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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륙 한복판에 있는 광개토태왕의 지명 '영락진' (1/8부)

설레임의 하루 2012. 1. 2. 01:05

*출처:역사복원신문

                        

 

 

 

 

 

 

중국대륙 한복판에 있는 광개토태왕의 지명 '영락진' (1/8부)
영락진은 고구리 장수왕 때 생긴 지명으로, 태왕릉으로 추정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1/11/30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역사드라마 ‘광개토태왕’이 20% 좌우의 시청률로 동시간대 드라마 중 1위를 달리고 있다.

아주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광개토태왕을 소재로 한 드라마로는 2007년 MBC에서 배용준이 주연한 ‘‘태왕사신기’가 30%가

넘는 최고의 시청률로 연말대상까지 수상한 적이 있다.  
광개토태왕은 우리에게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정복군주로 알려져 있다.

사학계에서는광개토태왕이 진출한 지역이 북경 근처까지였다고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그런데 사학계에서 정사(正史)로 인정하는 <삼국사기>를 들여다보면 광개토태왕은 별로 정복전쟁을 한 것이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광개토태왕의 정복전쟁 내용이다. 참고로 적군이 쳐들어와 방어한 기록을 뺏다.
원년 7월 남으로 백제를 쳐 10성을 빼앗고, 9월 거란을 쳐 500명을 사로잡고 만명의 고구리 백성을 데리고 돌아왔다.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4년 8월 패수(浿水) 가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무너뜨리고 8,000명을 사로잡았다.
11년 후연의 숙군성을 치니 연의 평주자사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13년 11월 후연을 침범하였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어떻게 광개토태왕을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정복군주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즉 <삼국사기>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상당부분 누락된 기록이 많다는 의미인 것이다.

어떤 기록이 누락 되었고 또 실제 광개토태왕의 치적은 어떠한 것이 있었는지 추적해보기로 한다. 

중국대륙 한복판에 있는 광개토태왕의 지명 ‘영락진’  

중국대륙 한가운데에 이상한 지명이 하나 있다.
그 지명의 이름은 바로 영락진(永樂鎭)인데 그 위치는 섬서성과 사천성 등 여러 곳이 있는데, 광개토태왕과 관련있는 영락진은

산서성 최남단 황하변에 있는 운성시 예성현(芮城縣)에 있는 소도시이다.

원래 이곳에는 영락궁(永樂宮)이라는 유적이 있었는데, 이 영락궁이 바로 광개토태왕과 관련 있는 궁궐로 보인다. 
 

▲  영락진이란 지명은 산서성 최남단 황하변에 있는 소도시로 광개토태왕과 관련있는 지명이다.   

   © 역사복원신문


중국에서는 명나라 영락제와 관련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동아시아 역사상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쓴 황제는 고구리의 광개토태왕과 명나라 영락제 뿐이다.

그리고 영락진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시기를 추적해보면 분명 고구리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영락진이란 지명이 언제 생겼는지 그 연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영락현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번역) 영락현 : 후위에서 설치했다. 북주 때 북평고현으로 옮겨 다스렸기에 폐했다.
북주에서 설치했다. 황성현에 속했다. 당나라 때 황성현 동북 2리의 영고보를 영락현으로 설치했다. 송나라 때 진으로 했다.

 

산서성 영제현 동남 120리에 있다. <원화지> <환우기>에 모두 주나라가 영락현을 설치했고, 군으로 가지 않았다.

 

<수지>에 영락군으로 된 것은 오기이다.

(원문) 永乐县 : 后魏置,北周移治北平故县,而此城废。
北周置,寻省,以地属黄城县,唐分黄城于县东北二里永固堡重置永乐县,宋省为镇,故城在今山西永济县东南一百二十里,

 

按《元和志》、《寰宇记》皆云后周置永乐县,不去置郡,隋志作永乐郡,盖字之误也。 


또한 <중국백과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영락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번역) 동위 540년 북평현 서북의 땅을 쪼개 영락현을 설치해 낙랑군에 속하게 해 군의 치소로 했다.

 

북주 때 영락현을 창려군으로 다스렸다가, 북주 때 북평고성으로 옮겨 다스렸다.

수 문제 3년(583) 창려군을 파하고 영락현을 이역주로 변경했다가, 수양제 3년(607) 주를 파하고 상곡군으로 하고 영락현으로

거듭 다스렸다.

당 고조 4년(621) 영락현을 역주에 바꿔 속하게 했다. 천보 원년(742) 영락현을 만성현으로 처음 변경했다.

 

(원문)

 东魏兴和二年(公元540年)析北平县西北境,增置永乐县,属乐良郡,同时为郡治。北齐时,永乐县为昌黎郡郡治。

北周时永乐县徙治于北平故城,隋开皇三年(公元583年)罢昌黎郡,永乐县更隶易州,大业三年(公元607年)罢州为上谷郡,

仍辖永乐县。唐武德四年(公元621年)永乐县改属易州,天宝元年(公元742年)永乐县始更名满城县。
 

▲ 영락궁 정문에 있는 현판. 永樂이란 글자가 뚜렷하다.

이 궁은 광개토태왕과 관련있는 궁이 확실하다.     


위 중국자료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영락현이란 지명은 후위(=북위 386~534) 때 최초로 설치했는데 이때가 바로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다스리던 시절이었다.

 

본격적으로 영락현이란 지명을 사용한 시기는 북주(557~581) 때인데 북주는 겨우 24년간 존재했던 나라이므로 행정구역을 개편할

정도의 나라가 아니었다.

즉 북주 때는 고구리 평원태왕 때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영락진이라는 지명은 명나라 영락제가 아니라 고구리 광개토태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당나라 때 황성현 동북 2리의 영고보를 영락현으로 설치했다”는 문구에서 영락현은 광개토태왕의  능(陵)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는 광개토태왕의 능이 어디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남당 박창화선생의 <고구리사초.략>에는 광개토태왕의  능을 황산(黃山)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황산(黃山)과 황성현(黃城縣)이 무슨 관련이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 예성현으로 옮기기 전 영락진에 있던 영락궁의 모습     © 역사복원신문

또한 우리는 <중국백과사전>에서 아주 소중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영락현이 바로 창려(昌黎)현이었으며, 북평군(北平郡)에  속했다는 사실이다.

 

창려는 갈석산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결정적 자료이다.

중국은 역사왜곡을 위해 산서성 최남단 황하변 영락진 즉 창려현이라는 지명을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으로 옮겨놓아 마치 고대의

갈석산이 지금의 갈석산으로 보게 역사왜곡을 했다.

고대의 갈석산은 바로 산서성 최남단 황하변에 있는 지금의 중조산(中條山)인 것이다.  
갈석산은 우리 고대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산이다.

 

왜냐하면 중국 역사상 유명한 9 황제가 갈석산을 등정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인데, 그 9 황제들이란 바로 그 유명한 진시황과

한무제, 위무제(조조), 북주 문선제, 수양제, 당태종 등이다.

진시황은 이곳에 장성을 쌓고 등정했으며, 한무제는 한사군 설치 후 등정했고, 위무제(조조)는 오환족(고구리)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 시를 읊었으며, 수양제와 당태종은 요동(고구리) 정벌 때 갈석산을 올랐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은 단군조선의 번조선과 고구리가 이곳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갈석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래 싸이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230§ion=sc6§ion2=

▲ 진시황이 쌓은 장성과 관련있는 창려라는 지명은 역사왜곡을 위해 산서성

남단에서 하북성 진황도시로 지명이동 되었다.               © 역사복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