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카페-미스테리의 진실 글쓴이-화이트홀 2007.12.31 http://blog.daum.net/ffrok/13655655
'이병도사관'에 놀아난 한국역사 | |||
데일리안| 기사입력 2005-03-15 10:02 | |||
지금 새삼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이 생각나는 이유 [데일리안 박선협]이승만 정권에 빌붙어서 전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교육부 장관과 한림원 원장을 맡았던 이병도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그들은 그 이병도를 지금 친일사관의 거두쯤으로 치부한지 오래라. 그는 지금의 강단사학계가 100%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일조한 장본인이다 민족사관을 중심으로한 신진사류들에 의해 그의 일제치하 친일행각은 여지없이 파헤쳐졌다. 그가 끼친 천인공노할 역사왜곡에 찌든 한국민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만, 우리는 다만 그것을 용서하고 기억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수제자를 자처하며 당대의 실세실력가로 군림하는 이른바 대가군(大家群)의 선두주자 S씨에 이르면 생각이 많이 달라진다. 걸핏하면, 독도의 수호신으로, 독립협회의 변호인으로, 일제의 만행을 갈파하는데 선봉장임을 자랑하는 인물이라 함부로 다루기가 버거운 존재다. 도망친 그 일제 그늘에서 자라고 일제의 반간계에 놀아나 이역만리에서 사라진 재필이 만든 독립협회를 민족의 태양쯤으로 자랑의 틀을 씌운 그는 역사와는 상관이 없는 사회학도에 다름아니다. 아니치 못하면서 대세가 점진적으로 일제만행 규탄에로 에스칼레이트 하고 있는 사실과 더불어 그의 행적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생각해 보잔 뜻이 있어서다.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당도한 즈음, 그가 심혈을 기울인 독립협회옹호론이 흔들거릴 가능성에 대한 그의 심중이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따름이다. 어떠했던가를 냉철히 뒤돌아 짚어보고 돌아보자. 구분 하는데 의미를 두고자 한다. 수 있도록 그들의 역사보다 수천 년이 앞선 조선역사의 왜곡과 조작을 조선 총독부에 의하여 노골적이고 조직적인 차원으로 추진했다. 1910년 11월부터 조선총독부 산하의 ‘취조국’으로 하여금 1911년 12월까지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를 근거로 하여 ‘51종 약 20만권"정도를 약탈했다. 물론 역사서 또한 포함되었다. 다음해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 1차 서적 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판매금지한 서적과 수거된 서적은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광복 후 제헌국회사와 <문정창(文定昌) 저>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에서 밝히고 있다. 즉 1938년까지 엄청난 돈을 일본이 부담하여 식민사관에 입각한 자기만의 역사서를 편찬한다. 지워지게 됐다. 심어놓는가 하면, 말살시키는데 혈안이 됐다. 논리적으로 합리화시키려는 기도를 일삼았다. 즉 일본 고고학계는 지난 92년 70만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되었다고 했다가 2000년 11월 일본 언론에 의해 이것이 한 일본 역사연구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춰내어,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방조했다.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고자 시도한 요결인 것이다. 출판 조선 총독부에서 집필한 『조선사의 길잡이』라는 책은 해방 뒤 유네스코에서 한국사를 소개하는 지표로서 번역되어졌고 지금도 읽혀지고 있는 책이다. 그곳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참여한 사람이 병도였다. 그는 이마니시 류(今西龍), 즉 이마니시의 수서관보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일등 공로자가 됐다. 교육부 장관과 한림원 원장을 맡게 되어 지금의 강단사학계가 100%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일조한 병도의 행각인 것이다. 열두 살인 1907년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일인이 경영하는 불교고등학교를 찾아가 일어(日語)를 배웠다. 나라를 빼앗겨 대한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청년 학도들이 목숨을 바쳤으나 병도의 뇌리에는 애초부터 항일 의지 따위는 없었다. 사학과를 1919년에 졸업했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왜곡의 주역 일인 학자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와 와세다대학의 강사 츠다(津田左右吉)로부터 문헌고증학, 즉 실증사학의 기초를 다지며 한국역사 왜곡에 대한 개인적인 세뇌 지도 교육을 받았다. 이병도는 촉탁이기 때문에 무보수로 일했다고 변명하면서 이 시절 규장각 도서를 열람할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의 학문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리화하곤 했다. 풍수도참(風水圖讖) 사상, 그리고 조선시대 유학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당연히(?) 일어(日語)로 쓴 것들이었다. 이때 쓴 논문들은 문헌고증학의 관점에서는 꽤 수준이 높은 것이었으나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단제 신채호의 민족주의사학과는 서로 배치되는 논리들이었다. 식민사학을 쏟아내어 조선국은 고대로부터 반도국가로서 미개한 민족이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세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어용 학술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1922년의 조선사편찬위원회와 1925년의 조선사편수회였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이 단체의 고문으로 있었다. 역적인 완용과 중현 등 역적들을 고문으로 앉히고 1916년 1월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참의와 부참의 15명에게 『조선 반도사』 편집 업무를 맡기고, 일본 동경제국대학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박사와 일본 경도제국대학 미우라(三浦周行)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 (今西龍) 등 3인에게 지도, 감독을 의뢰하였다. 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이고 확대 개편하였다. 1925년 6월에는 "일황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 공포하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접 관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고대부터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에 위치한 부족국가로서 중국에서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 현도군 (玄菟郡).진번군(眞番郡)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고대부터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이론을 수없이 쏟아내 조선의 식민지화를 정당화시켰다. 1930년 5월 경성제대 교수와 조선사편수회원, 그리고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총동원되어 청구학회(靑丘學會)라는 어용 학술단체를 조직하는데 이들 역시 조선총독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저술 출판.강연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의 회무감독은 경성제대 교수인 일인 쇼우다(小田省吾)였고, 서기는 조선사편수회 서기인 마에다(前田耕造)였는데, 병도는 신석호와 함께 이 단체의 핵심위원이었다. (靑丘學叢)의 주요 필자이며 또 다른 식민사학의 학술지인 조선사학의 주요필자 였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33년 불교전문학교 강사 시절이었다. 위장하여 1934년 5월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설립하였다. 한국 학자의 힘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를 국어로 발표하려는 의도 하에 창립되었다. 6월 제14호로 종간하고 해산됐다. 그 후 1945년 8.15광복 후 다시 진단학회가 발족된다. 따라서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역사의 퇴보가 아니라 진보라는 것이 이들의 식민지 지배논리였다. (李丙燾).신석호(申奭鎬).홍희(洪憙) 같은 한인학자들이 참여하여 드디어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이 완간 했던 것이다.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을 완간하였다. 일본의 계략대로 우리 역사를 왜곡한 병도는 일본의 제 1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일본천왕으로부터 거액의 포상 금과 금시계를 받았다. 학자들이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병도의 해방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친일파 제명운동 ”에 들어간 것이다. 결국 병도는 재건된 진단학회를 주도할 수 없었고 송석하와 조윤제가 위원장과 총무를 맡고, 송석하가 사망하자 1948년 8월 이상백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친일파 식민사학자 병도가 남한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1950년 6.25전쟁이었다. 6.25전쟁은 많은 민족주의 인사들이 납북됨으로써 남한 학계를 가짜 실증사학의 병도 독무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6.25전쟁을 계기로 병도는 친일파 청산 제 1호에서 벗어나 국사학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해 병도는 식민사학을 유포하던 경성제대의 후신인 서울대학교 대학원장과 학술원 부원장을 맡아 역사학계의 최고 원로로 부상했다. (東丘學園) 이사장,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겸 대동문화연구원장에 취임했으며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에 추대됐다. 그 동안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학술원 공로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5.16민족상 등을 수상했다. 제목으로 특별기고 하여 우리나라 고대역사 왜곡의 사실을 발표하고 1989년에 죽었다. 또한 병도의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고려시대 연구》등이 있다./ 박선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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