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부도지』로 본 한사군 전쟁(마지막 회)

설레임의 하루 2011. 12. 12. 00:21

*출처:다음카페-행동하는 언론소비자연대  글쓴이-사람이 하늘이다  2011.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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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로 본 한사군 전쟁(마지막 회)|

 

* 우리 상고사는 의문투성이다. 모든 의문의 출발점에 한사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한사군 전쟁의 중심에 있는 패수의 위치가 학자에 따라 한반도 평양에서 중국 하남성 황하 부근에 이를 정도로 그 편차가 수 천리에 이른다.

도대체 고조선의 실체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한사군 문제를 풀기 위한 자료가 너무나 빈약할 뿐만 아니라 또 있는 자료들마저도 권력과

욕망에 의해 수없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고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한사군 문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한사군을 극복하는 과정과 더불어 우리의 삼국시대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역사서인 『부도지』에서 한사군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길이 보인다.

『부도지』에는 고조선의 위치와 그 존재의의 등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이 들어있다.

앞으로 5회 정도에 걸쳐 『사기』‘조선열전’을 통하여 한사군 전쟁의 전모를 살펴본다.

원문 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중국정사조선전’을 인용하였다. *

 

『부도지』로 본 한사군 전쟁(마지막 회)

 

5. 한사군 전쟁은 한漢나라가 승리한 전쟁이 아니었다. 전쟁에 참여한

한漢나라 장수 등은 서인이 되거나 모두 참수된 반면, 화친(?)을 주장한

조선 장상들은 모두 제후가 되었으며, 봉해진 지역이 위만조선의

영역이었다.  

 

사기 조선열전 원문 및 번역(5)

 

○ 좌장군이 패수 위의 군사를 격파하고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누선군도 또한 가서 합세하여 성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끝내 성을 굳게 지키므로 몇 달이 되어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좌장군은 본시 시중侍中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고 있는데다가 연과 대지방의 군사를 거느렸으므로 굳세었는데, 싸움에 이긴 기세를 타고 군사들이 더욱 교만해졌다.

누선장군은 제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로 출병하였으나, 이미 여러 번 싸움에 패하고 군사를

잃었으며¹, 앞서 우거와의 싸움에서 곤욕을 치른 패잔한 군사들이라 군사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장군은 부끄럽게 여겨 우거를 포위하고도 항상 화평을 유지했다.

(左將軍破浿水上軍, 乃前, 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遂堅守城, 數月未能下.

左將軍素侍中, 幸, 將燕代卒, 悍, 乘勝, 軍多驕. 樓船將齊卒, 入海, 固已多敗亡, 其先與右渠戰,

困辱亡卒, 卒皆恐, 將心慙, 其圍右渠, 常持和節.)

 

○ 좌장군이 맹렬히 성을 공격하니, 조선 대신들은 몰래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누선장군에게

항복을 약속했으나, 말만 오고 갈 뿐 아직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좌장군은 여러 차례 누선과 싸울 시기를 정하였으나 누선은 [조선과의] 약속을 급히 이루려고

싸움에 나가지 않았다.

좌장군 또한 사람을 보내 조선이 항복해 올 때를 탐문하였으나, 조선은 이를 반기지 않고 누선 쪽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로 인해 양 장군은 서로 반목하게 되였다.

좌장군은 마음속으로 ‘누선은 전에 군사를 잃은 죄가 있는데다가 지금은 조선과 사사로이 잘

지내고 있으며, [조선] 또한 항복하지 않으니 반계叛計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 하였으나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였다.

(左將軍急擊之, 朝鮮大臣乃陰閒使人私約降樓船, 往來言, 尙未肯決. 左將軍數與樓船期戰,

樓船欲急就其約, 不會, 左將軍亦使人求閒郤降下朝鮮, 朝鮮, 不肯, 心附樓船 以故兩將不相能.

左將軍心意樓船前有失軍罪, 今與朝鮮私善而又不降, 疑其有反計, 未敢發.)

 

○ 천자는, “장수들이 [일을] 이룰 수 없으므로 전에 위산으로 하여금 우거를 달래 항복하도록

하여 우거가 태자까지 보냈는데도 산이 이를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좌장군과 서로 계교가

틀려 마침내 약속이 깨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양 장군이 성을 포위하고도 역시 [의견이] 어긋나고 달라서 오래도록 결판이 나지

못하고 있다.” 고 말하고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어 이를 바로잡고 상황에 맞게 처하도록 하였다.

(天子曰將率不能, 前及使衛山諭降右渠, 右渠遣太子, 山使不能剸決, 與左將軍計相誤, 卒沮約.

今兩將圍城, 又乖異, 以故久不決. 使濟南太守公孫遂往征之, 有便宜得以從事.)

 

○ 공손수가 도착하니 좌장군이 말했다.

“조선이 항복할 형편에 이른 지 오래되었는데도 항복하지 않는 것은 사정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누선이 여러 차례 싸우러 나오지 않은 것과 평소의 뜻하는 바를 공손수에게, 낱낱이

고하였다.

이어 “지금 이와 같으니 [누선장군을] 체포하지 않으면 크게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누선 혼자만이 아니고 조선과 함께 우리 군사를 멸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공손]수도 이를

옳게 여기고 부절符節로 일을 의논하자고 누선을 불러 좌장군 진영에 오게 하고는, 좌장군

휘하에 명하여 곧 누선장군을 체포하고 군사를 합친 뒤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공손]수를

죽였다².

(遂至, 左將軍曰「朝鮮當下久矣, 不下者有狀.」言樓船數期不會, 具以素所意告遂, 曰

「今如此不取, 恐爲大害, 非獨樓船, 又且與朝鮮共滅吾軍.」遂亦以爲然,

而以節召樓船將軍入左將軍營計事, 卽命左將軍麾下執捕樓船將軍, 幷其軍, 以報天子. 天子誅遂.)

 

○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여 맹렬히 조선을 치니, 조선의 상 로인과 상 한음과 니계상 삼과

장군 왕겹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 누선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누선은 지금 잡혀 있고 좌장군

단독으로 장졸을 합하여 전투가 더욱 맹렬하여 맞아서 싸우기 두려운데도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 하고 한음ㆍ왕겹ㆍ로인이 모두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로인은 도중에서 죽었다.

(左將軍已幷兩軍, 卽急擊朝鮮. 朝鮮相路人ㆍ相韓陰ㆍ尼谿相參ㆍ將軍王唊 相與謀曰

「始欲降樓船, 樓船今執, 獨左將軍幷將, 戰益急, 恐不能與戰, 王又不肯降.」 陰ㆍ唊ㆍ

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 원봉 3년(B.C.108) 여름, 니계상 삼參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하여 왔으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의 대신 성이가 또 [한에] 반하여 다시 군리軍吏들을 공격하였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과 상 로인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성이를 죽이도록

하였다.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4군³을 설치하였다.

삼參을 봉하여 홰청후⁴로, 음陰은 적저후⁵, 겹唊은 평주후⁶, 장長은 기후幾候⁷로 삼았으며,

최最는 아버지가 죽은데다 자못 공이 있었으므로 온양후溫陽候⁸로 삼았다.

(元封三年夏, 尼谿相參乃使人殺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 復攻吏.

左將軍使右渠子長降·相路人之子最 告諭其民, 誅成巳, 以故遂定朝鮮, 爲四郡. 參爲澅淸侯,

陰爲荻苴侯, 唊爲平州侯, 長降爲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溫陽侯.)

 

○ 좌장군을 불러 들여 [그가] 오자, 功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긋나게 한 죄로 기시

棄市하였다.

누선장군도 병사를 거느리고 열구洌口⁹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도

제멋대로 먼저 군사를 풀어 많은 병사들을 잃어버렸으므로 주살함이 마땅하나 속전贖錢을 받고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左將軍徵至, 坐爭功相嫉, 乖計, 弃市. 樓船將軍亦坐兵至洌口, 當待左將軍, 擅先縱, 失亡多,

當誅, 贖爲庶人)

 

○ 태사공은 말한다.

우거는 험고險固함을 믿다가 나라의 사직을 잃었다.

섭하는 공을 속이다가 전쟁의 발단을 만들었다. 누

선은 장수의 그릇이 좁아서 난을 당하고 죄에 걸렸으며, [앞서] 번우番禹에서의 실패를 후회하다가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주살되었다.

결국 양군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列侯된 사람이 없었다¹

⁰.(太史公曰: 右渠負固, 國以絶祀. 涉何誣功, 爲兵發首. 樓船將狹, 及難離咎. 悔失番禺,

乃反見疑. 荀彘爭勞, 與遂皆誅. 兩軍俱辱, 將率莫侯矣)

 

[해설]

 

1. 고이다패망固已多敗亡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주석없음

 

(2) 필자의 주석

누선장군은 제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로 출병하였으나, “이미 여러 번 싸움에 패하고 군사들을 잃었다.”고 하였다.

누선군이 여러번 싸움에 패하여 군사들을 잃은 후 왕검성에 도착했을 때 병사가 7천명이었다.

그러면 누선장군이 처음 출병할 때 수군의 수는 얼마였을까?

앞에서 국사편찬위원회가 주석한 “그 해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로부터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너게 하고 군사 5만으로 좌장군 순체는 요동에서 출격하여 우거를 토벌하게 하였다.

(其秋, 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右渠.)”는 내용을 달리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즉 “그 해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로부터 발해에 배를 띄우니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 순체는 요동에서 출격하여 우거를 토벌하게 하였다.”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누선장군이 처음 출병할 때 수군이 5만이었는데 여러 번의 해전에서 패하여 수많은 군사들을

잃고 겨우 7천명이 왕검성에 도착했다가 그마저도 우거에게 격파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천자주수天子誅遂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주석없음

 

(2) 필자의 주석

제남태수 공손수가 주살된 이유는 태사공(사마천)이 이르기를 “순체荀彘는 공손수와 더불어

공을 다투다가 함께 주살되었다.”고 하였다.

또 『사기』 ‘색은’은 “ ..... 두 장수를 의심한 위산과 공손수는 법에 따라 주살되었다.

장계를 어지럽게 보고한 것이다.”고 하였다.

공손수는 좌장군 순체와 공을 다투고, 거짓 보고를 한 이유로 주살되었던 것이다.

 

3. 4군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본문에서는 무제가 원봉 3년(B.C.108) 조선을 평정하고 4군을 설치하였다는 사실만 나타나 있고

군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한서』「무제본기」에서는 4군의 명칭이 낙랑ㆍ임둔ㆍ현토ㆍ진번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한서』「지리지」에는 낙랑ㆍ현토의 2군만 기록하고 있고,「오행지」에서는 원봉

6년(B.C.105)조에 ‘선시양장군정조선先是兩將軍征朝鮮 개삼군開三郡’이라 기술하고 있어

논란이 있어 왔다.

즉, 한사군을 중국의 직접 통치를 받는 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고, 이와는 달리 고조선세력과의 계속적인 군사분쟁 상태에서 설치하려고 계획만 하였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군이라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의 위치문제도 앞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인가에 대한 논란과 연결되어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위치문제는 진번의 위치문제로서 앞서 한사군명칭으로서 존재하기

이전의 진번위치와 연결되어 다기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즉, 재북설과 재남설로 크게 나뉘어져 전통사학자 사이에 논의가 있었다.

『삼국유사』의 찬자는「기이」 이부조二府條에 사왈私曰 조선전즉朝鮮傳則 진번眞番ㆍ현토

玄菟ㆍ임둔臨屯ㆍ낙랑등사樂浪等四 금유평나무진번今有平那無眞番 개일지이명야蓋一地二名也 라 하여 평나平那를 진번으로 보았고, 이 견해는『동국통감』등에 계승되었다.

한백겸은『동국지리지』에서 이를 예맥구지貊國舊地 즉, 강원도 춘천부로 이해하였고,

이익은『성호사설』「유선」에서 진번을 ‘요하이서최근중토자遼河以西最近中土者也’로

규정하였다.

한편 홍만종은『순오지』에서 진번이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정약용은『아방강역고』에서 진번지지眞番之地 수불가상雖不可詳 요재금흥경지남要在今興京之南 동가강지좌우佟家江之左右 흥경지남興京之南 압수이북鴨水以北 금애하이동今靉河以東 파저강지좌우波猪江之左右 연강흑지지沿江黑之地 즉비요동即非遼東 우비조선又非朝鮮 필고지진번야必古之眞番也 라 하여 재북설在北說을 제시하였다. 이같은 견해는 유득공의『사군지』에 계승되었고, 한진서의『해동역사』「지리고」에서도 이같은 견해가 유지되었다. 한편 일인학자가운데 那珂通世와 白鳥庫吉은 이를 압록강이북지역에서 찾고자 하였으며, 稻葉岩吉은 충청도지역에서, 금서룡은 충청ㆍ전북 등지에서 진번의 위치를 찾았다. 또 이병도는 대방군 영토에서 이를 찾아 재남설을 강조하였다.

(「한사군문제의 연구」 pp. 97∼209) 이와 함께 도유호는 진번이 현재 함경도 이동 쪽에 위치해

있다가 예군 남려의 반란 후 기원전 128년에 잠시 존재했던 창해군 영토의 임둔군과 나란히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진번과 옥저성의 위치」 p. 3)

이같이 진번군의 위치가 문제되는 것은 앞서 강조되었듯이 한사군설치 이전에 연의 침입을 받았던 진번, 조선과 위만조선에 복속되였던 소읍으로서의 진번ㆍ임둔 및 한漢과 직접교역코자 하였던 ‘진번방중국眞番傍衆國’ 등의 존재 때문이었다. 따라서 진번의 위치가 확정됨에 따라 한사군의 위치는 다양하게 변화되는데,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현재의 평양인가 요동지역인가에 의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현재 나타나고 있는 전반적인 연구 성과에 의거할 때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나, 한사군의 위치보다는 그 성격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4군 중의 하나인 낙랑군의 경우 종래에는 낙랑의 성격을 잘못 이해하여 낙랑군이 421년 동안

계속하여 존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나, 이는 재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낙랑은 대륙의 정세변화에 따라 군현적 성격을 띄기도 하지만, 그러한 기간은 전한시대를 제외하면 비교적 짧으며,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국계 유이민 집단의 자치도시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 25) 따라서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연구도 이러한 성격 검토를 통하여 재검토되어져야 할 것이다.

 

한사군의 위치

 

(2) 필자의 주석

4군의 위치는 앞의 ‘조선’과 ‘진번임둔’ 항목에서 언급하였다.

낙랑은 조선(아사달, 진조선, 진한, 부도符都 등으로 불림)의 위치와 같다.

『부도지』에 의하면 진조선(낙랑)의 남쪽인 하북성ㆍ산동성ㆍ강소성ㆍ절강성 등은 변조선

(변한)의 영역이다.

기원전 1122년경 기자가 조선(부도, 아사달, 진조선, 낙랑)을 침범하자, 조선의 민중들이 황하

(위 지도에서 고대 황하의 흐름 참조)를 건너 동해안(東海之濱)으로 이동하였다.

(부도지 제27장) 그리하여 진조선과 변조선의 민중들이 섞여서 살므로 진번이라 부른 것이다.

또 부도지 제27장에 의하면 고구려는 건국 즉시 부도의 북보(낙랑의 북쪽)를 회복하였다고

하였으므로, 현토는 낙랑의 북쪽지역이다.

이렇게 낙랑과 진번 및 현토의 위치를 정하면 나머지 임둔은 자연스럽게 낙랑의 동북쪽이 된다.

 

4. 홰청후澅淸侯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사기집해』에는 지금의 산동성인 제齊에 속한다고 하였고『사기색은』에는 회청은 제에

속한 현명縣名이라 하였다.

 

(2) 필자의 주석

조선에서 항복한 니계상 삼參을 홰청후로 봉했다.

홰청은 산동성 제(齊) 지역이며 이유립 선생은 산동성 임치현 서북쪽인데 춘추때의 획음. 본시

니계땅이라 하였다.(다음카페 coo2.net/사기조선열전 해설본)

 

5. 적저후荻苴侯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사기』「건원이래후자연표」에는 ‘적저荻苴’로 기록되어 있고,『한서』「서남이양월조선전」

에는 ‘추저후秋苴侯’로 기록되어 있다.

『사기집해』와『사기색은』에는 발해에 속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2) 필자의 주석

조선에서 항복한 재상 한음韓陰을 적저후로 봉했다. 적저는 발해渤海 지역이다.

『고금지명대사전』에는 하간현, 창현으로 나오며, 이유립 선생은 천진부 경운현

동쪽지방이라 하였다.(다음카페 coo2.net/사기조선열전 해설본)

 

6. 평주후平州侯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사기집해』와『사기색은』은 위소의 말을 인용하여 양부梁父에 속한다고 하였다.

 

(2) 필자의 주석

조선에서 항복한 장군 왕겹王唊을 평주후로 봉했다. 평주는 양부梁父 지역이다.

『고금지명대사전』에는 산동성 태안현 남쪽 60리로 사수현과 접경을 이룬다고 하였다.

이유립 선생은 산동성 태안부 모현 서쪽지방이라 하였다.

(다음카페 coo2.net/사기조선열전 해설본)

 

7. 기후幾侯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사기집해』와『사기색은』은 위소 말을 인용하여 하동河東에 속해있던 현명이라고 하였다.

 

(2) 필자의 주석

항복한 우거왕의 아들 장항長降을 기후에 봉했다. 기후는 하동河東 지역이다.

『고금지명대사전』에는 황하 동쪽이라 하였고, 이유립 선생은 하동 상湘과 로潞의 사이로

현재의 산서성 로주라 하였다.

(다음카페 coo2.net/사기조선열전 해설본) 『위키백과』는 “한무제 시대에는 우거왕의 아들

장항長降을 기후幾侯에 책봉하여 하북성 중산 일대을 지배하게 하였으나, 모반을 일으켜

참수되었다.”고 하였다.

하북성 중산 일대는 위만조선의 핵심지역이므로 장항이 우거왕의 아들임을 감안할 때 필자는

『위키백과』의 설을 인용한다.

 

8. 온양후溫陽侯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사기』「건원이래후자봉표」와『한서』「지리지」남양군南陽郡의 속현에는 날양涅陽으로

되어 있다.

 

(2) 필자의 주석

조선에서 항복한 재상 로인의 아들 최最를 온양후에 봉했다. 온양은 제(齊) 지역이다.

『고금지명대사전』에는 온양현은 현 수도의 양유壤柔현에 속한다고 하였고, 이유립 선생은

열수의 북쪽이니 오늘의 하남성 진평현(옛 제 땅)이라 하였다.

또 송준희 교수는 로인이 하북성 어양 사람이므로 하북성 회유 유역(북경 부근)으로 보았다.

(다음카페 coo2.net/사기조선열전 해설본) 위만조선의 강역을 생각할 때 필자는 송준희 교수의

설을 인용한다.

 

조선에서 항복한 장상들이 봉해진 조선5군의 위치

 

9. 열구洌口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본문에 나타난 내용에 의하면 한군漢軍이 집결키로 한 열구가 열수洌水의 하구지명河口地名임을 알려 준다. 그런데 앞서의 내용에서 제(산동반도) 지역에서 발해(현재의 발해)로 한의 수군이 항해하였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열구가 현재의 요동지역 발해연안에 존재하였다고 보아 요동지역에서 발해로 유입하는 강으로 파악함으로써 열수洌水와 연결되는 왕검성도 이곳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리지린,『고조선연구』)이러한 사실은 4세기초 진晋의 곽박이 주석한『방언方言』의 ‘조선열수지간朝鮮洌水之間’이란 내용에 대해 ‘열수명재요동列水名在遼東’이라 한 기록과,『사기집해』에 인용된 장안의 ‘조선유습수朝鮮有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 삼수합위열수三水合爲洌水 의낙랑조선취명어차야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란 내용 등에 근거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열수洌水는 요하遼河이며 열구洌口는 발해로 요하가 유입하는 지역으로 이해된다.

한편『수경주』이래로 유지된 열수=대동강설은 평양을 왕검성 및 낙랑군지역으로 이해하고 대동강 하구에 존재한 지명의 유사성과 특히 ‘낙랑유적’과 ‘점제현신사비’의 존재로 확증된다고 보았다. (금서룡,「열수고」 p. 56; 이병도,「위씨조선흥망고」 p. 72) 그리하여『한서』「지리지」 낙랑군 탄열현呑列縣의 주석에 ‘분려산分黎山 열수소출列水所出 서지점선입해西至黏蟬入海 행팔백이십리行八百二十里’라 한 내용이 위의 사실과 부합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앞서 논급된 발해의 위치문제와 평양부근의 ‘낙랑유적’이 고조선의 유물이란 사실 등을 들어 반박하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또한 고조선의 이동설을 주장하는 견해에 의하면 열수가 고조선계 지명인 까닭에 고조선의 중심이 요동에 있었던 때의 열수와 대동강 유역로 이동한 이후의 열수가 다르다고 한다. 즉,『사기』와『한서』의 열수는 고조선의 중심이 이동한 이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므로 이 열구는 대동강 하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p. 40∼49)

 

(2) 필자의 주석

본문의 내용에 의하면 누선군이 집결키로 한 열구는 열수洌水의 하구임을 알 수 있다.

앞의 ‘조선’ 항목에서 보았듯이 열수는 호타하로 비정된다. 호타하 하류는 사하, 대사하, 당하 등

여러 강줄기들이 합류하여 발해로 들어간다.

응소가 왕검(험)성 주석에서 “물이 험한 지역에 의지하여 살기 때문에 험독이다” 한 것처럼 여러

강줄기들이 열구로 흘러들면서 험한 물 길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10. 양군구욕兩軍俱辱 장솔막후의將率莫侯矣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없음

 

(2) 필자의 주석

한사군 전쟁은 사마천(기원전 145~기원전 86년) 당시에 일어났다.

사마천이 이 전쟁을 전체적으로 평가한 내용이 “결국 (한나라 수륙) 양군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列侯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한漢나라의 육군대장인 좌장군 순체는 참수되어 머리가 거리에 효수되는 기시형에 처해지고,

수군대장인 누선장군 양복은 참수를 면하는 대신 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요동군을 거느렸던 좌장군의 졸정인 다多는 싸움에 패하여 참수되었으며, 우거를 회유하러 갔던

위산과 제남태수 공손수 등은 모두 한무제에게 주살되었다.

이처럼 한사군 전쟁에 참여했던 한나라 장수들이 모두 참수되거나 서인이 된 반면 항복(?)한

조선의 장상들은 모두 제후의 반열 올랐다.

한사군 전쟁은 결코 한나라의 승리가 아니었으며, 항복(?)한 조선의 장상들이 제후가 되어

차지한 지역이 위만조선의 영역이었다.<끝>

*출처:다음카페-행동하는 언론소비자연대  글쓴이-사람이 하늘이다  2011.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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