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신라고분 서봉총(瑞鳳塚)

설레임의 하루 2011. 11. 25. 02:54

*출처:다음카페-수원지기학교 글쓴이- 신영주  2008.12.07.  http://cafe.daum.net/jigiclass/I0Ry/162 

 

 

 

 

 

 

신라고분 서봉총(瑞鳳塚)

노서동고분군(사적 제39호) 가운데 하나로 금관총(金冠塚)의 서쪽 가까이에 위치하며 경주지역 고분의 일련번호는 노서동

129호분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전형적 무덤구조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1926년 고이즈미[小泉顯夫] 등이 발굴·조사했으며, 당시 스웨덴의 황태자 구스타프가 방한중 시찰·참가했다.

무덤이름은 황태자의 참가를 기념하여 스웨덴의 한문표기인 서전(瑞典)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에 봉황(鳳凰) 모양이 장식된 데서

각 1자씩 따서 서봉총이라 했다.

발굴 전 고분은 남북길이 52m, 동서길이 35m, 높이 7m 정도였고, 주위에는 집들이 들어서 있어 봉토의 상당부분은 이미 깎여나간

상태였다.

발굴결과 고분 외형은 돌무지덧널무덤 2기가 붙어 있는 쌍무덤[雙墳:또는 瓢形墳]으로 밝혀졌으며, 발굴은 북쪽 부분(北墳)의 봉토와

매장시설에서 이루어졌다.

봉토의 규모는 지름 36.3m였고 높이는 10m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봉토의 바깥선에는 폭 1.8m의 무덤둘레돌[護石]이 둘러져 있었다.

매장시설은 원래의 지형을 60㎝ 정도 깊이로 파서 갈색 점토로 다지고 냇돌과 잔자갈을 채워 평지와 같게 한 후 지상에 동서 4.7m,

남북 2.0m의 나무덧널[木槨]을 세워 이용했다.

덧널 내부 서쪽에는 널[木棺]을 안치하고 동쪽과 널 주위는 껴묻거리[副葬品]를 배치했다.

널 속에는 머리를 동쪽으로 둔 피장자가 착용한 금관을 비롯한 각종 금제장신구가 있었다.

금관은 나무와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있는 신라의 전형적 형태이나, 그 안에 3마리의 봉황 모양 장식을 붙인 십자형(十字形)의 내관

(內冠)이 있어 특이하다.

널 동쪽에는 쇠솥 2개와 각종 토기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칠기, 금·은·청동제 용기류, 유리용기, 마구, 각종 유리구슬이 있었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출토유물 중 은제합(銀製盒)의 뚜껑 안쪽 면에 "延壽元年辛卯"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추정이 가능하다.

연수(延壽)는 5세기대 신라와 빈번한 관계를 가졌던 고구려의 연호로 보이므로 5세기대 신묘(辛卯)의 간지년(干支年)인 451년

이후, 즉 5세기 중엽·후엽 사이에 고분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한장의 흑백 사진을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신지...

아.....물론 '루비의 정원'을 자주 거니시는 분은 포토 갤러리에 올린 '경주의 옛모습'이란 포스트에서 이 사진을 인용한 것을 기억해

내실 것이다.

 

경주는 누구나 아는 것처럼 신라 천년의 고도이다.

경주를 방문하면 곳곳에서 신라의 흔적과 만날 수 있는데  특히 시내 중심가 가운데 여기저기 솟아 있는 커다란 고분들은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경주를 관광하러 오는 사람들이면 천마총이 있는 대능원에는 꼭 들리게 되지만주택지 한 가운데 위치한 노서동,노동동 고분군은

그냥 지나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 소개하고 싶은 것은 노서동 고분군 중에서도 서봉총이다.

스웨덴의 한문표기인 서전(瑞典)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에 봉황(鳳凰) 모양이 장식된 데서 각 한 자씩 따서 서봉총이라 했다.

이 고분이 왜 스웨덴과 관련이 있는고 하니, 그 이유는 이러하다.

경주 시내에 있는 많은 신라 고분들은 안타깝게도 우리 손으로 조사한 것이 드물어서 그 대부분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발굴 조사하였고 경주시의 개별 고분에 붙여진 번호 125호 고분,130호 고분.....등의 이름도 그들이 임의로 붙인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금관총이 우연히 조사된 이후(금관총은 서봉총 바로 옆에 있다)

경주 고분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진다는 소문이 돌아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이러한 출토 유물에 대한 욕심이 서봉총의

발굴조사를 추동했다.

이때가 1926년인데 마침 스웨덴의 황태자 아돌프 쿠스타프 6세가 일본을 방문하였다.

당시 일본은 쿠스타프가 고고학에 관심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고분발굴이 한창인 경주에 그를 안내하였던 것이다. 

 

위 사진은 경주에 도착하여 발굴중인 고분의 내부조사를 할 수 있게 배려받은 아돌프 황태자가 고분을 직접 발굴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그 뒤에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이 그의 부인인데 이들은 후에 스웨덴의 국왕이 되었다.

 

 

서봉총은 노서동고분군(사적 제39호) 가운데 하나로

금관총의 서쪽 가까이에 위치하며 고분의 일련번호는 129호 고분이다.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것처럼 둥근 동산같은 것은 서봉총이 아니다.

뒷부분의 큰 고분은 130호 고분이고 앞에 야트막하게 평평한 부분이 서봉총이다.

발굴 전 고분은 남북길이 52m, 동서길이 35m, 높이 7m 정도였고 주위에는 집들이 들어서 있어 봉토의 상당부분은 이미 깎여나간

상태였다는데 발굴 후 다시 봉토를 원래대로 쌓은 천마총같은 고분과는 달리 봉토를 쌓아놓지 않아 그저 평지처럼 보인다.

 

 

위에서 본 서봉총의 전반적인 모습을 참고 하시길 바란다.

쌍분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가 전체적으로 땅콩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http://cafe.daum.net/kohyuntwothree)

 

 

 

삼국시대 신라의 전형적 무덤구조인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인데 오른 쪽에 언덕같이 보이는 것은 금관총이다.
 

 

발굴된 출토품 중에는 쇠솥 2개와 각종 토기, 칠기, 금·은·청동제 용기류, 유리용기, 마구, 각종 유리구슬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무와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있는 신라의 전형적 형태의 금관이 주목할 만 한데 금관 안에 3마리의 봉황 모양 장식을

붙인 십자형의 내관(內冠)이 있어 서봉총이란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의 서봉총 발굴 참가 기념비가 서봉총 앞에 서 있다.

발굴에 참여하고 나서 기념으로 구 경주 박물관 자리에 전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당시 아돌프 일행은 경주 교동의 최부자집 사랑채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국왕이 된 후에 아돌프는 한국을 방문하는 간호사들에게 최부자집의 안채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어 올 것을 부탁했다는 일화가 있다.

최부자는 이방인에게 여인들만이 기거하는 안채 출입과 구경을 철저히 금지시켰기 때문이라고....   

 

 

1994년에 다시 서봉총을 방문하고 기념으로 심었다는 나무가 서봉총 맞은 편에 자라고 있었다.

 

 

 

일인들은 쿠스타프가 발굴에 참여할 당시에 발굴 현장에서 황태자가 좀 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게 이미 출토되어 이미 수습되었던

고급 유물을 현장에 다시 놓아두는 등의 친절을 아끼지 않았다.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최고급 문화재가 일본의  외교전략의 수단이 되어 파헤쳐졌던 가슴 아픈 이야기인 것이다.

 

일본은 자기네들의 규모가 큰 고분은 천황계와 관련이 있다고 하여 조사를 금지하고 있었던 터였다.

자기네 나라의 고분은 철저히 보존하면서 전국 방방곡 조선의 고분을 파헤친 일본인들을 생각하면 실로 불쾌하기 그지 없고 지금도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른다.

 

 

세월이 흘러 무덤의 주인인 이름모를 왕자의 유택은 평토화되고 외국의 황태자가 발굴에 참여한 사실만이 부각되어져 있는 서봉총을 

마주하니 씁쓸한 기운만이 한바탕 무덤을 휘....감돌았다.

 

 


 

서봉총금관
서봉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금관. 보물 제339호. 높이 30.7㎝.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3단으로 된 출자형입식(出字形立飾)을 앞면 및 좌우의 대륜(臺輪) 위에 각각 세우고 사슴뿔 모양의 입식 2개를 대륜 뒤쪽에 세워

 

다른 금관에서 보이는 바와 같다.

 

그리고 2개의 좁은 금대를 전후·좌우로 연결하여 중앙에서 십자형으로 교차시킴으로써 내모형(內帽形)의 골격을 만든 특징이 있다.

교차점에 금판을 오려서 만든 봉황장식 3개를 붙여 장식한 예는 다른 금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입식과 대륜에는 곱은옥과 영락을 일정한 배열규칙을 가지고 금사(金絲)로 꼬아 매달았다.

좌우의 드리개[垂下飾]는 태환(太環)에 긴 줄과 짧은 줄의 2가닥으로 되어 있고 맨끝에는 펜촉 모양의 금판식이 붙어 있으며

태환에는 작은 금제영락을 달아 촘촘하게 장식했다.
경주 노서동 신라 무덤인 서봉총에서 출토된 높이 30.7㎝, 지름 18.4㎝, 드리개(수식) 길이 24.7㎝인 금관이다.
넓은 관 테 위에 5개의 가지를 세웠고, 상하에 점선으로 물결무늬를 찍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으로 장식했다.

관 테에 못으로 고정시켜서 세운 5개의 가지 중 중앙과 그 좌우의 3가지는 山자형 장식을 3단으로 연결하고, 가지 끝은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했다.

이 가지 주위에는 2줄씩 점선을 찍어 금판이 휘지 않도록 했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을 달았다.

山자형 장식의 좌우에는 끝이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된 사슴뿔 장식을 세웠고, 이 곳에도 원판과 옥으로 장식했다.
내부의 골격은 2개의 금판대를 전후·좌우에서 관 테에 연결하여 반원을 그리면서 교차시켰고, 그 위에 3가닥이 난 나뭇가지를 붙이고

가지 끝에 새 모양을 하나씩 붙였다. 관 테 좌·우에 길게 굵은고리(태환식) 귀고리 드리개를 달아 늘어뜨렸다.

기본형은 다른 금관(金冠)과 같으나 2개의 양대(樑帶)로 내모형(內帽形)의 골격(骨格)을 만든 것과 수식(垂飾)에서 양식을 달리하고

있다.
밑에 넓은 대륜(臺輪) 위에 5개의 가지를 세웠고 대륜(臺輪)에는 상하에 점선으로 파상문(波狀文)을 찍고 상중하 3줄로 도드라진

원좌(圓座)를 만들어 그 중앙에 원형 영락(瓔珞)과 비취(翡翠) 곡옥(曲玉)도 달았다.
대륜(臺輪)에 못으로 고정시켜서 세운 5개의 가지 중 중앙과 그 좌우의 3가지는 산자형(山字形)을 3번 연결하고 끝은 모두 보주형

(寶珠形)으로 막음하고 있다.

금판(金板)을 오려서 만든 이같은 가지 주위에는 2줄씩 점선을 찍어 얇은 금판이 휘지 않고 바로 서 있게 하였고 표면에는 20여

개의 원좌(圓座)를 만들고 금줄로 원형 영락 또는 비취 곡옥을 달거나 혹은 원좌 없이 달기도 하였다.

산자형(山字形) 가지 좌우에는 끝이 보주형(寶珠形)으로 된 녹각형(鹿角形) 가지를 금판을 오려서 세웠고 이곳에도 가장자리에 2줄

점선이 찍히고 원좌 중앙에 원형 영락과 곡옥을 달고 있다.
내모형(內帽形)은 두 가닥의 금판대(金板帶)를 전후 ·좌우에서 대륜(臺輪)에 연결하여 반원을 그리면서 약 21㎝ 높이에서 십자

(十字)로 교차 연결시키고 그 위에 3가닥이 난 나뭇가지를 붙이고 가지 끝마다 새를 한 마리씩 붙인 다음 새에까지도 영락을 달았다.

대륜(臺輪) 좌우에 길게 수식(垂飾)이 달려 있는데 태환식(太環式) 귀걸이형의 중간 장식이 길고 복잡해진 형식이다.

태환(太環)에는 작은 원형 영락이 장식되고 여기 연결된 고리에서 2가닥 수식(垂飾)이 늘어졌는데 짧은 줄에는 금줄을 꼬아서

가운데가 빈 유엽형(柳葉形) 장식이 달리고 긴 줄에는 역시 금줄을 꼬운 중간에 촘촘히 심엽형(心葉形) 영락을 금줄로 연결하였다.

끝에는 세로 반에 접은 큼직한 유엽형(柳葉形) 장식 3개를 달았는데, 여기도 영락을 장식하였다.

경주는 시내 언저리쪽에도 유적지가 있다.

클릭하면 크게 뜨겠습니다.

 

대강 이쯤 되는 부분이 경주의 시내 부분이다.

원래 지방 소도시가 그렇듯이 적절히 (그 도시치곤)많은 상가가 밀집해 있어서 '시내'에서 많은 걸 해결한다는 말을 쓸 때의 그

시내인데(좀 더 작은 곳이라면 읍내가 되겠다),

큰길 쪽으로 나오면 병원과 약국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드문드문 은행이 보인다. 경주역에서 동서로 나있는 큰길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큰길에서 얼마쯤 들어간 경주여중 앞마당에는 옛날 비석이 있으며, 다시 큰길의 반대쪽으로 나가서 보이는 천마총을

비롯한 대릉원까지 가기 전에, 길을 끼고 동서로 나뉘어져 있는 경주 노서리 고분군과 경주 노동리 고분군이 있다.

원래는 한무더기였겠지만 가운데 길이 나서 둘로 나뉘어 있고, 동네 구획도 달라(각각 노서동, 노동동 소재) 사적 번호도 각각 따로

붙어 있다.
이 쪽의 무덤들은 굉장히 커서, 그 앞에 있는 초등학교 애들은 겨울에는 (하지 말라는데도 불구하고) 눈이 오면 그 앞 슈퍼(지금은

없어졌다)에서 박스를 가져다

고분 위까지 올라가서 타고 내려오고 했다.

무덤이 왜 그렇게 커요? 진짜 무덤 맞아요? 라는 사소한 의문과 함께. 난 정말로 바른생활 어린이여서 안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해볼 걸 하고 후회된다.

이 무덤은 노동리 고분군의 대표주자인 봉황대이다. 높이 22m, 지름 82m. 저 양쪽 길 가운데 서서 비석이 보이게 찍었는데, 그나마

양쪽이 다 보이지 않는다...
그 남동쪽에 보이는 황오동 소재의 황오리 고분군으로 말하자면, 큰길 바깥쪽으로 노출된 부분은 작지만 안쪽이 넓다.

여기까지 서론이고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오늘의 본론은 노서리 고분군이다.
애들이 올라가서 박스 썰매를 타고 내려오던 무덤은 아래 사진이다.

 

누르시면 커집니다.

이 큰 무덤을 서봉황대라 부른다.

무덤이 가운데 있는 게 아니라 미묘하게 왼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은, 오른쪽에 있는 나무 뒤에 보이는 옅은 연두색 건물이 그

초등학교이기 때문이다.

교문을 나서면 보이는, 아니 교실에서 바깥만 내다보면 보이는 무덤. 음침한 느낌은 아닌데, 그게 당연한 것이다보니 역시 참 이상한

도시답다.

아랫쪽에 보이는 얕은 언덕은 무덤을 발굴하고 남긴 흔적이다.

안에 있던 것은 아마 거의 박물관으로... 이것이 참 재미있는게, "이미 도굴되었습니다 죄송"인 상태의 무덤도 있었을 텐데 노서리

고분군은 발굴했더니 금관이 나왔다.

그것도 두 개나 나와서, 각각 무덤 이름을 금관총과 서봉총이라 한다.

그리고, 지금 보이는 얕은 언덕은 서봉총의 흔적이다. 그리고 저 비석 얘긴데.

서전국왕 구스타프6세 아돌프 폐하 서봉총발굴기념비
서전국왕폐하의 이 문장은 폐하께서 윤허하시어 보내온것을 옮겨 새겼다
뒷면은 아래 사진과 같습니다. 클릭하면 커지지만...
그래도 전문을 옮기자면,
여기에 자리잡고 있던 무덤은 고대신라의 문화가 찬연히 빛나던 시기에 이룩된 이름모를 왕자(王者)의 유택으로서 1926년

10월 10일 당시 서전국(瑞典國, 스웨덴)의 황태자이시던 현 국왕 구스타프6세 아돌프 폐하께서 루이즈 왕비와 함께

내한하시어 찬란한 황금보관을 친히 발굴하신 유서깊은 사적이다
이 역사적인 발굴을 길이 기념하고자 서전국의 '서'자와 금관의 정수에 장식된 봉황의 '봉'자를 따서 이곳을 서봉총이라

명명하였다.

 또 폐하께서 그날 경주박물관 정원에 친히 기념식수하신 한 그루의 전나무는 오늘도 반세기의 연륜을 해아리며 청청하게

자라고 있으니 이 어찌 한서 양국간의 우호의 상징이 아니랴
이에 오인(吾人)은 폐하의 이 발굴을 영원히 기념하고 아울러 한서 양국간의 친선을 더욱 두터이 하고자 여기에 이 사실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노라
1971년 5월 1일 한서협회장 최장수


그래서 서봉총이다.

읽어놓고 완전히 잊어먹고는 오늘 만난 고등학교 후배와 떠들다가 했다는 이야기는, "이런 동양 촌구석 동네까지 발굴하러 올

정도면 왕자는 왕자래도 서자급 아니었을까?" 하는 농담이었는데 다시 보니 황태자고, 발굴을 목적으로 왔다기보다 사실은 일본의

파티장에서 발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고 한다.

아마 직접 발굴에 참여했다기보다, 뒤에서 구경하고 있었다든가 해서 우호 증진의 의미로 서봉총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리라.

구스타프 6세 아돌프 황태자가 이 발굴현장에 참여했을 때는 이미 44세였다.

이후 68세에 국왕 자리에 즉위하고, 1973년에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현 스웨덴 국왕은 그의 손자인 칼 16세 구스타프이다.

딱히 일제강점기 중이라서 침략자의 일부로 방문한 게 아니라, 이정도면 국빈인데 나라도 다녀가시라 하겠다.

우호 증진을 위해 무덤 이름도 하나 내주고. 사실 그 뒤에 있는 금관총은 금관이 나와서 금관총, 금령총은 금방울이 나와서 금령총,

천마총은 천마도가 나와서 천마총... 이름 짓는 게 거의 거기서 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