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근세조선

100년전 조선 여행기-(저)조지커어즌

설레임의 하루 2009. 2. 20. 21:17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운영자

 

 

 

◆ 100년 전의 여행, 100년 후의 교훈 해제 ◆
백년 전의 여행, 백년 후의 교훈(원제목은 Problems of the Far East)은 19세기 영국의 저명한 정치가였던 조오지 커즌(George Curzon)

이 1894년 경 중국, 조선, 일본을 방문하고 쓴 책이다.

커즌은 영국이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던 시절에 최고의 배경을 갖고 엘리트 코스를 달린 인물이었다.

유서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이튼 고교를 나와 옥스포드의 발리올(Balliol)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연구와 현지 답사를 통해 아시아 전문가가 되었다. 30대 중반에 결혼했는데 신부는 큰 재산을 물려받은 미국의 미인 메리

라이터였다.

커즌은 27세에 하원 의원이 되었고 35세에 외무차관, 39세에 인도 총독이 되었다.

1919년 외무부장관을 역임하여 화려한 공직 생활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커즌은 평생동안 대영제국의 신봉자였다.

그가 동아시아에 흥미를 가진 것도 이러한 그의 성향과 관계가 있다.

그의 관찰은 편견이 있어도 날카로운 편이며 특히 미래에 대한 전망은 상당히 정확한 것이었다.

백 여년 전 그가 조선을 관찰하여 기록한 내용은 지금 우리 한국인에게도 ‘그 당시 조선이 이러했구나’ 하는 생각을 줄 만큼

정보로서의 가치가 있다
.
◆ 조선의 매력 ◆
나는 동아시아의 나라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서구인이 가장 많이 방문한 나라(역주:일본을 지칭함.

저자의 여정은 일본-조선-중국의 순으로 진행되었음.)에서 가장 방문객이 드물고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한 나라로 여로를 정했다.

이 나라는 '코리아'(Korea)라고 하는데 최근 전쟁이 있기 전까지는 대다수 영국 사람들에게 매우 신비로운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아주 미약하고 개발이 덜 된 나라이지만, 동아시아 지역의 상대적 요충지에 위치한 까닭에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정치 현상들은

특별한 관심을 끌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는 여행가에게 이 나라보다 더 강한 매력을 지닌 곳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조선의 고풍스런 풍광은 테베·바빌론과 같이 유구한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으나, 서양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폐허화된 고대 문명의

흔적은없다.

조선은 수세기 동안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외세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지켜 온 것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동양의 왕국 중 최근까지 성공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배격했다는 명분을 가지면서, 서양인들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은 이 나라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은 아직까지 여행객의 발길이 닿지 않은 처녀지로 남아 있다.

조선은 과거 일본에 문명·과학·종교· 예술 등을 전수해 주었다고 주장하지만, 그 자신은 이 모든 것의 흔적을 상실했다.

조선인들은 체력적으로는 용맹하지만 도덕적으로는 둔감하다.

천연 자원의 보고(寶庫)를 물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국고의 결핍으로 국가 발전은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 특징을 갖고 있는 조선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은 내가 아는 아시아의 어느 나라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에 멀리서 지켜 보는 나의 상상력에 오랫동안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조선은 일본과 중국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두 나라의 어느 쪽과도 다르다.

일본 봉건제의 남성적 기개도 부족하며, 중국의 밀집된 삶의 방식에 의하여 유발되는 근면성도 결핍하고 있다.

종교에 대한무관심으로 인해 조선에는 그 전 시대에 건조된 훌륭한 사찰이나 조선 초기부터 유교를 바탕으로 형성된 자기 절제적

성격 등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아름답고 오래된 유적들은 3백 년 전 히데요시[豊臣秀吉, 일반적으로 다이코사마(Taikosama)]의 침략 때 모두 망가졌다.

그때 조선이 입은 상처는 결코 치유되지 않았다.

최근 일련의 사건들로 저지되었지만, 그 전까지 중국의 대 조선 정책은 조선을 자신의 감독하에 두는 것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낀 불행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조선은 마치 '이사카'(Issachar)처럼 두 개의 큰 짐 사이에 낀 힘센 당나귀

신세였다.

19세기 말 조선은 자신의 문을 두드리는 서구 열강의 경종에 돌연 긴 잠에서 깨어났다.

열강의 특명 전권 공사들이 조선과의 상호 조약체결을 타진하거나 요구하기 위해 항구에 나타났다.

현재 조선은 문명화된 사회로 진입하고는 있으나, 오랜 휴면으로 아직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천천히 의아스러운 서양 문명의 빛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 조선에 관한 문헌 ◆
1876년 개항 이후 쓰여진 유용한 두 권의 책도 저자들이 실제 조선을 방문하고 쓴 것은 아니다.

미국인 그리피스(W. E. Griffis)의 《은자(隱者)의 나라》(The Hermit Nation)는 조선의 역사를 주로 일본 자료를 이용하여 쓴 학술적인

책인데, 조선의 관습고 조선인의 생활 습관에 조금은 구태의연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또 다른 저서는 뉴창이라는 곳에 오랫동안 살았던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로스(J. Ross)목사가 쓴 것으로 역사적인 내용을 주로

기술하였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와는 달리 조선과 조선인을 고찰해 보기 위해 여행객이나 연구자들이 참조할 수 있는 유능한 저술가에 의해

쓰여진 적합한 문헌은 전무하다.

조선은 오랫동안 완전한 고립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죽음으로 선교 활동을 마무리한 로마 카톨릭 신부들을 제외하고는 개항 전까지

한반도 내륙을 통과하거나 정착한 외국인은 없었다.

유럽 인들은 1874년 프랑스 인 페르 달레(Pere Dallet)가 자료를 모아서 편집한 책을 통해 조선인과 제도· 생활상 등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책에는 조선에 관한 흥미롭고 자세한 그림들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반세기 전의 자료들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그때의 시점과 맥을 같이하며, 지금은 회상을 통해서도 복원이 불가능하거나 아예 폐기된 관습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편자 자신이 실제 조선 땅을 밟아본 적이 없으므로 현지 편집의 이점이 결여되어 있다.

개항 후 조선을 탐험한 몇 안 되는 여행객들은 저마다 조선 여행기를〈지오그래피컬 소사이어티즈〉(Geographical Societies)나 정부

보고서 같은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고 접하기도 힘든 간행물에 실었다.

이런 기행문 중에서 내가 가장 후하게 평가하는 것은 조선의 생활상과 특성을 제일 생생하고 정확하게 표현한 영 제국 영사부의

켐벨(C. W. Campbell)이 1891년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이다.

그보다 먼저 제출했던 칼스(W. R. Csrles)의 보고서는 흥미롭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실망스런 수준이었다.

더 심한 것은 미국인 작가 로웰(P. Lowell)의 과장된 작품이다. 최근의 전쟁 이후 조선에 관한 저술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의 책은 간접 경험에 기초한 것이었고, 자연히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 조약항 ◆
외국 방문객이 처음 도착하는 곳은 당연히 3개의 개항항인 부산·원산·제물포 중 한 곳이다.

나는 이 3개의 항구에 모두 가 보았고 잠깐 동안 머물기도 했었다.

부산은 일본 쓰시마 섬의 반대편에 위치하고 그곳의 시계에 들어 있는데 반도의 남동쪽 해안에 있다.

원산은 동해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와 부산의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다.

제물포는 서해안에 자리잡고 있고 수도인 서울의 항구 역할을 한다.

반도의 서해안과 동해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지형적 차이를 보인다.

동해안은 산맥으로 이어져 있어서 마치 조선의 아펜니노라 할 수 있으며, 산맥의 돌출부는 해안의 여러 곳으로 뻗어 나와 있고

조수차가 극히 적은 몇 개의 좋은 항구와 만나고 있다.

이 항구들은 일년 내내 열려 있다. 중국의 황해와 맞닿고 있는 서해안은 동해안과는 대조적으로 수심이

얕고 완만한 해안으로 조밀한 섬들이 방패막이를 하고 있으며 조수 간만의 차는 25∼40피트 가량된다.

또한 겨울에는 종종 얼어붙기도 한다.

 

◆ 부산 ◆
부산과 원산은 지형적으로 수심이 깊고 안전한 만의 끝에 위치하는 항구라는 면에서 유사하다.

이 두 곳은 거대한 함대의 정박지로도 아주 적합하여 일본·중국·러시아의 깃발을 휘날리는 상선들의 방문이 매년 증가하고 있는

곳이다.

부산은 일본과 가장 근접한 항구로서 다이묘의 봉토 또는 쓰시마 영주의 시대 이래 1876년 두 나라가 조약을 맺어 이곳을 무역항으로 선언하기까지 수세기 동안 명목적 연계 이상의 관계가 계속되어 왔다.

현재 번창하고 있는 일본인 정착촌은 5천 명(뜨내기 일본 어부 6천 명을 제외한 숫자)을 수용하고 있으며 군사와 교역을 위한

식민지로서의 새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바다를 통해 일본에서 실어온 게 분명한 일본 삼나무 관목으로 덮인 동산을 중심으로 정착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두 개의 수수한 일본식 사찰이 있고, 유럽인이 '사슴섬'(Deer Island)〔역주: '영도'를 가리킨다〕이라고 부르는 부산만 남쪽에 있는

구릉이 많은 섬 데츠예(Tet-suye)의 반대편에 자리잡고 있다.

이 도시에서 약간 북쪽으로 가면 중국인들의 새 정착촌이 있다.

아직 일본인의 수적 우세와 정착의 역사에서 눌리고 있지만, 최근에는 그들도 부산에 입성한 것만은 사실이다.

다시 북쪽에는 국완이라 불리는 본래의 일본인 정착촌이 있다.

그 위로 조금 더 가면 돌로 만든 성곽에 둘러싸여 있으며 폐허가 된 성을 가지고 있는 조선의 도시가 나오는데, 그 성문 밖에는 누추한

조선의 부락과 시장이 있다.

이 도시의 배경은 하늘에 닿을 듯한 긴 능선이 전나무 숲으로 덮힌 황폐한 구릉과 그 밑으로 화사한 붉은색의 계단식 경작지로

형성되어 있다.

 

◆ 원산 ◆
몇 마일 남쪽 내륙으로 들어가면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조선 촌락의 표정이다.

이 마을에는 1만 3천 명의 주민이 상고 있다.

숲을 이룬 구릉들이 그림 같은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로 보이는 산안개는 산촌의 모습을 감추어 주고 있다.

이곳의 교역은 부산보다는 다소 덜한 상태이다.

주로 일본인과 최근 교역을 개시한 중국인들이 북방 지역과 교역하고 있으나, 그 지역 내의 인구 과밀 도시들은 서해안에서 보다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강변에 있는 평양이 외국 상인들에게 개방되거나, 조선의 연안 함선이 공급 능력을 갖추게 될 경우,

평양이 궁극적으로 더 유망한 교역장이 될 것이다.

원산은 동해안의 움푹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7년 이곳을 처음 조사한 영국인 향해사가 이곳을 '브로턴베이'(Broughton

Bay)라고 명명한 바 있다.

같은 만에서 더 깊고 훌륭한 만입 부분은 나키모프(Nakimoff) 반도에 의해 싸여진 라자레프(Lazareff) 항이다.

그곳은 1854년 러시아 인들에 의해 처음 탐사되어 그렇게 명명되었으며, 그때 이래로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 있는 자신들의

얼어붙는 군영과 비교하여 부러움 이상의 눈초리를 보내 왔다.

이 만(영흥만)의 길이는 14마일 정도이고, 폭은 2∼6마일 정도이며, 깊이는 6∼12길(1길은 6피트, 1.83미터) 정도이다.

바다 쪽을 향하고 있는 입구는 작은 군도로 싸여 있다.

만에 들어서면 1879년 이래 현재 700명 이상의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 정착촌이 언덕 오른편에 군집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제물포 ◆
제물포는 조선의 수도 서울이 위치하고 있는 한강의 남쪽 지류의 어귀에 있다는 점과 인구의 밀집지라는 점 외에는 항구로서 별다른

장점을 지니고 있지 않다.

강을 따라 54마일을 가면 서울의 선착장인 마포 나루에 이르게 되고, 이 강을 따라가는 여정은 3마일 더 계속된다.

거기서부터 육로로 26마일을 가야 서울에 이르게 되는데 결코 유쾌한 여로는 아니다.

1883년 제물포가 처음 외국 상인에게 개항되었을 때, 그곳에는 1개의 초라한 어촌과 15개의 오두막만이 있었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번창하는 도시로 3천 명 이상의 조선 사람과 그와 비슷한 수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 일본인은 2천 5백 명, 중국인은 6백 명 정도이며, 유럽 인은 2십여 명 정도이다.

또한 유럽식 클럽과 당구장과 식당들, 그리고 잘 꾸며진 중국 상점이 몇 개 들어서 있다.

외곽 정박지는 해안으로부터 약 2마일 떨어져 있으며, 파고가 24∼30마일에 이르는 조수 간만의 차가 수 마일에 달하므로 드러나는

개펄과 협소한 해협등에서 선박들은 가벼운 해풍을 피할 수 있다.

바쁘게 돌아가는 거리와 항구에서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교역의 징후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미래에 이루어질 교역의 팽창을

예고하고 있다.

 

◆ 조선민족 ◆
맨 처음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으로 에워 싸인 항구나 그 주변을 보게 되면 내륙지방에서 만나게 될 아름드리 나무로 둘러싸인

울창한 고원과 청명한 계곡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처음으로 백의(白衣)를 걸친 조선인을 보게 되면 그들이 독특한 민족이며 복식도 독특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멀리서 정지하고 있는 조선인을 보게 된다면 마치 이정표나 비석으로 오인할 수도 있을 것이며, 이들이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백조의 무리로 오해할 수도 있으리라.

첫째 조선인은 결코 청결하지 않으면서도 휜 옷을 고집하는 민족이며,

둘째 북방의 매서운 겨울을 지내야 하는 이들이 일년 내내 면(겨울에는 솜을 넣어 입기는 하지만)을 입기를 주장하고,

셋째 항상 갓을 쓰고 다니며 때에 따라 여러 가지 모자를 곁들인다.

이런 모습들에서 우리는 조선 민족의 독창성을 알 수 있지만, 조선인이 생각하는 안락함의 기준에 대해서는 달리 알 길이 없다.

신체상 남자들은 건장하고 튼튼하며, 성질은 비록 유순하고 과묵하지만 남자다운 기상을 잃지 않고 있다.

그들은 머리를 길게 길러 상투를 틀어 올린 후 갓을 덮어 써서 머리를 보호한다.

여자들의 경우 상류층 여자들은 아예 보기조차 힘들고, 가난한 하류층 여자들은 가정집·들녘·거리 등에서 일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는데, 결코 아름답다고 표현하기는 힘들다.

그녀들의 행색에 대해 말하자면, 깡둥한 흰색 속옷의 끈은 어깨까지 내려오고 가슴은 훤히 다 내놓고 있으며 벙벙한 치마를 겨드랑이

바로 밑 허리에 둘러 입고 있는데, 치마는 엉덩이 부분이 제일 불룩하며 그 속에 은은하얗거나 갈빛의 거친 속바지를 가까스로 감추고

있다.

그들의 머리칼은 까맣고, 머리채는 양 관자 놀이를 돌려서 틀어 올렸는데 이것은 일본 여인들의 윤기 나고 고혹적으로 장식한 머리

모양과는 사뭇 다르다.

사실을 비교하면, 조선 남자들은 일본 남자들에 비해 키가 크고 건장하며 잘 생긴 반면 나태하고, 일본 남자들은 작고 못생겼지만

재빠르고 불굴의 의지를 가졌다.

조선 여인들은 강인하고 힘세며 가정을 꾸리는 능력을 백분 발휘하는 반면, 일본 여인들은 헤프고 안짱다리를 가졌으며 잘 웃고

남자를 흐리는 요기를 부린다.

조선의 남자 어린아이는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 앞가르마를 타고 머리를 땋아서 등판에 내려뜨리므로 여자 아이로 오해하기 쉽다.

 

◆ 전체 인구 ◆
인구비는 남자가 여자보다 많으며, 인구 총수는 약 1천 1백만 명 가량이며, 영국과 비슷한 크기의 영토를 가지고 있다고 믿어진다.

나는 가장 사실에 가깝다고 믿어지는 수치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최근 출간된 자료에 제시된 극단적인 두 개의 수치인 7백만과 2천 8백만의 중간치를 제시하는 것이며, 이런 극단적인 수치가

나온 것은 수고를 전혀 들이지 않은 통계자의 이 나라와 민족에 대한 전적인 무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조혼을 행하고 대가족을 이루며, 전쟁과 기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명맥을 이어온 조선 민족의 인구는 유아 사망률이 그리

높지 않다면, 아무 예방 조치도 취하지 못하는 이유로 3,4년마다 전국을 휩쓰는 전염병으로 인해 죽는 인구의 사망률이 높지만

않다면 틀림없이 증가할 것이다.

한편 경작된 적도 없고 사람이 살지 않는 채 버려진 넓은 땅이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므로 인구 팽창에 따른 필요한 식량을

충분히 댈 수 있을 것이다.

◆ 인종과 언어 ◆
조선족은 분명 몽고족 혈통이며 몽고인과 일본인 중간 유형의 인종적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일본인이나 중국인 어느 쪽과 동일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나라를 여행한 적이 있는 서양인에게 조선인은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인종일 것이다.

조선에서 파란 눈과 금발의 이색적인 유형을 본 적이 있는 몇몇 저술가는 조선인의 혈통 속에 서양적 요소가 있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이 가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조선의 언어는 우랄알타이(Turania)어족에 속하며, 중국의 어휘를 많이 차용하고 있다.

조선인은 두 개의 음절표 또는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천백 년 전에 유명한 학승인 설총에 의해 고안된 이두(吏讀) 또는

조선 음절표로서 250개의 중국 상형 문자에 음가를 준 것이며,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1447년 왕명으로 처음 공포된 조선 문자 체계, 또는 필기 문자로 아직까지 하층민들이 사용하고 있다.

만일 조선말을 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때는 중국의 상형 문자인 한자를 사용하면 항상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정부 간행물·선포문·칙서·과거 시험 등에서 한문이 공식 문자로 채택되고 있고, 상류층과 식자층 사이에서는 한문을 언술과 서신

교환하는데 상용한다.

◆ 민족성 ◆
민족성과 신체적 특질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의견으로 집약되는 것 같다.

매서운 기후가 그들이 자연적으로 장수하며 강건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면 비도덕적 생활 관습은 그들이 갖은 형태의 고통과 병마에

시달리게 되는 이유이다.

그들은 외국과의 교류 결핍, 개인의 사생활을 인정하지도 장려하지도 않는 정부 형태, 특권층을 제외한 모든 국민이 처해 있는 기막힌

수준의 빈곤 등으로 인해 무력하고 유약하며, 무관심에 빠지게 되었다.

개별적으로 보면, 조선인 각각은 다양하며 호감이 가는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상류층 사람들은 예의 바르고, 교양 있고, 외국인에게 우호적이며, 절도 있는 행동거지를 자랑하는 반면, 하층민들은 선량하고,

흥분을 잘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수다스럽고 명랑하다.

그러나 어느 선 이상을 넘으면 어떤 종류의 행동에도 꿈쩍하지 않는 비슷한 불감증을 나타낸다.

서울의 정치인들은 개화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을 설득하기란 역시 결코 쉽지 않다.

하급 노동자들은 하루 일하면 다음 이틀은 빈둥거리고 놀면서 노임을 다 써 버린다.

마부도 마찬가지여서 아무 때나 자신의 끼니를 찾아 먹고 말에게 여물을 먹이며 아무 생각 없이 그때그때를 넘긴다.

세상의 어떤 다급한 상황도 이런 자기 만족적인 나태함에서 그들을 구출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조선의 민족성은 이 나라와 관련 없는 사람들에게는 단지 재미있는 흥미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나,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국민 생활에 미치는 여파는 실로 지대하다 하겠다.

고착화된 이러한 행태들과 더불어 관직을 이용한 수탈로 살아가며 자신의 사회 계층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제 활동과 부의 축적을

막는 상류층과 관리의 폐해는 왜 조선인들이 자신들이 쌓은 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하며, 근면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을 피우며, 경쟁과 위기 상황에서도 무신경한가를 설명해 준다.

나는 튼튼한 소가 짊어져도 다리가 휠 만큼 무거운 짐을 옮기는 하층민을 본 경우도 있었고, 또 땅을 갈고 있는 게으른 세 명의 일꾼이

삽 하나를 밧줄에 매달아 작업을 하면서, 세 명이 한 명의 힘도 제대로 내지 않는 비효율적인 경우를 본 일도 있었다.

◆ 극단적인 사회 현상들 ◆
위에서 소개한 조선 민족의 특성은 조선인의 생활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밭일로 단련된 남성적 힘의 엄청남 비축량은 국가의 일에 소모된다.

조선의 남자는 관가나 고을의 치안 관청 또는 포도청의 업무를 보는데, 이런 관공서에서 그들은 나라의 원기를 북돋우는 기능 대신에

무고한 백성의 피를 착취하는 기능을 한다. 사실상 조선 사람들은 대충 두 계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양반이라 불리는 상류 또는 관료층은 신분상 육체 노동을 하지 않으며, 따라서 다른 사람의 노동에 의존해서 살아야 한다.

양반은 수많은 하층민의 노고에 기생하고 있으며, 하층민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분량만을 남겨 놓고 그 나머지를 착취해 간다.

조선에 절대적 빈곤은 없다.

그러나 근근히 생활을 꾸려 가는 수단 이상으로 인생의 즐거움을 맛보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서의 잉여 가치를 갖지 못하는 빈곤은

거의 보편적이다. 이들이 조금만 더 적극적인 민족이었더라면 아마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가끔 관례나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포도청의 침해는 순식간에 폭동으로 번지며, 그 과정에서 과오를 범한 관료는 1891년에 일어난

사건에서처럼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이런 일은 대개 너무나 큰 노력을 전제로 한다.

일반 백성들은 무장하지 않았고 매우 허약하기 때문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극한 상황까지 몰리지 않는 한 조선의 체제는 조용히

묵인될 것이다.

◆ 여행할 때의 필요 사항 ◆
조선 내륙을 여행하려면 관가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다.

이방인으로서 이 가난한 나라에서 짐을 나를 가축이나 음식, 잠자리 등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외무 관청은 '관초'라고 알려진 서류를 발행해 주는데, 그것을 패용한 사람은 관의 안내와 나귀의 도움을 얻을 수 있고,

관원들이 사용하는 여인숙이나 관아에서 숙박을 할 수 있으며, 마초, 닭, 밤길에 필요한 횃불 등을 제공받을 수 있다.

그러나 종종 조선인들은 이방인의 이런 주문을 받으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숨기고 아무것도 없다고 잡아뗀다. 따라서 관가에 이 관초를 제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이 문서는 지방 관가에게 이것을 지닌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협조하라는 명령인 셈이며,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이러한

냉대에 대해 서울에 보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관초가 없었다면 나는 원산에서 단 한 발자국도 옮기지 못했을 것이다.

원산의 나귀 주인들이 공모하여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부르고 그들의 모든 짐승을 대주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출발을 이틀간 연기하고 지방 관아에 있는 임시 대리인과의 다소 힘든 면담을 통해 어렵사리 관초를 구하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 금강산 기행 ◆
조선의 심장부를 여행하면서 나는 서울이나 큰 도시에서 접한 것보다 더 원시적이며, 국민 정서를 보다 구체적으로 대변하는

인정미의 한 유형을 보게 되었다.

그에 덧붙여 도시에 거주하거나 번화한 지역만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영영 알지 못하는 자연 경관의 특징을 볼 수도 있었다.

이 두 가지는 내가 원산에서 수도 서울까지 우회로를 여행하면서 얻은 소득이었다.

나의 여정은 거리상 5백 5십 리(약 170마일)였고, 근사한 금강산 종주(縱走)를 제외하면 장관(壯觀)이나 모험적인 고상한 요소를

결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호감을 느끼게 하는 풍경을 통과하고 있었다.

노정에서 며칠간 이탈하여 유럽 인으로는 겨우 대여섯 명만이 방문한 지역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서기 1천 4백 년경 현 왕조 창건 전 천년 동안 이 나라의 국교이며 민중 신앙이었지만 현재는 비 국교화된 불교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외경스런 유적이 있는, 이 나라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갖고 있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거기에는 훌륭한 삼림이 풍요롭게 휘덮고 있는 계곡과 골짜기가 수도 없이 많고, 단풍과 밤나무, 캘리포니아의 그랜드 캐년(Grand 

Canyon)에나 있음직한 장식물들이 총천연색으로 가을의 절정을 이루며, 수정같이 맑은 계곡물이 협곡마다 춤을 추며 흘러내리고,

나암(裸岩)의 파편(破片)들 은 하늘을 향해 천장을 이루고 있는 나뭇잎들을 뚫고 그 뿔을 들어올린다. 또 많은 불교 사원들이 흩어져

있는데, 개중에는 수백 년이 더 된 것도 있다.

이 사찰들은 사회적으로 위축된 승려의 무리들이 불심을 닦고 있는 고립된 은신처이며, 성지 순례자들의 유량의 발길만이 거쳐 가는

곳이며, 다른 일반 백성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불심과는 관계없이 금으로 도금된 부처상과 부처의 사도를 앞에서 의례적인 기도를

올리는 곳이다.

자연 경관을 아끼는 사람에게 이런 승려의 은신처보다 더 매혹적인 장소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모든 주변의 경치는 명쾌하나 인간만은 비열하다. 이것은 조선 승려의 타락에 대한 가장 불경한 표현이며, 나의 경험에서 우러난

손상된 인간 체면에 대한 약간 신중한 표현이다.

물론 이런 나의 허탈한 심정이 아름다운 자연 경관에 도취된 여행객의 흥을 깨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조선의 승려 ◆
수도 생활(修道生活)이 보편적이며 그럴듯한 이유로 인해 경멸을 당하는 조선과 같은 나라에서, 일반 백성의 무신론과 관(官)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꽤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답은 조선인의 치료 불능의 게으름에서 찾을 수 있다.

승려는 때때로 절에 딸린 농지를 경작하거나 짚신 삼는 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육체 노동을 하지 않으며, 주로 다른 이들의 시주에

의해 살아간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승려라는 직업에서 개인의 노력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매력을 발견한다.

때문에 마땅히 할 일이 없거나 아무 일도 하기 싫은 사람들은 자진해서 이곳으로 찾아 든다.

또 결혼할 수 없는 총각, 재혼을 원치 않는 홀아비, 버려진 아이들, 가족을 떠나고 싶은 자, 때로는 마치 유대인 망명 도시처럼 정치

망명의 은신처를 찾는 사람 등이 이곳을 찾아온다.

아마도 수백 명 중의 한 명 꼴이나 될까 말까 한 사람만이 속세를 떠나 온전한 의미의 학문과 수도에 전념하려고 불교에 귀의한다.

마치 영국의 은행 공휴일〔Bank Holiday,역주: 영국에는 은행 휴일이라는 공휴일 제도가 있는데, 말 그대로 은행이 쉬는 날을 의미함.

영국인들은 은행 휴일이 낀 주말에는 여행을 떠나서 휴식을 취함〕에 자전거 여행을 하는 젊은이처럼 조선인 관광객들은 절을 찾는데, 이들은 경치를 감상할 줄 아는 안목을 지니고 있고, 세상의 모든 근심을 떨쳐 버리고 마음 내키는 대로 유유자적할 수 있는 곳으로

구경을 가거나 유람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가능한 한 다른 사람의 호의에 얹혀 숙식을 해결하고, 산의 정상이나 새로운 정경에 다다르면 멈춰 서서 그 아름다움을 언어로

표현하며, 그 지방의 특출한 인물이나 신령을 기리는 노변의 작은 사원〔역주: 칠성당 또는 성황당을 이름〕에 들러서는 돌이나 넝마

조각을 봉헌하고, 만일 글을 좀 하는 사람이라면 앞서 살았던 시인의 시구를 읊조리거나, 그 자신의 절구(絶句)를 짓기도 한다.

이러한 반쯤 탐미적이며, 반쯤 미신적인 자연 숭배 사상이 조선 민족의 정서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가 하는 것은 백두산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유명한 백두산은 북쪽 국경에 있는 산으로 반짝이는 눈의 관〔雪冠〕을 쓰고 있는데, 용암의 분화구로 만들어진 호수는 그 수심을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매년 정부 파견단은 이 산으로부터 제일 가까운 지방 정부의 도읍인 함흥에서 출발하여, 백두산 정상의 전경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지점인 압록강 근처의 운청이라는 곳에 이르면 무릎을 꿇어 절을 하고 제사를 바치고 하산한다.

오랫동안 절이 종교적 의무라기보다는 여행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방문되어 왔다는 점은 하멜(Hamel)이 240년 전에 한 말로도

입증된다. 보통 귀족들은 평민 출신의 여인들과 또는 그들이 대동한 사람들과의 유희를 위해서 쾌 적한 장소를 물색하는데, 기분 좋은

경치가 있고 훌륭한 공원이기도 한 절이 자주 이용된다.

그러므로 절은 사원이라기보다는 쾌락원(快樂院)으로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며, 따라서 조선의 일반적인 절이란 곳은 종교적인

사람들이 열심히 술을 마셔대는 장소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 수도 생활과 풍습 ◆
조선의 사찰에서 밤잠을 온전히 자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여명이 오기 전 경건한 수도자는 다른 동료 승려들을 깨우기 위해 경내를 한 바퀴 돌며 북을 치고 우울한 불협화음의 영창조를

읊는다. 그러면 어떤 이는 놋쇠로 된 징을 치기 시작한다.

그 다음엔 사찰 입구 현관문 위에 걸려 있는 큰 북이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의식(儀式)을철저히 지키며, 잔과 접시의 내용물보다

그것들의 거죽에 더 마음을 두는 조선의 사찰에서 밤을 지낸 사람은 모두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 사찰 건물 ◆
금강산 안에는 비구니들이 거처하는 절을 포함하여 약 40개의 사찰이 있다.

나는 원산에서 약 20마일 가량 떨어진 석왕사를 방문하였는데, 석왕사를 포함한 모든 사찰의 내부 구조는 일반적으로 동일하다고

한다.

사찰 입구는 지붕이 있는 현관이나 테라스 형식으로 되어 있고, 기둥과 측면에는 앞서 간 순교자의 봉헌도가 두툼하게 걸려 있다.

대개 거대한 북이 채색된 목조 수호상의 뒤에 놓여 있다. 쇠창살 안에는 구리로 만든 종(銅鐘)이 걸려 있다.

처음으로 들어서게 되는 본당 안뜰에는 보통 상단 끝에 대웅전(大雄殿)이 있고, 그 양측으로는 부속 사원 또는 방문객의 방들이 있다.

 건물은 모두 같은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서로 분리되어 있는 낮은 높이의 건물들은 무거운 기와 지붕과 뻗어 늘어져 있는 처마를 가지고 있으며, 앞면을 휘장이나 덧문 또는

문으로 막아 두었다.

정적이 감도는 법당 내부는 크고 붉은색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깊게 조각된 채색된 천장이 있다.

법당 입구의 맞은편에는 제대(祭臺)가 있고, 그 위편에 녹색이나 분홍빛의 얇은 천으로 된 발을 쳐서 금입상불이나 금좌상불을 반쯤

가리고 있다.

빙 둘러진 측면에는 대개가 진흙으로 빚은 후 온통 채색을 한 괴상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형상의 반신반인(半神半人)·성인·영웅들이

늘어서 있다.

제대 앞에 있는 낮은 탁자는 불경과 작은 동종(銅鐘)을 놓기 위한 것이다.

그곳에서 승려들은 아침 저녁으로 공양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면 자신들의 하얀 평상복 위에 황급히 잿빛 가사를 걸치고, 붉은

휘장을 두르고, 방석에 무릎을 끊고,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전을 암송하고, 이마를 바닥에 대는 절을 하며, 작은 사슴의 뿔로

동종을 친다. 이웃한 법당에는 다른 신들에게 봉헌된 조금 작은 복제물들을 모셔 놓았다.

◆ 조선의 종교 ◆
조선의 불교 양식은 중국의 불교 양식과 흡사하며 일본의 예술 감각이 가미된 분위기와는 크게 다르다.

조선의 사찰은 소름끼칠 정도로 덕지덕지 칠을 해 놓았는데, 오로지 너무 낡아서 색이 바랬기에 어느 정도 봐 줄 만하며, 형형색색의

조금은 괴상한 원시적 색감은 일본의 이케가미(.Ikegami)나 닛코(Nikko)의 아름다움과 전혀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사쿠사(Asakusa)

의 다소 감이 떨어지는 매력과도 비교될 수 없다.

조선의 종교는 불교의 본래 모습이 세속화하여 악마숭배적 미신에 압도되고, 반신격화된 영웅들이 민중의 신으로 접목된 점에서

중국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령 신앙을 제외하고는 어떤 종류의 민간 신앙도 존재하지 않아서 자연의 위력 앞에 신경과민적인 공포감을

보이고, 하멜이 "종교에 관하여 말하면 조선인은 차라리 아무 종교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 이 조선 땅에서 비록 훼손되고 점점

소멸해 가고는 있지만 신앙의 본거지가 되는 사찰을 발견하게 된 것은 다행이라 아니 할 수 없다.

◆ 정령 숭배와 유교 ◆
특히 조선의 농부들은 미신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마을 어귀에는 무시무시한 모습의 얼굴에 조소를 머금고 있는 사람 머리 모양의 나무로 만든 이정표가 보이는데, 이것은 악령을 쫓기

위한 것이다. 비슷한 용도로 궁궐과 도시의 대문 지붕 위에는 청동 형상이 있다.

조선의 귀신학상 정령의 특별한 거처인 나뭇가지에 묶어 둔 넝마 조각과 밧줄, 그리고언덕길의 한 옆에 쌓아 둔 돌무더기에 지나가는

행인이 반드시 절을 하고 침을 뱉는 것도 이유에서이다.

조선인은 중요한 일을 하기 전 택일(擇日)을 위해 빈번히 무녀(巫女)와 점쟁이를 찾아가서 점을 친다.

서울에서 나는 귀신이 들렸다는 병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영국 선교단의 한 의사가 이 환자를 치료하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척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 귀신을 쫓아 큰 길을 따라가서는 선교단의 전도장에서 죽여 버렸다고 한다.

상류층에게 유일하고 절대적인 종교 양식은 조상 숭배이다.

이것은 중국과의 오랜 교류와 유교의 영향으로 발전된 것이다.

남성에게는 자신의 혼을 숭배하여 자신의 무덤에 제물을 바칠 아들을 두는 것보다 더 큰 야망은 없다.

이와 같은 윤리 체계의 궁극적 결과는 아이네아스[Aeneas, 역주: 호머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트로이의 왕자로서 서사시

<아이네이드>(Aeneid)의 주인공〕마저도 전형적인 중국인으로 만들었음직한 효심이며, 주군에 대한 맹종이며, 연장자와 친구에 대한

의무이다. 불교 승려는 누구도 도시로 들어오지 못한다.

이러한 금지 조치는 300년 전 일본의 침략 때부터 관행으로 굳어졌는데, 그 당시 일본군이 승려로 변장하고 몇몇 고을로 잠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의 국왕은 서울 근처 마을의 산에 안전한 은신처를 확보하고 있지만, 위급한 때에는 승려들로 구성된 수비대의 보호 구역으로

도피한다.

◆ 여행의 조건 ◆
조선 여행은 가을이 적기이다.

조선의 가을은 낮 동안은 따뜻하고 밤에는 상쾌하고 시원하여 여행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반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고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며, 여름의 더위 또한 유쾌하지 않다.

조선에는 인력에 의하여 놓여진 길이라고는 없다.

길이라고 하는 것도 단지 말의 통행로에 불과하며, 그 폭도 말이 지나다니며 터 놓을 정도이다.

경작지 만큼이나 많은 작은 산봉우리가 보이는데 너무 가파르고 돌이 많다.

내가 길에서 벗어나 올라가 본 산길은 온통 조약돌로 수놓은 듯한 계곡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조선의 조랑말만이 그런 울퉁불퉁한 자갈길에서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조선에는 무거운 짐을 나르는 황소와 빈궁한 선비들이 애호하는 당나귀를 제외하고 다른 운송 수단이나 동물은 없는 것 같다.

조랑말은 열한 뼘[역주: 뼘(hand)은 말의 키를 잴 때 쓰는 단위로 한 뼘은 약 4인치(inch)에 해당됨] 이상인 것이 드물며,

투지만만하고 영악하다.

틈만 나면 언제든 뒷발질을 하고 싸움을 걸지만, 150∼200파운드 가량의 등짐을 지고 하루에 30마일을 간다.

콩과 짚을 넣고 끊인 여물을 하루에 세 번만 주면 아무 탈 없이 하루의 고된 일을 묵묵히 해낸다.

조랑말 한 필마다 마부나 기수가 붙어 있는데, 그들의 뛰어난 해학은 여행의 피로를 덜어주는 요소이다.

그들은 창(唱)을 하고, 궐련을 피우며, 우스갯소리도 잘하며, 온종일 서로 다툰다.

만약 밤이 될 때까지 목적지에 이르지 못했을 경우 관가에서 발급해 준 통행증은 인근 마을에서 횃불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마을에서 횃불이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마부나 관아의 아전들은 엄청나게 큰 소리로 '어서!,어서!' 하고 외쳐댄다.

만일 심부름꾼이 나무나 짚단으로 된 횃불을 안 가져왔다면, 무사태평했던 그들의 태도는 갑자기 돌변하여 온갖 욕설을 퍼부어댄다.

그러나 잠시 후 대여섯 개의 횃불이 만들어지고 불길이 일렁이기 시작하면 혼란은 이내 칠흑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 사냥 ◆
세계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겠지만, 여행 중의 재미는 빡빡한 여정에서 잠시 빠져 나오지 않는 한 별다른 게 없다.

사냥은 조선 여행 중 반드시 부수적으로 끼여드는 재미 중의 하나이다. 산의 덤불 속에는 꿩들이 많다.

겨울철에는 암거위·백조·오리·검둥오리·쇠물닭·물떼새· 도요새 등 온갖 잡새들이 바닷가와 강가, 물찬 논에 떼지어 몰려다닌다.

조선인들은 덫을 놓아 잡거나 앉아 있을 때 총질을 한다.

일직선으로 날아오르는 야생 물오리를 쏘아서 그것이 높은 공중에서 떨어지는 장관은 즐거움을 넘어선 탄성을 지르게 한다.

칠면조과에 속하는 능에·기러기·해오라비·분홍색과 흰색 따오기도 볼 수 있으며, 중국인들의 부채로 사용됨으로써 귀중하게 여겨지는

 꼬리 깃털을 가진 큰 독수리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인이 탐내는 것은 깃털보다는 털과 가죽이다. 토끼·여우·오소리·살쾡이·멧돼지·곰·검은담비·횐족제비·수달, 중국의

한방재료 이는 녹용을 가진 노루 등이 우거진 산의 관목 숲에서 발견되는 것들이다.

표범도 흔한 편인데, 겨울철에는 서울의 4대문 안까지 침입하기도 한다.

표범 가죽의 가격은 개발 약 10달러이고, 궁정의 공식 휘장의 일부분으로 사용된다. 조선에서 수렵의 백미는 호랑이 사냥이다.

조선 호랑이의 크기는 거대한데, 나는 조선에 있는 동안에 기가 막히게 좋은 호피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호랑이 사냥터는 동해안 근처의 수목이 들어찬 계곡에서 식인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다는 압록강의 삼림 지역까지 북쪽으로 쭉 연결된

지역이다.

원산의 외국인 정착촌에는 매년 겨울마다 호랑이가 한 번 이상 내려와 사람을 물어 간다는 소문도 있다.

심지어 나는 그곳에서 어떤 유럽인이 식사하러 외출하는 도중에 호랑이가 길목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다.

또 금강산에서 최고의 절인 장안사(長安寺:'영원한 평화의 장소'라는 뜻)에 들렀을 때에도 매일밤 한 사람이 경내를 둘러보며 경계를

했었는데, 호랑이의 발자국과 오물이 발견되기도 했었다.

조선 국왕은 일군의 호랑이 사냥꾼을 두고 있는데, 그들은 웅덩이를 파거나 덫을 놓아서 호랑이를 잡는다.

일반적인 형태의 덫은 통나무와 돌로 짠 나무장으로 차라리 거대한 쥐덫처럼 생겼다.

돼지 한 마리를 미끼 삼아 안에 묶어 두고 호랑이가 들어섬과 동시에 문이 내려져 가두게 되며, 갇힌 호랑이는 창으로 척살된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호랑이를 매우 두려워한다.

중국 속담에 "조선에서는 반년 간은 사람이 범을 잡고, 다음 반 년 간은 범이 사람을 잡는다."고 전해질 지경이다.

조선인은 홀로 밤길을 여행하는 법이 없으며, 먼 길을 떠날 때는 횃불과 징을 앞세우고 무리를 지어 떠난다.

조선인들은 몰이꾼 역할을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그래서 조선에 호랑이가 흔하기는 하지만 유럽인이 호랑이를 포획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거의 없다.

때때로 나에게 사냥 애호가들이 조선 원정의 매력과 사냥감에 대해 물어본다.

우선 야생 조류 사냥에서 가장 성가신 일은 잡은 새를 치울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또 한동안 새만 쏘다 보면 김이 빠지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보다 큰 규모의 수렵 여행은 여행의 고초와 험난함, 숙박 시설·음식, 그 밖의 불편한 사항으로 인하여 아마 여행을 떠날 때 느꼈던

흥미보다 훨씬 못한

기분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 농촌의 생활 ◆
도보로 여행을 하다 보면 농촌의 생활과 농사일의 다양한 측면들을 보게 된다. 조선의 마을은 흙으로 지은 오두막이 군집 상태를

이루고, 각 오두막마다 짚으로 지붕을 해 덮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대게 박넝쿨이 올라가고 있다. 난방은 온돌 형식인데 방바닥 밑으로 화기를 빨아들이는 토관을 설치해 난방을 하고

있으며, 보호 또는 격리 명목으로 나뭇가지나 갈대로 엮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다.

집 밖의 진흙 마당에는 대개 멍석 한 가득 펴 말리고 있는 붉은 고추나 방금 도리깨질을 한 기장·쌀 같은 곡식을 볼 수 있다.

남새밭에서 수확된 긴 줄의 담배잎 다발이 줄줄이 걸려있으며, 남새밭마다 아주까리가 없는 곳이 없다.

검은빛의 구역질나는 작은 돼지들의 우리는 길 쪽을 향하고있고, 아이들은 유럽 아이들과 비교할 때 거의 발가벗은 상태로 뛰놀고

있다.

집 안에서는 무뚝뚝한 표정의 여인네들이 곡식을 갈고, 도리깨질을 하고, 문턱에서 바깥을 보면서 체로 곡식을 고르는 모습이 보인다.

남정네들은 논이나 기장·콩·메밀밭에 나가 주식 작물을 재배한다. 열심히 경작하지만 수확은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다.

경작 가능하지만 고르지 않고 내버려 둔 땅 수백 에이커가 몇 뙈기의 개간된 땅과 교환 되기도 한다.

황금빛 곡식이 추수를 기다리며 익어 갈 수 있는 땅 위에 안타깝게도 거친 잡초만이 무성하다.

◆ 시골 풍습 ◆
레나 마차는 북쪽 함흥 근처나 다른 몇몇 지방에서만 볼 수 있었다.

흔히 짐을 운반하는 황소가 조야한 나무 달구지를 끄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보다 흔한 광경은 소의 등에 나무 선반 같은 것을

부착하고 그 위에 연료용 나뭇단을 쌓아올린 형태이다.

남자들은 대나무 작대기를 사용해 짐을 나르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대로 짠 지게를 등에 지고 그 위에 짐을 올려서 옮긴다.

그들이 쉴 때는 나무 받침봉이나 나무 다리로 지게를 땅에 똑바로 세운다.

그들은 2∼3피트 가량 되는 길고 가는 담뱃대를 사용하는데, 쓰지 않을 때는 끝이 공중에 삐죽이 튀어나오도록 목 뒤에 옷깃에 꼽아

둔다. 조랑말에 편지를 박을 때는 땅에 등을 대고 눕게 한 뒤, 두 다리의 구절[球節, 역주: 말굽의 뒤쪽 위에 털이 난 부분.]을 밧줄로

묶는다.

◆ 기념비 ◆
모든 마을의 어귀에는 크든 작든 기념비나 현판(이따금 철이나 청동으로 만든 것도 있음)이 반드시 눈에 띄는데, 그 위에는 한자로

무어라고 새겨져 있다.

이것은 어떤 역사적 사건과 관련 있거나 더욱 빈번하게는 마을 사람들이 고을 원님에게 감사하는 뜻에서 세운 것이다.

후자의 경우 사람들은 고을 원님에게 정의나 관용 같은 것은 아예 기대하지도 않았으므로 단지 그가 특권을 이용해 고을 사람들을

쥐어짜는데 보통 수준으로 했음을 감사한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과거에 급제한 지방의 유생이나 공중의 후견인, 배우자의 죽음에 자살로 절의를 지킨 고결한 여인들을 위해 현판을 세웠다.

◆ 무덤들 ◆
중국의 영향은 조선의 도처에서 발견되며 특히 죽은 사람의 처리에 있어서 더욱 확실하다.

왕릉은 서울의 동대문에서 10마일 거리에 있다. 하지만 이들의 크기는 북경이나 후에(Hue)에 있는 대영묘(大靈廟)의 크기에 비하면

검소한 편이다.

관리의 무덤 앞에는 제물을 놓는 석상(石床) 또는 제대(祭臺)와 죽은 이의 비문(碑文)을 담고 있는 중심주(中心柱) 또는 비석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여기에 중국의 영향을 받아 무사나 동물의 형상을 세우기도 하고, 죽은 이가 말을 타고 싶을 때를 생각하여 안장을 두른 석마

(石馬)를 세우기도 하며, 죽은 이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기둥을 세워 새의 횃대를 삼도록 한다.

무덤의 일반 형태는 크고 둥근 풀로 덮인 흙무더기이며, 대개의 묘자리는 언덕 측면이나 낮은 구릉 위에 쓰고 측백나무[Scotch firs,

 역주: 저자는 스코틀랜드의 전나무로 표현하고 있음]를 주변에 심는다.

묘자리는 점쟁이와 상의한 후 정하며, 사람들은 매년 정해진 날에 이 곳을 찾아 성묘를 한다.

또 한 번 무덤을 쓰고 나면 그 후로는 절대 삽이나 쟁기를 대지 않는다.

서울 주변에는 이런 무덤이 수천 개나 흩어져 있다.

◆ 도보 여행자 ◆
저주스러울 정도로 조선을 황폐화시킨 관료주의는 여행을 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여행 중인 관리는 자신이 묵고 싶은 곳 아무데서나 여장을 풀고, 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식량을 추렴하므로, 일반 백성들에게 그는

악몽과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관이 발행한 통행증을 보이면 마치 흑사병에 걸린 사람을 만난 듯이 도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해 돈을 냈지만 닭과 달걀을 구할 때는 어느 누구도 없다는 구실을 붙여 항상 거절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든 것을 통조림 형태로 챙겨 가지고 다닐 필요가

있다. 하루 여정의 끝에는 다른 도보 여행자들과 만나게 된다.

도읍 근처의 길은 작고 불편한 가마에 몸을 실은 관리들, 과거를 보러 가거나 보고 돌아가는 유생들, 순례자들·상인들·악사 또는

거리의 약장수들, 구걸하는 사람들, 유람객들, 각양각색의 신분과 모양새를 지닌 가난한 방랑자들로 초만원을 이룬다.

◆ 조선의 여관 ◆
여관에서 조선 여행에서 가장 흥미로운 측면과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밤이 되면 찾아드는 장소인 여관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되는 어려움이 있다.

조선에는 변변한 여관이 별로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을 후원할 계층이 없기 때문이다.

관리나 양반은 앞서 말한 대로 관저에서 묵는다.

농민은 동료 농민의 투박한 호의에 신세를 지고, 그 이외의 사람들만이 어쩔 수 없이 여관에 묵게 된다.

길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작고 더러운 마당을 둘러싸고, 한 켠에는 나무로 지은 말이 여물을 먹는 말구유가 있는 긴 오두막이 있고

다른 한켠에는 토기 항아리와 여물을 끓이는 화덕이 있다.

작고 낮은 지붕의 방을 열어 젖히면, 보통 8평방 피트 정도의 가구 한 점 없는 방에 하나나 두 개의 닳아빠진 짚방석과 베개 역할을

하는 목침이 몇 개 있을 뿐이다.

거기서 투숙객은 수단껏 먹고, 옷을 벗고, 입고, 씻고 자는 것이다.

주위의 불결함 외에 따로 이나 벼룩같이 잠을 방해하는 귀찮은 것들만 없어도 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열악한 조선 여관에서 단잠을 잤기 때문에 그 공을 잊고 부당하게 비판을 가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 서울이라는 이름 ◆
예상외로 조선의 수도인 서울은 크기와 인구면에서 동양의 대도시중 하나로 꼽힐 만하다.

나는 'Soul'이라고 썼는데, 미리 말해 둘 것은, 그것을 똑같이 발음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학자에 따라 'Seoul'·'Syool'·'Sawull'· 'Sowul'등 여러 가지로 쓰고 있다.

확실히 이 도시의 이름은 음절어이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조차 확실하게 발음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인에게는 아일랜드 인에게서 들을 수 있는 'Soul'(영혼)의 발음과 가장 유사하게 들릴 것이다.

조선과 중국의 긴밀한 관계를 아는 사람에게는 외견상 서울이 중국의 도시와 비슷하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실 서울은 정확히 500년 전에 현 왕가의 시조인 이 태조에 의해 도읍으로 정해졌다.

그는 거의 모든 면에서 중국을 모방하였다. 중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주변 작은 나라들에게는 이상적인 유일한 국가 모델인 셈이다.

그는 수도 주변에 20피트 이상의 높이로 석벽을 쌓았고 거기에 궁수(弓手)를 위한 흉장(胸障)과 총안(銃眼)을 만들었다.

그는 8개의 존문(尊門)을 세웠는데 이 문막으로 터널 같은 통로가 있고

그 위에 1층이나 2층의 기와 누각이 있다. 아직도 이 문을 통해서만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북경의 성문들과 마찬가지로 이 문들에는 그럴듯하며 거창한 이름들이 붙여져 있다. 흥인문(興仁門, Gate of Exalted Humanity)

숭례문(崇禮門, Gate of High Ceremony) 광희문(光熙門, Gate of Bright Amiability) 등이다.

역시 북경과 마찬가지로 무쇠를 입히고 꺽쇠를 친 무거운 목재문이 해가 떨어지면 곧 닫히고, 성문 열쇠는 왕궁으로 옮겨져서 왕이

보관한다. 그러나 중국 관리가 서울에 있는 경우에는 그가 열쇠를 보관한다.

그래서 일단 문이 닫히면 아무리 뇌물을 쓴다고 해도 다시 열 수 없게 된다.

그럴 경우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밧줄을 타거나 타인의 도움을 받아 약간 허물어진 성벽을 타고 넘어가는 것이다.

내가 서울에 가기 직전 영국 해군의 제독 한 사람이 불과 몇 분 늦어져 이렇게 뱃사람다운 방식으로 성내에 진입했다고 한다.

조선의 고관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한편으론 충격을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재미있어 하였다.

◆ 서울의 위치 ◆
서울은 원래 바위투성이의 언덕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사람이 절대로 근접할 수 없는 지형이 상당 부분 있으므로, 도시 전체가

성벽으로만 둘러싸여져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성벽은 그저 방어할 수 있는 지역만을 감싸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중심부의 낮은 곳에 인가가 밀집해 있다.

어찌 보면 높은 산으로 둘러 싸여진 골에 자리를 잡아 도시 전체의 풍경이 매우 빼어난데, 이곳에 도읍을 정한 것이 좋은 경관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위생 상태에 있어서는 열악하기 짝이 없어서 특히 여름철에는 마치 질병 양성소와 같은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앞 장에서 묘사한 동북부 지역의 경치와는 달리 서울 주변의 산은 나무가 거의 없고 메말랐으며 볼품도 없다.

산은 대부분 퇴화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나무나 풀이 자라기 어려우며 산록을 덮고 있었던 나무들은 대부분 쓸려 내려간 것

같아 보인다. 북산[역주: 북악산의 오기]이라고 불리는 북쪽 산에는 목재가 될 만한 나무가 약간 자라고 있기는 하다.

이 산은 마치 아테네의 리카베투스 산처럼 왕궁의 뒤쪽으로 날카롭게 솟아 있다. 그러나 다른 산들은 거의 나무가 없다.

남산만은 예외여서 도시 남쪽 800피트 높이의 산 정상까지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다.

북쪽으로 더 가면 그 부근의 산들은 위용이 당당한 북한산의 그늘 아래 있다.

북한산의 찬란한 회색빛 봉우리들은 밋밋하고 낮은 산록들 위로 우뚝 솟아 있다.

남산은 한번쯤 등반해 볼 만하다. 남산에서 보면 사면의 회색빛 파도처럼 물결치는 산들 너머로 둔중하고 거칠은 경관이 눈에

들어온다.

이 산들의 점차 넓어져 가는 계곡 사이로 한강이 굽이져서 바다로 이어진다.

◆ 봉화 ◆
남산의 정상에는 4개의 봉화대가 있다. 이것은 온돌로 지은 원통형의 구조물인데, 안에는 땔감들이 높이 쌓여 있어서 밤마다 불을

지피고 수도 서울에 평화와 안녕, 혹은 그 반대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것은 마치 트로이의 봉화와 같이 왕국의 남쪽 변경으로부터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면서 이어진다.

북서쪽으로는 3개의 뾰족하고 높은 봉우리의 산이 보이는데, 삼곡산[Sam Kok San, 역주: 삼각산의 오기임]이라고 부른다.

1866년 프랑스 원정군은 이 산을 닭벼슬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 틀 무렵 이 산은 붉게 물들어서 반대편에서 오는 불빛에 답을 하기 때문이었다.

유선 통신으로 대체된 곳을 제외하면 아직도 이런 원시적 통신 방식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봉화의 수와 위치, 그리고 그것이 오르는 연속성에 따라 정해진 암호로 외적이 침입하는 상황이나 전황을 알린다.

저녁 무렵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은 신기한 신호에서 눈을 뗄 줄 모르고 각 봉우리마다 피어오르는 불꽃을 쳐다보게 된다.

◆ 주민과 거리 ◆
서울의 인구는 15만에서 30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공식 추산으로 서울에는 3만 호가 있다.

따라서 서울 인구는 20만 명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근사한 수치일 것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초가집에서 산다. 이 초가집들은 좁고 악취가 나는 작은 길 양 쪽에 줄지어 서있다.

그러나 3개의 주요 도로는 좁은 골목들과는 달리 독특한 동양적 대칭을 이루고 있다.

주도로의 하나는 왕궁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수도를 동서로 가르는 두 번째 도로로부터 남대문에 이르는 길이다.

이 3개의 주요 도로는 폭이 적어도 50야드에 이르며 부드러운 자갈로 덮여 있어서 유럽의 어떤 도시에 가져다 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혼잡과 더러움이 눈에 뛴다.

도로의 양편으로 초가집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것은 가난에 찌들린 무주택 빈민들이 지어 놓은 것으로 도로의 장애물이 되기도

하여 결국 도로의 중간에 좁은 통로밖에 남지 않는다.

왕의 행차시에나 엄숙한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 이 임시 주택들은 미리 철거가 되지만 그 후에는 곧바로 다시 지어진다.

나는 어느 날 이 초가집들에 화재가 나서 많은 집이 타는 것을 보고 속으로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 도로들이 잠시 동안이나마 고유의 공간을 되찾았고, 더구나 이 화재로 인해 원주민들의 생활 양태를 잘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이 났을 때 어떤 이들이 불을 끌 생각은 않고 이웃의 지붕에 앉아, 신령님에게 불을 막아 달라고 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작은 냄비·사발 그리고 찻잔까지 들고 뛰어나가면서 물을 끼얹었는데, 물론 이런 식으로 진화가 될 리는 없었다.

중국인 거주 구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중국 총독[역주: 앞에서 언급한 통리조선교섭사의인 원세개를 가리킴.]이 조직한 소방대가

없었더라면 아마 전 도시가 불에 탔을지도 모른다.

◆ 더러운 개천들 ◆
지도를 보면 서울은 한강 변에 자리잡고 있다. 나는 역사책에서 프랑스와 미국의 전함들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수도를 위협했다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나일강 변에 있는 하르툼(Khartum)[역주: 수단의 수도, 백나일·청나일의 두 강이 합류하는 곳]을 연상했었다.

그러나 서울은 실제적으로는 한강에서 4∼5마일이나 떨어져 있다.

서울을 관통하는 강에 해당할 만한 것으로는 좁은 운하가 있기는 있다.

이 운하는 우기에 아바나(Abana)나 파르파(Pharpar) 정도는 되겠지만 평상시에는 개구쟁이 아이들이 그 안에서 놀고 있는 더럽기

짝이 없는 얕 은 하수천에 불과하다.

더구나 큰 거리나 좁은 골목의 양측으로 복개가 되지않은 하수도가 흐르고 있는데, 온갖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이 섞여 있다.

그 덕택에 서울은 더럽고 악취가 난다. 그래서 미로와 같은 골목들을 돌아다니자면 눈과 코 모두가 고역을 당하기 십상이다.

서울 안에는 눈에 띄는 몇 개의 언덕이 솟아 있는데, 주로 외국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영국·러시아·일본대사관과 프랑스 천주 교회 등이다.

천여 명이 넘는 일본인 거주자들은 자신들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고 점점 늘어나는 중국인 거주자들과 첨예한 대립 상태에 있고,

1백 여 명에 이르는 유럽 인과 미국인이 나머지 외국인 거주자이다.

그러나 이들 외국인이 조선인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조선인들은 흰 저고리와 흰 바지, 흰 양말을 신고 떼를 지어 혼잡한 거리를 몰려다닌다.

◆ 주택 ◆
서울에는 공공 건물이 드물 뿐 아니라 있어도 보잘것 없어 보인다.

궁궐 알현실의 높이 치솟은 지붕을 제외하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아도 도시 전체가 거의 기와 지붕으로 뒤덮여 있고, 너무 근접해

있어서 한 지붕에서 다른 지붕으로 걸어 다닐 수 있을 것만 같다.

특히 가옥 사이의 좁은 골목길은 잘 알아보기조차 힘들다.

단지 3개의 흰 띠 같은 주도로만이 조선인의 흰 옷 때문에 더욱 희게 보이며, 흰색의 떼지어 다니는 무리들 때문에 전체적으로

단조로운 갈색의 조화가 깨지는 느낌이다.

도심지의 집들도 아름다움이란 전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천편일률적으로 진흙·종이·목재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혹 특이하게 지어진 집도 있는데 벽을 둥근 돌로 쌓고 새끼줄로 묶어 놓았으며 창문은 없고 밀창과 들창만이 있을 뿐이다.

주거 생활의 청결함과 우아함이 있다면 그것은 집안 내부에 숨겨져 있다.

집안으로 들어가면 거리에서는 볼 수 없는 은밀한 내실이 작은 정원을 중심으로 배열되어 있다.

어느 부류의 사람이든지 지반을 높인 후 그 위에 집을 짓는데, 이것은 난방 때문이다.

전통 가옥의 난방은 한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 밑바닥을 농해 집 전체를 데운다.

아궁이 반대편의 새까만 굴뚝을 통해 연기가 나가는데 그 결과 도시의 미관은 더욱 엉망이 된다.

서울은 어디에서도 정교하게 조각되고 금박을 입힌 북경 상점의 장식이나 광동의 알록달록 색깔을 입힌 광고판 같은 것을 찾을 수가

없다.

거리를 아름답게 꾸미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정 규모 이상의 집을 짓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편협한 사치 금지법 때문이다.

◆ 거리의 생활과 복식 ◆
반면 서울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충분한 개성을 발휘하고 있다.

거리의 독특한 생활 방식과 아울러 때론 위압적이고 때론 우스꽝스럽기도 한 궁궐이 그것이다.

조선인들이 왜 흰 옷만 입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중국의 변발처럼 정복에 의해 타민족의 관습을 강요당한 것도 아니며, 알바니아의 짧은 외투처럼 멋진 것도 아니고, 로마의

겉옷(toga)처럼 정장으로서 위엄이 있는 것도 아니며, 스코틀랜드의 킬트[역주: 영국 고지대(Highland) 사람들의 민속 의상으로

치마처럼 생간 하의(下衣).]처럼 편리한 것도 아니며, 천박하기조차 한 유럽의 바지처럼 편한 것도 아니다.

또한 겨울의 햇빛이 그리 강렬하지 않은 것을 보면 조선인의 흰색 취향이 태양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더욱이 추운 날씨에 두껍게 솜을 넣어 입는 것을 보면 희색의 무명도 천이 가볍기 때문에 선택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것을 그저 영국에서 '크리놀린[Crinoline, 역주: 천에 말총 같은 심을 박아 뻣뻣하게 만든 것임.]이나 '톱 햇'[Top hat. 역주:

공식 행사에 쓰이는 높은 모자임.]가 사용되는 것과 유사한 정도로 생각해 본다.

흰 옷은 남성들이 여성들을 계속 일하게 하려는 숨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가 하는 점이다.

서울 거리에서는 꼭 닫힌 집안으로부터 온종일 또드락 뚝딱하는 신비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소리는 부녀자가 나무 방망이로 흰 무명옷을 쉴새없이 두들겨서 서방님께서 남성 패션에 맞는 윤이 나는 흰 옷을 입고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옷은 미리 빤 다음 꿰매거나 풀을 먹인다.

일반 남성은 흰 무명 속옷 아래에 누빈 양말을 신고 그 위에 같은 천으로 만든 치마 같은 것을 입는데, 이 옷은 양측을 갈라 놓았으며

잠옷과 흡사하다.

관아에 근무하는 관리는 그 위에 다시 비슷한 반투명의 검정색 옷을 입는다.

일반 여인네들은 마치 견진성사 예배에 가는 영국 소녀들처럼 흰색 일색의 옷만 입는다.

그러나 양반층 여인들은 초록·주홍·보랏빛 가운을 입는데 이것은 어깨에 걸치는 것이 아니고,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앞을 꼭 여미고

다녀서 그 안에 있는 두 눈만이 보일 뿐이다. 소맷자락은 뒤켠 양측에 늘어져 있다.

궁궐 내 시녀나 궁녀들의 머리 치장은 놀랄 만하다.

윤기나는 검은 머리채를 땋아올려 만든 거대한 봉우리를 머리 위에 이고 다니는데, 이것은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나 영국 대법관의

인조 가발보다 더 크다.

이 가발은 남자 아이의 머리채를 자르거나 빗질하여 나온 것을 검게 염색하여 다발로 파는 것으로 만들었는데, 한 꼬리가

손가락만하게 굵고 길이는 1야드 정도이다.

이것을 머리 위에 커다란 쟁반을 얹듯 올려놓고 다니는데, 마치 네 다리 달린 식탁 위에 놓은 것처럼 안정되어 있다.

◆ 무희들 ◆
연회(宴會)가 벌어질 때 늘 빠지지 않는 것이 무희들이다.

이들의 머리 치장 또한 특이한데 이 여자들 기생(妓生)이라 부르며, 일본의 게이사(妓女)와 같은 여자들이다.

대소 고을마다 기생들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며 그녀들은 직업적인 연예 활동과 매춘을 동시에 한다.

대부분이 빼어난 미모를 갖추고 있는데, 일본 여성처럼 여성적인 매력은 없지만 이목구비가 또렷하다.

조선의 대표적 춤은 앉아서 연주하는 느리고 하소연하는 듯한 음악에 맞춰 추게 되어 있는데 매우 단조롭고 오래 계속된다.

내가 접해 본 동아시아의 다른 모든 나라의 춤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춤도 점잖고, 때로는 우아하기도 하며, 미뉴에트와 가드릴

[Guadrile, 역주: 넷이 한 조가 되어 추는 스퀘어 댄스]을 합해 놓은 것처럼 재미있고 끝이 경쾌하다.

조선인들은 이 춤에 심취하여 한 자리에 수 시간 동안 앉아 관람을 한다.

◆ 조선의 모자 ◆
조선 모자의 특이함은 잘 알려져 있는데, 서울 거리를 잠시만 거닐어 보아도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모자를 만나게 된다.

보통 쓰는 모자는 두 개다. 겉에 T는 모자는 챙이 넓고 약간 원추형이어서 옛날 웨일즈 여인들의 나들이 모자와 비슷하지만, 그

재료만은 일찍이 본일이 없을 정도로 섬세한 것이다.

양반층은 대를 쪼개서 만든 섬유로 짠 검정 칠 모자를 쓰며, 일반 평민은 같은 재료라도 값이 싸거나 말총 모자를 쓴다.

이 모자는 관자놀이 부근에 머리를 감싸는 모자 위에 덧쓰는 것이다.

안에 쓰는 모자는 머리를 자르지 않고 위로 치켜올려서 꼭대기에서 매듭지어 놓은 것을 묶는 역할을 한다.

밖에 쓰는 모자는 끈이나 호박 또는 홍옥 구슬로 엮어 놓은 줄로 턱 밑에서 매듭을 지어 고정한다.

또 신분·나이·직업을 막론하고 아무나 쓰는 모자가 있다. 약혼한 젊은이는 결혼할 때까지 짚으로 만든 멋쟁이 모자를 쓰고 다닌다.

문과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채색한 꽃술로 장식된 두 개의 철사를 모자 위에 안테나처럼 달고 다닌다.

농부들이나 소몰이꾼들은 짚으로 엮어 만든 커다란 집 모양의 모자를 쓰고 다니는데, 그 둘레가 하도 커서 얼굴이 거의 안 보일 뿐

아니라 어깨를 모두 덮을 정도이다. 아마도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이 제일 곤란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테가 6각으로 된 모자 가리개를 써야 하며, 망자(亡者)와의 관계에 따라 1∼3년 동안 허리를 끈으로 묶은 대마로

만든 가리개를 들고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짐작건대 이것은 망자(亡者)의 혼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상중에는 혼인을 하거나 놀이를 즐기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불운한 신랑의 이야기가 있다.

이들은 친척들이 자꾸 죽는 통에 계속 독신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약혼한 여인들도 하릴없이 늙어 버리는 것이다.

승려들은 골풀을 엮어 만든 6각형 테를 두르고 꼭대기가 뾰족한 특이한 모자를 쓰고 다닌다.

여승들은 따로 길고 좁은 밀집 모자를 쓴다. 일반 병사들도 나름대로 특이한 모자를 쓰고 다니는데, 검은 말총으로 만든 채색한

끈으로 묶고 다닌다. 장교 모자는 재료가 훨씬 좋은 것이며 깃털을 꽂고 다녀서 멋있어 보인다.

그러나 여러 등급의 궁정과 관아 사함을 만나 보아야 조선의 모자를 만드는 장인의 걸작품을 볼 수 있다.

관찰사에게는 금박을 입힌 두꺼운 종이로 만든 관(冠)을 공급하고, 대신(大臣)이나 일반 관리들에게는 또 다른 여러 가지 모자를

만들어 바친다.

이 모자들은 여러 층을 이루어 뒤로 젖혀져서 마치 옛 베니스 총독의 모자와 같은데 뒤쪽에 날개 혹은 노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다.

왕실의 하인들까지도 별도의 모자가 있는데, 양편에 작은 대나무 장식을 하고 뒤에는 커다란 조화 다발을 달았다.

마 페르시아 황제인 '샤(Shah)의 전령이 쓰는 어릿광대 모자를 빼놓고는 이렇게 굉장한 모자도 없을 것이다.

◆ 놀이 ◆
열에 아홉이 흰 옷만 입고, 열이면 열이 모두 이런 각양각색의 모자를 쓰고 다니는 서울 거리의 풍경이 런던이나 뉴욕과는 매우

다르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서양과 비교하면 마차나 바퀴가 달린 수레는 전혀 없다. 움직이는 것은 모두 두 발에 의지하는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상류층 사람들이 조그만 조선 조랑말을 타고 다니는 것인데,

그 형색이 마치 안장의 앞머리에 어렵사리 매달려 가는 것 같다.

이 안장 높이는 말의 키만큼 높다. 또는 가마를 타고 다니는데, 시종들이 소리쳐서 사람들을 비켜나게 한다.

조랑말 다음으로 서울 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짐승은 잘 생긴 황소이다.

황소들은 땔감 나무를 산더미처럼 지고 가며, 기이할 정도로 온순하다. 조랑말을 제외하면 짐을 운반하는 짐승이 황소뿐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우 소중히 여기며 그만큼 값도 비싸다. 거리의 어디나 아이들이 득실거리는데, 하수천에서 노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어린 아이들은 분홍색이나 밝은 색 옷을 입고 다니며 장방형의 채색한 연을 날리며 놀기도 하는데, 이 연은 조선 특산의 훌륭한

유지로 만든 것이다. 연날리기 시합은 자기 연을 다른 사람의 연에 엉키게 해서 상대의 줄을 끊는 것이다.

또 다른 오락은 돌팔매질이다.

서울은 5개 구역으로 또는 부락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들은 넓은 터에서 치열한 투석전을 벌이며 진퇴를 거듭한다.

이 시합은 광포해서 흔히 목숨을 잃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데, 문명이 진보해도 흉포함은 별로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

하기는 이렇게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오락도 예전보다는 인기가 덜하다고 한다.

이것은 아직도 영국의 한두 마을에 남아 있는 관습인 축구 시합과 비슷한 점이 있다.

이 축구 시합은 마을의 양측 중간에 큰 길에서 벌어지는데 아무나 참가한다.

◆ 보신각종 ◆
조선은 여러 차례 침략과 약탈을 당해서 수도나 그 인근에 볼 만한 고적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런대로 남아 있는 것을 몇 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두 개의 주도로 교차점에 종각(鐘閣)이라고 부르는 정자가 있다.

종각이란 종이 있는 건물이란 뜻이며, 나무로 된 창살 속에 유명하고 오래된 청동제 종이 있는데, 이것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종이라고 한다. 특별히 뛰어난 종은 아니며, 1468년 태조 대왕이 건립했다는 각자(刻字)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이것을 시카고로 가져가려고 했다고 한다.

매일 저녁 7시와 9시 사이 성문을 닫기 전 몇 분 동안, 그리고 일출 전 3시와 5시 사이, 또는 화재가 난다든지 하는 특별한 경우에

나무 대들보로 타종을 하기 때문에 이 종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이다.

종각으로부터 뻗어나간 길을 종로(鐘路)라고 한다.

◆ 상점들 ◆
종각 부근에는 현재의 왕[역주: 고종]이 성년이 되기 전 나라를 다스렸던 섭정 대원군이 1866년 모든 기독교인을 척살하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비석을 세웠는데, 이것은 1883년에 와서야 철거되었다.[역주: 이것은 필자가 척화비(斥和碑)를 잘못 안 것이다.

척화비는 병인 양요(1866)와 신미 양요(1871)를 치른 후 백성들에게 고하기 위하여 서울 및 전국 요충지에 세워졌다.

그 내용은 "洋夷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 이다. 우리들 자손만대에 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이다.

또한 철거 시기도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어 간 1882년임.] 그 바로 옆에 서울에 단 하나뿐인 2층 상점들이 있다.

 이것은 왕의 소유로 조선의 여섯 개상인 조합에게 세를 준 것이다.

이 상인들은 중국산 비단이나 조선산 무명·모시·삼베 등의 옷감과 조선산 종이 장사를 총괄하는 대가로 상당한 세금을 낸다.

상점들은 중앙의 좁은 통행로를 향해 열려져 있다.

그러나 진열된 비단 ·무명·무늬를 넣은 천·중국 신발·조선 종이·청동 그릇 따위는 외국인에게 별 매력이 없다.

외국인이 좋아할만한 것은 길거리 노점상에 쌓여 있는 고물들 중에 있을 것이다.

◆ 석탑과 비석 ◆
보잘 것 없는 오두막집 뒤뜰에는 많이 손상이 되었지만 정교하게 다듬어진 휜 화강암 탑이 있다.

이 탑은 층층마다 좌불상의 모습이 훌륭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맨 위층은 깨어져서 땅바닥에 떨어져 있다.

이것은 300년 전 침략 당시 일본인이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

이 탑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의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700년 전에 조선 왕의 중국인 부인[역주 : 고려 후기에 고려 국왕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였는데 이를 말한다]이 중국에서 가져왔으며 수도 중심에 있었던 중요한 불교 사찰터의 표지였다고도 한다.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거북상이 있으며 그 위에 중국식 기둥이 서 있는데, 화환을 두른 용이 꼭대기에 조각되어 있고, 앞면에는

해독할 수 없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역주 : 삼전도 비문이다].

◆ 사원 ◆
지금의 수도나 그 인근에는 제단이 별로 없다.

토지신을 섬기는 제단이 있는데, 텅 빈 공간의 무대 위에서 매년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중국이나 안남의 셰치탄(She Cghi Tan)과 같은 것이다.

성 안의 동북쪽에는 공자를 모시는 사원이 있다.[역주: 성균관(成均館)을 말함] 이 사원에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고,

학생들과 선비를 위한 큰 집이 있다. 나는 남대문 밖의 전쟁신을 모신 사원을 방문한 적도 있다.

이것은 중국 영웅 중 한 분을 모신 것으로 실제 역사의 인물이었다고 하며 칙령에 의해 성인이 되었다고 한다.[역주: 관운장을 모 신

동묘를 말함] 이것은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이 사원에 있는 인물상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생겼다.

그러나 마당에는 흥미를 끄는 해시계가 있으며 양측의 복도에는 진품인 옛 투구와 갑옷이 진열되어 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기술할

왕의 행렬에서 보는 것과 꼭 같은 것이며 유명한 중국 역사 소설《삼국지》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벽화에 나오는 것과 같다.

◆ 홍살문 ◆
내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 중에 하나는 홍살문이었다.

이것은 왕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30피트 되는 높은 나무 아치 모양으로 왕가의 색인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고, 두 수직 기둥이 꼭대기에서 하나의 수평으로 가로지른

횡목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사이로 여러 개의 위로 향한 붉은 화살들이 고정되어 있었다.

원래 이것은 타타르에서 기원했다고 하는데, 일본의 신도 道) 또는 불교 사찰 이전에 있었던 도리이(새의 집이란 뜻)나 중국의 패루

(牌樓) 혹은 기념 아치와 비슷한 형태이며, 정부와 국왕의 상징이어서 왕궁이나 관아 그리고 왕가가 후원하는 석왕사 같은 절 앞에

세운다.
서울에는 중국 황제의 칙사가 거주하는 남별궁으로 가는 길에 세워져 있는데, 이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우아하며 순수한 중국식 석조

아치가 북경으로 가는 서대문 밖 1마일 지점에 서 있다.

이것은 거문[역주: 迎恩門)을 지칭함.]이라고 부르며 조선 왕이 중국 칙사를 맞이하러 가는 지점을 표시한다.

이 부근에 조선 왕이 중국 황제의 칙사를 기다리는 보가관이 있었다.

조선의 주권을 상징하는 홍살문이나 중국의 영유권을 표시하는 거문 모두 청일 전쟁 후 일본인에 의하여 파괴되었다.[역주: 이러한

일본의 행위는 조선에 있어서 청의 종주권을 애써 부인하는 노력의 일환임.]이러한 행위는 수치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우상파괴적 행동일 뿐이다.

◆ 채색한 부처 ◆
홍살문을 지나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3마일 정도 가면 15피트나 되는 거대한 불상을 만난다.

이것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로 몸통은 흰색이지만 눈·입·귀 그리고 머리치장은 색칠을 하여 놓았다.

거기에 화려한 지붕의 사원이 불상 전체를 덮고 있다. 불상의 한 손은 위로 치켜져 있고 또 다른 한 손은 옆구리에 놓여 있다.

◆ 형장 ◆
사형 집행장은 남대문 밖 부근에 있다. 참수당한 목이 없는 죄인의 시체나 몸통 없는 목이 3일 동안 방치된다.

서양으로부터 양식(洋食)같은 문물이 전파됨에 따라 형장을 수도에서 조금 더 떨어진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은 몇몇 죄인의 형이 집행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림으로 그리기까지 하였는데 큰 칼로 여러 차례

내리쳐야 목이 떨어진다고 한다.

◆ 왕의 피난지 ◆
그 외 서울 주변에서 언급할 만한 것은 북산과 삼각산에 있는 왕의 피난지이다.

이곳은 성벽으로 둘러쌓아 요새화한 곳으로 승병이 지키고 있다.

외적의 침입이나 혁명 등 위난시에 왕은 이곳 중 한 곳으로 도피하며 오랜 기간 머물 것에 대비하여 식량을 비축해 두었다.

가장 가까운 곳은 11마일 거리에 있으며 북한산성이라고 부르는데, 성벽의 둘레가 5마일이나 된다.

이곳보다 더 큰 곳은 16마일 떨어져 있으며, 성벽의 둘레가 7마일이나 되는 남한산성이란 곳이다.

◆ 조선의 주권 ◆
관리와 관리가 되려는 사람들·상인·사교 생활·사업·고용·휴식 등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수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서울이 왕국의

중심인 것과 같이 수도의 모든 생활은 왕과 대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외부 세계에서 보면 왕은 잘 알려지지 않은 별 중요성이 없는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민들에게는 절대적 존재이다.

과거 중국이나 중국의 속국에서는 왕은 하늘이 낸 사람이며 하늘의 아들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늘의 왕치고 조선의 왕처럼 무력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의 눈에는 이런 것들이 자신들의 왕의 위엄을 조금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예부터 내려온 엄격한 예절에 따라 왕의 위엄은 일반인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분위기 속에서 유지되었다.

다행히 조선의 경우 중국과는 달리 왕의 권위가 지난 20년 동안 많이 손상을 입어 외국인에게 쉽게
알현을 허락할 정도까지는 되었다. 가까이 접해 보면 조선 국왕은 친절한 사람이며 그의 동포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사람이며,

어떤 면에서는 더욱 인간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 궁궐들 ◆
서울에는 여러 개의 궁궐이 있다. 그 중 하나인 남궁은 남대문 부근에 있는데 결혼식을 거행하는 곳이며 때로는 왕이 거주하기도

했었다.

서대문 부근의 남별궁은 전쟁 이전까지는 중국 칙사의 숙소였다.

세 번째로 북쪽에 있는 운현궁은 이전에 현 왕의 부친이며 섭정을 했던 대원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현 왕이 미성년이던 동안 실제로 왕위를 찬탈한 셈이며 선교사를 고문하여 죽이고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그의 야만적이고 반동적인 정책은 외국 열강들로 하여금 이 나라를 개국하도록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역주: 쇄국 정책을

실시했던 대원군에 대한 저자의 감정이 부정적임을 드러내고 있음]

◆ 동궁(東宮)또는 새 궁궐 ◆
왕족들이 거처하는 곳은 지금까지 언급했던 궁궐들보다 훨씬 더 큰 두 개의 궁궐 중 하나이다.

각 궁궐의 유구한 역사에 대한 설명은 가지각색인데, 아마도 전 거처를 보수하기 위하여 왕이 현재 임시로 머물고 있는 거처가 새

궁궐일 것이다.

두 궁궐은 대단히 넓은 터에 함께 자리잡고 있으며,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큰 대문을 통해 출입하고, 서울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궁궐 경내에는 수백 평의 비경작지가 있는데 그곳은 키 작은 관목림이 원뿔형의 층을 이루면서 북쪽 언덕 꼭대기까지 타고 올라가서,

그 뒤의 가파르게 우뚝 솟은 산봉우리까지 이르고 있다.

실상 두 궁궐 중 동편에 있는 새 궁궐은 약 400년 전 세자의 거처로 지은 것이다.

동궁(東宮)은 열세 개의 문과 산책로와 정원이 있는 방대한 토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연못들과 교각들과 하절기의 별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 황이 왕위 계승 직후 거주했던 이 궁궐은 1882년에 일부가 소실되었으므로, 재건한 후 다시 입주를 하였는데, 1884년 반란시

거의 황폐화되었고, 내가 서울에 있던 1892년에는 주인이 없었다. 세자가 현재 거처하고 있는 곳의 천장에서 뱀이 떨어져 왕이 다시

이 궁으로 옮기리라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재원의 부족으로 현실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왕은 이미 이 궁궐과 현재 거처하고 있는 궁궐의 뒤뜰을 연결하는 내부 통로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 서궁(西宮)또는 옛 궁궐 ◆
조금 서쪽에 위치하며 현재 본 궁궐로 쓰이는 경복궁은 지은 지 500년이나 되었으므로 지금은 낡은 건물이다.

그것은 대궐로라고 알려진 넓은 통행로의 끝에 서 있으며, 길의 끝에는 두 개의 층으로 지붕을 해 덮은 육중하고 거대한 돌대문으로

꽉 들어차 있다.

대문 밖 받침대 위에는 두 마리의 괴이한 돌사자상이 버티고 서 있고, 진입로에는 열 여덟 개의 나지막한 돌기둥이 양측에 서 있다.

대문의 누각 아래에 있는 세 개의 원형 출입로는 가각 다른 색으로 채색된 조각들로 장식된 문이 닫혀 있다.

가운데 문인 도화문은 왕이 출입할 때와 외국 전권 대사가 신임장을 제시하러 출입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 두 개의 문은 일반적인 통행을 위한 것으로 관리·가신·병사·대신·비서·하인·파발 전달자·궁궐 식객 등 모든 종류의

사람들로 붐빈다.

왕족은 5백 명의 근위대를 거느리고 있으며 그들을 제외한 평화시의 전 병력인 4천 명의 수비대는 궁궐 밖의 막사에 주둔하고 있다.

궁궐 내에는 이들 말고도 약 2천 명의 식솔이 더 있다고 한다.

◆ 알현실 ◆
경복궁 내로 들어서면 출입로 끝에 나지막한 건물로 둘러싸여 있는 포장된 넓은 뜰이 있다.

그 중 두 번째 뜰은 상당히 큰 사각형 건물과 이어져 있으며, 그것의 위쪽 끝에는 전체가 하양 화강암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쪽으로 세 겹의 계단 위에 두 겹의 테라스가 있고, 그 위의 한가운데에는 왕족이 타는 가마가 놓여 있다.

이곳은 대알현실로서 왕의 탄신일이나 정월 초하루, 그리고 기타 기념일에 멋진 장관 연례 접견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 건물은 쌍둥이 지붕이 덮여 있고, 전체가 목재로 건축되었으며, 깊게 조각된 창살 모양의 천장은 적색·남색·녹색으로 칠이 되어

있고, 윗부분은 붉은색 밑부분은 흰색으로 칠해진 웅장한 원형 기둥과 지주가 떠받치고 있다.

문을 향하고 있는 고상한 주홍빛 단(壇)을 제외하면 이 방은 휑하니 비어 있는데, 단은 여섯 개의 계단으로 높여져 있고, 그 위에는

아름답게 조각 된 주홍빛과 검정빛의 구멍난 목재 병풍이 펼쳐져 있으며 그 앞에 왕의 옥좌가 있다. 여기 에 앉아 왕은 열린 문을 통해

건물 밖 두 층의 테라스와 서열에 따라 양편으로 세워진 열두 개의 기둥인 품석(品石)이 있는 사각형 뜰을 내려다본다.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군주의 위엄 있는 자태를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장엄하면서도 지독히 단순한 양식의 이 근사한 알현실의 발상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Darius) 시대에서 나스레 딘샤(Nasr-ed-din

Shah)시대에 이르는 탈라즈(The Talars) 혹은 공식 알현실의 전통과 놀랍게도 흡사하다.

여기에서 연출되는 장관은 내가 나중에 후에(Hue)에서 쓸 후속 작품에 묘사할 내용처럼 동아시아에 그대로 살아 남은 몇 안 되는

구경거리 중의 하나이다.

◆ 여름 궁궐 ◆
여기에 연결되는 궁궐 하나는 여름 궁궐로서 12피트 높이의 석주 48개가 떠받치고 있는 연못의 한가운데의 누각이다.

'진창궁' 또는 '근면실'(勤勉室:영혼이 떠나는 방}, '재궁' 또는 '금식실(禁食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왕과 후궁들이 거처하는 건물의 뒤에는 꽤 많은 작은 별궁과 간이 건물, 누각이 밝은 색으로 장식된 채 환상적이고 우아한 모습을

띠고 있다. 새롭고 값비싼 발명품을 좋아하는 동양적 습성을 가진 왕의 지시에 따라 여기에 전기가 가설되었다.

그러나 곧 실패로 끝났다.

1893년 미국으로부터 발전기를 통째로 수입한 미국 기술자와 별개의 계약을 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들 중 한 곳에서 나는 왕을 알현한 적이 있다.

◆ 조선 국왕 ◆
조선 국왕인 이희[李熙: 아명은 命福]]는 이씨 왕조의 28대 왕이다.

그는 1864년 대를 이을 자손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난 숙부인 이변의 왕권을 이어받았으며 그 자신도 손이 없었던 선왕 이환(李奐)

의 조카이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당시 12세였던 어린 소년을 후계자로 임명했으며, 그를 왕권을 계승하지 못했던 세자 이호의 미망인이었던

고조할머니 대비 조씨에게 입양되도록 하였다.

조 대비는 1890년 타계하였다.

◆ 대원군 ◆
그는 한 국내 작가에 의해 '쇠로 된 창자와 돌로 된 심장을 가진 인물'이라고 적절히 묘사된 바 있다.

1873년 왕이 전권을 장악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대원군은 보수 세력과 반항 세력을 결집하여 모든 조약과 외세에 저항하기도 하고,

때론 타고난 재주를 십분 활용하여 현 왕과 왕비를 축출하고 자신의 친족 중 말 잘 듣는 자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획책하기도

하였다.

1876년 자신의 또 다른 아들을 왕위에 세우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그 불행한 청년은 사약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원군은 시대를 앞선

능력을 발휘하여 폭탄이 든 고급 사탕과자 상자를 승리감에 도취된 적들에게 보내서 보란 듯이 그들을 제거해 버렸다.

이 어린 군주를 제쳐두고, 왕권은 소년의 아버지이자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인 이하응(李昰應)이 섭정을 하였고, 그는 그의 지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휘둘렀다.

섭정자로서, 대원군이란 이름으로서, 그리고 대궐 총수로서 그는 1864년에서 1873년까지 이 왕국을 혹독하게 다스렸다.

그가 바로 기독교 선교사들의 박해와 실패한 1866년 프랑스 조선 원정[역주: 병인양요를 말함]의 원인 제공자이다.

결국 외국 열강이 합세하여 굴복시키고 말았지만, 그는 광적으로 척양이운동(斥洋夷運動)을 벌인 인물이다.

1882년 일본이 고종을 납치하고 명성왕후 암살을 시도하다가 일본 대신 하나부사와 그의 군대가 제물포까지 퇴각하였을 때,

대원군은 잠시 동안의 소강 상태에 빠진 일본 대사관을 상대로 첫 번째로 폭동을 사주하였다.

거기에서 하나부사 일행은 영국 군함에 의해 구출되었는데, 곧 다시 나타나 즉각적인 거대한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배상금 협상이 지연되는 동안 중국 황제의 손상된 종주권을 재확립할 기회를 포착한 중국 총독 이홍장이 등장하여 사태를

수습하였고, 대원군 자신은 중국으로 납치되어 보정부(保定府)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1884년 그의 부재 중에 같은 성격의 두 번째 반란이 서울에서 일어났고, 고종은 내시의 등에 업혀 서울 외곽에 있는 청나라 진영으로

도망치는 불미스러운 행동을 하였다.

사태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자 고종은 대원군의 능력이 내정 수습에 필요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청나라에 대원군의 귀환을 요청했다. 이들 부자간의 관계를 고려하건대 고종의 선택은 성공적이라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1892년 여름 대원군의 정적들이 대원군을 폭사시키려는 기도가 있었지만 폭약을 잘못 사용하여 폭약이 방의 중앙에서

터지지 않고 방 한 구석에서 터져 대원군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들은 고종은 아버지의 기적적인 회생에 대해 어떤 감정의 표현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효를 최고의 의무로 여기는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참으로 별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대원군은 나이가 74세이지만 건재하고, 거듭된 좌절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굴함 이 없는 활력을 보이고 있다.

1894년 일본과 중국의 적대감이 불붙기 직전 일본은 대원군의 영향력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심산으로 그를 개혁 심의

감독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최악의 반일 감정을 표출하였고 직책에서 해고되었다.

그는 자신의 자유로움을 이용하여 왕과 명성왕후를 상대로 새로운 음모를 꾸몄던 것 같은데, 그 자신은 처벌을 면했지만 소자가

체포되어 1895년 10년 간의 유배에 처해졌다.

짧은 기간 정계를 은퇴한 후 내가 이 장을 출판사에 넘길 즈음인 1895년 그는 다시 왕의 근위병을 매수한 후 다수의 일본인을 궁궐에

침투시켜 명성왕후를 살해[역주: 필자는 명성왕후 시해 사건을 대원군이 주도한 것으로 잘못 기술하고 있음]하여 거듭된 자신의

실패를 만회하였다. 그는 다시 한번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왕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일본이 연루됐다고 알려진 이 수치스러운 사건[역주: 을미사변을 지칭함.]은 앞으로 조선의 운명을 바꿔 놓은 계기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엄청난 사건들과 연관된 대원군과 함께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대원군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그가 직접 그리고 직접 서명한 멋들어진 수묵화 한 점을 소장하고 있다.

◆ 왕의 통치 ◆
1882년과 1884년에 있었던 민중 운동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궁중 음모의 형식을 띤 두 번의 반란을 제외하면, 왕은 1894년까지 20년

간 특별한 위협이나 위기 없이 왕권을 지켜 왔다.

이 두 사건의 외적 징후는 서울에서 가장 인기 없는 일본 대사관에 대한 공격이었지만, 사건 주모자들의 실제 목적은 왕을 상해함이

없이 체포하는 것이다. 왕의 옥새와 서명은 반란에 성공한 파당들이 갈망하는 합법성을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두 번의 반란은 어느 경우도 왕의 목숨을 노린 것이 아니었으며, 왕을 좌지우지하는 자들의 영향력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1894년 2월 왕조의 위패를 모신 절을 참배하기 위한 왕의 행차 도중 왕과 세자, 그리고 조정의 중요한 대신들을 폭살시키고자 하는

음모가 발각되었다.

그러나 조선판 가이 폭스[Guy Fawkes,, 역주: 영국에서 가이 폭스(1570∼1606)가 일으킨 의사당 폭파 음모 사건을 지칭함.

영국에서는 거사일인 11월 5일을 그의 이름을 따서 '가이 폭스의 날'이라고 부르기 도 함]사건의 진짜 목적이 무엇이며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항간에는 대원군이 2년 전 자신에게 가해졌던 폭탄 테러에 대해 보복 행위를 한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했었다.

이 음모는 왕이 최악의 굴욕적 상황에 처하게 되고, 군주로서의 지위는 유명 무실한 가장 서글픈 왕위의 보유자로서 전락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 조선 왕의 성품 ◆
조선 왕은 매우 온후한 성격을 지녔다.

그의 인간적 매력이나 태도에 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는 부친인 대원군처럼 완고한 성격을 갖고 있지 않지만 동시에 결연한 성품도 물려받지 못했다.

군주로서의 엄격한 훈련과 왕가의 전통을 이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그는 그가 처한 어려운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고, 변덕스런 자신의 정책과 결단력이 부족한 행동에 대하여 구구한 변명을 해야만 했다.

일본인이 조선에 들어 오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민족과 자신의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발견이나 새로운 문물의 발명에 대하여 예민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과 조선 양국 모두 금세기 후반에 이르러 평범한 군주의 통치하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을 겪었다고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 명성왕후 ◆
왕비는 궁궐만이 아니라 조선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민씨 가문의 소생이었고, 그 가문은 구체제하에 궁궐과 조정의 거의 모든 요직과 이권을 점하면서 권력의 상승세를 탔으므로

시기와 모함의 대상이 되었다.

곳곳에 왕비와 내통하는 첩자가 깔려 있다고 하며 그녀가 모르는 어떠한 일도 성사되는 법이 없다고 한다.

대원군의 권세는 그녀의 이러한 전능한 영향력에 반하는 것이었다.

왕을 그대로 두고는 그녀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으므로 일본은 우선적으로 민씨 일파를 완전히 축출하였다.

모든 부분에서 민씨 일파가 불명예스럽게 퇴진하였고 좀더 고분고분한 세력으로 대체되었다.

그러자 명성왕후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에 대항하였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최근에 벌어진 명성왕후 시해라는 극단적인 폭력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 세자 ◆
1873년 명성황후의 소생으로 태어난 왕의 큰아들 이척이 후계자인 세자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 좀 모자라고, 스스로 가족을 거느릴 능력도 없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궁중에서의 위치는 본래 세자가 갖는 것보다 낮았다.

따라서 때때로 왕과 한 후궁 사이에 태어난 그의 이복형이 관심의 초점이 되기도 했었다.

이 후궁에 대하여는 추후 더 이야기할 것이다.

당분간 세자는 계속 그 지위를 유지할 것이고,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괴로운 허깨비 역을 담당할 것이다.

◆ 조선의 군주제 ◆
이론상 조선의 군주제는 절대적이고 세습적이며 신성하다. 왕은 백성의 생명과 재산과 그의 왕국 내 전 재화의 주인이다.

그는 모든 관(官)을 자신의 휘하에 두고 있으며 그의 말은 곧 법이다. 그에게 모든 관의 부속물이 집중된다.

그는 최근까지 대 중국 관계에서 구차한 영주에 지나지 않았으나 자신의 영내에서는 최고의 권력자였다.

조선의 개방은 특이하게도 신성불가침한 왕권에 대한 타격을 감수하지 않고는 불가능했고, 다수의 저술가들은 이 왕권에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 왕권은 서구의 경험에 영향을 받아 조금은 겸손해진 왕권의 개념으로 위축되고 말았다

◆ 외국 사신 접견 ◆
왕을 알현하기 전 나무 외무 대신을 먼저 만났다.

그는 멋진 검정모자를 쓰고 있었고, 선량하고 졸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불룩한 뺨, 성긴 회색의 콧수염과 턱수염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와 나누었던 질문과 대답 몇 가지를 기억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나이가 젊다는 것이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가 "몇 살이냐?"고 직선적으로 질문을 했을 때 서른 세 살인

나는 주저하지 않고 사십이라고 말했다.

그는 "원, 저런! 나이에 비해 퍽 젊어 보이는군. 어째서 그렇지요?"라고 다시 물었다.

나는 "제가 당신 나라의 좋은 기후 속에서 한달 이상 여행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내가 영국 장관으로 봉직한 일이 있다는 것을 듣고 있던 터라 나의 봉급이 얼마 였었는가를 물었으며, "나는 귀하가 관직의 가장

기분 좋은 점이 봉급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짐작하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부수입이 그보다 더 컸으리라는 거요."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조선에서는 왕과 왕비의 친족이 아니면 조정의 일원이 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당신은 여왕 폐하의

가까운 친척이겠군요."라고 말했다. 나는 "여왕의 친척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의 안색에 불쾌한 표정이 스쳤으므로, 나는 "저는 아직 결혼을 못했습니다."라고 슬쩍 화제를 바꿔서 그 노인의 호의를

완전히 회복했다

◆ 관복과 조정 내의 예의 범절 ◆
조정에서는 의복과 품행과 거동·걸음걸이 등 모든 것이 섬세하고 엄격한 예법에 의해 통제된다.

한번은 영국 영사가 그의 제복을 싸들고 평상복으로 입성했다는 이유로 왕의 알현이 거부된 적도 있었다.

중하위급 관리는 주홍색·청색·황금색 같은 밝은 색깔의 관복을 입으며, 대신과 주요 관직에 있는 이들은 보다 고급스럽고 차분한
느낌이 드는 짙은 남색이나 암갈색의 수입 비단으로 만든 관복을 입는다.

관복의 흉부에는 호랑이·나무 또는 다른 상징적인 동물을 거칠게 수놓은 복갑(腹甲)이 찍혀 있으며, 허리를 빙 둘러 금·은·옥·상아

등으로 다양하게 장식한 넓은 허리띠를 감는데, 그것은 마치 맥주통의 테두리처럼 그것을 맨 사람으로부터 몇 인치나 쑥 내밀고 있다.

머리에는 전에 기술했던 대로 날개가 달린 삼중관을 쓴다.

'양반 걸음'이라는 점잔을 빼는 특이한 걸음걸이는 대신이나 왕족이 대중 앞에서 걸을 때 취하는 행동이다.

그것은 매우 계산적으로 보폭을 크게 하며 느리게 움직이는 것인데, 묘사하기는 힘들지만 분명히 우스꽝스럽게 모체를 흔들며 걷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양반이 자신의 품위를 나타내는 주된 방식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것인 듯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게 때문에 남의 도움 없이는 아마도 땅에 쓰러질지도 모른다.

따라서 대신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한 명 내지 두 명의 수행원에게 의젓하게 부축을 받으며 아주 천천히 점잔을 빼며

걷는다.

말을 탈 때도 가신이 달려와서 안장에 앉는 것을 도와 주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내무 대신과 외무 대신이 근엄하게 나를 왕에 인도했고 나는 갑자기 멍한 상태가 되었다.

그들은 내게서 물러나 왕을 향해 머리를 땅에 조아렸다.

◆ 국왕 알현 ◆
왕은 밝은 분위기의 조그만 궁전에 서 계셨다. 그 방은 궁궐의 작은 뜰을 향해 열려 있었다.

그는 고급스런 중국 자수가 새겨진 책상보로 반쯤 덮인 흉칙한 벨기에산 책상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내시들이 모여 있었고, 바로 옆에는 통역관이 최대의 공손함이 밴 태도로 어깨와 머리를 조아리며 그가 귀에 속삭이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양편으로 왕의 검을 받드는 사람들이 정렬하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대신들이 기립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2단으로 된 보랏빛 관을 쓰고, 왕의 고유색인 주홍빛 비단으로 만든 도포의 어깨부분과 흉부에 황금수를 놓은 네모꼴 헝겊을

대고, 허리에 금을 박은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의 체구는 작고 안색은 나빠 보였다.

머리는 앞 이마로부터 단단히 틀어올린 후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눈썹은 숱이 적고, 총기 있는 작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빨은 구장잎을 씹은 결과로 색이 변해 있었고(그는 나와 면접하는 동안 내내 구장잎 한조각을 씹고 있었다)성긴 콧수염과 턱

밑으로 황제 수염이 있었다. 그러나 표정만은 유난히 부드럽고 명랑한 편이었다.

그가 전적으로 진행한 20분 동안의 접견 과정에서 그는 영국의 우정과 배려에 대해 생동감 넘치는 관심을 표명했으며, 서울에서

여왕을 대신하여 유능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는 힐리어(W.C. Hillier)의 공로를 개인적으로 치하했다.

왕을 알현한 후 나는 다른 궁으로 안내되어 비슷한 절차로 세자를 알현했다.

그의 수석 내시에 의해 통역된 그의 질문과 발언은 전혀 흥미롭지 않았으며, 그 면접은 단지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 왕의 행차 ◆
조선 궁정의 진수는 왕이 이따금씩 위풍당당하게 서울의 거리를 지나 사찰이나 능에 행차하는 행사에서 볼 수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병사들이 거리를 수비하였는데, 이런 군대는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희한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노변에 열지어 있는 보병은 대부분은 땅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고 사람 수보다 많은 깃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구식총은 쇠공이·방아쇠·금속판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며, 어떤 것은 그것들 중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줄로 그것들을

동여매두었을 뿐이었다. 총검은 구부러졌고 녹이 슬어 있었다.

보병보다 더 기막힌 것은 기병대였다. 그들은 300년쯤은 되었음직한 낡은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부서진 투구와 창, 두꺼운 가죽

조끼 위에 걸쳐 입은 청동 장식을 한 검은 가죽 동체 갑옷, 그리고 좀이 슨 무늬가 있는 옷 등을 입고 있었다.

일반 병사의 행색에서 거대한 군화를 빼 놓을 수 없는데, 그것은 가끔 신는 것으로 크기가 열한 뼘이나 되어서 군마에 오르기조차

힘들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들은 끝부분에 꿩의 깃털이 달려 있는 노랑·빨강·녹색의 깃발을 가지고 있었다.

화살 꾸러미는 장교의 전방에서 운반되었으며, 장교들은 시종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피라미드 모양의 안장에 올라탔다.

왕의 행차시 도로의 중앙은 비워 놓아야 했으며, 모래를 뿌려서 모랫길을 맞들어 놓았는데, 그 폭은 약 60센티미터 정도 였다.

그러나 모랫길은 모래 가 뿌려지자마자 곧 밟혀서 흐트러져 버렸다.

대신·조신(朝臣)·관리들이 아침 내내 이 길을 따라서 대궐로 오고 갔다.

이들은 대부분 사방으로 터진 가마 위에서 표범 가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가마는 길을 비키라고 외쳐대는 가신(家臣)들이 메고 갔다.

어떤 가마는 밑에 달린 다리 하나에 의자하고 있거나 수레바퀴 한 개에 닿아 있기도 했는데, 그것은 도로의 중앙을 따라 달릴 때

가마꾼이 속도를 내는 데 용이하게 하였다.

일부 관리는 판지(板紙)로 만든 번쩍이는 투구를 쓰고 있었고, 등에는 한자로 무엇인가를 써서 달고 있었다.

종주국을 대표하는 중국의 총독 대리는 주요 인물로서 붉은 술이 달린 모자를 쓴 튼튼한 중국인들이 메고 있는 검은색 벨벳 천의

가마를 타고 재빠르게 지나갔다.

길 양쪽에 구경 나온 흰옷의 군중들은 총을 가진 병사들에게 가옥 쪽으로 떠밀리거나, 길잡이 주자들이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나무

막대기에 볼기를 맞기도 하였다. 한번은 군중의 무리가 왕의 행차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고초를 당했고, 일을 잘못 처리한 병조

판서는 3개월치 봉급을 감봉 당했다는 공시문이 관보에 실리기도 하였다
수 시간 후 이윽고 대궐문이 활짝 열렸다. 시장이 열리는 날 런던의 외곽 지역이나 드루어리 가(Drury Lane)의 성탄절 팬터마임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다채로운 행렬이 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존경할 만한 구식총을 집어들거나 왜소한 군마에 올라탔다. 깃발이 올려졌고 길을 따라 색색의 물결을 이루었다.

첫 번째로 주홍빛 칠을 한 가마를 운반하는 빨간 모자의 가마꾼 부대가 나왔고, 파란 악대의 무리가 뒤따랐다.

그러자 황금빛 비단 위에 거룩한 용의 문장으로 꾸며진 왕의 깃발이 나타났고, 이내 북소리가 울렸으며, 침묵하라는 외침소리가

들렸다. 무리 중앙에는 붉은색으로 칠한 한 개의 빈 가마가 공중에 들려 있었다.

이것은 설명이 필요한데, 우선 하나는 과거 왕족이 일반 사람의 눈에 뜨여서는 안 된다는 법도가 엄격히 지켜지던 때에는 행차시

똑같이 생긴 가마를 두 개 사용하여 어느 쪽에 왕이 있는지 모르게 했다고 한다.

이것은 러시아 황제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를 분쇄할 목적으로 빈 기차를 앞세우거나 뒤따르게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 다른 설명에 따르면 첫 번째 가마를 일부러 비워서 왕손을 잡아가려는 악귀의 공격을 따돌리기 위함이라고 한다.

또 빈 가마에 왕가 선조의 위패가 모셔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이어서 황금빛 도포와 작은 짚모자를 쓰고, 머리 양쪽에는 예쁜 꽃 장식을 한 시종들의 행차가 나타났다.

북치기들은 현란한 장식음의 궁중 음악을 연주했다.

기병대는 질서를 지키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했으며, 포병은 작은 두 개의 캐틀링 총을 늘어뜨린 채 조금 떨어져 걷고 있었다.

길잡이 주자들은 파랑과 녹색이 섞인 얇은 옷을 입고 종횡무진 길을 휘젖고 있었으며, 피리 연주자는 날카로운 음계의 단음을

씩씩하게 불어댔다.

서두르는 발자국 소리와 길을 비키라고 외치는 소리 속에서 붉은색의 두 겹으로 된 모자를 쓰고 재빠르게 달리는 억센 가마꾼 부대에

의하여 옮겨지는 붉은색과 흰색의 비단 휘장과 수술을 내린 천장이 있는 위엄 있는 가마 속에 몸을 의지하고 앉아 있는 이가 바로

임금이다.

좌우로 살피는 임금은 가마꾼의 동작에 따라 몸이 이리저리 쏠리기도 한다.

그 뒤 약간 떨어진 곳에 세자의 행차가 따르고 있었는데, 그 광경 역시 장관이었다. 그 뒤로는 각양각색의대신들·장수들· 대령·

화승총잡이, 그리고 아장아장 걷는 기사들이 뒤범벅이 된 채 따르고 있었다.

행렬의 맨 뒤에는 발을 맞춰 행진하려고 노력하는 유럽식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 있었다.

그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은 목청껏 통솔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어깨 위에는 엄청나게 큰 깃발이 메어져 있었다.

어스름한 저녁때가 되었을 때 나는 이 행차가 귀환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모든 것이 좁은 도로에 한꺼번에 완전히 뒤섞여 무엇도 구별이 불가능했지만 사람들 머리 위로는 임금의 주홍빛 가마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남빛과 선홍빛의 비단 초롱을 밝힌 채 보병의 창 끝을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 조선의 군대 ◆
이미 살펴본 대로 조선의 군대는 개혁되지 않은 조선 군주의 가장 덜 부패한 부속물은 아니었다.

외국인에 의해 훈련된 보병 연대는 4천명의 건장한 군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훈련과 기율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1884년 갑신정면 때까지는 일본인에 의해 훈련을 받았으나, 그후 그들은 전쟁청의 부사령관과 고문이라는 어마어마한 명칭을

가지고 있는 두 명의 미국인 훈련관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휘권이 없었으며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았다.

병력은 세 개의 대대로 나뉘어 있었고 다양한 종류의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조선인 장교들은 하잘 것 없는 꼴이었다.

서울에는 기기국이라는 외국 무기를 저장하는 무기고가 있었으나 단지 무기를 수선하는 데 사용되었다.

순수한 조선국의 연대들은 상비군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우스갯거리였다.

유럽이라면 조선의 기마병은 어렵사리 지방의 2류 팬터마임극의 단역으로서의 역할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전투력 점검
20년 또는 30년마다 한 번씩 서울 밖의 야전장에서는 전군의 전투력을 점검하였다.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자주 점검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광경은 왕의 행차보다 더 볼 만하다.

1894년 여름 이 점검이 실시되었다.

아침 9시에 점검이 시작된다고 발표되었으나, 3만의 관중이 오후 5시까지 왕의 행차를 기다려야 했다.

이 행차는 만 명 정도의 사람으로 구성되었고, 왕과 세자가 그들 중앙에서 말을 타고 있었다.

7천 내지 8천 명 가량의 병사들이 열병식을 하면서 경례 대신 땅에 닿게 그들의 몸을 굽혀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이 점검은 매우 불만족스럽다고 평가되었으므로 군대 내에는 대단한 동요가 있었고 연대장은 직위 해제되었다.

그러자 현대식으로 훈련된 군대에 대해서도 점검을 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현대식 군대에 대한 점검을 하기도 전에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졌다.

조선은 자신의 군대에게 전쟁놀이를 위한 놀이터를 제공하는 대신 다른 나라의 야욕으로 인한 전쟁터로 변해 버렸던 것이다.

백년 전의 여행, 백년 후의 교훈(원제목은 Problems of the Far East)은 19세기 영국의 저 명한 정치가였던 커즌(George Curzon)이

1894년 경 중국, 조선, 일본을 방문하고 쓴 책이다.

조지 커즌은 영국이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던 시절에 초고의 배경을 갖고 엘리트 코스를 달린 인물이었다.

유서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이튼 고교를 나와 옥스포드의 발리올 (Balliol)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연구와 현지 답사를 통해 아시아 전문가 가 되었다.

30대 중반에 결혼했는데 신부는 큰 재산을 물려받은 미국의 미인 메리 라이터였다.

27 세에 하원 의원이 되었고35세에 외무차관, 39세에 인도 총독이 되었다.

1919년 외무부장관 을 역임하여 화려한 공직 생활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커즌은 평생동안 대영제국의 신봉자였다. 그가 동아시아에 흥미를 가진 것도 이러한 그 의 성향과 관계가 있다.

그의 관찰은 편견이 있어도 날카로운 편이며 특히 미래에 대한 전 망은 상당히 정확한 것이었다.

백 여년 전 그가 조선을 관찰하여 기록한 내용은 지금 우리 한국인에게도 '그 당시 조선이 이러했구나' 하는 생각을 줄 만큼

정보로서의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