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카페(잃어버린 역사..글쓴이: 道不遠人 )
백제 22담로 위치에 대하여
백제의 22담로를 추적한 칼럼입니다.
운영자의 생각으로 흑치 즉 검은 이빨은 열대의 과일인 <빈랑열매>를 생활의 일부로 씹어 생활하기에 구강청결효과가 있고
현대적으로 이야기하면 치약과 같은 것인데 현대에도 이를 상시 원주민사이에 복용하는 곳은 대만, 광동남부, 필리핀, 월남 북부
등으로 파악됩니다.
또 다른 인접국가가 있을런지는 더 파악해야 합니다. 당시의 식생과 기후도 현재와 과히 바뀐 것이 없기에 이 지역으로 추론하는
것이 근래의 학설입니다.
1. 해외영토 담로를 찾아라..
이 책의 피날레는 역사의 시간 속에서 잃어버렸고, 지금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망각되고 있는 대제국 백제의 영토를 복원하는
것으로 정했다.
지금까지는 민족과 문화가 외부에서 한반도로 이동해온 내용을 다뤘지만, 이번에는 역동적으로 한반도로부터 외부 세계로
뻗어나간 우리민족의 역사적 사실을 추적한 것이다.
왜 우리는 동양의 로마 제국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강대했던 백제 제국을 잃어버렸을까?
우리민족의 삼국시대 역사의 상당부분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김부식은 우리나라를 마치 중국의 속국처럼 비하시켜놓았다. 그는, 그것 말고도 또 하나의 잘못을 저질렀는데, 신라의
정통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고구려와 백제사를 별 볼 일없게 만들어버렸고, 그 와중에서 우리는 진정한 백제사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만약 백제사를 사실 대로 복원한다면 과연 그 실체가 어떻했을까.
해양 대제국, 아니 동양의 로마제국과 같은 초강대국의 면모였을 것이다.
동북아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까지 뻗어나간 백제 대제국, 그러나 그 사이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으니 이제 와서 어떻게 백제
대 제국을 복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은 없는 법,
아시아의 패자 백제 대제국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비밀의 열쇠가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그 비밀의 열쇠는 바로 담로(擔魯). 사서에 의하면 담로는 백제 시대의 행정구역이었으며 모두 22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민족의 자랑스런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담로의 위치를 찾아내야만 했다.
백제의 담로에 대해서 중국의 고사서인 양서(梁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나라(백제)에는 이 담로가 모두 22개 있는데, 모두 그들의 자제들이나 종족들이 나누어 점령 하고 있다.]- (梁書 諸夷傳 百濟)
그러면 백제의 영토였던 담로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 담로의 위치를 밝히면 저절로 해양 대제국 백제의 강역을 알게 되고 1,700여
년 동안 어둠 속에 싸였던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가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담로 가운데 몇 개는 다행히 기록에 나타나 있지만 또 어떤 것들은 마치 불가사의한 백제의 지문을 찾듯 끈질기게 탐색을 하여야만
했다.
먼저 기록으로 유추해볼 수 있는 담로에 대해 조사해보자.
첫 번째와 두 번째 담로에 대해 양서는 그때의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 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와 진평의 두 군 땅을 차지해서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
(梁書 諸夷傳 百濟)
요서는 바로 지금의 난하(난河) 서쪽의 중국 하북성과 산동성, 그리고 당시의 진평군은 오늘날의 산서성이다.
바로 그곳에 우리민족 국가인 백제의 영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양서(梁書)뿐만이 아니라 남사(南史)에도 기록되어 있다.
과연 누가 중국 측의 정사인 25사서인 양서와 남사를 부인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남의 나라의 역사책을 통해서이지만, 1천 7백 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오랜 망각을 깨고 부활하는 백제의 모습이 대견스러울
뿐이다.
세 번째의 담로는 다행스럽게도 일본서기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삼국사기보다 편찬 년대가 더 오랜 일본서기 신대기(日本書紀 神代記)
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두 주(柱)의 신은 부부의 교합이 있은 뒤에 먼저 담로(淡路) 주(州)를 맏아들로 낳다. - (日本書紀 卷第一 神代 上)
[ 담로주를 태반으로 하여 대일본풍추진주(大日本豊秋津洲를) 낳았다] - 日本書紀 卷第一 神代 上 -
당시 일본도 백제제국의 영토였다.
마침내 백제의 강역은 북쪽으로는 요서였던 만주, 서쪽으로는 진평군이었던 중국 동남부 그리고 동쪽으로는 일본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러나 백제의 남쪽국경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백제 아니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걸린 대제국사를 복원하기 위해서 또 다른
담로를 찾아야만 했고, 이 과정에서 쏟은 저자의 노력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끈끈한 삼복더위를 고서더미 속에서 묻혀 지내야만 했는데,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참으로 엉뚱한 곳에서 그간 잊혀졌던 백제의
담로를 찾아냈다.
영원속에서 묻혀버릴 뻔 했던 단서 하나가 모습을 들어냈던 것이다.
2. 흑치 상지 무덤 속의 비밀
1929년 어느 그믐날 밤, 달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옛날부터 유명한 중국 낙양성의 북망산에 나타났다.
밤도 자정이 지나서 주위가 조용했는데, 오직 도굴꾼들만이 제법 큰 분묘를 파헤치기 위해 삽질하는 소리만이 주위의 적막을 깨고
있었다.
그때였다. '턱!'
드디어 삽 끝에 무엇인가 부딫히는 소리, 달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도굴꾼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에 붙박혔다.
다음 순간, 도굴꾼들에 의해 땅 위로 올려 진 것은 검은 빛깔의 오석(烏石)으로 만든 묘지석, 그곳에 뜻밖에도 백제의 유장 흑치상지
(黑齒 常之)에 대한 생애가 촘촘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묘지석 이외에 두 구의 시체가 다른 부장품과 함께 발굴 되었는데 한 구는 신장이 7척(중국의 자로 약196cm), 다른
한 구는 작은 키였다.
즉, 큰 키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하다가 당나라로 들어가 돌궐을 정벌하는 등 무공을 크게 세운 흑치상지이고 작은 시체는 그의 아들
흑치 준(黑齒 俊), 그러나 망한 민족을 뒤로하고 당나라에 귀화해 영화를 누린 흑치상지의 말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끝내, 그는 모함을 받아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다.
그런데 흑치 상지의 묘비석의 기록에 우리가 잃어버린 민족사의 한 부분이 있었고, 그로인해 백제의 해양대제국이 부활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이빨이 검어서 그의 이름이 흑치(黑齒)가 아닐까 생각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실인즉, 그가 흑치국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흑치상지의 묘비석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선조는 부여씨에서 나와 흑치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이것을 성으로 삼았다]
부여씨는 백제왕의 성씨(王姓), 따라서 흑치국은 백제국의 담로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 비로소 세상에 들어난 것이다.
그러면 흑치국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저자는 마치 탐정이 미스테리를 파헤치듯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전에 존재했던 흑치국을 찾느라 온갖 가능성을 탐색하며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던 어느날, 마침내 고서더미 속에서 흑치국을 기적같이 찾아냈던 것이다.
[여왕국에서 남쪽으로 4천 여리를 가면 주유국(朱儒國)에 이른다. 이 주유국은 사람들의 키가 3-4척 밖에 안 된다.
또 여왕국에서 남쪽으로 배를 타고 1년 동안을 가면 나국(裸國)과 흑치국(黑齒國)에 이른다.
역관들이 와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마도 여기가 끝인가 싶다] - (後漢書 東夷傳 倭)
후한서가 쓰여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1,700여 년 전, 당시의 역관들이 지구의 끝인가 하고 생각했다면 흑치국은 육지에서 가까운
곳이 아니고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 섬나라였음이 분명하다.
섬이 끝나는 지점에서 망망한 대해가 가로 놓여 있으니 육지의 끝이라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와 같은 섬을 대상으로 흑치국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왜에서 남쪽으로 배를 타고 1년(다소 막연한 표현이었겠지만)이 걸리는 거리에 있는 섬이라면 일차적으로 필리핀의 루손섬이었거나
아니면 지금의 인도네시아 동쪽 끝 슬라베시 섬이었을 개연성이 있다.
필리핀의 루손섬은 우리나라에서 찾기가 쉽고 또 슬라베시 섬 북쪽 마나도 지방에는 뜻밖에도 우리나라의 것과 유사한 고인돌이
발견되고 금강산의 것과 유사한 '선녀와 나뭇꾼'의 전설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면 필리핀 루손섬이나
슬라베시 섬에 백제국의 영토였던 담로가 있었음직 하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판단 해 보면 이 두 섬은 기록과 부합되지 않는다.
루손섬에 이어 시부, 민다나오 섬들이 연이어 있어서 육지의 끝이라고 할 수 없으며, 또 슬라베시 섬의 마나도 역시 육지로 계속
연결이 되어 있다가 다시 올망졸망한 작은 섬이 연이어 있어 루손섬과 같은 조건이다.
그러면 흑치국은 오늘날 어디를 지칭하는 것일까. 역사의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고대의 기록을 다시 검토 해 봐야 한다.
배를 타고 1년을 가야하는 거리에 있다는 것 이외에 나라의 이름이 상징하듯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빨이 검다는 사실이다.
그럼 이 지구상에서 어느 민족의 이빨이 검었을까?
3. 바다 위에 떠 있는 흑치국
마침내 검은 이빨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이빨이 검은 것은 아니고, 후천적으로 검게 된 것인데 기호식품인 인도산 후추나무(?)
열매를 평생 동안 씹어서 종당에는 이빨이 새까맣게 변해버렸으니 그들을 흑치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검은 이빨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은 베트남으로부터 인도까지, 분명 흑치국은 그 사이에 자리를 잡은 섬 나라임이
분명했다.
그러면 바로 그 곳이 어딘가.
저자는 제2차 추적 작업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백제의 문화가 아직도 흔적처럼 남아 있는 장소는 없을까하는 실날같은 희망을 가지고.
그래서 루손섬과 슬라베시 섬을 지나 보르네오 섬을 찾았다. 그리고 흑치국이라고 생각되는 장소를 향해 갔다.
2001년, 4월 어느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공항에서 이륙한 국영 가루다 항공기가 남빛 바다 위를 나른다.
1시간이 걸려 도착한 곳은 보르네오 섬, 이 섬이라면 남쪽으로 자바섬에 이르기까지 망망대해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옛날 사람들이
땅끝이라고 생각을 할 만도 했다.
저자가 찾아간 곳은 깔리만탄 지역의 발릭빠빤, 그곳에서 다시 6인승 소형비행기로 갈아타고 천연의 원시림 위로 아슬아슬하게 날랐다.
가도 가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남방 특유의 풍광들, 과연 그런 곳에 전혀 이질적인 북방의 백제유물들이 남아 있을까?
경비행기에서 내린 다음 원주민을 앞장 세워 정글을 뚫는다. 얼마쯤 전진했을까.
드디어 시야가 확 트이며 아늑한 공간이 있었고 그곳에 무엇인가가 서 있었다.
'저게 뭘까?'
소도와 솟대였다. 소도의 경계표식인 새문도, 장대 끝에 새를 올려놓은 솟대도 있었고 우리나라 고유의 홍살문도 있었다.
한반도와는 전혀 이질적인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 섬에 백제의 독특한 문화유산들과 유사한 것들이 인멸되지 않고 한 점 섬처럼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백제의 남 서방 경계도 확인이 되었다.
지도 위에 그려진 백제시대의 거대한 해상제국의 실체가 드디어 1,700년의 시공을 극복하고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4. 제 5 담로의 불가사의
그러나 아직도 백제 해양 대제국의 영토를 확실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풀어야할 미스테리들이 더 남아있다.
백제 제국을 구성하고 있던 제5의 담로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이제 5번째의 담로를 찾아야만 해상 제국 백제의 영토가 보다
선명하게 부활할 수 있다.
먼저 저자가 발견한 옛 기록 하나를 검토 해보자.
[그 나라(백제)에서 남쪽 바닷길로 석 달을 가면 담모라국(담모羅國)이 있다.
이 나라는 남과 북쪽이 천 여리나 되고 동쪽과 서쪽이 수 백리나 된다. 그곳에는 사슴이 많은 데 그들은 백제에 붙어 지냈다 ]-
(隋書 東夷傳 百濟) 이 담모라국의 이름이 라(羅)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신라, 가라, 구다라(백제의 우리말 식 이름), 탐라 등
우리민족 국가임이 분명하다.
백제에서 배를 타고 3달을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면 오늘날 그 나라는 어디였을까?
당시에는 동력이 없었으므로 돛단배가 아니면 노를 젓는 수동식 배였을 것이다. 목적지는 남북이 천 여리, 동서가 수 백리나 되는
큰 섬이다. 아무튼 제주도는 아니다.
제주도는 한반도와 가까우며 또 동서의 길이가 남북 보다더 길다. 제주도를 지나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유구열도가 나온다.
유구열도는 사서의 기록에 비해 너무나 작다. 남북이 천 여리는커녕 백 여리에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유구열도는 옛 담모라국이 될 수가 없다. 저자는 또 다시 남쪽을 향해 갔다.
드디어 사서의 내용과 일치되는 섬이 나타났다. 바로 포모사(대만)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 사람들이 자기네들 바로 곁에 있는 이 섬을 애매모호하게 묘사 해 놓았을 까닭이 없다.
그래서 저자는 또 다시 망망대해를 가로질러 간다. 드디어 도달한 곳이 필리핀의 루손섬, 바로 루손섬이 백제의 담로였던
담모라국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단정하는 데는 첫째 한반도에서 남쪽으로 항해해서 3달을 가야하는 섬이라면 루손섬까지의 거리가 알맞고, 두 번째는
루손섬은 사서의 내용과 같이 남북이 길고 동서의 길이가 짧을 뿐만아니라 천 여리씩 되는 섬의 크기도 가장 부합된다.
또 루손섬은 옛부터 야생 사슴이 많은 고장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루손섬에는 아직도 옛 우리나라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의 것과 유사한 말을 사용하고 있는 소수민족이 그 옛날의 향수를 간직한 체 지금도 화석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와서 복원할 수 있는 또 다른 백제의 영토는 없었을까? 이젠 더 이상의 옛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민족의 영광된 역사를 복원하는 일을 중도에서 포기할 수는 없다.
기록이 없으면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5. 드디어 부활한 백제 대제국
백제의 담로주였을 심증이 농후한 장소는 다름 아닌 태국이다. 태국의 옛 이름 자체가 섭라(攝羅)로 우리 민족 계통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 앞에서 언급을 했듯이 구다라, 신라, 탐라, 나라 등 '라'의 행렬이 바로 그것이다.
체질인류학적으로도 태국 사람은 우리와 의외로 가깝고, 특히 방콕만 부근은 오늘날도 마한과 백제의 독특한 지명인 '부리'가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다.
혹시나 소아시아에서 인도를 거쳐 방콕만에 이른 우리민족의 한 집단이 한반도에 정착한 다음에도 두고 온 자기네들의 영토였던
태국 남부일대에 행정기구인 담로를 설치해서 오래 동안 다스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그동안 천신만고 끝에 찾은 담로를 연결시켜 해양의 지배자 백제 대제국을 부활시켜 보자.
첫눈에 보아도 과연 동부 아시아를 석권한 동방의 로마 제국 백제의 위용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면 백제 해양제국의 남서쪽의 영토인 제7, 제8의 담로는 과연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 관해서는 사서의 기록이 없으니
이제부터는 탐험의 방법을 사용해서 그 시절의 지문(智文)을 찾아내야만 한다.
가장 혐의가 짙은 장소는 중국의 동남해안인 광시자치구(廣西自治區), 뜻밖에도 백제향(百濟鄕, 향은 우리나라의 면소지 격)이라고
부르는 백제의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또 그곳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것과 모양이 같은 두 가지 디딜방아를 사용하기도 한다.
과연 그곳이 옛 백제의 땅이었을까?
그러나 오늘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 그러면 그 시대를 살았던 백제인들은 역사의 시간 속에서 사라져버렸단 말인가?
이제부터 더욱 확실한 고증을 위해 백제의 담로에서 살았던 후손들을 찾아보기로 하자.
백제인들의 배타적인 특징은 마한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소도(솟대) 신앙, 후한서 동이전 한전(後漢書 東夷傳 韓傳)에는 소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여러 나라의 고을에는 각각 한 사람이 천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주관한다. 이 사람을 천군(天君) 라고 부르고, 또 소도(蘇塗)를 세운다.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놓고 귀신을 섬긴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한전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또 이들 여러 나라에는 각각 따로 읍(邑)이 있는데 이것을 소도(蘇塗)라고 한다.
사방에서 도망 온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모여 돌아가지 않는다.
마한시대의 소도는 신성한 지역이었고, 솟대는 신성한 물건이었다.
이 소도와 솟대가 있는 장소라면 일단 백제의 담로였다고 추리해볼 수가 있다.
백제의 담로였던 일본에도 아직까지 소도(鳥居)가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더욱 확실해 보인다.
그래서 저자는 마한, 백제시대의 소도를 찾기 위해서 동남아 일대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천신만고 끝에 황금의 삼각지대에서 발견한 하니족, 그들이 바로 광시자치구에서 살았던 백제 담로의 후예들이란 혐의가 농후했다.
그 넓은 지역에서 오직 그들만이 지금도 소도(別邑)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살고 복식과 생활풍속이 백제시대의 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그들의 구전에 의하면 어느 땐가 광서자치구의 해안지방에서 살았는데 내륙지방으로 이동해왔다고 한다.
바로 그들이 백제향에서 살았던 담로주의 백성들이었다고 추리를 해도 무리가 없다.
거기에는 움직일 수 없는 또 하나의 지문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해서 7번째 담로를 찾았다.
그러나 아직도 백제의 남서쪽 끝을 나타내는 마지막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체 남아있다.
과연 8부터 22번째의 담로는 어디에 있었을까? 아마도 한반도 내에서 지금의 행정구획인 시나 도(市道)처럼 나뉘어져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제주도가 옛 백제의 담로주였던 '탐라'였듯이 ......,
이 칼럼은 인터넷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백제는 정말 19세기의 영국을 방불케 할 정도로 강건한 해상왕국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 국사교과서는 두루뭉술하게 22담로를 설치했다고만 했지 어디인지 자세하게 묘사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다수 국민들은 22담로가 겨우 전라도, 충청도 일대에 찌그러져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렇게 증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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