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근세조선

중국의 한韓민족 역사왜곡

설레임의 하루 2009. 2. 20. 21:04

*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 삼태극


 

 

 

중국의 고구려역사 귀속(인용글-편집)


중국정부가 고구려가 역사시기에 중국에 귀속되어 있었으며 중국 영토에 건립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글과 기사를 소개합니다


 중국은 한(韓)민족이 건국한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하고 세계에 홍보하고 있으며 그런 계획의 하나로 90년대부터 중국의

학교에서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로 가르치고 있다.


 대륙학자들의 논문과 보고서 일부를 알아 봅니다.


 

김육불

[고구려 일족은 본래 부여에서 나와 우리 중화민족의 일부가 되었는데 오늘날 동북지역에서 가장 오래 된 국가이다]


 손진기의 <동북민족사고>

[예맥족이 세운 부여국 고구려국은 줄곧 한(漢)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일찍이 우리나라의 일부분에 속했다]

[4세기 고구려가 한나라의 낙랑군을 빼앗은 뒤부터 조선반도의 한 나라가 되었다]


 서덕원

[고구려인은 우리나라(중국) 요동지방과 한·조 국경을 이룬 압록강 양쪽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처음에 기씨(箕氏)조선에 속했고 그 뒤

전국시기에는 중국 북방의 연(燕)에 귀속되었으며, 진(秦)이 연을 멸망시키고 만리장성을 요동까지 쌓자 고구려와 기씨조선은 모두

진나라의 요동으로 귀속되었다]


 [한나라 초기 고구려는 계속해서 중국 북방의 제후국인 연(燕)에 속했었다.

현토군이 조선반도 동북부에서 요동지구까지 물러나자 고구려인의 거주지역도 그 관할지역으로 들어갔다]


 [맥족은 고대 조선족의 한 갈래가 아니며 고구려를 건국할 당시 아직 통일된 조선족은 형성되지 않았다.

고구려를 세운 맥인은 당시 중국의 한 민족이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처음 연의 전성기부터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켜 관리를 두고 국경 요새를 쌓았다.

진이 연을 멸한 뒤 요동외요(遼東外遼)에 소속시켰다]


 [중국 고대문헌인 전국책(戰國策)에 조선과 요동은 두개가 함께 나타난 지명이고 당시 조선은 요동을 점거하지 못했다.

일주서(逸周書)에서는 고구려의 선조 고이(高夷)가 예인(穢人), 양이(良夷), 발인(發人)과 함께 나와있고 주(周)의 신속(臣屬)으로

되어 있다]


*예인- 송화강지역

*양이- 대동강지역

*발인- 요녕성 동북부


 이런식으로 말을 하고 BC.3세기 이전부터 동북지역에서 한반도북부지역이 연(燕)나라의 영역에 속하였으며 진(秦)이 6국을

통일하고 다시 진나라의 요동외요에 속하므로 고조선의영토가 아니라고 합니다.


 다만 BC.2세기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연(燕)과 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거느리고 기자조선 영토를 공격하여 점령하였기 때문에

요동태수로 임명했으며 위만을 외신(外臣)으로 국경 밖 오랑캐가 변경을 노략질할 수 없도록 지키게 했지만 모든 동이(東夷)의

군장이 대륙에 들어와 천자를 뵙는 것도 막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주변의 작은 읍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BC.188년 한(漢)나라가 관할하면서부터 BC.128년 한나라가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여 이 지역을 직접 관할하게

되는 60년간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졸본부여(卒本夫余)와 고구려가 고조선의 속국이라는 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고구려는 BC.108년에 정식으로 한나라

현토군의 현이 되었고 졸본부여도 한나라 현토군이 관할하는 범위안에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BC.37년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러 고구려 5부를 통일한 것도 당시 한나라 현토군의 영토에서 진행된 것으로 오늘의 한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합니다.


 고구려는 낙랑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한반도 북부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고 당시 고구려가

일어난 곳은 한반도 북부가 아니고 압록강 이북의 낙랑이 아니고 현토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리고 발해도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흑룡강성 영안현의 동경성, 연길의 서고성, 훈춘의 팔련성을 복원 중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한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동경성- 상경용천부

*서고성- 중경현덕부

*팔련성- 동경용원부


 또 용봉문화(龍鳳文化)는 한(韓)민족의 문화인데 이 용봉문화에 대해서 화하족의 인식을 알아보면 정말 가관입니다.


 용은 은(殷)왕조가 즐겨 사용했던 것으로 동이족의 일파이던 은왕조가 발전시킨 것이고 봉황도 복희가 창출한 동물로서 역시

동이족의 문화로 대륙학계에서도 용봉문화의 원류를 분명 홍산문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홍산문명- 환국과 고조선시대 발해만 서북지역


 하지만 중국은 용과 봉황도 중국땅에서 기원하고 형성된 것이므로 순수 중국문화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비록 동이족에서 기원했더라도 그것이 중국땅에서 발전되었으면 중국문화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서 은왕조의 유민들이 화하족과 함께 동북지역으로 이동하여 고조선이나 고구려에 영향을 주었고 베링해를 건너가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조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용봉문화도 전파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광명일보>의 왜곡기사

광명일보는 중국 공산당 대변지라고 할 수 있는데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라는 글을 요약해서 소개합니다.


 

[고구려역사 연구의 몇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 요약]


고려라고도 약칭하는 고구려는 서한(西漢)에서 수(隋), 당(唐)시대까지 중국 동북지역에 출현했던 변방민족 중의 하나였다.


 고구려는 중국의 중원왕조의 관할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중원왕조와 종속관계로 제약을 받았고 중국 지방정권의 관할에 있었으므로

고대중국에 있었던 변방정권으로 보아야 한다.


 1.고구려는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출현했던 소수민족 정권이다.

 

우리는 고구려가 중국 동북지역 역사에 등장한 변경민족 정권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학자들은 고구려의 기원을 예맥(濊貊)과 부여(夫餘), 고이(高夷), 상인(商人), 염제(炎帝)설을 제기하는데 공통점은

고구려는 주와 진나라 때에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점으로 주무왕이 상나라를 점령한 후 동북지역을 경영했음을 알고

있는데 주나라의 세력 범위는 지금의 동북지역보다 훨씬 넓었다.

 환인현의 태서구와 요산유적, 봉명유적, 집안시의 대주선구와 이도외자유적, 동촌유적, 통화시의 왕만 발발자유적이 고구려가

출현하기 이전으로 하층은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의 문화이고 위층은 한대문화이고 위층은 고구려가 출현한 후의 문화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두번째, 중국학자들과 외국학자들은 대부분 고구려가 BC.37년에 흘승골에서 세워졌다는 견해를 보이는데 요녕성 환인현에는

하고성자(下古城子)와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있다.

 고구려가 출현하기 전 중국의 서한(西漢)은 중국 동북지역에 행정을 펼치고 있었으며 한나라시대에는 현도군,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의 네군이 세워졌는데 동북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이르렀고 현도군의 행정수도가 고구려현으로 이전하였고 고구려현에서

건립한 고구려는 표(表)를 올려 신하를 칭하고 조공을 받쳤다.


 세번째, 한나라부터 당나라까지 중국의 왕조들은 고구려를 변방의 정권으로 생각했다는 점으로 BC.108년 한나라는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사군을 설치해 한반도 중부이북을 포함한 동북지역을 중국의 중원지역과 같은 방식으로 통치하였다.

 한나라로부터 당나라 때까지 중국의 통치자들은 고구려지역을 중국의 영토로 생각해서 수와 당나라의 왕조가 고구려와의 통일을

이룩하려고 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네번째, 고구려 또한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고 중국 중앙왕조의 변방정권이었으며 중국의 중앙왕조에 대해 종속관계를

유지하는 책봉을 받았고 조공을 바쳤으며 인질을 보냈다.

 통전(通典)을 보면 고구려의 왕은 동진(東晉)과 송(宋), 제(齊), 양(梁), 후위(後魏), 후주(後周)시대까지 중국 남북의 두왕조로부터

작위를 책봉 받는 기록이 있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통일하자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에 대해 망국(亡國)의 한을 품지 않았으며 통합된

후에 이름을 남기기까지 했는데 신, 구당서에 천남생(泉男生), 고선지(高仙芝), 왕모중(王毛仲), 왕사례(王思禮), 이정기(李正己)등이

기록돼 있다.


 다섯번째, 고구려는 당 고종 668년 멸망했는데 신당서 고려전에는 당나라가 고구려 난민 69만호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중국학자들에 의하면 30만명이 중원으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신라에 귀의한 사람은 10만 정도였고 말갈(발해)에 의탁한 사람은 10만이고 돌궐로 옮겨간 고구려인은 1만여 명으로 보며 신라로

유입된 고구려인은 반도민족에 융화되었고 나머지 대다수의 고구려인은 한족(漢族)에 융화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방에 등장했던 변방민족으로 보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에 가장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수, 당시기의 고구려는 영토 확장정책을 실시해 한반도에 있는 기타 정권이 중원의 왕조에 조공을 막아서 수,

당왕조로부터의 토벌을 받았고 당나라는 고씨고려를 통일함으로써 고씨고려의 영토는 당나라 안동도호부에 의해 관할되었고

고구려가 관할하던 구역에 중국역사의 지방정권인 발해가 들어섰고 고구려가 관할한 다른지역은 한반도 남부에서 일어난 신라에

귀속되었다.


 이로써 고구려 왕족은 후계자가 끊겼으니 고구려는 나라를 세운지 700년만에 중국 역사발전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2. 왕씨(王氏)고려는 결코 고구려의 계승자가 아니다.

 

 918년 한반도에서 고려라는 이름의 정권이 출현하였는데 통치자의 성(姓)이 왕씨였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를 왕씨고려라고

부르지만 왕씨고려는 고구려하고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왕씨고려는 935년 한반도에 있던 신라를 대치하고 후백제를 멸망시켜 한반도 중남부의 대부분을 통일하였고 왕씨고려의 주민은

신라인 위주로 후백제를 병합하였으므로 신라인과 백제인이 왕씨고려의 주요 주민이 되었다.

 신라인은 한반도 남부지역에 있었던 진한과 변한인이고 백제인은 대다수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마한인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왕씨고려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삼한인(三韓人)이 중심이 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역사서들은 왕씨고려는 삼한의 후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중국학자에 의하면 왕건은 서한(西漢)시절 낙랑군에 있었던

한인(漢人)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한대(漢代) 한반도에서 일어난 마한, 진한, 변한은 신라와 백제로 발전해갔고 백제는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신라는

왕씨고려가 대신하게 되었다.

 그 후에 이조가 왕씨고려를 대신해 최종적으로는 이씨조선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러한 정권들의 강역(疆域)은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중국 사서들이 오류를 범해서 중국의 고대 변방민족이 사용하던 고려라는 명칭을 삼한(三韓) 신라의 계승자인 왕씨정권이 도용하게

되었고 왕씨정권의 계승자인 이조(李朝)는 기자조선이 쓰던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을 또 도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중국 고대 동북지역에 있었던 변방정권의 연혁을 이해하는 데 있어 혼란과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었다.


 글: 변중(邊衆)


 


<의견>


한국의 외교통상부, 교육부, 문화관광부는 중국 정부에 문제를 제기하여야 하고 한국학계는 고대사연구를 정확하게 해서 세계에

한(韓)민족의 고대사를 알리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사학계는 더 이상 민족의 반역자가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