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스크랩] 남북국 시대에 신라의 경주는 세계 4대 도시

설레임의 하루 2012. 1. 4. 23:59

 2012 신년기획 2부작 랭턴 박사의 역사추적
  -제 1 부 신라 인면유리구슬의 비밀 (2012년 1월 5일 목요일)
  -제 2 부 유리구슬의 대항해 (2012년 1월 19일 목요일)


제 1 부 신라 인면유리구슬의 비밀

▣방송 : 2012. 1. 5 (목) 22:00~22:50 (KBS 1TV)
▣연출 : 임기순 PD
▣글, 구성 : 정종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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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년 동안 신라 유리구슬을 연구해 온
푸른 눈의 고고학자, 제임스 랭턴 박사.
그를 사로잡은 것은
경주 미추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인면유리구슬!

지름 1.8cm의 작은 유리구슬에 새겨진
미소를 띤 신비로운 얼굴.

유리구슬 속 얼굴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 구슬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신라최대 수수께끼의 인면유리구슬.
그 속에는 바닷길을 통한 신라 문명교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역사스페셜>에서는 총 2부에 걸쳐
런던대학교 고고학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인
제임스 랭턴 박사와 함께
8개국을 오가며 인면유리구슬이 간직해 온
신라 고대사의 비밀을 추적한다!

 

■ 신라인의 무덤에서 나온 수수께끼의 인면유리구슬!


 

▲ 경주 황남동 상감 유리구슬
  (보물 제634호)

▲ 인면유리구슬을 현미경 카메라로 
   특수촬영 하는 모습


1973년 경주 미추왕릉 지구, 신라 지배층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신비로운 유리구슬 한 점이 발견됐다. 경주에서 출토 된 그 어떤 유리구슬과도 다른 독특한 문양을 지닌 지름 1.8cm의 작은 유리구슬. 국립경주박물관의 도움을 받아 특수촬영을 실행하자 그 속에 담긴 놀라운 세계가 드러났다. 미소를 머금은 이국적인 네 명의 얼굴과 두 그루의 나무와 여섯 마리의 새들.
유리구슬 속 얼굴의 실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신라인의 무덤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까?

 

■ 1600년 전 유리의 증언
- 초원의 길을 따라 로마에서 신라로! 그렇다면 인면유리구슬은?


 

▲ 이스라엘 예루살렘

▲ 지중해 연안 출토의 유리잔과
 
경주 출토 유리잔


로마제국의 영토였던 지중해 연안에서 랭턴 박사의 본격적인 추적이 시작됐다. 유리의 본산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었던 경주 대릉원 출토의 유리용기와 동일한 유형의 용기들. 모두 대롱불기법으로 만들어진 ‘로만글라스’였다. 로만글라스는 지중해의 바닷길과 북방 초원의 길을 넘어 동쪽 끝 신라로 전해진 것이다.
그러나 표현양식과 제작기법을 분석한 결과, 미추왕릉지구 인면유리구슬은 로마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인면유리구슬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 베일에 가려진 인면유리구슬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8개국을 넘나드는 제임스 랭턴 박사의 험난한 여정과 끈질긴 신라 고대사 추적!


 

▲ 8개국을 오가는 랭턴의 긴 여정

▲ 랭턴 박사와 유리구슬 전문가


미소 짓고 있는 네 명의 얼굴과 하얀 새의 모습. 유리구슬 속 형상들이 담고 있는 비밀코드는 무엇일까? 랭턴 박사의 추적은 이스라엘에서 미국, 인도, 인도네시아 자바섬 등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이었다. 세계 최고의 유리구슬 전문가들과 함께한 추적 과정에서 랭턴 박사가 밝혀낸 놀라운 비밀! 인면유리구슬에는 고대 신라의 바닷길을 통한 문명교류의 비밀이 담겨 있었다.

 

 

■ 인면유리구슬이 간직해온 신라의 역동성!
지중해에서 동쪽 끝 신라까지 이어진 문명 교류의 바닷길, 해양 실크로드가 열린다!


 

▲ 인도네시아 자바섬 시골마을의 유리공방

▲ 얼굴의 형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미국 샌디에고의 한 박물관, 랭턴 박사는 이곳에서 결정적인 실마리를 얻었다. 마침내 신라 인면유리구슬과 제작기법은 물론 모자이크 문양까지 같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인면유리구슬을 찾은 것이다! ‘자바 티무르(동자바)’를 줄여 ‘자팀’이라 불리는 이 유리구슬의 원산지는 바로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이었다. 유리구슬의 비밀을 풀기 위해 자바섬으로 이어지는 랭턴 박사의 추적! 그리고 자바섬의 작은 마을에서 확인한 신라 인면유리구슬의 제작기법!
지중해에서 동남아시아, 그리고 신라로 이어지는 고대 문명교류의 바닷길, 신라 최대의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제임스 랭턴 박사의 해양 실크로드 항해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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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도 해머리땅은 대륙과 해양을 통하여 세계와 연결된 역동적인 심장부였다

[자료]세계 4대 도시였던 경주

고려때의 개경도 추정인구 50만에 [외국인 타운]이 존재할 정도로
국제적인 무역도시였습니다만, 신라 서라벌도 그에 못지 않게 대단했습니다.

신라가 당나라와 군사동맹으로 삼한(남한)을 통합한 후기 신라시대에 해당하는
8세기 전 세계 4대도시 콘스탄티노플, 장안, 바그다드, 그리고 신라 서라벌 이었습니다.
 
 
[삼국유사]는 신라의 전성기 때 수도에 17만 8936호가 있었다고 적고있습니다.
보통 1호를 5인으로 잡는데 이대로 17만 8936호를 계산하면 90만정도의 인구가 됩니다.

 
(현재 울산광역시의 인구가 100만 정도)

아래는 신라 [왕경도(왕이 사는 도시 그림)]입니다.
 
 
 
조선 후기의 한양 인구가 20만인것을 볼 때,
 
그로부터 1000년 전의 도시 인구가 100만이란것은 정말 대단한 수치인것입니다.
 
하지만 신라는 단지 인구만 많은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위의 [왕경도]에서 볼 수 있듯이 경주는 대단한 계획도시 였습니다.
 
우선 천년 전 신라인이 걸었을 길은 집과 집 사이로 반듯하게 나 있습니다.
 
또한 골목마나 출입문이 있어 치안상태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서라벌은 몇번째 골목, 몇번째 집 하는 식으로 주소만 알면 집찾기도 매우 쉽게 되어있습니다.
 
집터에서는 아궁이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숯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미 신라시대의 풍로가 출토된 바로 미루어 실내에선

온돌 대신 풍로를 놓고 숯을 피워 난방을 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숯을 때면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도 생기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의 주거환경은 상당히 쾌적했던 것 같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서라벌에는 집에 금을 입힌 금입택이 30채나 되었다고 합니다.
 
배수시설도 완벽 히 되어있었고 일정한 간격으로 수십개의 우물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또 당시 신라의 도로는 인도와 마차가 다니는 차도로 나뉘어있었습니다.
 
도로는 규격별 로 나뉘어 있었고,
 
길을 지나다니는 마차의 폭도 고구려의 예를 들어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서라벌은 도시 전체가 바둑판 모양 으로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고구려 말기 북한 평양의 장안성을 50만이 넘는 계획도시로 건설한 고구려도

마찬가지로서 우리나라 계획도시의 역사는 이미 1500년이 넘은것입니다.

 

 

백제 성왕도 세계적인 해양국가을 건설하기 위하여 늪지대였으나 서해와 연결된 금강으로 이어진 

 

사비(부여)을 계획 도시로 건설했던 이유입니다.바다로 뻗어 나가기 위해서 말이죠.

 
많은 분들께서 '역사' 하면 조선을 떠올리며 그 이전의 시대는

조선보다 못했을거라고 넘겨 짚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조선보다 훨씬 번영했고 자유로웠던 모습이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국제항구 벽란도와 연결된 고려수도인 50만의 개경의 거리입니다.
 
아시겠지만 고려시대 개경에는 알라딘 궁전같은 이슬람 사원과 아라비아 타운도 존재했습니다. 
 
 
바둑두는 고려 귀족들 입니다. (도자기 의자)
 
 
5세기 당나라 장안성보다 컸던 세계 최대 규모의 고구려 안학궁성(북한 평양)/고구려 장안성 사방둘레는 42km로 세계 최대 규모
 
한변 길이 622 미터
 
둘레 2.5 키로미터의 거대한 궁궐.
 
대동강에서 발견된 길이 375m 폭 9m의 초대형 다리를 지나면
 
판석(판모양 돌)으로 포장된 도로가 안학궁 남문까지 쭈욱 이어져 있었습니다.
 
(나중에 훨씬 더 큰 궁궐을 지어 옮긴다.) 
 
 
 
백제 미륵사
 
 
신라 황룡사. 저 목탑은 높이가 86m쯤으로 추정되며 현대의 아파트 30층 높이에 달합니다.
(세계 최고의 목탑.백제 미륵사를 지은 장인-박사들을 초청하여 지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일본에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가 수십장이 작성 되었습니다.
 
신라와의 무역내역을 적은 문서인데, 오사카대학의 도노 하루유키 교수의 문서 분석 결과
신라 물건을 살 수 있었던 사람은 5위 이상의 고위 귀족들 이라고 합니다.
 
또 이 [매신라물해]에 나타나는 물품에는 신라 물품 말고도
동남아산 향료와 약초, 중국산 비단, 페르시아산 물품까지 적혀있습니다.
즉, 세계 각지의 물품들을 신라를 통해 들여왔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 온 물건들은 단순한 수입품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일본 귀족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상층 귀족문화의 상징 이 된것입니다.

백제와 무역하던 일본은 백제멸망 후에는 지나물품과 아라비아.동남아 물품을 수입하기
위해서는 중간을 연결하는 신라와 불가피하게 무역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반영한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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