과 북평지간 진평2군)

- 본 홈페이지에 소개한 "고 북평"은 북경 서남쪽에 있음을 밝혔다- 어찌하였던 하북성 유역이다.

여기서 고구려를 구려라고 적은 것을 좀 이상하게 생각 하실지는 모르나 이는 중국 사람들의 필법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려와 고구려를 구별하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잘못이예요.  같은 나라입니다.

"구려(句麗)"에는 "고(高)"자를 쓰지 않았을 뿐입니다.
왜 안 썼는가 하면 중국 사필처럼 오만한 사필은 없습니다.
"고"자가 높을 "고"자이기 때문에 안 쓴 것입니다. 이는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왕망이란 자가 한을 멸망시키고 "신"이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그는 주변에 잇는 나라이름 산의 이름 지명들을 멋대로 고쳤는데

고구려라는 나라는 나라의 이름을 뭐라고 고쳤는지 아십니까?
그는 "고"자가 보기 싫어서 "하(下)"자로 고쳤어요. 그래서 '하구려"라고 불렀어요.

중국인들의 심뽀를 이만하면 알 것입니다.

(중국놈들 역사기록의 원칙 3가지)

그렇지 않아도 중국사필에 세가지 원칙이 있는데

첫째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 중국을 위해 중국의 수치를 숨기고
둘째 "긍화하이누이적(矜華夏而陋夷狄)"- 중국을 높이고 외국을 깍으며
셋째 "상외략외(詳內略外)- 중국내국의 역사는 상세하게 외국의 역사는 간략하게 적는다. 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손(不遜)한 사필정신 밑에 역사를 적었으므로 위에서 본 바와 같다.

(구려는 고구려의 낮춘말)

"여구려 재요동지동(本與句麗 在遼東之東)"이라고"고"자 쓰지 않고 "구려"라 한 것입니다.
"기국 본여구려 재요동지동(其國 本與句麗 在遼東之東)"이라는 대목의 "요동"도 현재의 "요동"이 아니고
상고시대의 "요동입니다.

(요동은 만리장성 동쪽)

위에서 "갈석"의 사료를 말씀드리면서 "요동의 개념"을 말씀 드렸는데 여기서는 알기 쉽게 만리장성의 동쪽을 우선 요동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아마 현재의 한국사람보고 백제의 위치를 적으라고 한다면
"백제여신라재반도지서남지의""百濟與新羅在半島之西南地矣"라고 적을 것입니다.
그런데 송서 백제전은 "기국 본여구려 재요동지동" 이라고 적었습니다"其國 本與句麗 在遼東之東"
위의 송서 백제전을 계속해서 해석하면

(AD 3세기 진나라때 이미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 (AD 3세기 진나라때 백제가 하북성을 점령)

"진나라 때 (3세기 중엽)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고 백제 역시 요서진평의 2군을 점령하니 지금의 유성과 북평 사이로다."
위의 진(晋)시의 진나라는 265년에 건국합니다. 이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했다 했습니다.

또 위의 "백제전거유요서진평이군의(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라는 말의 "요서 진평 2군"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했는데 백제는 요서와 진평을 점령했다 했습니다.
요서가 한국땅이 아니고 중국땅인 것은 확실합니다.
요서만이 아니라 진평군의 2군의 땅을 점령했다고 정식으로 적었어요.
"주(註)"에 뭐라고 적혔는고 하 "유성북평지간(今柳城北平之間)"이라고 했습니다.
버들 "류(柳)"자와 재 성(城)자 !아마 좀 낯선 지명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도를 찾아보시면 황하남쪽에 유성이 있습니다. 하남성이지요.
북평은 아마 모르시는 분이 없을 거예요. 오늘날로 중국의 서울입니다.
"유성과 북평 사이"거기에 요서군, 진평군이 있었는데 "자치 백제군(自治百濟郡)"이라 했습니다
즉, "백제가 백제군을 자치했다"고 한 것입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 정사의 기록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국사학계)

여러분 이는 정사의 기록이요 . 특히 동양정사의 기록입니다.

나는 여러 가지 수수께끼가 많이 있지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하나 있어요. 뭔지 아시겠습니까?
이 글은 피해자인 중국 측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국사당국은 어째서 이 기록을 못 본체 하십니까?

중국이라고 하는 나라는 백제에게 자기의 땅을 뺏기고 주권을 유린당하고 피해를 입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중국사 속에 백제가 요서 진평의 두 군을 점령했다
"자치백제군"을 했다고 적었는데 왜 우리 국사당국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외면합니까?

여기다가 살을 붙이고 분칠을 하고 아름답게 꾸며서 적으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플러스 알파"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마이너스 알파"는 물론 안되지요.

(사료(정사의 기록)은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사료라고 하는 것은 역사사실이라고 할 때 당연하게협상의 대상이나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료를 있는 그대로 우리 국사교과서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좀 이 수수께끼를 누가좀 풀어주세요.
어떤 자는 이자료를 단편적인 기록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백제의 대륙경영 기록은 송서뿐아니라 25사 전체에 걸쳐 나와...)

송서 한군데만이 기록이 있는 것이라면 단편적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송사, 영사, 북제사, 남제사, 주서........"심지어 "만주원류고"까지 이러한 기록으로 꽉 찼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기록을 왜 단편적인 기록이라고 합니까? 또 왜 이것을 무시합니까?
무시하는 이유를 알아요. 이는 한국의 영광과 관계되는 기사이기 때문에 무시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의 영광과 주체성이 가득한 책만 골라 못된책이라 배척하는 국사학계)

(만주원류고, 요사지리지)

그 증거로 어저께 이용범 교수는 한국의 영광이 강조되고 한국의 주체성이 뚜렸한 책 !
예를 들면 "만주원류고"나 "요사지리지" 같은 책을 모조리 잘못된 책이라고 나무랬으니까요.
25사 가운데에서 "지리지" 가운데 가장 참고 할 것이 많은 "지리지"가 "요사지리지"인데 하필이면 이런 주체성
있는 책은 용케도

골라서 못된 책이라고 그러는 가 말입니다.

(현대판 숭명사대주의자 삼학사 들이 등장한 것 같아요.)

이것은 지난날 숭명(崇明)사대주의자들이 하는 짓이예요.
명나라가 제일이고 명나라가 미워하는 나라는 청나라요 만주족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과거에 명나라가 미워 했으니까.
청나라에서 쓴 책이나 만주족이 쓴 책(요사도 마찬가지입니다.)은 모조리 잘못됐다는 겁니까?
이것이 숭명사대주의자들이 아니고 뭡니까? 그래서 현대판 삼학사들이 다시 나온 것 같아요.
이땅에 삼학사 전통을 이어 받은 사람들이 말입니다. 지금 제가 소개한 "백제사료"는 "절대사료"입니다.
제가 다시한번 여러분들한테 읽어드리겠어요. 절대 사료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백제자 후점강대 겸제지국 百濟者 後漸强大 兼諸小國
기국 본여구려 재요동지동 진세 구려기략유요서 其國 本與句麗 在遼東之東 晋世 句麗旣略有遼東
백제전거유요서진평이군의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라"
자 이 기록을 왜 외면 합니까? 외면하는 이유가 어디 있어요. 뿐만 아닙니다.

▒ "대륙백제, 중국동해안 전체를 통치하다"

(중국대륙의 옥토 전체를 백제가 7개군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아까 어떤 분이 백제나 상해 등지를 통치했다는데 대해서 말씀하셨지마는 그것은 하나의 가공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서 중국사가 이렇게 적고 있어요.
"동성왕의 국서"인데 오늘은 제가 그 윤곽만 말씀드리고 다음 공청회 때 좀 더 자세한 발언을 하겠습니다.
"중국 25사의"의 "남제서백제전"을 보면 참 기가 막힌 내용이 있습니다.

(동성왕 재위기간 31년 = 남제 존속기간 31년(왕이 5번 바끰))

동성왕(東城王)은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인물인데 묘하게도 "남제가" 건국하는 해에 동성왕이 임금이 되셨고

남제가 멸망하는 해에 동성왕도 승하(昇遐)하셨어요.

그러니까 동성왕 1대하고 남제라는 나라의 길이가 같습니다.
그러니까 남제와 같은 이런 "미니제국"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미니왕국"입니다.

이 남제라고 하는 나라가 31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백제 동성왕 역시 31년 동안 재위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 31년 동안에 남제의 왕은 다섯 사람이나 등락을 합니다.
그러니까 한 임금의 평균 재위기간이 6년 되는 셈이지요.
(백제 동성왕은 남제의 소란왕에게 국서(國書)를 보내여 중국 동해안을 7개 구역으로 나누어 7명의 백제장군이 통치하게 하였다)

그런데 백제의 동성왕은 남제(南薺)의 소란(簫蘭)이라는 왕한테 국서를 보냈습니다.
"레트 어브 스테이트"(Latter of state) "국서(國書)" 말입니다.
이 국서의 내용이 "남제서" 백제전 속에 꽉 들어찼습니다.

현대인이 이 "남제서"의 백제전을 보고서 놀라지 않는다면 우리 한국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성왕은 중국의 산동반도에 남쪽으로 상해까지 중국의 북경에서 동해안을 "7개지역"으로 분할하여 백제의

장군 7명에게 그 통치권을 위임한다는 글을 전기(前記)의 남제 "소란"왕에게 국서로 보냈어요.

(동해안 지역 옥토는 전부 동이의 땅)
중국의 지리적인 여건은 동해안에 평야지대가 밀집되어 있습니다.

"북경에서 상해까지"는 지도만 봐도 파란 색깔로 칠해진 평야지대예요.

여러분들에게 참고적으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중국 역대왕조가 가지고 있던 수도가 어딘지 아십니까?

이 평야지대 살기 좋은 이곳에 있는 줄 아십니까? 산서성 서쪽으로 여기 태행산맥이라고 하는 산맥이
흐릅니다.

지도상으로 이렇게 벌겋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중국 역대왕조는 황무지 고원지대 섬서성에 도읍하고 동쪽의 옥토 "동이의 땅"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이 섬서성(陝西省)에
- 주(周)나라 은(殷)나라 때의 장안(長安), 호경(鎬京) - 진(秦)나라때의 함양(咸陽) - 심지어 당(唐)나라때
서안(西安)도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지금의 지도에도 호경, 장안, 서안, 함양은 모두 섬서성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섬서성은 흉악한 산골짜기입니다. 여기에 역대 중국의 수도가 있었습니다.
이런 산골짜기에 사는 중국 사람들이 그 동쪽의 살기 좋은 평야지대에 살고 있는 우리 "동이족"을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선망(羨望)의

눈으로 보았겠습니까?

(동이(東夷)는 오랑케가 아닌 어질"인(仁)"자와 같은 뜻)

그래서 저들은 우리를 "동이(東夷)"라고 했습니다. "이(夷)"라는 글자를 오랑케 "이"라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설문"이라는 책에서는 "이"자를 "여고문인동(與古文仁同)"이라고 했습니다.
즉 고문의 어질 '인"자와 같은 글자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고전은 이 "이(夷)"자를 굉장히 선망하는 찬사(讚辭)를 써서 적고 있습니다.

어제 "동이 가운데서도 예맥........만이 한국족"이라고 김철준 박사가 말씀 했는데 그런 단정적인 얘기는
하지 마세요.
난 동이 뿐만이 아니라 서이(西夷)도 우리 계통이라고 봅니다. "순동이지인야(舜東夷之人也)"

"주문왕서이지인야(周文王西夷之人也)"라이는 맹자의 기록입니다.

그러니 "夷"자는 마찬가지이지 어찌 달리 볼 수 있습니까?

 

(중국 동해안의 사람이 살수 있는 옥토는 전부 백제가 통치하였다
그런데 "북경에서 상해까지" 중국의 실질적인 가주지역(可住區域 : 사람이 살 수 있는 대륙)
그 전부를 7개로 나누어서 백제장군 일곱 사람에게 통치권을 맡기는 글을 남제의 소란이라고 하는 왕한테
보냈어요.
그 당시 남제는 백제와 우호관계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말하자면 협조공문이라고 할까요.

그런 친서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중국사필은 예(例)의 그 오만불손(傲慢不遜)한 사필로서 이 남제서에 손질을 했습니다.

 

"대륙백제, 7태수 관할지역 및 8대 성씨는 대륙"

가령 동성왕이 목간나(木干那), 찬수류(贊首流)... 등 7장군을 태수로 임명했는데
그 국서의 서두에 동성왕이"신(臣)......가임(假任) 목간나......위광위장군 운운(爲廣威將軍 云云)"이라 하고 끝머리에는 "복원(伏願)....

청제 운운(聽除 云云)"으로 기록한 것처럼 조작 했습니다.

즉, 동성왕이 31년간 겨우 존속한 남제의 왕한테 "신칭(臣稱)"하고
"신자석수봉운운(臣自昔受封云云)"했을 리가 있습니까?(신이 옛날부터 封을 받자옵고....운운)

또"臣이 목간나를 임시로 임명 하였사오니.....원컨대 제수(除授)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을 리가 있습니까?

정말이지 이는 "갓뎀 !"이요 "네버 하픈"의 헛소리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가필만 빼고 보면 이것은 백제의 뚜렷한 영광입니다.

중국의 동해안을 "원 사이드"하게 지배했다는 말씀입니다.

(백제 일곱장군의 성씨는 중국에 존재한다)

또 백제 7장군의 성씨만 훑어봐도 사학을 아는 사람은 깜짝 놀랄 일이 있어요.
왜 그런고 하니 백제에는 본래 8대 성씨가 있는데 중국 25사와 우리 삼국사기는 이렇게 적고 있어요.

"백제유 대성팔씨 사씨 해씨 진씨 목씨 국씨 연씨 묘씨(혹 묘씨) 협씨"
"百濟有 大性八氏 沙氏 解氏 眞氏 木氏 國氏 燕氏  씨(或 苗氏) 協氏"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백제 8대성씨가 현재 남북한을 통틀어 단 한 가구도 남지 않았는데 남제서 백제전의 7장군 성씨들은 대부분

유서 깊은 8대 성씨들이라는 사실이예요.

(백제 일곱장군의 통치지역은 중국 동해안 전체)

동성왕은 그 장군들에게 중국의 동해안을 지배하는 통치권을 위임하는 글을 적었어요.
아무 장군은 이러저러한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청하태수(산동성)로 임명한다는 등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때문에 그 당시 북조가 위나라인데"위나라의 군대를 무찔러서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
(강시단야( 屍丹野))라고 적힌 글을 보면 정말 피가 끓습니다.
백제 장군들이 임명된 지명들만 흝어봐도 이는 순수한 중국대륙의 지명들이지 한국의 동국여지승람 등 지리서나 사서에 나오지

않는 이름들입니다. (조선, 낙랑, 대방만을 제외하면)

즉, 광양태수 광릉태수 청하태수 성양태수 낙랑태수(북평태수) 대방태수(북평태수) 조선태수(역사 북경지방)등입니다.

(참고) 

<조선성재금영평부(북경) 경내 (대명통일지)><朝鮮城在今永平府(北京) 境內 (大明一統志)>상기 지명들은

모두 중국땅에 있는 지명들입니다.                           

 

(남제서 백제전 동성왕조 부분을 없애버렸다)

그런데 묘한 것은 중국사가들이 남제서 백제전을 보다가 자존심에 걸렸던 모양이에요.
어떤 자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제가 추리컨대는 당나라 때의 사가의 짓으로 봅니다마는 남제서백제전 서두 부분을 "북!" 뜯어냈어요.
백제의 영광이 하늘을 찌르고 중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니까 그게 배가 아팠던 모양입니다.
아마 문교부에서 갖고 계신 25사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마는 저도 두 질이 있는데 이 두질(帙)이 다 그래요.
그리고 그 공간에다 글자 네 개를 박아 놓았어요. 이것은 중국사가의 양심을 표(表)한 것입니다.
뭐라고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이하결문(以下缺文)"이라고 하는 공란 다음에 계속되는 글의 내용입니다.
사실이 뜯겨 나간 자리에 있었던 백제의 영광 동성왕의 영광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을 거예요.
                      

여러분들 빨리 남북통일 합시다.그래서 옛날처럼 자유중국 중국대륙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그런 날이 오면 나부터 먼저 중국

땅에 가겠어요.

이 "이하결문"의 공란 속에 들어 있던 글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중국땅에 가면 찾을 가망있어요.
나는 중국말 곧잘 합니다. 거기서 중학교 4학년까지 다녔으니까요.
저기 송지영 교수께서 계신데 아마 중국말 썩 잘 하실 줄 압니다.
우리 모두 총동원해서 중국에 가서 이를 찾아옵시다. 이것도 국사 바로 잡는 작업의 하나입니다.
아뭏던 이러한 백제의 기록을 외면하고 있는 현 사단의 아리송한 태도나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대륙백제를 외면하지 맙시다.""대륙백제, 3000여회 외침만 받은 역사가 아니다."

(식민사관 정신문화적 측면 : 패배주의를 버려야)

아까 서론에서 말씀드릴 때 식민사관
"조선사"의 3원칙을 말씀드리면서 반도사관(공간)과 1000년 사관(시간)까지 말씀 드렸으나그 정신적인
측면은 일부러 미루고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끝으로 그것을 말씀드리고 결론을 맺겠습니다.
조선사의 세 번째 측면은 정신 문화사적인 측면인데 그것은 곧 패배주의(敗北主義)입니다.
한국은 외국과 싸우면 지는 나라라고 인식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역대사가가 "침(侵)"자를 정식으로 쓴 것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국이 외국을 침략했다"는 글은 거의 없다는 말입니다.
외국의 침략을 당허는 쪽이 우리가 아닌가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최치원은 고구려, 백제가 강성시 강병백만으로 중국 동해안을 침략하였다 하였다)

그러나
최치원이 당나라의 태사시중(太史侍中)이라는 벼슬아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 좀 특수합니다.
거기에는 정식으로 "남침오월운운(南侵吳越云云)"하고 "침"자를 썼어요. 이건 정말 희한한 일입니다.

"고구려 백제가 전성했을 때 강병 백만이 남쪽으로 오나라 월나라(상해등지)를 침략하고 북쪽으로 유주,
연나라(북경쪽), 제나라

(산둥반도), 노나라(산동반도)를 쥐고 흔들어 중국의 큰 적이 되었소이다.
수양제가 망한 것은 요동(=고구려)을 정벌하려다 그것 때문에 망했소이다. 운운"한 것입니다.
최치원의 이 "상태사시중장(上太史侍中狀)"하나만 보아도백제가 양자강 남쪽까지 세력을 뻗쳤다는 것은
움직일수 없는 사실입니다.


(문교부 장학관이라는 자가 우리역사는 2000년이라 했단다)

이를 왜 외면합니까? 저는 문교부의 어떤 장학관이라고 하는 사람의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그의 이름은 압니다마는 실명을 밝히지 않겠습니다.
(운영자 주 : 몇주전 언론에 나온 한심한 자를 지칭하는 것 같음)

삼청동에 있는 어떤 연수원에서 이런 강연을 했다고 불평을 나한테 늘어 놓는 어느 수강자의 얘기를
얼마전에 들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이 장학관은 서독까지 가서 장학관 노릇을 했다고 하며 더욱이 현직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한국은 실질적인 역사가 2000년 밖에 안 되고 그 가운데서 독립사는 겨우 200년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답니다.
이런 망국적인 발언이 어디 있어요? 이것을 망국이라고 한다고 해서 나를 나무라지 마세요.

한국사가 2000년 밖에 안된다 했으니 B.C 4세기라고 하면 2400년인데 그러면 국사 교과서 보다도 400년이나

깍아 버렸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흥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국사교과서에도 고작 B.C 4세시라고 우리의 건국을 못 박지 않았어요.

요새는 조금 발전해서 B.C 10세기로 그 연대가 올라갔어요.

아까 김원룡 박사는 B.C 7세기라고 했고 이 사람은 한 술 더 떠서 한국의 실질적 역사는 2000년 밖에 안 된다고?
도대체 이거 어떻게 된 일입니까 ?

그리고 우리 한국 사람의 조국관은 모두 비통에 젖어 있고 패배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제가 문교부에서 설정한 어떤 교육기관에 가서 강의한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피교육자는 바다건너 일본에서 온 남녀교포 대학생들이었습니다.

거기에 가서 강의를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했습니다.

제 강의를 절반쯤 하였을 때 여학생들이 울기 시작했어요.

왜 울었는가 나중에 알아 봤더니 이유가 있어요. 여기에 앉아계신 위원님들도 해외에 있는 교포가 흘린
눈물의 뜻을 모르실 거예요.

왜 울었는지 아시겠어요?
나는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강단에 섰는데 나보다 먼저 나와 꼭 같은 민족사를 들고 나와서 강의한
사학자가 있는데

(2000년동안 외침을 3000번 받은 나라라 교육하는 비참한 현실)

그 사람은 첫날에 "우리 한국사는 유사이래 지금까지 외침을 받은 회수가 936회나 된다"고 하더래요.
그러나 학생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참아 주었겠지요.그 다음날 다른 교수가 역시 같은 민족사를 들고 와서
강의를 하는데 이 사람은

한술 더 떴습니다. 3,000여회나 외침을 받았다 하더랍니다.

아까 문교부 어떤 장학사의 말처럼 한국사가 2000년 밖에 안 되었다면 3000여회의 외침을 받았다는 이 얘기는
1년에 1.5회 꼴로

외침을 당했다는 말이 아닙니까?

1년에 1번이라도 2000회 밖에 안되는데 계산한번 해보세요.

1년에 거의 두 번씩 외침을 당했다는 얘기입니다.
아마 이런 외침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면 분명히 세계 최고기록만 수록하는 "기네스 북"에 우리민족
이 올라가야 됩니다.
패배주의 통계내는 것이 사학의 본분인줄 아는 모양이죠. 왜들 이럽니까? (운영자 주 :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대생들이 눈물을 흘린 뜻을 알겠습니까?
나의 "조국사의 영광"에 대한 강의를 듣고 저들은 너무 감격해서 울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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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속기록 소개의 가장 중요한 것은 입법기관인 국회 청문회를 당당히 거쳐 국사 교과를 고치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 단군조선의 개국 사실과- 백제의 대륙진출- 한사군의 명칭 삭제 등이 그것입니다.
이제 인터넷에 누구나 접할수 있는 고
임승국교수의 너무도 유명한 글 "한사군과 백제사"의 진실을 아시게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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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있는 민족역사학자와 국회의원 19명의 요청으로 1981. 11.26 ~ 27 양일간 열린 국회 "국사청문회"에서
식민 강단사학 측 참여자가

최영희(崔永禧), 김철준(金哲埈), 이용범(李龍範), 전해종(全海宗), 이기백(李基白), 이원순(李元淳), 안승주(安承周) 7인 이었고 그

자들을 상대로 당당히  안호상(安浩相), 박시인(朴時仁), 임승국(林承國) 교수 3분이 국회에서 국사교과서 정정을 이끌어 낸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넷상에 유명한 고
임승국 교수의 대륙백제 부분을 소개하면서 국회 국사청문회 속기록 소개를 마감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참역사는 반드시 밝혀질 것이며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대륙백제를 마무리 하면서... "

(이하 고
임승국 교수의 국회 국사청문회 마지막 발언내용입니다

제가 오늘 이 얘기를 하려고 책 한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금언(金言)으로 본 한국유사"라는 책인데 이 책의 "캐치프레이즈" 말하자면 선전문구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글을 쓰시고 저서를 남기시는 분들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사를 이런 스타일로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자, 보세요. 뭐라고 있는고 하니 "이 책속에는 우리 조상들의 웃음보다 한숨, 기쁨보다 눈물이 주름져 있다."

참 좋쇠다. 또
"이 책속에다 누가 어찌하여 우리나라의 과거는 이렇듯 비참 했던가를 숨김없이 털어놓은 벌거벗은 지난날의
우리 모습 그대로

나타나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 또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 두겠습니다.

자 이런 글 쓰지 마세요.
우리 조국을 패배주의전통에 빛나는 조국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 마음속에 내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중략)
우리는 유사이래 우리나라에서 2,000여회 1년에 두 번씩 외침을 당했다고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나라
 위해 애국하고 충성할

마음이 생길까요.

(중략)
자기 조국을 어떠한 눈으로 보느냐 ?이것이 충성심이 샘솟는 원천이요 정신전력의 샘터입니다.
위대한 조국 긍지와 영광이 아롱지는 조국을 발견합시다. 감사합니다. (완결)

(대륙 백제를 말한다)
(임승국 교수의 역사입문 이야기)

제가 경희대 영문학 교수시절 때 우연히 중국 25사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25사 가운데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다음으로 여섯번째
 책이 송서(宋書)입니다.
하루는 윤영춘 박사댁에 놀러갔다가 그 분이 갖고 있는 장서 중에서 우연히 이 송서를 끄집어냈습니다.
윤 박사가 이걸 보라고 권한 것도 아닌데, 제가 펼친 곳이 송서 97권 '백제의 전'이라는 대목이었습니다.
그 기록을 무심코 쭉 읽어 내려갔지요.

중국에서 태어나 중학교 4학년까지 그곳에서 성장했으니 한문 실력은 그런대로 있어서 쭉 읽어보니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송서에 기록되어있는 백제는 우리가 알고있는 백제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우리는 의례히 백제를 생각할 때면 연상되는 것이 의자왕이고, 의자왕 하면 삼천궁녀, 삼천 궁녀와 낙화암과
백마강, 그리고 다이빙

앤드 풍덩 등입니다.

그런데 송서 97권을 보니까 아예 백제의 위치부터가 달랐습니다. 반도가 아니었습니다.

현 수도인 북경으로부터 남쪽으로는 산동 반도를 지나 양자강 남북의 평야지대를 포함한 중국동해안 일대를
백제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록을 보고서 그 때 하고 있던 영문학이라는 낡아빠진 학문을 집어 치우고 스승도 안내자도 없이 한국 상고사라는 난장판

학문에 뛰어 들었습니다.

만 5년동안 학교도 나가지 않고 직장도 없이 도서관에 파묻혀서 사서삼경과 25史와 씨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6년 만에 다행히 명지대학으로부터 다시 교수발령을 받은 후에, 영문학 교수가 아닌 한국고대사를 강의하는
사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학문의 안내자가 바로 백제사였으니, 오늘 강의하는 것도 백제사의 이해라고 하면 비로소 말문이
열립니다.
송서 97권 백제전의 머릿 부분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
'백제국, 본여고려구재요동지동천여리, 기후고려략유요동, 백제략유요서. 백제소치, 위지진평군진평현.

'(안원전 해설)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함께 있었으며, 그 후 고려는 대략 요동에 있었으며,
백제는 대략 요서에

있었고,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불렀다.
요서는 북경을 포함한 하북, 하남, 산서 등을 포괄한다. 산서성의 옛 이름이 진(晉)이다

(진평이군 = 진성/고평

송서에만 이런 기록이 있고 다른 기록에는 이런 것이 없다고 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25사 중 송서 다음이 양서(梁書)인데, 양서 54권 백제전에도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양서 다음은 남제서(南濟書)입니다. 당시 양자강 남쪽에는 제(濟)나라가 있었고, 북쪽에는 북위(北魏)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남제서에도 백제전이 있는데, 그 내용은 더 엄청납니다.

당시의 백제왕은 무령왕의 아버지인 동성왕이었습니다.
동성왕의 무덤이 산동 반도에 있다고 25사에 기록되어있고요, 동성왕은 산동 반도에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직접 도읍하면서 대륙을

경영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의 군사·외교정책은 가까이에 있는 위나라와는 전쟁으로 상대하고, 양자강 남쪽의 남제와는 우호관계를
맺는 등의 정책을 폈습니다.
동성왕은 남제의 소도왕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실로 엄청납니다.
아마 간덩이가 작은 사람은 이 글만 보아도 깜짝 놀랄 것입니다.
요서나 진평이라고 했던 백제의 세력이 놀랍게도 남쪽으로 확장되어 북위의 군대와 싸워 이겼고, 또 한 때는
양자강 남쪽까지 점령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땅을 일곱 구역으로 나누어서 백제장군 일곱을 각각 파견하여 통치하게 합니다.
쉽게 말하면 총독 일곱 명을 두고 중국동해안을 싸그리 지배한 것입니다.

남제서에 나오는 백제 7개 태수명칭중- 광양태수, - 청하태수, - 성양태수, - 광릉태수는 현재도 지명을 확인할 수 있으나
- 낙랑태수, - 대방태수, - 조선태수는 정확한 확인이 어렵다.
단 대방은 석문(석문접 대방)인근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낙랑군도 이 지역으로 보고 있다. (운영자 주)

그런데 이런 기록을 중국인들은 다 없애 버렸습니다.

남제서 백제전의 머리부분을 다 뜯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현재 한국으로 오는 25사 중 남제서를 보면, 백제전의 앞부분이 뜯겨나간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글씨가 없는 공백이 하얗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게 '똥되는 놈'(지나인)의 심뽀입니다.

오죽하면 똥되는 놈이라고 하겠습니까?
백제전이라는 제목은 있는데 그 다음이 빈칸이란 말이예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강시단야(降屍丹野: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인데, 똥 되는 놈을 시체로 만든 자는 백제

군대이겠죠. 그리고 그 빈칸은 그냥 남겨두었습니다.

중국본토에는 오리지날 25사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대만에는 물론이고요.
중국본토와 대만에 가공하지 아니한 원본 25사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흔하지 않지만. 중국 가는 사람들은 오리지날 25사를 구해서 남제서 백제전을 펼쳤을 때, 공백이 아니라
글씨가 꽉 차 있다고 한다면

무조건 갖고 와야 합니다.

요즘 중국에 많이 갔다왔다 하는 모양인데 다 소용없어요. 강아지 눈에 보이는 건 누런 똥 밖에 없습니다.
근래 중국 갔다 온 사람들의 눈에는 누런 황금덩어리만 보일 뿐입니다.

'백제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딱 꼬집어서 얘기할 때는 위와 같은 것이 적절 한 예화가 될 겁니다.
백제가 이렇다는 것은 감히 생각을 못합니다. 그저 '낙화암 풍덩'만을 연상할 뿐입니다.

중국지도에 있어 동해안 지역은 사실상 중국 땅의 전체나 다름없습니다. 깊은 오지에는 사람 들이 살지를 못합니다.
중국 사람들이 집결되어있고 중국문화가 한데 모여 있는 곳이 중국 동해안 지역입니다.
모택동도 여기에 사는 중국인구의 수를 10억(十億)에서 2억(二億)을 뺀 수억이라고 했습니다.
전체 10억 중에서 (십억에서 이억을 뺀 수억)의 인구가 이곳에 몰려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지역을 몽땅 백제가 지배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요즘 남북사학자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토론하자고 하는데, 그건 위험천만한 얘기입니다.

우리 사학계는 아직도 식민사관에 푹 젖어있어서 노태우정권은 또 그런 사람을 뽑을테고, 그래서
'마피아단'을 남한대표로 보내면

북한사학자들한테 비웃음만 당할 것입니다.

북한 사학은 60년대 초에 한사군문제를 싹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낙랑/현도/진번/임둔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주 앉으면 남쪽이 망신당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사학의 주류가 민족주의 정예학자로 되기 전에는 위험한 주장입니다.

얼마 전에 KBS에서 사학 관계서류를 모아서 연변대학에 기증을 했습니다. 약 몇 천권 보낸 모양입니다.

연변대학 총장이 그걸 받아서 읽어 보니까 식민사관이 그대로 남아 있길래, 예를 들어 김철준씨가 쓴 문화사관이나 이기백씨가 쓴

한국사의 무엇 등등이었는데, 무슨 이런 책을 보냈느냐 하면서 모조리 폐기처분해 버렸다고 합니다.

남한에서 보내 온 사서는 모조리 식민사학에 젖어 있어서 폐기처분했다는 사실, 이것만큼 대한민국 망신시킨 적이 어디 있습니까?


해방 이후 40-50년동안 우리는 식민사학을 복창 복습했다는 것을 여기서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