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스크랩] 요수(난하) 동쪽지역에서 벌어진 고수.고당전쟁 기록

설레임의 하루 2011. 12. 24. 17:15

 

고구려와 수.당 전쟁은 난하 동쪽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이지,황하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이

 

아니니 자꾸 문헌기록에도 맞지 않는 헛소리들은 그만 하자!

 

 

난하(요수)는 고구려 최전방 군사지역이였다.

 

살수(청천강)는 고구려 평양성을 방어하는 최후 보루였다.

 

 

1.고구려와 수나라 전쟁(麗隋戰爭)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적혀 있는 고.수전쟁 기록이다.

 

「영양무원호태열제 홍무 9년(A.D 598년) 옛 역사에서 말하기를 "제(帝)는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어 등주(登州 : 산동반도 방면)를 토벌하고 총관 위충을 잡아 죽였다"고 하였다..중략..수나라 왕 양견은 은밀하게 모반의 뜻을 품고 감히 복수의 군대를 내어 몰래 총관 위충을 파견하여 공명을 위해 관가를 부수고 읍락에 불지르고 노략질하게 하였다.

 

이에 제는 곧장 장병을 보내 적의 괴수(註:위충)를 사로 잡아 죽이니 산동지방은 이에 다시 평정되고 해역은 조용해졌다. 이 해 양견은 또 양양, 왕세적 등 30만을 파견하여 싸우도록 했으나 겨우 정주를 출발하여 아직 요택에도 이르지 못하였을 때 물 난리를 만나서 식량은 떨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마저 크게 돌았다.

 

주라후는 병력을 모아 등주에 웅거하여 전함 수백 척을 징집시켜 동래(註 산동반도에 있는 지명)로부터 배를 띄워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이를 알아차리고 후군으로써 이를 방어하도록 내보냈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나서 전군이 물에 떠다니다 몰사하였다. 舊史曰 陽武元好太烈帝 弘武九年 帝遣西部大人淵太祚 往討登州 擒殺總管..中略.然.隋主陽堅 陰藏禍心 敢出讐兵 密遣 總管爲名 潰破官家 梵掠邑落 乃遣將兵 擒殺賊魁 山東平服 海域謐然 是歲 堅又遣楊諒王世績等三十萬 來與戰 發定州 未之遼澤 水亂而饋轉杜絶 疫幷熾 周羅 以兵據登州 徵集戰艦數百 自東萊 船 趣平壤 爲我所覺 殿而拒之以進 忽遭大風 而全軍漂沒」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영양왕(陽王) 9년(A.D 598년) 왕이 말갈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를 침범하니 영주총관(營州總管) 위충(冲)이 쳐 물리쳤다. 수 문제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양과 왕세적으로 원수를 삼아 수군과 육군 30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케 하였다. 여름 6월 수제(隋帝)는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삭제하였다. 한왕 양의 군사가 임유관에 당도하자 장마비를 만나 수송이 계속되지 못하여 진중에 양식이 떨어지고 또 유행병이 돌았다.

 

주라후(周羅睺)동래로부터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달리다가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많이 침몰되었다. 가을 9월 수의 군사가 돌아 가는데 죽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 왕도 또한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를 올리어 "요동분토의 신하 아무개"라고 일컬으니 수 문제는 이에 군사를 철회하고 처음과 같이 대우하였다. 백제왕 창(昌 : 위덕왕)이 수 문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군도(군대의 길 안내)를 하겠다고 청하니 수제는 조서를 내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므로 이미 용서해 주었으니 다시 칠 수는 없다"하고 그 사신을 후대하여 돌려 보냈다. 왕은 그 사실을 알고 백제의 경계를 침략하였다. 九年 王率靺鞨之衆萬餘 侵遼西 營州總管擊退之 隋文帝聞而大怒 命漢王諒王世積並爲元帥 將水陸三十萬來伐 夏六月 帝下詔黜王官爵 漢王諒軍出臨渝關 値水潦 餽轉不繼 軍中乏食 復遇疾疫 周羅自東萊泛海 趣平壤城 亦遭風 舡多漂沒 秋九月 師還 死者十八九 王亦恐懼 遣使謝罪 上表稱『遼東糞土臣某』 帝於是罷兵 待之如初 百濟王昌遣使奉表 請爲軍導 帝下詔諭以 '高句麗服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 王知其事 侵掠百濟之境」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지나대륙을 통일한 수나라가  고구려의 요수가 장강보다 크냐는 비유까지 내세우며 고구려에게 복속을 요구해 왔다.이에 고구려가 수나라를 선제공격했던 것이다.

 

위의[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삼국사기]기록을 보면 고구려 영양태양이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를 보내 산동지역의 등주를 토벌하자, 이에 격분한 수나라가 위충을 보내 정벌하게 하였으나, 도리어 위충이 고구려군대에 패하고 죽임을 당하자, 30만을 파견하여 싸우도록 했으나 겨우 정주를 출발하여 아직 요택에도 이르지 못하였을 때 장마로 인하여 물 난리를 만나서 전멸했고,전함 수백 척을 동래(註 산동반도에 있는 지명)에서 출발하여 고구려 평양(북한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폭풍을 만나서 전멸했다는 것이다. 백제가 길 안내까지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하늘의 징벌인지 몰라도 수육군이 전멸해 버리자, 쪽팔린 수문제는 백제 위덕왕에게 고구려가 죄를 자복했으니 칠 수 없다며 변명을 하고 있는 내용이다.

 

 

환단고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명백하게 고구려와 수나라는 지나대륙 동해안 지역(등주.래주 등)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대도 황하지역을 운운하는 정신나간 자들은 과연 무슨 생각과 목적을 가지고 민족사를 연구한다는 것인가? 사료의 기록 내용도 이해못하는 얼간이들이 아니겠는가?

 

 

수나라는 정벌군(征伐軍)이 실패하자 10여년간 전쟁준비를 한 후 이번에는 수제(隋帝)가 직접 수육군 100여만명을 동원하여 친정(親征)에 나섰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적혀 있는 고수전쟁 기록을 살펴 본다.

 

「영양왕(陽王) 22년(A.D 611년) 봄 2월 수제(隋帝)는 조서를 내려 토벌키로 하였다. 여름 4월 거가가 탁군(註 북경 남쪽)의 임삭궁에 당도하여 사방의 군사들이 탁군으로 모였다. 二十二年 春二月 煬帝下詔 討高句麗 夏四月 車駕至涿郡之臨朔宮 四方兵皆集涿郡」

 

「영양왕(陽王) 23년(A.D 612년) 봄 정월 임오 제(수나라 왕)가 조서를 내렸다. "하찮은 고구려 무리들이 어리석고 불공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들고, 요(遼)와 예(濊)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한(漢), 위(魏) 때 주륙을 거듭 당하여 그들의 소굴이 잠시 엎어 졌어도, 난리로 막힘이 많자 무리들이 다시 모여 들어 지금은 지난 시대보다 더 많아 졌다.]

  

수나라 왕의 조서(詔書)에 의하면 이 고.수 전쟁 이전에 고구려 무리는 발갈지간(渤碣之間) 즉 발해(渤海)와 갈석(碣石:난하 방면) 사이에 진출해 있었다. A.D 612년 정월부터 수나라 왕 양광이 100만 대군의 정벌군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이다.

 

왼쪽 12군은 루방, 장잠, 해명, 개마, 건안, 남소,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 등 길로 진군하고, 오른쪽 12군은 점선, 함자, 혼미, 임둔, 후성, 제해, 답돈, 숙신, 갈석, 동이, 대방, 양평 등 길로 진군하되 앞뒤 부대끼리 서로 연락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여 모두 평양에 집결하라. 모두 1,133,800명이었는데 200만이라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가 되었다. 남쪽의 상건수 위에서 제사를 지내고, 임삭궁 남쪽에서 상제에 제사지내고, 계성 북쪽에서 마조에 제사지냈다.

 

제가 친히 절도를 제수하여 군대마다 상장과 아장을 각각 1명씩 두고, 기병은 40대로 하고, 각 대는 100명, 10대가 1단이 되게 하였으며, 보병은 80대로 하고 나누어 4단으로 하였으며, 단마다 각각 편장 1명을 두었다. 그 갑옷, 투구, 갓끈, 인장끈, 깃발은 단마다 색깔을 다르게 하였다. 하루 1군씩 40리 간격으로 영(營)을 이어 점진케 하니 40일만에 출발이 모두 끝났다. 머리와 꼬리가 계속되고 고각이 서로 들리며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어영 내에는 모두 12위, 3대, 5성, 9시가 있었는데, 내 외 전 후 좌 우 6군에 나누어 속하게 하고 그 뒤에 출발시키니 또 80리를 뻗쳤다. 左十二軍 出鏤方長岑溟海蓋馬建安南蘇遼東玄菟扶餘朝鮮沃沮樂浪等道 右十二軍 出黏蟬含資渾彌臨屯候城提奚踏頓肅愼碣石東暆帶方襄平等道 絡繹 引途 摠集平壤" 凡一百十三萬三千八百人 號二百萬 其 輸者倍之 宜社 於南桑乾水上 類上帝於臨朔宮南 祭馬祖於薊城北 帝親授節度 每軍上將亞將各一人 騎兵四十隊 隊百人 十隊爲團 步卒八十隊 分爲四團 團各有偏將一人 其鎧胄纓拂旗 每團異色 日遣一軍 相去四十里 連營漸進 終四十日發 乃盡 首尾相繼 鼓角相聞 旌旗亘九百六十里 御營內 合十二衛三臺五省九寺 分隸內外前後左右六軍 次後發 又亘八十里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

 

위 문구를 보면 수(隋) 나라는 A.D 611년에 탁군(涿郡) 임삭궁(臨朔宮)에 사방의 군사를 집결시켰고, 다음해 A.D 612년 정월에 수제(隋帝)가 친히 조절(調節)하여 계미일(1월 3일)부터 하루 1군(軍)씩 출발시켰다. 이때 수나라 정벌군은 모두 1,133,800명이라 하였다. 이는 편제보다 더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는 [수서(隋書)]에 적혀 있는 수(隋) 나라 정벌군의 상황이다.

 

癸未(1월3일) 第一軍發終四十日 引師乃盡 旌旗亙千里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 乙未 以右候衛大將軍衛玄為刑部尚書 甲辰 內史令元壽卒 二月 甲寅 詔 曰 "朕觀風燕裔 問罪遼濱 文武協力 爪牙思奮 莫不執銳勤王 捨家從役 罕蓄倉廩之資 兼損播殖之務 朕所以夕惕愀然 慮其匱乏 雖復素飽之眾 情在忘私 悅使之人 宜從其厚 諸行從一品以下 佽飛募人以上家口 郡縣宜數存問 若有糧食乏少 皆宜賑給 或雖有田疇 貧弱不能自耕種 可於多丁富室勸課相助 使夫居者有斂積之豐 行役無顧後之慮 壬戌 司空,京兆尹,光祿大夫觀王雄薨 三月 辛卯 兵部尚書 左候衛大將軍段文振卒 癸巳 上御師 甲午(3월15일) 臨戎于遼水橋 戊戌(3월19일) 大軍為賊所拒 不果濟 右屯衛大將軍 左光祿大夫麥鐵杖 武賁郎將錢士雄,孟金叉等 皆死之甲午(5월16일) 車駕渡遼 大戰于東岸 擊賊破之 進圍遼東 乙未(5월17일) 大頓 見二大鳥 高丈餘 皜身朱足 遊泳自若 上異之 命工圖寫 并立銘頌 六月己未(6월11일) 幸遼東 責怒諸將 止城西數裡 御六合城 七月壬寅(7월25일) 宇文述等敗績於薩水 右屯衛將軍辛世雄死之 九軍並陷 將帥奔還亡者二千餘騎 癸卯 班師 九月庚辰 上至東都」隋書 帝紀第四 煬帝下 八年條

 

위 문구를 보면 수(隋) 나라 정벌군은 1군(軍) 사이 간격을 40리로 하여 하루 40리씩 종대대형(縱隊隊形)으로 진군하였다. 종대대형은 대규모 병력이 이동할 때 흔히 사용하는 대형(隊形)이지만 중군(中軍)에서 선두(先頭)와 후미(後尾)에 명령을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종대대형으로 진군해도 이렇게 긴 종대대형으로는 진군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긴 종대대형으로 진군한 것은 이렇게 진군해야만 할 특별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후군로(後軍路)와 보급로(補給路)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종대대형으로 진군하면서 동.서.남.북 외곽에 기병이 각 1단씩 둘러싸고 그 안에 보병, 치중융차산병등(輜重戎車散兵等)이 들어가 있는 형태로 진형을 만들어 진군하였다. 이를 보면 정벌군은 탁군(涿郡) 임삭궁(臨朔宮)을 출발하면서부터 이미 고구려 군사들이 정벌군의 측면을 공격하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고구려 경계지역인 요수(난하)에서 치열한 접전

 

정벌군은 요수(遼水)까지 진군하였지만, 요수(遼水)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는 고구려 군사가 요수(遼水) 동안(東岸)에서 방어선을 치고 정벌군의 진군을 저지(沮止)하였기 때문이다.

 

「2월 수제가 군사를 통어하여 요수에 이르니 여러 군사가 모두 모여 물가에 이르러 큰 진을 이루었으나, 우리 군사가 강을 막고 지켰으므로 수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수제가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명하여 요수 서쪽 언덕에서 3개의 부교를 만들게 하였는데, 완성되자 끌어다 동쪽 언덕으로 갔으나 짧아서 한 길 남짓하게 언덕에 미치지 못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크게 닥치자 수나라 군사로서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다투어 물가로 나아와 접전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높은 곳에 올라 공격하니, 수나라 군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맥철장이 언덕으로 뛰어 올라 갔으나 전사웅, 맹(금)차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니, 이에 군사를 거두어 다리를 끌고 서쪽 언덕으로 돌아 갔다. 다시 소부감 하조에게 명하여 다리를 잇게 하여 이틀만에 완성하였으므로, 여러 군대가 차례로 이어서 나아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웠는데, 우리 군사들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만명을 헤아렸다. 여러 군대가 승세를 타고 나아와서 요동성을 포위하니 한나라 때의 양평성이다. 수제가 요수에 이르자 조서를 내려 천하에 사면을 베풀고, 형부상서 위문승 등에게 명하여 요수 동쪽의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고, 10년 동안 조세를 면제해주고 군현을 두어 서로 통섭하게 하였다, 二月 帝御師 進至遼水 衆軍摠會 臨水爲大陣 我兵阻水拒守 隋兵不得濟 帝命工部尙書宇文愷 造浮橋三道於遼水西岸 旣成 引橋趣東岸 短不及岸丈餘 我兵大至 隋兵驍勇者 爭赴水接戰 我兵乘高擊之 隋兵不得登岸 死者甚衆 麥鐵杖躍登岸 與錢士雄孟叉等 皆戰死 乃斂兵引橋 復就西岸 更命少府監何稠接橋 二日而成 諸軍相次繼進 大戰于東岸 我兵大敗 死者萬計 諸軍乘勝 進圍遼東城 則漢之襄平城也 車駕到遼 下詔赦天下 命刑部尙書衛文昇等 撫遼左之民 給復十年 建置郡縣 以相統攝.」 

 

수나라 군대가 요수(遼水)에 도착했을 때는 3월 15일경이고, 이때 수나라 군사는 여영군과 24군을 합쳐서 총 30군 1,133,800명이었다. 그런데 정벌군이 그 강을 건넜을 때는 2달 후인 5월 16일이었고, 건넌 인원은 어영(御營) 6군을 빼고 24군 중 불과 9군 30만 5천명뿐이었다. 2달간의 요수 전투에서 정벌군은 무려 15군이 죽었다. 이후 수(隋) 나라 보기병(步騎兵)이 직접 양식(糧食)과 무기(武器)를 지참하고 진군한 것을 보면 요수전투에서 보급부대는 도강시설 건축이나 강을 메우는 흙 운반에 대량 소모된 것 같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직예(直隸)]에 의하면 수(隋) 나라 장군 조효재(趙孝才)가 나온 갈석은 진장성(秦長城)이 시작된 곳에 있는 갈석(碣石)이고, 한나라 때 낙랑군 수성현이 있던 곳이라고 적혀 있다(碣石山在永平府昌黎縣西北二十里...秦築長城起自石此碣 碣石在高麗界中 亦謂之左碣石 杜佑曰秦長城所起之碣石 在樂浪郡遂城縣地 今猶有長城遺址 東截遼水入高麗 隋大業八年伐高麗遣趙孝才出碣石道是也. 讀史方輿紀要 直隸1).

 

9군이 공격한 성 중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것은 갈석도(碣石道)와 수성도(遂城道)이고, 이 곳은 모두 난하 방면이므로 수(隋) 나라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치열하게 싸운 요수(遼水)는 난하다. 그리고 수(隋) 나라 군사들은 요수를 건넌 후 그날 요동성을 포위하였는데, 요수가 난하이므로, 요동성은 난하에서 동으로 하루 진군거리 이내에 있다. 혹자는 고수전쟁에 나오는 요동성(遼東城)을 요양 방면이라고 주장하나, 요수가 난하이므로 요동성은 요양 방면이 될 수 없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이 요동성(遼東城)이 난하 동쪽 창려(昌黎) 남쪽에 있다고 적혀 있다(遼東在昌黎南境).

 

[수서(隋書)]에 의하면 수제(隋帝)가 머문 요동성(遼東城)은 수제(隋帝)가 머문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바다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리고 요수(난하)에서 하루 안에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이 요동성의 위치를 알기 위하여 [북사(北史) ]우작(虞綽) 열전에 나오는 문구와 수서(隋書) 양제(煬帝) 8년조 문구를 살펴본다.

 

「虞綽字士裕...從征遼東 帝舍臨海頓 見大鳥 異之 詔綽為銘 帝覽而善之 命有司勒於海上 以度遼功 授建節尉」北史 卷八十三 列傳 第七十一 文苑 虞綽傳

 

癸未(1월3일) 第一軍發終四十日 引師乃盡 旌旗亙千里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 乙未 以右候衛大將軍衛玄為刑部尚書 甲辰 內史令元壽卒   二月 甲寅 詔 曰 "朕觀風燕裔 問罪遼濱 文武協力 爪牙思奮 莫不執銳勤王 捨家從役 罕蓄倉廩之資 兼損播殖之務 朕所以夕惕愀然 慮其匱乏 雖復素飽之眾 情在忘私 悅使之人 宜從其厚 諸行從一品以下 佽飛募人以上家口 郡縣宜數存問 若有糧食乏少 皆宜賑給 或雖有田疇 貧弱不能自耕種 可於多丁富室勸課相助 使夫居者有斂積之豐 行役無顧後之慮 壬戌 司空,京兆尹,光祿大夫觀王雄薨   三月 辛卯 兵部尚書 左候衛大將軍段文振卒 癸 巳 上御師 甲午(3월15일) 臨戎于遼水橋 戊戌(3월19일) 大軍為賊所拒 不果濟 右屯衛大將軍 左光祿大夫麥鐵杖 武賁郎將錢士雄,孟金叉等 皆死之甲午(5월16일) 車駕渡遼 大戰于東岸 擊賊破之 進圍遼東 乙未(5월17일)大頓 見二大鳥 高丈餘 皜身朱足 遊泳自若 上異之 命工圖寫 并立銘頌」隋書 帝紀第四 煬帝下 八年條

 

우작(虞綽)은 양제(煬帝)의 고구려 친정 때 양제를 수행한 인물이다. 위 문구는 수(隋) 나라 군사는 요수(遼水)에 도착한지 두달만에 고구려 군사들의 저항을 물리 치고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성(遼東城)을 포위하였고, 이때 요동성 공격을 독려하는 양제(煬帝)가 머문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 키가 1장이 넘고 몸이 희고 발이 붉은 큰 새가 바다 위에서 유유이 헤엄치고 있는 것이 보이므로, 양제는 이를 기이하게 여겨 그 모양을 공인(工人)에게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우작(虞綽)에게 글을 짓게 하여 유사에 명하여 바위에 글을 새겨 이를 바다에 세우게 하였다는 것이다.

 

양제(煬帝)가 요수(遼水)를 건넌 후 머문 곳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으므로, 이 요동성(遼東城)의 위치는 내륙에 있는 요양(遼陽) 방면에 있는 성이 아니라 바다와 가까운 곳에 있는 난하 동쪽 창려(昌黎) 남쪽 방면의 요동성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수양제는 요양 방면에서 요동반도 서안 바다에 있는 새를 볼 수 있을만큼 천리안을 가졌다는 것이 된다.

 

요수(遼水)에서 물러나 요동성(遼東城)으로 들어간 고구려 군사들이 완강히 저항하자 수(隋) 나라 군사들은 요동성을 점령하지 못하였다. 다른 9성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수나라 군사들은 고구려 성 공격에 시일을 허비하느라 평양성(平壤城)으로 진군하지 못하였다.

 

「여름 5월 초 요동성 군사가 자주 나와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수제는 모든 군사에게 명령하여 공격케 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되려 하자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이 외치며 항복하기를 청하였으나 처음 여러 장수가 동으로 내려올 때 수제가 이르기를 "군사행동은 모두 아뢰고서 행하여라" 하였으므로 여러 장수가 그 칙지를 받들어 감히 응해 가지를 못하고 먼저 달려가 아뢰었다. 그에 대한 회보가 왔을 때에는 성 중의 방어 또한 갖추어져 항거하며 싸웠다. 이 같이 하기를 두세 차례 거듭하였으나 수제는 끝내 깨닫지 못하였고,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夏五月 初 諸將之東下也 帝戒之曰 “凡軍士進止 皆須奏聞待報 無得專擅” 遼東數出戰不利 乃 城固守 帝命諸軍攻之 又 諸將 “高句麗若降 卽宜撫納 不得縱兵” 遼東城將陷 城中人輒言請降 諸將奉旨不敢赴期 先令馳奏 比報至 城中守禦亦備 隨出拒戰 如此再三 帝終不悟 旣而城久不下

 

이에 초조해진 수제(隋帝)는 수군(水軍)을 동원하여 평양(平壤)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는 평양을 공격하므로서 전방에 있는 고구려 군사들을 당황하게 만들어 수(隋) 나라 보기병(步騎兵)의 평양 진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수제(隋帝)의 명령에 따라 패수(浿水대동강)로부터 들어와 평양성으로 진군하던 수(隋) 나라 수군(水軍)은 평양과 60리 떨어진 지점에서 고구려 복병(伏兵)에 걸려 궤멸되었다.

 

「6월 수제가 요동성 남쪽에 행차하여 그 성지와 형세를 관찰한 뒤 여러 장수를 불러 꾸짖으며, "그대들이 힘을 다하지 아니해도 내가 그대들을 죽이지 못할 줄로 여기느냐" 하였다. 여러 장수가 다 벌벌 떨며 낯빛이 변하였다. 수제는 성 서쪽 수리에 머물러 육합성에 어거하였다. 우리 여러 성이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아니하니 좌익위대장군 내호아가 강회의 수군을 거느리고 수백 리에 뻗쳐 병선으로 바다를 떠서 먼저 패수로부터 들어와 평양과 60리 거리의 지점에서 우리 군사와 만나 진격하여 크게 부쉈다. 호아가 승세를 타서 그 성을 육박하려 하자 부총관 주법상이 말리며 제군의 도착을 기다려 함께 진격하자고 청하였다. 호아는 듣지 아니라고 정병 수만명을 뽑아 곧장 성 밑으로 달려들었다. 우리 장수는 나곽 안의 빈 절 속에 복병해 놓고 군사를 내어 호아와 더불어 싸우다가 거짓 패하였다. 호아가 쫓아서 성 안에 들어와 군사를 풀어 사람을 사로잡고 물건을 약탈하느라 대오가 흩어지게 되자 복병이 터져 나오니 호아는 크게 패하여 겨우 몸만 빠져나가고 살아 남은 군사는 수천명에 불과하였다. 우리 군사는 병선이 있는 곳까지 쫓아갔으나 주법상이 진영을 단속하고 있으므로 물러났다. 호아는 군사를 끌고 돌아가 해포에 주둔하고 감히 다시 제군을 응접하지 못하였다. 六月 己未 帝幸遼東城南 觀其城池形勢 因召諸將 詰責之曰 “公等自以官高 又恃家世 欲以暗懦待我耶 在都之日 公等皆不願我來 恐見病敗耳 我今來此 正欲觀公等所爲 斬公輩爾 公今畏死 莫肯盡力 謂我不能殺公耶” 諸將咸戰懼失色 帝因留止城西數里 御六合城 我諸城堅守不下 左翊衛大將軍來護兒帥江淮水軍 數百里 浮海先進 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與我軍相遇 進擊大破之 護兒欲乘勝趣其城 副總管周法尙止之 請俟諸軍至俱進 護兒不聽 簡精甲數萬 直造城下 我將伏兵於羅郭內空寺中 出兵與護兒戰而僞敗 護兒逐之入城 縱兵 掠 無復部伍 伏兵發 護兒大敗 僅而獲免 士卒還者不過數千人 我軍追至舡所 周法尙整陣待之 我軍乃退 護兒引兵還屯海浦 不敢復留應接諸軍」

 

수군(水軍)의 평양(平壤) 공격이 실패하자 조급해진 수제(隋帝)는 그때까지 고구려 성을 공격하고 있던 수(隋) 나라 군사에게 모두 압록수(鴨淥水:요하) 서쪽으로 모이도록 명령하였다. 이는 압록수 서쪽에서 수(隋) 나라 군사에게 평양까지 갈 식량과 무기를 지급한 후 평양으로 진군시켜 고구려를 항복 받겠다는 의도이다. 즉 속전속결 하겠다는 의도이다. 혹자는 이 압록수(鴨淥水)를 지금의 압록강이라고 주장하나. 압록수를 건너온 수(隋) 나라 보기병(步騎兵)이 군량(軍糧)과 무기(武器)를 지급받은 곳은 노하(瀘河), 회원(懷遠) 2 진(鎭)이므로, 이 압록수는 요하(遼河)이다. 수제(隋帝)의 명령에 따라 각지에서 고구려성을 공격하고 있던 수(隋) 나라 군사들은 모두 압록수(요하) 서쪽으로 모여 군량과 무기를 지급받고 평양으로 향하였다.

 

수제(隋帝)가 후군로와 보급로 확보를 포기한 채 군사들을 평양(平壤)으로 진군(進軍)시킨 것은 정벌군의 약점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왕조 정벌군은 봄이 시작되는 1월에 공격을 시작하여 겨울이 시작되는 10월에 철군하였다. 만약 겨울이 되어도 정벌군이 철군하지 않으면 혹독한 추위에 풀이 일찍 마르고 물이 얼고 보급로(補給路)가 차단(遮斷)됨으로써, 병마(兵馬)가 얼고 굶주리게 되어 정벌군의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그 때문에 중국왕조 정벌군은 결정적 승기(勝機)를 잡지 못하면 10월 이전에 반드시 철군하였다.

 

고구려는 수(隋) 나라 군사의 이러한 약점(弱點)을 이용하여 싸우다 후퇴(後退)하는 전술(戰術)을 반복(反復)하여 시간을 질질 끌어 수(隋) 나라 군사의 진군속도(進軍速度)를 늦추었고(즉 겨울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요지(要地)의 성(城)에 주둔(駐屯)하고 있던 고구려군은 수(隋) 나라의 주력부대가 지나간 후 성(城)을 나와 수(隋) 나라 군사의 후군로(後軍路)와 보급로(補給路)를 차단(遮斷)함으로써 수(隋) 나라 군사가 보급품(補給品)을 보충(補充)받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진군로(進軍路) 주변 고구려 성(城)에 주둔(駐屯)하고 있던 고구려 군은 수시(隋時)로 성(城)을 나와 수(隋) 나라 군사를 기습(奇襲)하고 달아나는 전술을 반복하여 수(隋) 나라 군사가 편히 쉬지 못하도록 하였다.

 

수제(隋帝)가 후군로와 보급로 확보를 포기한 채 군사들을 모두 평양(平壤)으로 진군(進軍)시키므로서 고구려의 전략(戰略)에 걸려들었다. 보급로와 후군로가 차단(遮斷) 된 수(隋) 나라 군사들은 식량(食糧)과 무기(武器)를 휴대(携帶)하고 다녀야 하는데, 수(隋) 나라 군사들은 100일분의 식량과 무기를 휴대하고 이동하느라 기동력이 떨어졌고, 진군로(進軍路) 주변 성(城)에서 나온 고구려 군의 잦은 습격(襲擊)으로 편히 쉬지 못하여 피로(疲勞)해 졌으며, 피로에 지친 수(隋) 나라 군사는 무거운 식량을 몰래 버림으로써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수(隋) 나라 군사(軍士)는 싸우기도 전에 전투력을 상실하였다.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에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에서 나오고,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은 요동도에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설세웅은 옥저도에서 나오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은 현도도에서 나오고, 우어위장군 장근은 양평도에서 나오고,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도에서 나오고, 탁군태수 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은 수성도에서 나오고,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은 증지도에서 나와 모두 압록수의 서쪽에 모였다. 우문술 등의 군사는 노하, 회원 2진에서부터 사람과 말에게 모두 100일분의 군량을 주고, 또 갑옷, 무기와 아울러 의자, 융구, 화막을 나누어 주니, 사람마다 3석 이상이 되어 무거워 능히 운반할 수 없었다. 군중에 명령을 내려 “군량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하였으므로, 사졸들이 모두 군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행군이 겨우 중로에 이르자 양식이 이미 떨어지게 되었다. 左翊衛大將軍宇文述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出樂浪道 左驍衛大將軍荊元恒出遼東道 右翊衛大將軍薛世雄出沃沮道 右屯衛將軍辛世雄出玄菟道 右禦衛將軍張瑾出襄平道 右武侯將軍趙孝才出碣石道 涿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崔弘昇出遂城道 檢校右禦衛虎賁郞將衛文昇出增地道 皆會於鴨淥水西 述等兵 自瀘河懷遠二鎭 人馬皆給百日糧 又給排甲槍  幷衣資戎具火幕 人別三石已上 重莫能勝致 下令軍中 “遺棄米粟者斬” 士卒皆於幕下掘坑埋之 行及中路 糧已將盡」

 

고구려는 수(隋) 나라 군사(軍士) 군사들이 피로와 굶주림으로 전투력(戰鬪力)을 상실(喪失)한 것을 눈치채고 수(隋) 나라 군사들을 더 깊숙히 끌어들였다.

 

「왕은 대신 을지문덕을 시켜 그 진영에 나아가 거짓 항복케 하니 이것은 실상 그의 허실을 관찰하려 함이었는데 우중문이 먼저 받은 수제의 밀서에 "만약 왕이나 문덕이 오는 기회가 있거던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하였으므로 문덕을 잡으려 하던 차 위무사 상서우승 유사룡이 굳이 말리어 중문은 못내 그 청을 들어 주었다. 문덕이 돌아가자 이내 후회하고 사람을 시켜 문덕을 속이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다시 오라" 하였으나 문덕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압록수를 건너가 버리니 우중문, 우문술 등은 문덕을 놓치고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다. 우문술은 군량이 다 되어 가므로 돌아가려 했으나 우중문의 의견은 "정병으로써 문덕을 추격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문술이 굳이 말리니 우중문은 노하여 "장군이 10만의 병력을 가지고서 능히 소적을 깨뜨리지 못한다면 무쓴 낯으로 제를 뵙겠소 나도 이 걸음이 반드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소 옛날의 명장이 능히 성공한 것은 결정권이 한사람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소 이렇듯 사람마다 각 마음을 갖고 있으니 어떻게 적을 이긴다 말이요" 하였다. 그때 수제가 우중문이 계획성이 있다 하여 제군으로 하여금 절도를 품해서 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은 하는 수 없이 응종하여 여러 장수와 더불어 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문덕은 우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지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달아나기만 하니 이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은 하루 사이에 일곱 번 싸워 다 승리하였다. 이미 손쉽게 승리한 것을 믿고 또 뭇 사람의 의논에 밀려 급기야 동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과 30리 거리에서 산을 의거하여 진영을 만들었다. 문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거짓 항복서를 올리고 우문술에게 청하기를 "만약 군사를 철회한다면 마땅히 왕을 모시고 행재소에 가서 조회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문술은 자기의 병졸이 지쳐서 다시 싸울 수 없음을 보았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굳어 졸지에 함락시키기 어려울 것으로 짐작하여 마침내 거짓 항복을 구실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방진을 만들어 행군하자 문덕이 사방으로 유격해 우문술 등은 싸우다 가고 가다 싸웠다. 王遣大臣乙支文德 詣其營詐降 實欲觀虛實 于仲文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者 必擒之” 仲文將執之 尙書右丞劉士龍爲慰撫使 固止之 仲文遂聽 文德還 旣而悔之 遣人 文德曰 “更欲有言 可復來” 文德不顧 濟鴨淥水而去 仲文與述等 旣失文德 內不自安 述以糧盡欲還 仲文議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固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之衆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且仲文此行 固知無功 何則古之良將能成功者 軍中之事 決在一人 今人各有心 何以勝敵” 時帝以仲文有計 令諸軍諮稟節度 故有此言 由是 述等不得已而從之 與諸將渡水追文德 文德見述軍士有饑色 故欲疲之 每戰輒走 述一日之中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於是 遂進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文德復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 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度難猝拔 遂因其詐而還 述等爲方陣而行 我軍四面 초擊 述等且戰且行」

 

 

「가을 7월 살수에 도착하여 군이 반쯤 건넜을 무렵 우리 군사가 뒤로부터 그 후군을 공격하니 신세웅이 전사하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무너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남은 병사가 달아나 압록수에 당도하고 보니 하루 낮 하루 밤에 4백 50리를 걸은 폭이었다. 처음 9군이 요에 도착할 때는 무려 30만 5천명이었는데, 요동성에 되돌아 왔을 때는 겨우 2천 7백 명뿐이었고 수만으로 계산되는 기계와 물자도 거의 다 탕진되었다. 수제는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에 묶어 가지고 돌아갔다. 처음에 백제 왕 장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칠 것을 청하니, 황제가 우리나라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으나, 장은 안으로 우리나라와 몰래 통하였다. 수나라 군대가 장차 출동하려 하자, 장은 그 신하 국지모를 수나라에 들여보내 출병할 시기를 알려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후하게 상을 주고, 상서기부랑 석률을 백제에 보내 모일 시기를 알렸다. 수나라 군대가 요수를 건너자, 백제도 역시 국경에 군사를 엄히 배치하고 말로는 수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실은 양다리를 걸치었다. 수나라는 이번 군사행동으로 오직 요수의 서쪽에 우리의 무려라를 함락시켜 요동군과 통정진을 설치하였을 따름이었다. 秋七月 至薩水 軍半濟 我軍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世雄戰死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淥水 行四百五十里 將軍天水王仁恭爲殿 擊我軍却之 來護兒聞述等敗 亦引還 唯衛文昇一軍獨全 初 九軍度遼 凡三十萬五千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資儲器械巨萬計 失亡蕩盡 帝大怒 鎖繫 述等 癸卯引還 初 百濟王璋遣使 請討高句麗 帝使之 我動靜 璋內與我潛通 隋軍將出 璋使其臣國智牟 入隋 請師期 帝大悅 厚加賞賜 遣尙書起部郞席律 詣百濟 告以期會 及隋軍渡遼 百濟亦嚴兵境上 聲言助隋 實持兩端 是行也 唯於遼水西 拔我武厲邏 置遼東郡及通定鎭而已」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수(隋) 나라 장수들은 처음에는 속아서 이끌려 들어왔으나 곧 실수임을 깨닫고 을지문덕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회군하였지만 이미 때가 늦어 고구려 군사의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

 

영양왕(嬰陽王) 24년(A.D 613년)에 수(隋) 나라는 다시 고구려 정벌(征伐)에 나섰다. 영양왕 24년에 일어난 전쟁 때는 수(隋) 나라 보기병(步騎兵)은 후군로(後軍路)와 보급로(補給路)가 차단(遮斷)당하지 않기 위하여 고구려의 난하방어선을 통과하지 않고 북쪽 돌궐지역으로 우회(迂回)하여 요하(遼河)를 건너 신성(新城) 등지로 가서 고구려 성을 공격하다 양현감(楊玄感)의 반역 소식이 전해지자 서둘러 철군하였다.

 

「영양왕(陽王) 24년 봄 정월 제(帝)가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탁군에 모으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를 만들고,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였다. 2월 제가 측근의 신하에게 “고구려 같은 하잘 것 없는 오랑캐가 상국을 업신여긴다. 지금 바다를 뽑고 산이라도 옮길 수 있는 힘이 있거늘 하물며 이 오랑캐쯤이야”라고 말하며 다시 정벌할 것을 의론하였다. 좌광록대부 곽영이 “오랑캐가 예의에 벗어나는 것은 신하가 처리 할 일입니다. 천균의 쇠뇌는 새앙쥐를 잡기 위해서 쏘지 않는 법인데, 어찌 몸소 천자의 지위를 욕되게 하면서 작은 적을 상대하려 하십니까?”하고 간하였으나 제가 듣지 않았다. 여름 4월 거가가 요수를 건넜다. 우문술과 양의신을 보내어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왕인공이 부여도로 나와 신성에 이르자, 우리 군사 수만명이 막아 싸웠다. 왕인공이 날랜 기병 1천명을 거느리고 우리 군사를 깨뜨렸으므로, 우리 군사는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요동성을 공격하였는데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게 하였으므로, 비루(飛樓)·동차(車)·운제(雲梯)·지도(地道)로 사면에서 함께 진격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우리는 임기응변으로 막았으므로 20여일 동안 함락되지 않고, 적과 아군 중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충제의 장대의 길이가 15길이었는데, 심광이 그 꼭대기에 올라가 성을 내려다보며 우리 군사와 싸우는데 칼을 가지고 십수 명을 죽였다. 우리 군사는 다투어 그를 공격하여 그가 떨어지게 되었는데, 미처 땅에 떨어지기 전에 마침 장대에 줄이 늘어져 있어, 심광이 거기에 매달려 다시 올라갔다. 제가 그것을 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조산대부에 임명하였다. 요동성이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자, 제가 베 주머니 백여만 개를 만들어 보내 그 속에 흙을 가득 넣어 쌓아 어량대도를 만들었는데, 넓이가 30보나 되고 높이가 성과 가지런하게 되어 전사들이 올라가 공격하였다. 또 바퀴 여덟 달린 누거를 만들었는데, 성보다 높게 하여 어량도를 끼고 성 안을 내려다 보고 쏘면서 기일을 정해 장차 공격하려고 하였으므로, 성 안은 매우 위급하였다. 마침 양현감이 반역하였다는 글이 오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으며, 또 고관의 자손들이 모두 양현감이 거처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듣고 더욱 염려하였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본래 양현감과 친하였으므로 속으로 불안하여 우리에게 도망하여 왔다. 황제가 밤에 여러 장수를 몰래 불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군수품과 기계와 공격용 도구가 산처럼 쌓였고, 보루와 장막이 그대로여서 움직이지 않았으나, 무리의 마음이 떨며 두려워져 다시 부서를 나눌 새도 없이 여러 길로 흩어졌다. 우리 군사는 즉시 이것을 깨달았으나 감히 나가지 못하고 다만 성 안에서 북치고 고함을 지를 뿐이었다. 다음날 오시가 되어 그제야 점차 밖으로 나갔으나, 수나라 군사가 속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수천명의 군사를 내어 뒤를 밟아 쫓았으나, 수나라 군사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압박하지 못하고, 항상 8, 90리의 거리를 두었다. 요수에 거의 이르러서 황제의 병영이 다 건넌 것을 알고는 그제야 감히 후군을 압박하였다. 二十四年 春正月 帝詔徵天下兵 集涿郡 募民爲驍果 修遼東古城 以貯軍糧 二月 帝謂侍臣曰 “高句麗小虜 侮慢上國 今拔海移山 猶望克果 況此虜乎” 乃復議伐 左光祿大夫郭榮諫曰 “戎狄失禮 臣下之事 千鈞之弩 不爲  鼠發機 奈何親辱萬乘 以敵小寇乎” 帝不聽 夏四月 車駕度遼 遣宇文述與楊義臣 趣平壤 王仁恭出扶餘道 進軍至新城 我兵數萬拒戰 仁恭帥勁騎一千 擊破之 我軍  城固守 帝命諸將攻遼東 聽以便宜從事 飛樓동 雲梯地道 四面俱進 晝夜不息 我應變拒之 二十餘日不拔 主客死者甚衆 衝梯竿長十五丈 驍果沈光升其端 臨城與我軍戰 短兵接殺十數人 我軍競擊之而墜未及地 適遇竿有垂 光接而復上 帝望見壯之 卽拜朝散大夫 遼東城久不下 帝遣造布囊百餘萬口 滿貯土  欲積爲魚梁大道 闊三十步 高與城齊 使戰士登而攻之 又作八輪樓車 高出於城 夾魚梁道 欲俯射城內 指期將攻 城內危蹙 會 楊玄感叛書至 帝大懼 又聞達官子弟皆在玄感所 益憂之 兵部侍郞斛斯政素與玄感善 內不自安 來奔 帝夜密召諸將 使引軍還 軍資器械攻具 積如丘山 營壘帳幕 案堵不動 衆心 懼 無復部分 諸道分散 我軍卽時覺之 然不敢出 但於城內鼓 至來日午時 方漸出外 猶疑隋軍詐之 經二日 乃出數千兵追 畏隋軍之衆 不敢逼 常相去八九十里 將至遼水 知御營畢度 乃敢逼後軍 時 後軍猶數萬人 我軍隨而초擊 殺略數千人」

 

영양왕(陽王) 25년(A.D 614년)에 수(隋) 나라는 다시 고구려 정벌(征伐)에 나섰다. 그러나 보기병은 회원진(懷遠鎭)까지 진군하였지만 뚜렷한 전과가 없었고, 수군(水軍)은 비사성(卑奢城)을 점령하였지만 평양으로 향하지 못하였다. 이때 수나라 내부가 어지러워지자 수제(隋帝)는 고구려가 곡사정을 돌려보내 주는 것을 핑계로 회원진(懷遠鎭)에서 돌아갔다. 고기(古記)에는 이때 수제(隋帝)가 항복을 가장한 고구려 사신에게 활로 저격당하자 서둘러 철군하였다고 적혀 있다.

 

「영양왕(陽王) 25년(A.D 614년) 봄 2월 황제가 모든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정벌할 일을 의론하게 하였는데, 여러 날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다시 징발하여 여러 길로 함께 진군하게 하였다. 가을 7월 황제의 수레가 회원진에 행차하였다. 이때 천하가 이미 어지러워져서 징발된 군사들이 기일을 어기고 도달하지 못한 자가 많았으며, 우리나라도 역시 지쳐 있었다. 내호아가 비사성에 이르자 우리 군사가 맞아 싸웠으나, 내호아가 쳐서 이기고 평양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왕은 두려워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그에 따라 곡사정을 돌려 보내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고 절부를 가진 사신을 보내 내호아를 소환하였다. 8월에 황제가 회원진으로부터 군대를 돌이켰다. 二十五年 春二月 帝詔百寮 議伐高句麗 數日無敢言者 詔復徵天下兵 百道俱進 秋七月 車駕次懷遠鎭 時 天下已亂 所徵兵多失期不至 吾國亦困弊 來護兒至卑奢城 我兵逆戰 護兒擊克之 將趣平壤 王懼遣使乞降 囚送斛斯政 帝大悅 遣使持節 召護兒還 八月 帝自懷遠鎭班師」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홍무 25년 양광은 또다시 동쪽으로 침략해와서 먼저 장병을 보내 비사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케 했다. 관병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니 바야흐로 평양을 습격하려 했다. 제는 이를 듣고 완병술을 쓰려 했다. 계략을 꾸며 곡사정을 보냈다. 때마침 조의 가운데 일인이라는 자가 있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한 끝에 함께 표를 양광에게 바쳤다. 양광이 배에서 표를 손에 들고 읽는데 절반도 채 읽기 전에 갑자기 소매 속에서 작은 활을 꺼내 쏘아 그의 뇌를 맞혔다. 양광은 놀라 자빠지고 실신했다. 우상 양명은 서둘러 양광을 업게 하여 작은 배로 갈아타고 후퇴하여 회원진에 명을 내려 병력을 철수시키도록 하였다. 양광은 좌우에 말하여 가로대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몸소 작은 나라를 쳐도 승리하지 못하니 이는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겠는가?' 라고 했다. 양명 등은 얼굴색이 검게 변하여 대답 못하고 말았다. 隋主楊廣 本鮮卑遺種 統合南北地域 以其餘勢 侮高句麗 以爲小虜 侮慢上國 頻加大兵 我旣有備 而未嘗一敗也 弘武二十五年 廣又復東侵 先遣將兵 重圍卑奢城 官兵戰不利 將襲平壤 帝聞之 欲圖緩兵 執遣斛斯政 適有早衣一仁者 自願廳從而偕到 獻表於楊廣 廣於舡中 手表而讀未半 遽發袖中小弩 中其胸廣驚到失神 右相羊皿 使負之 急移於小船而退 命懷遠鎭撤兵 廣謂左右 曰子爲天下主 親伐小國而不利 是非萬歲之所嗤乎 羊皿等 面黑無答」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쇠하여 멸망하고 A.D 618년에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다.

 

 

 

 

 

 

2. 고당전쟁(麗唐戰爭) 

 

[삼국사기]「보장왕 3년 가을 7월 당제(唐帝)는 군사를 출발시키기에 앞서 홍, 요, 강 3주에 명령하여 병선 4백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도독 장검 등을 보내어 유, 영 두 도독부의 군사와 거란, 해, 말갈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여 그 형세를 살피게 하고 대리경 위정을 궤수사로 삼고 또 소경 소예를 시켜 하남 제주의 군량을 운반하여 바닷길로 들여보내게 하였다. 9월 연개소문이 당에 백금을 바치자 당나라 신하 저수량이 아뢰기를 "개소문이 그 임금을 죽였으니 구이에게도 용납되지 못하는 바입니다. 지금 토벌하러 하면서 그 금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고정과 같은 종류이오라 신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당제는 그 말에 응종하였다. 사신은 또 말하기를 "개소문이 관원 50명을 숙위에 편입시켜 달라고 보내왔습니다."고 하니 제는 노하여 사신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다 고무를 섬기어 관작을 누렸으면서도 개소문이 고무를 죽였으되 너희들이 원수도 갚지 못하면서 지금 다시 유세를 하여 대국을 속이려 하니 죄가 너희 보다 큰 자가 어디 있겠느냐" 하고 모두 대리에 회부하였다. 겨울 10월 평양의 눈빛이 붉었다. 당제가 자신이 장수가 되어 토벌코자 하자 여러 신하가 떠나지 말 것을 권하니 당제는 "나는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끝으로 나아가고 높은 것을 두고 낮은 것을 취하고 가까운 곳을 두고 먼 곳으로 가는 이 세 가지는 상서롭지 못하다는 것이니 고구려를 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또 대신을 죽여 하도 무엄하므로 일국의 백성이 고개를 쳐들고 구원을 고대하고 있는 이 점을 의논하는 자는 생각 못하고 있다" 하며 북으로 곡식을 영주(註 대릉하 방면)에 수송하고, 동으로 고대인성에 저장하였다. 秋七月 帝將出兵 洪饒江三州 造舡 四百艘 以載軍糧 遣營州都督張儉等 帥幽營二都督兵及契丹奚靺鞨 先擊遼東 以觀其勢 以大理卿 韋挺爲饋輸使 自河北諸州 皆受挺節度 聽以便宜從事 又命少卿蕭銳 轉河南諸州糧入海 九月 莫離支貢白金於唐  遂良曰 莫離支弑其君 九夷所不容 今將討之 而納其金 此  鼎之類也 臣謂不可受 帝從之 使者又言 莫離支遣官五十 入宿衛 帝怒謂使者曰 汝曹皆事高武 有官爵 莫離支弑逆 汝曹不能復   今更爲之遊說 以欺大國 罪孰大焉 悉以屬大理 冬十月 平壤雪色赤 帝欲自將討之 召長安耆老 勞曰 遼東故中國地 而莫離支賊殺其主 朕將自行經略之 故與父老約7) 子若孫從我行者 我能  循之 無容恤也 則厚賜布粟  臣皆勸帝毋行 帝曰 吾知之矣 去本以趣末 捨高以取下 釋近而之遠 三者爲不祥 伐高句麗是也 然蓋蘇文弑君 又戮大臣以逞 一國之人延頸待救 議者顧未亮耳 於是 北輸粟營州 東儲粟古大人城」 

 

 

「11월 당제(唐帝)가 낙양에 이르렀다. 전 의주자사 정천숙이 이미 벼슬을 그만 두었으나, 당제는 그가 일찍이 수나라 양제를 따라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므로 행재소로 불러서 물으니, “그가 요동은 멀어서 군량을 옮기는 것이 어렵고, 동이는 성을 잘 지키므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당제는 “지금은 수나라 때에 비교할 것이 아니다. 공은 다만 따르기만 하라.”고 말하였다. 형부상서 장량을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서 강,회와 영,협의 군사 4만명과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명과 전함 500척을 거느리고 래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오게 하였다. 또 태자 첨사좌위솔 이세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명과 난주, 하주 2주의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게 하여, 양군이 합세하여 유주에서 다 모이게 하였다. 행군총관 강행본과 소감 구행엄을 보내 먼저 중공을 독려하여 안라산에서 사다리와 충차를 만들게 하였다. 이때 응모한 원근의 용사들과 성을 공격하는 기계를 바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므로, 당제가 모든 것을 친히 가감하여 편이한 것을 취하였다. 또 친필 조서로써 천하에 알렸다. “고구려의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하니 그 실정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느냐? 이제 유주와 계주를 순행하고 요동과 갈석으로 가서 그 죄를 물으려고 하니, 지나는 곳의 군영과 숙사에서 노력과 경비가 들지 않도록 하라.” 또 말하기를 “예전에 수나라 양제는 부하들에게 잔인하고 포악하였는데, 고구려왕은 그 백성들을 인자하게 사랑하였다. 반란을 생각하는 군사로써, 편안하고 화목한 백성들을 쳤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 지금 대략 말해서, 필승의 길은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큰 것으로써 작은 것을 치는 것이고, 둘째는 순리로써 반역을 치는 것이고, 셋째는 다스려진 형세로써 어지러운 틈을 타는 것이고, 넷째는 편안함으로써 피로한 것에 대적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기쁨으로 원망에 맞서는 것이다. 어찌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 할 것이냐? 백성들에게 포고하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로써 무릇 숙사, 공급, 설비의 기구를 줄인 것이 태반이었다. 여러 군대와 신라, 백제, 해, 거란에 명령하여 길을 나누어 치게 하였다. 十一月 帝至洛陽 前宜州刺史鄭天璹已致仕 帝以其嘗從隋煬帝伐高句麗 召詣行在問之 對曰 遼東道遠 糧轉艱阻 東夷善守城 不可猝下 帝曰 今日非隋之比 公但聽之 以刑部尙書張亮爲平壤道行軍大總管 帥江淮嶺硤兵四萬 長安洛陽募士三千 戰艦五百艘 自萊州泛海 趣平壤 又以太子詹事左衛率李世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 帥步騎六萬及蘭河二州降胡 趣遼東 兩軍合勢 大集於幽州 遣行軍總管姜行本少監丘行淹 先督衆工造梯衝於安羅山 時 遠近勇士應募及獻攻城器械者 不可勝數 帝皆親加損益 取其便易 又手詔諭天下 以高句麗蓋蘇文弑主虐民 情何可忍 今欲巡幸幽薊 問罪遼碣 所過營頓 無爲勞費 且言 昔 隋煬帝殘暴其下 高句麗王仁愛其民 以思亂之軍擊安和之衆 故不能成功 今略言必勝之道有五 一曰 以大擊小 二曰 以順討逆 三曰 以理乘亂 四曰 以逸敵勞 五曰 以悅當怨 何憂不克 布告元元 勿爲疑懼 於是 凡頓舍供備之具 減者太半 (十二月) 詔諸軍及新羅百濟奚契丹 分道擊之」

 

당제(唐帝)가 내린 작전명령을 분석해 보면, 당제는 당시 발해연안(勃海沿岸)을 따라 서쪽으로 백하(白河) 방면까지 길게 뻗어 있는 고구려 거점에 대한 대책에 가장 고심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출전하기 전 해에 장검을 보내어 요동의 정세를 미리 살펴보게 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따라서 당제가 11월에 내린 작전명령은 당시 발해연안(勃海沿岸)을 따라 서쪽으로 백하(白河) 방면까지 길게 뻗어 있는 고구려 거점에 대한 대책이 중점이었다.

 

[삼국사기]「보장왕(寶臧王) 4년(A.D 645년) 봄 정월에 이세적의 군대가 유주에 이르렀다. 3월에 당제(唐帝)가 정주에 이르러 시중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인데 수나라가 네 번이나 출병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다. 짐이 지금 동쪽으로 정벌하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자제들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이고, 고구려를 위해서는 임금의 치욕을 씻어주려고 하는 것뿐이다. 또 사방이 대체로 평정되었는데 오직 이곳만 평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직 늙지 않았을 때 사대부들의 남은 힘으로써 이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다.” 당제가 정주를 출발할 때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자기 손으로 안장 뒤에 비옷을 매었다. 이세적의 군대가 유성을 출발하여 형세를 과시하며 마치 회원진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고는, 군사를 몰래 내달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길로 나왔다. 여름 4월 이세적이 통정진으로부터 요수를 건너 현도에 이르렀다. 우리 성읍들은 크게 놀라 모두 성문을 닫고 지켰다. 부대총관 강하왕 도종이 병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신성에 이르자, 절충도위 조삼량이 기병 10여명을 이끌고 곧바로 성문으로 압박해 오니, 성 안에서는 놀라 소란해져서 감히 나가는 자가 없었다. 영주도독 장검이 호병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나아와,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달려가서, 우리 군사를 깨뜨리고 수천명을 죽였다.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을 쳐서 함락시켜, 1만명을 사로잡고 양곡 10만석을 빼앗았으며, 그 땅을 개주로 삼았다. 장량이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註 산동반도)로부터 바다를 건너 비사성(註 요동반도 서안 군사요지. 지금의 영구 방면)을 습격하였는데, 성은 4면이 깎은 듯하고 다만 서문만 오를 수 있었다. 정명진이 군사를 이끌고 밤에 도착하였다. 부총관 왕대도가 먼저 올라갔다. 四年 春正月 李世勣軍至幽州 三月 帝至定州 謂侍臣曰 遼東本中國之地 隋氏四出師 而不能得 朕今東征 欲爲中國 報子弟之 高句麗 雪君父之恥耳 且方隅大定 唯此未平 故及朕之未老 用士大夫餘力 以取之 帝發定州 親佩弓矢 手結雨衣於鞍後 李世勣軍發柳城 多張形勢 若出懷遠鎭者 而潛師北趣甬道 出我不意 夏四月 世勣自通定濟遼水 至玄菟 我城邑大駭 皆閉門自守 副大總管江夏王道宗 將兵數千 至新城 折衝都尉曹三良 引十餘騎 直壓城門 城中驚擾 無敢出者 營州都督張儉 將胡兵爲前鋒 進度遼水 趨建安城 破我兵 殺數千人 李世勣江夏王道宗攻盖牟城 拔之 獲一萬人糧十萬石 以其地爲盖州 張亮帥舟師 自東萊度海 襲卑沙城 城四面懸絶 惟西門可上 程名振引兵夜至 副總管王大度先登」

 

 

「진주는 본래 고구려 개모성이다. 당태종과 이세적이 공격하여 함락시킨 개모성이 바로 이것이다. 발해는 개주로 고쳤고, 또 진주로 고쳤다. 이는 진한에서 나온 이름이다. 동경류수사 예하에 두었는데 거느리는 縣으로 建安縣이 있다. 辰州 奉國軍 節度 本高麗蓋牟城 唐太宗會李世徠攻破蓋牟城 即此 渤海改為蓋州 又改辰州 以辰韓得名..中略..隸東京留守司 統縣一建安縣.」 遼史地里志

「안동도호부에서 오백리에 옛 한나라 양평성이 있다. 안동도호부에서 동북으로 가면 옛 개모성, 신성을 지난다. 또 더 가면 발해장령부를 지난다. 安東都護府五百里 府 故漢襄平城也...自都護府東北經古蓋牟,新城 又經渤海長嶺府」 [新唐書]卷四十三 下 志第三十三 下  地理七 下

 

위 문구에 나오는 비사성(卑沙城) 위치를 살펴본다.

 

「해주위 도사(요양) 성 남 120리에 있다. 본래 개모 땅이다. 고구려가 사비성을 두었고 발해는 남해부를 두었으며, 요나라는 해주남해군을 두고 치소를 임명현에 두었다. 금나라 천덕 초에 징주로 바꾸었다가 원나라 때 폐지했다. 명나라 홍무 원년에 해주위를 두었다. 海州衞 箏司城南一百二十里 本盖牟地 高麗爲沙卑城 渤海國爲南海府 遼爲海州南海軍 治臨溟縣 金天德初改爲澄州 元廢 本朝洪武元年置衞」 明一統志 卷二十五 建置沿革條

 

「해주남해군절도는 비사성이다. 전요지에서 말하기를 해주위는 요양성 남 120리에 있다. 당나라는 징주를 두었고, 요나라는 해주남해군으로 하였다. 방여기요에서 말하기를 지금의 해주위 성은 고구려가 지은 성으로 비사성이라 했다. 성벽이 돌로 된 성으로 지름이 9리이다. 혹은 글자를 바꾸어 비사성(卑奢城)이라고도 한다. 등주, 래주에서 바다를 건너 고구려 평양성으로 가려면 꼭 이곳으로 나와야 한다. 수나라 대업 10년에 바다를 건너 비사성에 와서 고구려 군사에게 패했다. 이곳에서 수나라 장수들이 평양으로 향하려고 하니 고구려는 두려워 하여 항복을 청했다. 당나라 정관 18년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장량이 거느린 수군이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비사성을 습격했다. 그 성은 4면이 절벽이나 오직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다. 당나라 군사가 공격하여 점령했다. 총장 초에 이세적이 다시 그 땅을 점령했다. 후에 발해 땅이 되었다. 海州南海軍節度 卑沙城 全遼志曰  海州衛在遼陽城南一百二十里  唐置澄州 遼爲海州南海軍 方輿紀要曰 今海州衛城 高麗所築亦曰卑沙城 叠石爲城幅員九里 或譌爲卑奢城 自登萊海道趨高麗之平壤必先出此 隋大業十年 來護兒出海道至卑奢城敗高麗兵 將趨平壤 高麗懼而請降 唐貞觀十八年伐高麗  張亮帥舟師自東萊渡海 襲卑沙城 其城四面懸絶 唯西門可上 唐兵攻拔之 揔章初 李世勣復得其地 後沒於渤海」[遼史] 拾遺卷十三 錢塘厲鶚撰 志第二

 

「해주위는 본래 해주이다. 명나라 홍무 초에 옛 징주성에 설치했다. 9년에 위를 두었다. 28년 4월에 주를 폐지했다. 서남은 바다 가이고 염장이 있다. 서쪽에 요하가 혼하, 태자하와 합하여 바다로 들어 간다. 그래서 물길이 3갈레로 갈라졌다고 3차하(岔河)라고 한다. 또 서쪽에 남.북 통강이 있는데 역시 요하에 합쳐진다. 동쪽에는 대편령관이 있고, 염장이 있으며 동북에 있는 도사성(요양)과 120리 떨어져 있다. 海州衛本海州 洪武初 置於舊澄州城 九年置衛 二十八年四月 州廢 西南濱海 有鹽場 西有遼河 匯渾河 太子河入海 謂之三岔河 又西有南.北通江 亦合於遼河 東有大片嶺關 有鹽場 東北距都司百二十裡」 [明史] 志第十七 地理二

 

「사비성은 지금 위(衛) 성이다. 비사성(卑沙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가 돌을 포개어 쌓은 성으로 폭원이 9리이다. 혹은 비사성(卑奢城)이라고도 한다. 등주,래주에서 바다길로 고구려의 평양으로 가려면 꼭 먼저 나와야 하는 곳이 이곳이다. 수 대업 10년에 래호아가 바다길로 나와 비사성에 와서 고구려 병사들에게 패하였다. 장수들이 평양으로 향하려고 하니 고구려가 두려워 하며 항복을 청했다. 당나라 정관 18년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와 비사성을 습격했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오직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다. 당나라 군사가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총장 초에 이세적이 다시 그 땅을 점령했다. 후에 발해 땅이 되었다. 沙卑城今衛城亦曰卑沙城 高麗所築疊石爲城幅員九里或譌卑奢城 自登萊海道趨高麗之平壤必先出此 隋大業十年 來護兒出海道至卑奢城 敗高麗兵 將趨平壤 高麗懼而請降 唐貞觀十八年伐高麗  張亮帥舟師自東萊渡海 襲卑沙城 其城四面懸絶 唯西門可上 唐兵攻拔之 總章初 李世勣復得其地 後沒於渤海」讀史方輿紀要 山東8 卑沙城

 

[명(明) 일통지(一統志)] 의하면 비사성(卑沙城)은 도사(요양) 성 서남 120리에 있으며 그곳에 해주위(海州衛)가 설치되어 있었고, 명사(明史)에 의하면 해주위(海州衛) 서쪽에 요하(遼河), 혼하(渾河), 태자하(太子河)가 합쳐서 삼차하 방면에서 바다로 들어갔다. 이를 보면 해주위(海州衛)가 설치된 곳 즉 비사성은 요하, 혼하, 태자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요충지였다.  

 

「5월 비사성이 함락되어 남녀 8천명이 죽었다. 이세적이 돌진하여 요동성 밑에 이르고, 당제(唐帝)가 요택에 이르렀으나, 진흙이 200여 리나 되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대장 염립덕이 흙을 덮어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군대가 머무르지 않고 요택의 동쪽으로 건너왔다. 왕은 신성과 국내성의 보기병 4만명을 내어 요동성을 구원하였다. 강하왕 도종이 기병 4천명을 거느리고 맞이했는데, 군중에서는 모두 군사의 수가 많고 적은 것이 현저하게 다르므로, 도랑을 깊이 파고 성루를 높이 쌓아 당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도종이 말하였다. “적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깔보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멀리 와서 피곤할 터이니 그들을 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마땅히 길을 깨끗이 치우고 제를 맞이할 일인데 적을 임금께 남겨두려고 하느냐? 도위 마문거가 강한 적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장사임을 나타낼 수 있겠느냐?”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와 치니 향하는 곳마다 다 쓰러졌으므로, 여러 군사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맞붙어 싸우게 되자 행군총관 장군예가 후퇴하여 도망하였으므로 당군이 패하였다. 도종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우리 군진이 어지러우므로, 날랜 기병 수천 명과 함께 돌격하고, 이세적도 군사를 이끌고 그를 도왔으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천여명이었다. 五月 城陷 男女八千口沒焉 李世勣進至遼東城下 帝至遼澤 泥  二百餘里 人馬不可通 將作大匠閻立德布土作橋 軍不留行度澤東 王發新城國內城步騎四萬 救遼東 江夏王道宗將四千騎逆之 軍中皆以爲衆寡懸絶 不若深溝高壘以待車駕之至 道宗曰 賊恃衆有輕我心 遠來疲頓 擊之必敗 當淸路以待乘輿 乃更以賊遺君父乎 都尉馬文擧曰 不遇勍敵 何以顯壯士 策馬奔擊 所向皆靡 衆心稍安 旣合戰 行軍總管張君乂 退走 唐兵敗  道宗收散卒 登高而望見 我軍陣亂 與驍騎數千衝之 李世勣引兵助之 我軍大敗 死者千餘人」

 

「당제(唐帝)가 요수를 건너자 다리를 걷어치워 사졸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마수산에 진을 쳤다. 강하왕 도종에게 위로하여 선물을 내리고, 마문거는 승진시켜 중랑장을 삼았으며, 장군예는 목을 베었다. 당제가 몸소 수백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아래에 이르러, 사졸들이 흙을 져서 해자를 메우는 것을 보고 가장 무거운 짐을 나누어 말 위에 얹으니, 시종관들이 다투어 흙을 져다 성 밑에 놓았다. 이세적이 요동성을 공격하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고 12일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당제가 정예군을 이끌고 와서 합세하여 그 성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니 북소리와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고 사당에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령되게 말하기를 전연 시대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포위가 급해지자 미녀를 치장하여 부신으로 만들어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니 성은 꼭 안전할 것이다"고 하였다. 세적이 포거를 벌려놓고 큰 돌을 날리니 300보 넘게 날아가 맞는 것마다 이내 부서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다락을 만들고 밧줄로 만든 그물을 쳤으나 막을 수 없었다. 충차로 성가퀴를 쳐서 부수었다. 이때 백제가 검붉게 칠한 쇠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만들어 바치니, 당 군사들이 이것을 입고 따랐다. 당제가 세적과 만나니 갑옷 빛이 햇빛에 빛났다. 남풍이 세게 불자, 당제가 날랜 군사를 보내 충거의 장대 끝에 올라가 성의 서남쪽 다락에 불을 지르게 하고, 불이 성 안으로 번지자 장병들을 지휘하여 성으로 올라갔다. 우리 군사들은 힘껏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죽은 자는 만여명이었고, 포로 된 자가 만여명, 남녀가 4만명이었으며, 양곡은 50만석을 빼앗겼다. 그 성을 요주로 삼았다. 帝度遼水 撤橋以堅士卒之心 軍於馬首山 勞賜江夏王道宗 超拜馬文擧中郞將 斬張君乂 帝自將數百騎 至遼東城下 見士卒負土塡塹 帝分其尤重者 於馬上持之 從官爭負土置城下 李世勣攻遼東城 晝夜不息 旬有二日 帝引精兵會之 圍其城數百重 鼓  聲振天地 城有朱蒙祠 祠有鎖甲  矛 妄言前燕世天所降 方圍急 飾美女以婦神 巫言 朱蒙悅 城必完 勣列砲車 飛大石過三百步 所當輒潰 吾人積木爲樓 結  罔 不能拒 以衝車撞  屋碎之 時 百濟上金휴鎧 又以玄金爲文鎧 士被以從 帝與勣會 甲光炫日 南風急 帝遣銳卒 登衝竿之末  其西南樓 火延燒城中 因揮將士登城 我軍力戰不克 死者萬餘人 見捉勝兵萬餘人男女四萬口糧五十萬石 以其城爲遼州」 

 

 

당제(唐帝)는 이세적 등보다 2달이나 늦은 4월 초순에 유주(幽州)를 출발하여 요택(遼澤)을 지나 요수(遼水 : 난하)를 건넌 후 다리를 끊고 마수산(馬首山)에 주둔하여 요동성(遼東城) 공격을 독려하였다. 이때 당제(唐帝)가 다리를 끊은 것은 고구려를 항복받기 전에는 당나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의를 군사들에게 보여 준 것이다. 그런데 전황을 보면 개모성(盖牟城)을 점령한 이세적(李世勣) 등이 거느린 군사들이 난하 동쪽으로 와서 요동성 공격에 합세하였다. 이는 애초 작전계획대로 전황이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 작전계획은 당제(唐帝)와 장검(張儉)이 거느린 군사들이 당산(唐山) 방면의 건안성(建安城)을 점령하고, 이어서 안시성(安市城), 요동성(遼東城) 순서로 점령한 후 진군하여 대릉하(大凌河)를 지나 현도(玄菟), 요양(遼陽)으로 가는 것이었는데, 장검(張儉)의 건안성 점령이 실패하고, 이어서 투입한 장량(張亮)의 수군(水軍)도 건안성 점령에 실패하자 당제(唐帝)가 거느린 6군은 공격하기 어려운 안시성(安市城) 공격을 피하고 난하 동쪽의 요동성(遼東城)으로 향하자 당제의 안전을 위하여 요동반도 방면에서 싸우던 이세적, 이도종이 요하(遼河) 동쪽 방면의 공격을 중단하고 난하 동쪽으로 이동하여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하는 당제(唐帝)와 합류한 것이다.

 

이 전쟁에서 당제의 진군일자를 살펴본다.

 

二月庚戌上自將諸軍發洛陽..중략..癸亥(2.24)上至鄴..중략..是月 李世勣軍至幽州 三月丁丑(3.9)車駕至定州..중략..壬辰(3.24)車駕發定州 親佩弓矢 手結雨衣於鞍後 命長孫元忌攝侍中 楊師道攝中書令 李世勣軍發柳城 多張形勢 若出懷遠鎮者 而潛師北趣甬道 出高麗不意 夏四月 戊戌朔 世勣自通定濟遼水 至玄菟 高麗大駭 城邑皆閉門自守 壬寅 遼東道副大總管江夏王道宗將兵數千至新城 折沖都尉曹三良引十餘騎直壓城門 城中驚擾 無敢出者 營州都督張儉將胡兵為前鋒 進渡遼水 趨建安城 破高麗兵 斬首數千級 太子引高士廉同榻視事 又令更為士廉設案 士廉固辭 丁未(4.10)車駕發幽州..중략..壬子李世勣 江夏王道宗攻高麗蓋牟城 丁巳(4.20)車駕至北平 癸亥李世勣等拔蓋牟城 獲二萬餘口 糧十餘萬石資治通鑒 卷第一百九十七 唐紀十三

十九年春 二月庚戌(2.11)上親統六軍發洛陽 乙卯 詔皇太子留定州監國 開府儀同三司 申國公高士廉攝太子太傅 與侍中劉洎 中書令馬周 太子少詹事張行成 太子右庶子高季輔五人同掌機務 以吏部尚書 安德郡公楊師道為中書令 贈殷比干為太師 謚曰忠烈 命所司封墓 葺祠堂 春秋祠以少牢 上自為文以祭之 三月壬辰上發定州以司徒 太子太師兼檢校侍中 趙國公長孫無忌 中書令岑文本 楊師道從 夏四月癸卯誓師於幽州城南 因大饗六軍以遣之 丁未中書令岑文本卒於師癸亥遼東道行軍大總管 英國公李勣攻蓋牟城破之 五月丁醜車駕渡遼 甲申上親率鐵騎與李勣會圍遼東城 因烈風發火弩 斯須城上屋及樓皆盡 麾戰士令登乃拔之 六月丙辰師至安市城 丁巳高麗別將高延壽.高惠真帥兵十五萬來援安市 以拒王師 李勣率兵奮擊 上自高峰引軍臨之 高麗大潰 殺獲不可勝紀 延壽等以其眾降 因名所幸山為駐蹕山 刻石紀功焉 賜天下大酺二日 秋七月李勣進軍攻安市城 至九月不克乃班師 冬十月丙辰入臨渝關 皇太子自定州迎謁 戊午次漢武台刻石以紀功德 十一月辛未幸幽州 癸酉大饗還師」 舊唐書 本紀第三 太宗下

「張儉字師約 京兆新豐人..中略..太宗將征遼東 遣儉率蕃兵先進略地 至遼西川漲久未度 帝以為畏懦 召還 見洛陽宮 陳水草美惡山川險易 并久不進狀 帝悅 拜行軍總管 使領諸蕃騎 為六軍前鋒 時高麗候者言莫離支且至 帝召儉自新城路邀擊 虜不敢出 儉進度遼 趨建安城 破賊 斬數千級」 新唐書 張儉 列傳

「前略. 太宗將征遼東 遣儉率蕃兵先行抄掠 儉軍至遼西 為遼水汎漲 久而未渡 太宗以為畏懦 召還 儉詣洛陽謁見面陳利害因說水草好惡 山川險易 太宗甚悅仍拜行軍總管 兼領諸蕃騎卒 為六軍前鋒 時有獲高麗候者 稱莫離支將 至遼東 詔儉率兵 自新城路 邀擊之 莫離支竟不敢出 儉因進兵渡遼 趨建安城 賊徒大潰 斬首數千級.後略」[舊唐書] 張儉 列傳

 

위 문구를 보면, 645년 2월 초 이세적 등 유주 출발, 2월 11일 당제 낙양 출발, 2월 24일 당제 업 도착, 3월 9일 당제 정주 도착, 3월 24일 이세적 등 유성 출발, 3월 24일 당제 정주 출발, 3월 하순 당제 신성에서 장검에게 막리지 요격하라고 명령, 4월 1일 이세적과 이도종 등 요하를 건너 이세적은 현도성 공격, 4월 1일 영주도독 장검 요수(백하) 건너 건안성으로 향함, 4월 5일 이도종 신성 포위, 4월 5일 영주도독 장검 건안성 공격, 4월 10일 당제 유주 출발, 4월 15일 이세적과 이도종 개모성 공격, 4월 20일 당제 북평 도착, 4월 26일 이세적 등 개모성 점령, 5월 2일 장량의 수군 비사성 점령, 5월 3일 당제 요택 도착, 5월 5일 당제 요택 건넘, 5월 8일 고구려 보기병 4만명 요동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옴. 5월 10일 당제 요수 건넘, 5월 10일 당제 마수산에 진을 치고 요동성 공격 독려, 5월 17일 화공으로 요동성 점령.

 

고당전쟁 전황에 나오는 요수(遼水)는 난하이고, 요동성(遼東城), 마수산, 백암성(白巖城)은 요수(遼水)를 건넌 후에 있으므로 난하 동쪽에 있었다. 요동성(遼東城)이 함락되자 그 남쪽에 있는 백암성(白巖城)도 항복을 했다.

 

「이세적이 백암성 서남방으로 진공하고 당제(唐帝)가 그 서북쪽에 이르니, 성주 손대음이 몰래 심복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성에 이르러 칼과 도끼를 내던지는 것을 신표로 삼고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고 말하였다. 당제가 당나라 깃발을 사자에게 주며 “정녕 항복하려고 한다면 이것을 성 위에 세워라.”고 말하였다. 대음이 깃발을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은 당군이 이미 성으로 올라온 것으로 여기고 모두 그를 따랐다. 당제가 요동성에서 이겼을 때에, 백암성이 항복을 청했다가 얼마 후에 후회하였으므로, 당제는 그들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에 노하여 군중에 명령을 내려 “성을 빼앗으면 반드시 그 사람과 물건들을 전부 전사들에게 상으로 줄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이세적은 당제가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려는 것을 보고 갑옷 입은 군사 수십명을 거느리고 가서 청하였다. "사졸들이 다투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죽음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노획물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이 거의 함락되었는데 어찌 다시 그 항복을 받아들여서 전사들의 마음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당제가 말에서 내려 사과하며 말하였다.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이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장군 휘하의 공이 있는 자에게는 짐이 창고의 물건으로 상을 줄 터이니, 장군은 이 한 성과 바꾸기 바란다.” 세적은 그제야 물러났다. 성 안의 남녀 만여명을 붙잡아,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고 그들에게 음식을 내렸으며, 80세 이상 된 자에게는 비단을 차등있게 내렸다. 다른 성의 군사로서 백암성에 있던 자는 모두 위로하여 타이르고 양식과 병장기를 주어 그들이 가는 대로 맡겨 두었다. 李世勣進攻白巖城西南 帝臨其西北 城主孫代音 潛遣腹心請降 臨城投刀鉞爲信曰 奴願降 城中有不從者 帝以唐幟與其使曰 必降者 宜立之城上 代音立幟 城中人以爲唐兵已登城 皆從之 帝之克遼東也 白巖城請降 旣而中悔 帝怒其反覆 令軍中曰 得城 當悉以人物賞戰士 李世勣見帝將受其降 帥甲士數十人 請曰 士卒所以爭冒矢石 不顧其死者 貪虜獲耳 今城垂拔 奈何更受其降 孤戰士之心 帝下馬謝曰 將軍言是也 然縱兵殺人而虜其妻 朕所不忍 將軍麾下有功者 朕以庫物賞之 庶因將軍贖此一城 世勣乃退 得城中男女萬餘口 臨水設幄 受其降 仍賜之食 八十已上 賜帛有差 他城之兵在白巖者 悉慰諭給糧仗 任其所之」

 

「이에 앞서 요동성의 장사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 성사가 그의 처자를 받들고 백암성으로 도망하였다. 당제는 그가 의리가 있는 것을 어여삐 여겨 비단 5필을 내리고, 장사를 위하여 상여를 만들어 주고 평양으로 돌려보냈다. 백암성을 암주라 하고 손대음을 자사로 삼았다. 이전에 막리지는 가시성 사람 700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이 그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그 사람들은 종군하여 스스로 공을 세우기를 청하니, 당제가 말하였다. “너희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는데, 너희가 나를 위하여 싸우면 막리지가 필시 너희 처자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고서 한 집안을 멸망시키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모두에게 양식을 주어 보내고 개모성을 개주라고 하였다. 先是 遼東城長史 爲部下所殺 其省事奉其妻子 奔白巖 帝憐其有義 賜帛五匹 爲長史造靈輿 歸之平壤 以白巖城爲巖州 以孫代音爲刺史 初 莫離支遣加尸城七百人 戍盖牟城 李世勣盡虜之 其人請從軍自 帝曰 汝家皆在加尸 汝爲我戰 莫離支必殺汝妻子 得一人之力而滅一家 吾不忍也 皆 賜遣之 以盖牟城爲蓋州

 

요동성을 점령한 당나라 군사가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자 고구려는 고구려 군사와 말갈(靺鞨) 군사 15만명을 동원하여 안시성(安市城)을 구원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군 지휘관인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당제(唐帝)가 안시성에 이르러 군사를 보내 공격하니,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은 우리 군사와 말갈 군사 15만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당제가 근신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연수에게는 책략이 3가지 있을 것이다.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와 안시성을 연결하여 보루로 삼고, 높은 산의 험한 지세를 의거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며 말갈 군사를 풀어 우리의 소와 말을 빼앗으면, 우리가 공격해도 갑자기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요, 돌아가려 하면 진흙으로 막혀, 앉아서 우리 군사를 피곤하게 할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다. 성 안의 군사를 뽑아 함께 밤에 도망치는 것은 중책이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나와서 우리와 싸우는 것은 하책이다. 그대들은 보아라. 그들은 필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그들을 사로잡는 것은 내 눈 앞에 있다.” 그때 대로 고정의는 연로하여 일을 익히 잘 알았는데 연수에게 말하였다. “진왕이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 사람은 일세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천하의 무리를 데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지 않고 시간을 보내며, 오랫동안 버티면서 기습병을 나누어 보내, 그 군량 길을 끊는 것이 낫다. 양식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할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그제야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연수는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가 안시성에서 40리 떨어진 곳까지 갔다. 帝至安市城 進兵攻之 北部耨薩高延壽南部耨薩高惠眞 帥我軍及靺鞨兵十五萬 救安市 帝謂侍臣曰 今爲延壽策有三 引兵直前 連安市城爲壘 據高山之險 食城中之粟 縱靺鞨掠吾牛馬 攻之不可猝下 欲歸則泥  爲阻 坐困吾軍 上策也 拔城中之衆 與之宵遯 中策也 不度智能 來與吾戰 下策也 卿曹觀之 彼必出下策 成擒在吾目中矣 時 對盧高正義年老習事 謂延壽曰 秦王內芟  雄 外服戎狄 獨立爲帝 此命世之才 今擧海內之衆而來 不可敵也 爲吾計者 莫若頓兵不戰 曠日持久 分遣奇兵 斷其糧道 糧食旣盡 求戰不得 欲歸無路 乃可勝 延壽不從 引軍直進 去安市城四十里」

 

「당제(唐帝)는 그가 머뭇거리면서 오지 않을까 염려해서 대장군 아사나사이에게 명령하여, 돌궐 기병 1천명을 거느리고 가서 유인하고 첫 교전에 거짓으로 달아났다. 연수는 “상대하기 쉽구나.” 하고 다투어 나아가 그들을 이기고, 안시성 동남쪽 8리 되는 곳에 이르러 산에 기대어 진을 쳤다. 당제가 여러 장수를 모두 모아 계책을 물으니, 장손무기가 대답하였다. “신은 듣건대 ‘적과 대하여 싸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사졸들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고 합니다. 신은 마침 여러 군영을 지나가다가, 사졸들이 고구려가 왔다는 것을 듣고 모두 칼을 뽑고 깃발을 매어 달면서 얼굴에 즐거운 빛을 나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반드시 이길 군사들입니다. 폐하께서는 스무 살 이전에 친히 군진에 나가 기습병을 내어 이겼으니, 모두 위로 제의 계획을 받고 여러 장수들이 계책을 받들어 이루었을 뿐입니다. 오늘의 일은 폐하께서 지휘하십시오.” 당제가 웃으며 여러분이 이와 같이 사양하니 짐은 마땅히 여러분을 위하여 헤아려 생각하겠다고 말하고 장손무기 등 따르는 기병 수백명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며, 산천 형세가 군사를 숨길만한 곳과 드나들 수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 우리 군대는 말갈과 군사를 합해 진을 쳤는데, 길이가 40리나 되었으므로 당제가 그것을 바라보고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 帝恐其低徊不至 命大將軍阿史那社이 將突厥千騎以誘之 兵始交而僞走 延壽曰 易與耳 競進乘之 至安市城東南八里 依山而陣 帝悉召諸將問計 長孫無忌對曰 臣聞 臨敵將戰 必先觀士卒之情 臣適行經諸營 見士卒聞高句麗至 皆拔刀結  喜形於色 此必勝之兵也 陛下未冠 身親行陣 凡出奇制勝 皆上稟聖謀 諸將奉成  耳 今日之事 乞陛下指  帝笑曰 諸公以此見讓 朕當爲諸公商度 乃與無忌等 從數百騎 乘高望之 觀山川形勢 可以伏兵及出入之所 我軍與靺鞨合兵爲陣 長四十里 帝望之 有懼色」

 

「강하왕 도종이 말하였다. “고구려가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천자의 군대를 막고 있으므로 평양의 수비는 필시 약할 것입니다. 원컨대 신에게 정예 군사 5천명을 주십시오. 그 근본을 엎으면 수십만의 군대를 싸우지 않고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당제가 듣지 않고 사신을 고연수에게 보내 말하였다. “나는 너희 나라의 권력있는 신하가 임금을 죽였으므로 죄를 묻기 위하여 왔는데, 교전하기까지에 이른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너희 국경에 들어오니 꼴과 양식이 부족하여서 몇 개의 성을 빼앗은 것이다.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를 갖추면 잃은 것을 반드시 돌려줄 것이다.” 고연수는 이 말을 믿고 다시 방비를 하지 않았다. 당제가 밤에 문무관을 불러 일을 계획하고, 이세적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1만5천명을 거느리고 서쪽 고개에서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이 정예군 1만1천명을 거느려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북쪽으로부터 협곡으로 나와 그 뒤를 공격하게 하였다. 당제는 스스로 보병과 기병 4천명을 거느려 북과 피리를 가지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라갔다. 당제는 여러 군대에게 명령하여 북과 피리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나와 힘을 내어 공격하게 하고, 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조당 옆에 항복을 받을 장막을 설치하였다. 江夏王道宗曰 高句麗傾國以拒王師 平壤之守必弱 願假臣精卒五千 覆其本根 則數十萬之衆 可不戰而降 帝不應 遣使  延壽曰 我以爾國强臣弑其主 故來問罪 至於交戰 非吾本心 入爾境 芻粟不給 故取爾數城 俟爾國修臣禮 則所失必復矣 延壽信之 不復設備 帝夜召文武計事 命李世勣將步騎萬五千 陣於西嶺 長孫無忌牛進達 將精兵萬一千爲奇兵 自山北出於狹谷 以衝其後 帝自將步騎四千 挾鼓角 偃旗幟 登山 帝  諸軍 聞鼓角 齊出奮擊 因命有司 張受降幕於朝堂之側

 

「이날 밤 유성이 고연수의 진영에 떨어졌다. 이튿날 고연수 등은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군대를 통솔하여 싸우려고 하였다. 당제(唐帝)가 장손무기의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깃발을 들 것을 명령하니, 여러 군대들이 북치고 소리 지르며 일제히 나아왔다. 고연수 등은 두려워 군사를 나누어 막으려고 하였으나 그 군진이 이미 어지러워졌다.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용문 사람 설인귀가 기이한 옷을 입고 크게 소리치며 군진을 함락시키니, 향하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었고, 우리 군사들은 쓰러졌다. 대군이 들이치니 우리 군사들은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3만 여 명이었다. 당제가 설인귀를 바라보고 유격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고연수 등은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으나, 당제가 여러 군대에 명하여 포위하고, 장손무기가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귀로를 끊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무리 3만 6천 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고,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엎드려 목숨을 빌었다. 당제가 욕살 이하 장관 3천5백 명을 가려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 3백 명을 잡아서 모두 파묻고, 말 5만필과 소 5만 두와 명광개 1만을 노획하였다. 다른 기계들도 이만큼 되었다. 당제가 갔던 산 이름을 고쳐 주필산이라 하였다. 고연수를 홍려경으로, 고혜진을 사농경으로 삼았다. 是夜 流星墜延壽營 旦日 延壽等獨見李世勣軍少勒兵欲戰 帝望見無忌軍塵起 命作鼓角 擧旗幟 諸軍鼓  進 延壽等懼 欲分兵禦之 而其陣已亂 會有雷電 龍門人薛仁貴 著奇服 大呼陷陣 所向無敵 我軍披靡 大軍乘之 我軍大潰 死者二萬餘人 帝望見仁貴 拜遊擊將軍 延壽等將餘衆 依山自固 帝命諸軍圍之 長孫無忌悉撤橋梁 斷其歸路 延壽惠眞帥其衆三萬六千八百人 請降 入軍門拜伏請命 帝簡  薩已下官長三千五百人 遷之內地 餘皆縱之 使還平壤 收靺鞨三千三百人 悉坑之 獲馬五萬匹牛五萬頭明光鎧萬領  器械稱是 更名所幸山曰駐蹕山 以高延壽爲鴻臚卿 高惠眞爲司農卿」

 

당나라 군사는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으나 성(城)이 함락되지 않은 채 시일만 흘러가자 당나라에 항복한 고연수(高延壽), 고혜진(高惠眞)은 당제(唐帝)에게 안시성(安市城)을 그냥 두고 비사성(卑沙城)으로 가서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당나라 수군(水軍)을 동원하여 오골성(烏骨城)을 빼앗아 버리면 중간(中間)의 역로(驛路)에 있는 작은 성들은 놀라서 그 바람에 무너질 것이니, 그 다음 천천히 압록강을 건너서 평양을 빼앗으면 된다고 주청(奏請)하였다. 오골성의 위치에 대하여 신당서(新唐書)에는 오골강(烏骨江)이 압록강으로 적혀 있고, 전황에는 오골성이 압록강에서 멀지 않은 곳이고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고 적혀 있으므로, 오골성은 천산산맥(千山山脈)을 지나 의주(義州)로 가는 길목에 있는 봉황성(鳳凰城)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당제(唐帝)가 적진 깊숙한 곳에 있는 오골성을 빼앗으러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므로, 장손무기(長孫無忌)의 반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당군은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 못한 채 겨울이 다가 오자 철군하였다.

 

「당제(唐帝)는 백암성에서 이기자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안시성은 험하고 군사가 날래며 그 성주는 재능과 용기가 있어 막리지의 난 때에도 성을 지켜 굴복하지 않았고, 막리지가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킬 수 없어서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건안성은 군사가 약하고 양식이 적으므로 불시에 나가 그들을 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공은 먼저 건안성을 치라. 건안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은 내 배 안에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병법에서 말하는 성에는 치지 않을 곳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세적이 대답하였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는데 지금 안시성을 지나쳐 건안성을 쳤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 군량 길을 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여 안시성이 떨어지면, 북 치며 나아가 건안성을 빼앗는 것이 낫겠습니다.” 당제가 “공을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공의 책략을 쓰지 않겠느냐? 내 일을 그르치지는 말라.”고 말하였다.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는데 안시성 사람들은 당제의 깃발과 일산을 보고 즉시 성에 올라 북치며 소리 질렀다. 당제가 노하자 이세적은 성을 빼앗는 날에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릴 것을 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더욱 굳게 지키니 오랫동안 공격하여도 함락되지 않았다. 帝之克白巖也 謂李世勣曰 吾聞 安市城險而兵精 其城主材勇 莫離支之亂 城守不服 莫離支擊之 不能下 因而與之 建安兵弱而糧少 若出其不意 攻之必克 公可先攻建安 建安下 則安市在吾腹中 此兵法所謂城有所不攻者也 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 今踰安市而攻建安 若麗人斷吾糧道 將若之何 不如先攻安市 安市下 則鼓行而取建安耳 帝曰 以公爲將 安得不用公策 勿誤吾事 世勣遂攻安市 安市人望見帝旗蓋 輒乘城鼓   帝怒 世勣請克城之日 男子皆坑之 安市人聞之 益堅守 攻久不下」

 

「고연수, 고혜진이 당제(唐帝)에게 청하여 말하였다. “저희가 이미 대국에 몸을 맡기었으니 감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큰 공을 빨리 이루어 저희가 처자와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들의 집안을 돌보고 아껴서 사람마다 자진해서 싸우므로 쉽게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저희는 고구려의 10여만명의 군사를 가지고도 깃발을 보고는 사기가 꺾이고 허물어졌으니, 나라 사람들의 간담이 터질 것입니다. 오골성의 욕살이 늙어서 성을 굳게 지킬 수 없으므로 군사를 옮겨 그곳으로 가면 아침에 가서 저녁에 이길 것이며, 그 나머지 길을 막는 작은 성들은 반드시 위엄을 보고는 달아나고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그런 후에 물자와 양식을 거두어서 북치고 나아가면 평양도 결코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군신들도 역시 말하였다. “장량의 군사가 비사성에 있으므로 그를 부르면 이틀 후면 올 수 있을 것이니, 고구려가 두려워하는 틈을 타서 힘을 모아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수를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싸움에 달렸습니다.” 당제가 그 말에 따르려 하는데 장손무기만이 홀로 이렇게 말하였다. “천자의 친정은 장수의 정벌과 달라서 요행을 바랄 수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적의 무리가 10만명이나 되는데, 만약 오골성으로 향한다면 그들이 우리의 뒤를 밟을 것입니다. 먼저 안시성을 깨뜨리고 건안성을 빼앗은 후에 군사를 몰고 나아가는 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 당제가 그 말을 듣고 그만 두었다.  高延壽高惠眞請於帝曰 奴旣委身大國 不敢不獻其誠 欲天子早成大功 奴得與妻子相見 安市人顧惜其家 人自爲戰 未易猝拔 今 奴以高句麗十餘萬衆 望旗沮潰 國人膽破 烏骨城욕薩老  不能堅守 移兵臨之 朝至夕克 其餘當道小城 必望風奔潰 然後收其資糧 鼓行而前 平壤必不守矣 群臣亦言 張亮兵在沙城 召之 信宿可至 乘高句麗  懼 倂力拔烏骨城 度鴨淥水 直取平壤 在此擧矣 帝將從之 獨長孫無忌以爲 天子親征異於諸將 不可乘危  幸 今建安新城之虜衆 猶十萬 若向烏骨 皆  吾後 不如先破安市 取建安 然後長驅而進 此萬全之策也 帝乃止」 

 

「여러 장수가 급히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당제(唐帝)가 성 안에서 닭과 돼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성을 포위한 지 오래되어 성 안에서 나는 연기가 날로 작아지더니 이제 닭과 돼지가 매우 시끄럽게 우니, 이것은 필시 군사들을 먹이고 밤에 나와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땅히 군사들을 엄하게 하여 대비해야 한다.” 이날 밤에 우리 군사 수백명은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갔다. 당제가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성 밑에 이르러 군사를 불러 급히 공격하니,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수십명이었고 나머지 군사는 물러났다. 강하왕 도종이 무리를 독려하여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흙으로 산을 쌓고 성을 핍박하니, 성 안에서도 역시 성을 더욱 높혀서 이것을 막았다. 사졸들은 번을 나누어 싸웠는데 하루에 예닐곱 차례 맞붙었다. 충거와 포석으로 그 루첩을 무너뜨리면, 성 안에서도 따라서 목책을 세워 그 무너진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상하자 당제가 친히 침을 놓아 주었다. 산을 쌓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아 60일 동안 인력을 들인 것이 50만 명이었다. 산 꼭대기는 성에서 몇 길 떨어졌으므로 밑으로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도종이 과의 부복애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산꼭대기에 둔을 치고 적에 대비하도록 하였는데, 산이 무너지면서 성을 눌러 성이 무너졌다.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부대를 떠나 있었는데, 우리 군사 수백명은 성이 무너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흙산을 빼앗아 해자를 파고 지켰다. 諸將急攻安市 帝聞城中 聲 謂世勣曰 圍城積久 城中烟火日微 今鷄  甚喧 此必饗士 欲夜出襲我 宜嚴兵備之 是夜 我軍數百人  城而下 帝聞之 自至城下 召兵急擊 我軍死者數十人 餘軍退走 江夏王道宗 督衆築土山於城東南隅 浸逼其城 城中亦增高其城 以拒之 士卒分番 交戰日六七合 衝車  石 壞其樓堞 城中隨立木柵 以塞其缺 道宗傷足 帝親爲之針 築山晝夜不息 凡六旬 用功五十萬 山頂去城數丈 下臨城中 道宗使果毅傅伏愛 將兵屯山頂以備敵 山頹壓城 城崩 會 伏愛私離所部 我軍數百人 從城缺出戰 遂奪據土山 塹而守之」

 

「당제(唐帝)가 노하여 부복애를 목베어 두루 돌리고,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3일이 지나도 이기지 못하였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에 나아가 죄를 청하니 당제가 말하였다. “너의 죄는 마땅히 죽을 만하나, 다만 짐은 한나라 무제가 왕회를 죽인 것은, 진나라 목공이 맹명을 쓴 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기며, 또 개모성과 요동성을 깨뜨린 공이 있으므로 특별히 너를 용서할 뿐이다.” 당제는 요동은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다 떨어져가므로 군사를 돌릴 것을 명령하였다. 먼저 요주, 개주 2주의 호구를 뽑아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밑에서 군대의 위엄을 보이고 돌아갔다.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으나 성주가 성에 올라 절하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당제는 그가 굳게 지킨 것을 가상하게 여겨 비단 100필을 주면서 임금 섬기는 것을 격려하였다. 이세적과 이도종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4만명을 거느리고 후군이 되게 하였다. 帝怒斬伏愛以徇 命諸將攻之 三日不能克 道宗徒跣詣旗下 請罪 帝曰 汝罪當死 但朕以漢武殺王恢 不如秦穆用孟明 且有破盖牟遼東之功 故特赦汝耳 帝以遼左早寒 草枯水凍 士馬難久留 且糧食將盡  班師 先拔遼盖二州戶口 度遼 乃耀兵於安市城下而旋 城中皆屛跡不出 城主登城拜辭 帝嘉其固守 賜  百疋 以勵事君 命世勣道宗 將步騎四萬爲殿」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는데 요택이 진창이 되어 수레와 말이 지나갈 수 없으므로,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당제는 스스로 말채찍 끈으로 섶을 묶어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당제가 포구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길을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여러 군대가 발착수를 건너니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려서 사졸들이 습기에 젖어 죽는 자가 많았으므로, 명령을 내려 길에 불을 피워 맞이하게 하였다. 무릇 현도, 횡산, 개모, 마미, 요동, 백암, 비사, 협곡, 은산, 후황 10성을 함락시키고, 요주, 개주, 암주 3주의 호구를 옮겨 중국으로 들어간 자가 7만명이었다. 고연수는 항복한 뒤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근심으로 죽었고,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이르렀다. 신성 건안 주필의 세 대전에서 우리 군사와 당나라의 병마가 죽은 것이 매우 많았다. 당제는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여 탄식하기를 “위징이 있었다면 내가 이번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至遼東度遼水 遼澤泥  車馬不通 命無忌 將萬人  草塡道 水深處 以車爲梁 帝自繫薪於馬  以助役 冬十月 帝至蒲溝駐馬 督塡道 諸軍度渤錯水 暴風雪 士卒沾濕多死者    燃火於道以待之 凡拔玄菟 橫山盖牟磨米遼東白巖卑沙夾谷銀山後黃 十城 徙遼盖巖三州戶口入中國者七萬人 高延壽自降後 常憤歎 尋以憂死 惠眞竟至長安 新城建安駐驊三大戰 我軍及唐兵馬死亡者 甚衆 帝以不能成功 深悔之 嘆曰 魏徵若在 不使我有是行也」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보장왕 6년(A.D 647년) 당 태종이 다시 군대를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신하들의 의견을 물으니 이러하였다. “고구려는 산에 의거하여 성을 쌓아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전에 당제(唐帝)께서 친정하였을 때 그 나라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어, 곡식을 거둬들였으나 가뭄으로 백성들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였습니다. 이제 군대를 자주 보내 번갈아 그 강토를 어지럽히고, 그 무리들이 분주히 움직이도록 하여 지치게 만들면, 그들은 쟁기를 놓고 보로 들어갈 것이며, 수년 동안 천리 들판에 농사짓는 사람이 없으면 인심이 저절로 떠나갈 것이니, 그렇게 되면 압록수 북쪽은 싸우지도 않고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제는 그 말에 따라 좌무위대장군 우진달을 청구도 행군대총관, 우무위장군 이해안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만여명을 거느리고 누선을 타고 래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오게 하고, 또 태자첨사 이세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 등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의 군사를 앞세우고 신성도로부터 들어오게 하였는데, 모두 물에 익숙한 자들로 배치하였다. 이세적의 군사가 요수를 건너 남소 등 성을 지나가자 우리 군사가 모두 성을 등지고 싸웠으나, 이세적은 이를 격파하고 그 라성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가을 7월 우진달과 이해안이 국경을 넘어 들어와 백여 차례나 싸워 석성을 함락시키고 적리성 밑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 만여명이 나가 싸웠으나 이해안이 이를 쳐서 이기니, 죽은 우리 군사가 3천명이었다. 태종이 송주자사 왕파리 등에게 명하여 강남 12주의 공인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게 하고 우리를 치려하였다. 겨울 12월 왕은 둘째아들 막리지 임무를 당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니, 당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六年 太宗將復行師 朝議以爲 高句麗 依山爲城 不可猝拔 前大駕親征 國人不得耕種 所克之城 實收其   繼以旱災 民太半乏食 今若數遣偏師 更迭擾其疆  使彼疲於奔命 釋  入堡 數年之間 千里蕭條 則人心自離 鴨   之北 可不戰而取矣 帝從之 以左武衛大將軍牛進達 爲靑丘道行軍大總管 右武衛將軍李海岸副之 發兵萬餘人 乘樓舡 自萊州泛海而入 又以太子詹事李世勣 爲遼東道行軍大總管 右武衛將軍孫貳郞等副之 將兵三千人 因營州都督府兵 自新城道入 兩軍 皆選習水善戰者 配之  李世勣軍旣度遼 歷南蘇等數城 皆背城拒戰 世勣擊破之 焚其羅郭而還 秋七月 牛進達李海岸入我境 凡百餘戰 攻石城拔之 進至積利城下 我兵萬餘人出戰 李海岸擊克之 我軍死者三千人 太宗   宋州刺史王波利等 發江南十二州工人 造大舡數百   欲以伐我 冬十二月 王使第二子莫離支任武 入謝罪 帝許之」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보장왕(寶臧王) 7년(A.D 648년) 봄 정월 전략. 당제가 조서를 내려 우무위대장군 설만철을 청구도 행군대총관으로, 우위장군 배행방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3만여명과 전함을 거느리고 래주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공격하였다. 여름 4월 오호진 장수 고신감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침공해 와서 우리 보기병 5천명을 만나 역산에서 싸워 깨뜨렸다. 그날 밤 우리 군사 만여명이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였으나 복병에 걸려 우리 군사가 패하였다. 황제는 우리가 곤궁하고 피폐할 것으로 여기고 명년에 30만 군사를 발동하여 단번에 멸망시킬 것을 의논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대군이 동쪽으로 정벌하려면 반드시 한 해를 지낼 군량을 갖추어야 하는데, 짐승과 수레로 실어 나를 수 없으므로 마땅히 배를 갖추어 물로 운반해야 할 것입니다. 수나라 말기에 검남지방만이 도적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근자에 요동 싸움에도 검남은 또 참여하지 않아서 그 백성들이 많고 부유하므로 그들에게 배를 만들게 해야 합니다”. 황제는 그 말에 따랐다. 가을 7월 서울에 사는 여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다. 태종이 좌령좌우부 장사 강위를 검남도로 보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게 하였는데, 큰 것은 혹은 길이가 100자나 되고 넓이는 그 반이나 되었다. 따로 사신을 보내 수로로 가서 무협으로부터 강주 양주에 이르러 래주로 가게 하였다. 9월에 노루 떼가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나고 이리 떼가 서쪽으로 갔는데, 3일 동안 끊이지 않았다. 당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을 보내 침공하게 하니,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 남쪽 4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군영을 쳤다. 박작성주 소부손은 보병과 기병 1만여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설만철이 우위장군 배행방을 보내 보병과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들이 무너졌다. 배행방 등이 군사를 내보내어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에 의거하고, 압록수로 굳게 막혔으므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문은 오골, 안지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는데, 두 진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설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니, 우리 군사는 패하여 무너졌다. 황제가 또 래주자사 이도유에게 명령하여 군량과 기계를 옮겨 오호도에 두게 하고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七年 春正月 帝詔右武衛大將軍薛萬徹 爲靑丘道行軍大總管 右衛將軍裴行方副之 將兵三萬餘人及樓舡戰艦 自萊州 泛海來擊 夏四月 烏胡鎭將古神感將兵浮海來擊 遇我步騎五千 戰於易山 破之 其夜 我軍萬餘人 襲神感舡 神感伏發 乃敗 (六月) 帝謂我困弊 議以明年發三十萬衆 一擧滅之 或以爲大軍東征 須備經歲之糧 非畜乘所能載 宜具舟艦 爲水轉 隋末 劒南獨無寇盜 屬者遼東之役 劒南復不預及 其百姓富庶 宜使之造舟艦 帝從之 秋七月 王都女産子 一身兩頭 太宗遣左領左右府長史强偉於劒南道 伐木造舟艦 大者或長百尺 其廣半之 別遣使行水道 自巫峽 抵江楊 趣萊州 九月   獐渡河西走  狼向西行 三日不絶 太宗遣將軍薛萬徹等來伐 渡海入鴨   至泊灼城南四十里 止營 泊灼城主所夫孫 帥步騎萬餘 拒之 萬徹遣右衛將軍裴行方 領步卒及諸軍乘之 我兵潰 行方等進兵圍之 泊灼城因山設險 阻鴨  水以爲固 攻之不拔 我將高文率烏骨安地諸城兵三萬餘人 來援 分置兩陣 萬徹分軍以當之 我軍敗潰 帝又詔萊州刺史李道裕 轉糧及器械 貯於烏胡島 將欲大擧」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보장왕 14년(A.D 655년) 전략. 여름 5월 정명진 등이 요수를 건너오는데 그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우리 군사가 성문을 열고 나가 귀단수를 건너 마주 싸웠다. 정명진 등이 분발하여 우리 군사를 공격하여 크게 이기고 천여명을 죽이고 사로잡고, 그 외곽과 촌락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十四年 夏 五月 名振等 渡遼水 吾人見其兵少 開門度貴端水 逆戰 名振等奮擊 大克之 殺獲千餘人 焚其外郭及村落而歸」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보장왕 17년(A.D 658년) 여름 6월 당나라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 정명진과 우영군 중랑장 설인귀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十七年 夏六月 唐營州都督兼東夷都護程名振 右領軍中郞將薛仁貴 將兵來攻 不能克」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보장왕 18년(A.D 659년) 겨울 11월 당나라 우영군 중랑장 설인귀 등이 우리 장수 온사문과 횡산에서 싸워서 이를 깨뜨렸다. 十八年 冬十一月 唐右領軍中郞將薛仁貴等 與我將溫沙門 戰於橫山 破之」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보장왕 19년(A.D 660년) 가을 7월에 평양(平壤)의 강 물이 무릇 3일 동안이나 핏빛이었다. 겨울 11월에 당나라가 좌효위대장군 글필하력을 패강도 행군대총관으로,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좌효위장군 유백영을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포주자사 정명진을 루방도 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와서 공격하였다. 十九年 秋七月 平壤河水血色凡三日 冬十一月 唐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 爲浿江道行軍大總管 左武衛大將軍蘇定方 爲遼東道行軍大總管 左驍衛將軍劉伯英 爲平壤道行軍大總管 蒲州刺史程名振 爲鏤方道總管 將兵分道來擊」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보장왕 20년(A.D 661년) 봄 정월 당나라가 하남 하북 회남의 67주의 군사를 모집하여 4만 4천여명을 얻어서 평양 루방 군영으로 나아가고, 또 홍려경 소사업을 부여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회흘 등 여러 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여름 4월 임아상을 패강도 행군총관으로, 글필하력을 요동도 행군총관으로, 소정방을 평양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소사업 및 여러 호병 범 35군이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일제히 전진하게 하였다. 당제가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려 하였으나 울주자사 이군구가 건의하였다.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중국의 모든 힘을 기울일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가 망한다면 반드시 군사를 내어 지켜야 할 터인데, 적게 내면 위엄이 떨쳐지지 않고, 많이 내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터이니, 이것은 천하 백성들이 옮겨다니며 수(戍) 자리 사는 일로 피로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臣)이 생각하건대 정벌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또 무후도 간하였으므로 황제는 그제야 그만두었다. 여름 5월 왕은 장군 뇌음신을 보내어 말갈의 무리를 이끌고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여 열흘이 되도록 풀어주지 않았으므로, 신라는 식량길이 끊겨 성 안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 진영에 떨어지고 또 비가 오고 천둥이 쳤으므로, 뇌우진 등은 의심하고 놀라서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가을 8월 소정방이 우리 군사를 패강에서 깨뜨려 마읍산을 빼앗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9월 연개소문은 그 아들 남생을 보내 정예군 수만명으로써 압록수를 지키게 하였으므로 여러 군대가 건너 올 수 없었다. 글필하력이 이르렀을 때 얼음이 크게 얼었으므로, 글필하력이 무리를 이끌고 어름을 타고 물을 건너 북을 치고 소리 지르며 진격하니, 우리 군사가 무너져 달아났다. 글필하력이 수십리를 뒤쫓아 우리 군사 3만명을 죽이니,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항복하고 남생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마침 군사를 돌리라는 조서가 내려져 돌아갔다. 二十年 春正月 唐募河南北淮南六十七州兵 得四萬四千餘人 詣平壤鏤方行營 又以鴻  卿蕭嗣業 爲扶餘道行軍總管 帥回紇等諸部兵 詣平壤 夏四月 以任雅相 爲浿江道行軍總管 契苾何力 爲遼東道行軍總管 蘇定方 爲平壤道行軍總管 與蕭嗣業及諸胡兵凡三十五軍 水陸分道   進 帝欲自將大軍 蔚州刺史李君球立言 高句麗小國 何至傾中國事之有 如高句麗旣滅 必發兵以守 小發則威不振 多發則人不安 是天下疲於轉戍 臣謂 征之未如勿征 滅之未如勿滅 亦會武后諫帝 乃止 夏五月 王遣將軍惱音信 領靺鞨衆 圍新羅北漢山城 浹旬不解 新羅餉道絶 城中危懼 忽有大星落於我營 又雷雨震擊 惱音信等 疑駭引退 秋八月 蘇定方破我軍於浿江 奪馬邑山 遂圍平壤城 九月 蓋蘇文遣其子男生 以精兵數萬守鴨   諸軍不得渡 契苾何力至 値氷大合 何力引衆乘氷度水 鼓  而進 我軍潰奔 何力追數十里 殺三萬人 餘衆悉降 男生僅以身免 會 有詔班師 乃還」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보장왕 21년(A.D 662년) 봄 정월 좌효위장군 백주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사수 가에서 연개소문과 싸웠는데, 전군이 몰락하고 그 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소정방이 평양을 포위하였으나 마침 큰 눈이 와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무릇 전후에 걸친 행군에서 모두 큰 성과 없이 물러갔다. 二十一年 春正月 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總管龐孝泰 與蓋蘇文戰於蛇水之上 擧軍沒 與其子十三人 皆戰死 蘇定方圍平壤 會大雪 解而退 凡前後之行 皆無大功而退」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보장왕(寶臧王) 26년(A.D 667년) 가을 9월 이세적이 신성(註 심양 동북 방면)을 함락시키고 글필하력을 시켜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이세적이 처음 요수를 건널 때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신성은 고구려의 서쪽 변방의 요지이니 먼저 그곳을 빼앗지 않고서는 나머지 성들도 쉽게 빼았을 수 없다.” 마침내 공격하니 성 사람 사부구 등이 성주를 묶고 문을 열어 항복하였다. 이세적이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니 16성이 모두 함락되었다. 방동선과 고간이 아직 신성에 있었는데 남건이 군사를 보내 그 진영을 습격하니, 좌무위장군 설인귀가 이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고간이 나와 금산에 이르러 우리 군사와 싸우다 패하자, 우리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고 적을 추격하여 패주시켰으나, 설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측면에서 공격하여 우리 군사 5만여명을 죽이고, 남소 목저 창암 3성을 함락시키고 남생의 군사와 합하였다. 곽대봉이 수군을 데리고 다른 길로부터 평양으로 달려왔다. 이세적이 별장 풍사본을 보내 군량과 병장기를 싣고 가 공급하게 하였는데, 풍사본의 배가 부서져서 시기를 놓쳐 곽대봉의 군사들이 굶주리고 궁핍하였다. 곽대봉이 글을 지어 이세적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적이 빼앗아 보고 그 허실을 알게 될까 두려워하여, 이합시를 지어 이세적에게 주었다. 이세적이 노하여 “군의 사정이 급한데 무슨 시냐? 꼭 목을 베겠다.”고 말하였다. 행군관기통사사인 원만경이 그 뜻을 풀어주니 이세적이 그제야 다시 군량과 병장기를 보내 주었다. 원만경이 격문을 지어 “압록강의 험한 곳을 지킬 줄 모른다.”고 하니, 남건이 회보하기를 “삼가 명을 받들겠다.”고 하고는 곧 군사를 옮겨 압록강 나루에서 웅거하니, 당나라 군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고종이 듣고 원만경을 영남으로 귀양보냈다. 학처준이 안시성 밑에 있으면서 미처 대열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우리 군사 3만이 갑자기 닥치니 군중이 크게 놀랐다. 학처준이 호상 위에 걸터 앉아 막 마른 밥을 먹다가 정예 군사를 뽑아 우리 군사를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二十六年 秋九月 李勣拔新城 使契苾何力守之 勣初渡遼 謂諸將曰 新城高句麗西邊要害 不先得之 餘城未易取也 遂攻之 城人師夫仇等 縛城主開門降 勣引兵進擊 一十六城皆下 龐同善高侃 尙在新城 泉男建遣兵襲其營 左武衛將軍薛仁貴擊破之 侃進至金山 與我軍戰敗 我軍乘勝逐北 薛仁貴引兵橫擊之 殺我軍五萬餘人 拔南蘇木  蒼  三城 與泉男生軍合 郭待封以水軍 自別道趣平壤 勣遣別將馮師本 載糧仗以資之 師本舡破失期 待封軍中飢窘 欲作書與勣 恐爲他所得 知其虛實 乃作離合詩以與勣 勣怒曰 軍事方急 何以詩爲 必斬之 行軍管記通事舍人元萬頃 爲釋其義 勣乃更遣糧仗赴之 萬頃作檄文曰 不知守鴨   之險 泉男建報曰 謹聞命矣 卽移兵據鴨   津 唐兵不得度 高宗聞之 流萬頃於嶺南   處俊在安市城下 未及成列 我軍三萬掩至 軍中大駭 處俊據胡床 方食乾   簡精銳擊敗之」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보장왕(寶臧王) 27년(A.D 668년) 전략. 가을 9월 이세적이 평양을 함락시켰다. 이세적이 이미 대행성에서 이기자, 다른 길로 나왔던 여러 대가 모두 이세적과 합쳐 진격하여 압록책에 다달았다. 우리 군사가 맞서 싸웠으나 이세적 등이 이를 패배시키고, 200여리를 쫓아와서 욕이성을 함락시키니,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들이 이어졌다. 글필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밑에 이르니, 이세적의 군사가 뒤를 이어 와서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보장왕은 남산을 보내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흰기를 들고 이세적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이세적이 예로써 접대하였다. 남건은 오히려 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내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남건은 군사의 일을 신성에게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 오사와 요묘 등과 함께 몰래 이세적에게 사람을 보내 내응하기를 청하였다. 5일이 지난 후 신성이 성문을 여니, 이세적이 군사를 놓아 성에 올라가 북치고 소리지르며 성을 불질렀다. 남건은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왕과 남건 등을 사로잡았다. 겨울 10월 이세적이 돌아가려 할 때, 고종이 명령하여 왕 등을 먼저 소릉에 바치고, 군대의 위용을 갖추고 개선가를 연주하면서 수도로 들어가 대묘에 바치게 하였다. 12월 황제가 함원전에서 포로를 받았는데, 왕의 정사가 자신이 행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용서하고, 보장왕을 사평태상백원외동정으로 삼고, 남산을 사재소경으로 삼고, 신성을 은청광록대부로 삼고, 남생을 우위대장군으로 삼았으며, 이세적 이하의 사람들에게 차등 있게 관직과 상을 내리고, 남건은 검주로 귀양보냈다. 고구려의 5부, 176성, 69만여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통치하였으며, 우리 장수 중에 공이 있는 자들을 뽑아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아 중국 사람들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고, 우위위대장군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삼아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 진무하게 하였다. 이 때가 고종 총장 원년 무진(A.D 668년)이었다.  二十七年  秋九月 李勣拔平壤 勣旣克大行城 諸軍出他道者 皆與勣會 進至鴨   柵 我軍拒戰 勣等敗之 追奔二百餘里 拔辱夷城 諸城遁逃及降者相繼 契苾何力先引兵至平壤城下 勣軍繼之 圍平壤月餘 王臧遣泉男産 帥首領九十八人 持白幡 詣勣降 勣以禮接之 泉男建猶閉門拒守 頻遣兵出戰 皆敗 男建以軍事委浮圖信誠 信誠與小將烏沙饒苗等 密遣人詣勣 請爲內應 後五日 信誠開門 勣縱兵登城 鼓   焚城 男建自刺不死 執王及男建等 冬十月 李勣將還 高宗命 先以王等獻于昭陵 具軍容奏凱歌 入京師 獻于大廟 十二月 帝受   于含元殿 以王政非己出 赦以爲司平大常伯員外同正 以泉男産爲司宰少卿 僧信誠爲銀靑光祿大夫 泉男生爲右衛大將軍 李勣已下 封賞有差 泉男建流黔州 分五部百七十六城六十九萬餘戶 爲九都督府四十二州百縣 置安東都護府於平壤 以統之 擢我將帥有功者爲都督刺史縣令 與華人  理 以右威衛大將軍薛仁貴 檢校安東都護 摠兵二萬人 以鎭撫之 是高宗總章元年戊辰歲也」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악한 마음은 과녁이요, 선한 마음은 화살이라..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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