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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휴의"제왕운기" 중국은 요하 서쪽, 우리민족 역사무대는 요하 동쪽

설레임의 하루 2011. 12. 14. 00:28

*출처:역사복원신문  글쓴이-동북아역사재단 임상선 연구위원

                                

 

 

 

 

 

이승휴의"제왕운기" 중국은 요하 서쪽, 우리민족 역사무대는 요하 동쪽
 
동북아역사재단 임상선 연구위원 기사입력  2011/11/16 

고려의 대학자 이승휴가 활동한 시기는 대내외적으로 혼란과 격동의 시기였다.

1231년에 시작된 몽고족에 의한 대규모 침략은 1260년 강화교섭이 성사되기까지 계속되고, 특히 충렬왕대(1275~1308)는 몽고의

국력이 한창 팽창되어 가던 시기였다.

 

이승휴의 저술로는 현재 4종이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격동과 시련의 시기를 헤쳐 나가며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려던 그의 이상이

잘 나타나 있다. 

▲    강원도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적(사적421호)                                

 © 역사복원신문

 
 《빈왕록(賓王錄)》은 이승휴가 1273년(원종14년), 그의 나이 50세에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다온 체험을 엮은 것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연행록으로서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내전록(內典錄)》은 불교 전파와 경전 번역 역사 등을 담은 일종의 불교역사서일 것으로 추정되며,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은

이승휴 시문을 수습하여 1360년(공민왕) 어간에 처음 간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승휴의 대표 저술로 알려진 것이 바로 《제왕운기(帝王韻紀)》다.

 

《제왕운기》는 상·하 2권 1책에 중국과 한국의 역대 왕조 역사를 서술한 것이며, 1287년(충렬왕 13년)에 간행되었다.

상권에는 서문에 이어 중국 역사의 요점을 신화시대부터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기술하고, 그 끝에 중국 역대 왕조의 정통계승관계를

정리하였으며, 하권은 고려 이전 우리 역대 왕조의 역사를 서술한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와 고려 역사를 정리한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로 나눌 수 있다.

《제왕운기》는 단군을 한국사 맨 앞자리에 두어 단군의 후손으로 단일민족임을 천명하고, ‘지리기(地理紀)’에서는 요동(遼東) 지역이

중원 왕조와 구별되는 지역이며, 그것이 바로 조선이라고 하였다.

지리기에서 우리 역사무대를 요하 동쪽이라 한 것은 부여와 고구려, 발해의 강역을 의식한 것이며, 중국의 역사무대는 결과적으로

요하 서쪽으로 한정된다.

《제왕운기》에 나타난 발해 인식

고구려 멸망 후 그 땅에 건국된 것이 발해(渤海)다. 《제왕운기》는 발해를 단군 후손인 동족(同族)으로 인식하였고, 그에 따라

고려에 앞서 아래와 같은 발해사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전 고구려 옛 장수 대조영이

   태백산 남쪽 성에(지금의 남책성이다. 오대사에서 이르길,

   ‘발해는 본래 속말갈인데, 영주 동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웅거하였다. 주나라 측천 원년 갑신에(신라가 고구려를 멸한 후 17년)

   나라 열고 발해로 이름하였다.

   우리 태조 8년 을유(후당 장종 동광 원년)에 이르러

   온 나라가 서로 거느려 왕경(王京)에 조회하였다.

   누가 기틀 알고 먼저 돌아와 의탁하였는가.

   예부경과 사정경이었다.(예부경인 대화균, 사정경 좌우장군

   대리서, 장군인 신덕, 대덕, 지원 등 6백호가 내부하였다.)

   지나온 해가 이백 사십 이년

   그 동안 몇 임금이 수성하였는가.

  《제왕운기》 권하, 동국군왕개국연대

《제왕운기》의 발해사 부분은 건국관련 내용, 멸망 직전 발해인의 고려 내투에 관한 내용,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해 존속시기와 발해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고구려 옛 장수 대조영이 태백산 남쪽 성을 기반으로 측천 원년 갑신, 개국하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하였다’고 하였다.

《제왕운기》는 발해 건국자인 대조영을 ‘고구려 옛 장수’라고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   고려 학자 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        © 역사복원신문
발해 건국지에 대하여 《제왕운기》는 ‘태백산 남쪽 성’이라 하고, 그 세주에서는 다시 ‘지금의 남책성(南柵城)이다’라고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신당서》 〈발해전〉에서 말하는 발해 책성부(柵城府)가 주목된다. 책성부는 예맥의 옛터인데, 발해 동경용원부가 있던 곳이었다. 이곳은 현재 중국 길림성 훈춘의 팔련성(八連城)에 비정되며, 동해 및 두만강이 가까이 있어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다. 남책성은 책성 남쪽 어느 지역으로 짐작된다.

고려 태조 8년 을유년에 발해가 온 나라를 들어 고려 왕경에 조회하니, 먼저 의탁한 인물이 예부경과 사정경이라고 하였다. 태조 8년 을유년은 925년인데, 세주에서 말한 동광 원년은 923년으로 연대상으로 차이가 있다. 뒤에 대화균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태조 8년을 발해멸망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그러나 발해 멸망은 《요사(遼史)》에 의하면 고려 태조 9년(926년) 정월이었다. 

발해가 고려에 귀부하게 된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서 예부경과 사정경을 들고, 그 세주에서 예부경인 대화균, 사정경 좌우장군 대리서, 장군인 신덕, 대덕, 지원 등 6백호가 내부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지만, 《제왕운기》의 발간 시기가 빠르기 때문에 현존하는 자료상으로는 《제왕운기》가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제왕운기》는 발해가 684년에 건국되어 242년 동안 존속하였다고 하였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발해 건국이 698년이고,

거란에 멸망한 것이 926년 1월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발해는 228년 동안 존속한 것이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격동과 시련의 시기에 살았던 고려의 지식인 이승휴가 단군을 시작으로 하는 통사적 한국사 체계를 세우고,

발해를 한국사 체계 속에 적극 편입한 것은 그후 고려 후기와 조선 시대의 역사서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기사입력: 2011/11/16 [15:45]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