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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태극 문양을 새긴 신라 황금보검의 비밀

설레임의 하루 2012. 1. 15. 14:06

 

 

[역사추적]신라 황금보검의 비밀


경주 대릉원 인근 계림로 14호 고분
그 곳에서 출토된 눈부신 ‘황금보검’
이국적이고 화려함으로 주목받는 이 검


이 황금보검을 둘러싼 불가사의한 의문들을 추적해본다


세계 유일하게 완벽하게 보존된 검이다

1973년, 계림로 14호 고분 발굴-보물 635호 황금보검 출토

▲황금보검 출토 당시
1973년, 경주에서는 신라시대 고분 중 가장 큰 무덤인 황남대총의 발굴이 시작됐다. 금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국보급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당시에 배수로 공사 도중 우연히 발견된 또 다른 무덤이 있었다. 계림로 14호 고분이 바로 그 것이다. 소형적석목곽분인 이 고분에서는 유례가 없는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그 중에서도 이 무덤 피장자의 허리춤에서 나온 ‘황금보검’은 그 특이함과 화려함으로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삼태극 문양을 새긴 황금보검
보석 상감 기법, 누금세공기법, 삼태극을 연상케 하는 삼태극 문양이 어우러진 이국적인 정취의 황금보검. 당대 최고 수준의 장인이 만들었을 황금보검은 붉은 석류석 장식이 돋보인다. 이 검에 감입된 보석은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한 유례가 없는 석류석으로 그 중에서도 동유럽이 주 생산지인 희귀한 종류를 사용했다.

그렇다면 이 검은 동유럽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유라시아 대륙의 최동단에 위치한 신라 계림로 14호분의 피장자가 어떻게 황금보검을 가지고 잠들 수 있었을까?

 

초원문화를 담고 있는 신라 유물
계림로 14호 고분과 가까운 미추 왕릉지구에서 발굴된 특이한 유물에는 인면 모자이크 유리구슬 ‘미소 짓는 상감옥’ 목걸이가 있다. 지름 1.8cm, 높이 1.6cm에 불과한 이 구슬 안에는 놀랍게도 사람의 형상이 모자이크 기법으로 상감되어 있다. 이 구슬에 묘사된 사람들은 피부가 희고 콧날이 오뚝한 것으로 보아 백인종으로 보인다. 일본학자 요시미츠 츠네오는 이 구슬에 표현된 인물이 황금보검의 제작자인 흑해연안의 켈트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 유리구슬의 인물이 황금보검을 제작한 사람들일까?

 

흑해연안, 불가리아(부여고리)에서 황금보검의 기원을 찾다
▲황금보검과 비슷한 기법을 사용한 불가리아 유물
고대 트라키아 문명의 발원지이자 부여족의 갈래가 세운 불가리아. 한나라와 선비족의 연합공격으로 2세기에 초원에서 사라진 훈(흉)족이 촉발한 민족이동시기(3~6세기)의 유물들이 황금보검과 비슷한 기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된다. 동서양을 아울러 초원을 중심으로 거대한 민족이동이 이뤄졌던 당시, 동로마의 장인들은 초원민족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공예품을 생산한다. 즉,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석류석이 감입된 구슬과 로만그라스(유리)는 흑해연안 동로마 문화였던 것이다.

 

동서를 아우르는 거대한 초원문화권의 형성
관련학자들 마다 서로 다른 주장들, 하지만 고대에 중앙아시아 초원, 흑해 연안까지 자유롭게 오가며 살았던 유목민족과 분명히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사실이다. 동유럽과 경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로만글라스, 각배, 황금유물은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계림로 14호분에서 발견된 황금보검! 이것은 지금부터 천 오백년 전, 수 천 킬로미터 떨어진 동유럽과 신라 사이에 거대한 초원 문화가 형성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경주지역에 분포한 거대한 신라의 적석목곽분들은 흉노가 초원을 차지하고 주인노릇하는 2세기의 유적이 아니다. 선비족이 초원주인이 되는 2세기 이후에 해당하는 4-5세기 무덤들이다.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흉노를 정벌하면서 10여만호(40여만)을 흡수한 선비족의 기마세력이 4-5세기에 흉노문화를 가지고 동해안을 타고 경주지역으로 들어와 사로국(석씨 왕조)을 무너뜨리고 흉노문화를 가진 선비왕조가 세워진 것을 의미한다.

[삼국사기-신라본기]기록에는 '신라'를 공식국호로 정한 지증왕이 순장을 금지시키고 농경문화를 정착시켰다. 그리고 지증왕의 아들 법흥왕은 법령 공포,사병철폐와 군대의 일원화,불교공인,국가재정을 낭비하는 황금문화엄금,무덤의 소형화로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하여 신라을 중앙집권국가로 만든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세력을 진압하면서 공적비를 세우기도 했는데 경북 울진 봉평비가 그것이다.

울진 봉평비문에는 법흥왕의 성과 이름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모진이라고.그리고 수 많은 모씨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법흥왕의 성과 이름이 모진이라고 기록한 [삼국사기][만주원류고][양서]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는 4-5세기 고구려와 전쟁과정 중에 동해안을 타고 내려 온 선비족이 모용씨을 입증한다. 모용선비족은 모용을 시조로 삼는 선비족으로 요하지역에 춘추전국시대 연나라를 재건하겠다는 목적으로 '연'이라는 국호로 개국하여 고구려를 침략하게 되니 전연.후연.북연하는 선비족 나라다. 이들 모용선비족에 흉노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황금보검을 보면 명확히 [3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다. 3태극 문양은 해민족의 3신 사상이다.

[천부경]석삼극 무진본="3개로 쪼개져도 본체는 하나다."

[환단고기-삼신오제본기]"해를 신으로 삼다..무소부재한 삼신은 분리되지 않고

조화.교화.치화의 역할을 수행하는 1체로 최고의 자리에서 우주를 통치하신다."

[단군조선]은 3신1체 사상에 따라 지역을 3등분하고 3명의 단군이 다스리는 3한 관경제 나라였다.

[흉노제국]역시 선우를 중심으로 좌.우현왕이 3지역을 3명의 왕들이 다스리는 3한 관경제 나라였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3을 가장 좋아한다.그래서 씨름도 3번하고 재판도 3번 한다. 박수도 3.3.7박수다.

 

 

부여지역인 북만주에서 헝가리까지 펼쳐진 초원지역/고대 우리 선조들은 만주에서 유럽까지 말을 달렸다

 

황금문화는 만주에서 서진하여 알타이 산에서 금(김)을 추출한 아시아 초원세력의 문화다.

이들이 서쪽으로 이주하여 흑해지역에 황금문화를 남긴 것이다. 유럽에서는

이들을 스키타이라 기록하고 지나사에서는 흉노라 기록했다.

스키타이.흉노는 유라시아 초원을 배경으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유목생활을 하는 코카서스 인종과도 피가 섞여 투르크(터키=돌궐)라는

혼혈세력을 낳기도 하였다. 고구려가 망한 후에

고구려유민들이 합세한 돌궐(터키)는 100년전까지

유럽과 소아시아 지역을 지배했던 대제국이였다.


그런데, 이들 스키타이.흉노의 기원에 대하여 [환단고기]에는

명확히 단군족의 줄기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흉노의 시조는 약수(흑룡강지역)에 유배당한

단군조선 열양장관 색정이라고 기록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선우를 중심으로 좌.우현왕 제도로 통치한 흉노제국의 통치방식은

단군조선의 통치방식을 모방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초원세력이 단군조선에 분가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데,

언제인가 분석해 볼 때 기원전 1,200년 경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수유족 출신의 좌현왕(마한) 서우여(선우)가 21대 소태단군을 압박하여

5가 공화정의 추대방식을 무시하고 단군천황에 오르려 하자,

우현왕(번한) 색불루가 반기을 들었고 소태단군에게 5가 공화정 추대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요구하자, 소태단군이 거부를 하게 되었고,

결국 고리KOREA족 색불루가 군대를 일으켜 저지하고

단군천황에 직위하게 되었다.

불세출의 민족영웅 22대 색불루 단군천황은

그 유명한 고조선의 8조 법금을 제정하여

민족정기와 국가기강을 바로 세웠고 은나라의 반란을 진압하여

양자강 유역까지 고리족을 이주시켜 정착시키고

남국 여국 등 단군조선의 제후국가들을 세워 직접 통치를 했다.


마한과 연합하여 저항했던 서우여 세력의 반란을 진압하여

서우여를 번조선 단군에 임명하게 됨으로써 권력내분을 마무리하였다.

그 때 사건으로 많은 수유족이 단군조선을 이탈하여 독자세력을 형성했다고 본다.

슬픈 아리랑을 부르며 대홍안령을 넘고 알타이산을 넘고 베링해협을 건넜을 것이다.

서우여는 선우다. 서우여만이 단군임금이라는 의미로

선우를 중심으로 하는 좌.우현왕 통치제도로 흉노제국을 경영했다 볼 수 있다.

이 때부터 동방을 고리족의 단군조선이 경영했다면

서방은 수유족이 경영했다고 할 수 있다.

번조선으로 망명한 은나라 기자도 수유족이다.

기자 후손 중에 기후가 훗날에 번조선 단군에 오른 배경이다.

[환단고기-번한세가]에 기록되어 있지만.

흉노가 번조선의 단군(천왕)을 알현하고 공물을 바친 후에 신하국을 자처한 이유다.

위만조선에게 망한 기자후손 기준은 번조선의 마지막 단군으로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마한을 파하고 마한왕검성에서 한왕을 칭했다고 했다.

그리고 토착마한세력의 저항으로 기준이 살해되자, 상장군 기탁이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기탁의 고향인 목지국(충남 직산 추정)에

중마한을 세우고 마한을 상국으로 삼는

남3한 체제를 형성하니 백제에게 복속당한 마한연방이다.

한국의 성씨 중에 한씨.선우씨.서씨 등은

모두 기자조선의 마지막 단군 기준의 후손들이다.


스키타이는 기원전 800년에 출현한 아시아 유목세력이다.

수유족과 고리족이 충돌한 단군조선의 권력변화가 기원전 1200년경에 발생했으니까

400년 동안 독자세력을 형성하여 황금문화로 흑해지역에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황금문화를 형성한 유라시아 초원세력은 단군조선에 나온 줄기라는 것이다./윤복현 분석정리

 

 

 

『위서』동이전 고구려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황금은 부여로부터 나온다(黃金出自夫餘)." 이 같은 기록을 통해 부여에서 황금이 많이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는 유목.수렵.어로생활지역으로 유라시아 초원세력을 낳은 북만주 지역에 해당한다. 초원세력이 황금문화를 낳는 이유 또한 부여(단군조선)인들이 황금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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