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상고사는 의문투성이다. 모든 의문의 출발점에 한사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한사군 전쟁의 중심에 있는 패수의 위치가 학자에 따라 한반도 평양에서 중국 하남성 황하 부근에 이를 정도로 그 편차가 수 천리에 이른다. 도대체 고조선의 실체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한사군 문제를 풀기 위한 자료가 너무나 빈약할 뿐만 아니라 또 있는 자료들마저도 권력과 욕망에 의해 수없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고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한사군 문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한사군을 극복하는 과정과 더불어 우리의 삼국시대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역사서인 『부도지』에서 한사군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길이 보인다. 『부도지』에는 고조선의 위치와 그 존재의의 등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이 들어있다. 앞으로 5회 정도에 걸쳐 『사기』‘조선열전’을 통하여 한사군 전쟁의 전모를 살펴본다. 원문 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중국정사조선전’을 인용하였다. *
『부도지』로 본 한사군 전쟁(제4회)
4. 중국 하북성 창해군 지역이 진번의 중심지역이다.
○ 사기 조선열전 원문 및 번역(4)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¹ 때에 이르러서는 유인해 낸 한나라 망명자수가 대단히 많게 되었으며², 천자에게 입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³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 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 원봉 2년(B.C.109)에 한나라는 사신 섭하를 보내어 우거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우거는] 끝내 [한나라] 천자의 명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면서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서 마부를 시켜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 장長을 찔러 죽이고 바로 [패수를] 건너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드디어 천자에게 ‘조선의 장사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천자가 그 공을 기려 꾸짖지 않고 섭하에게 요동동부도위⁴의 벼슬을 내렸다. 이에 조선은 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습 공격해 하를 죽이니, 천자는 죄인을 모집하여 조선을 치게 하였다.(元封二年, 漢使涉何譙諭. 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御刺殺送何者, 朝鮮裨王長, 卽渡, 馳入塞, 遂歸報天子曰「殺朝鮮將.」 上爲其名美, 卽不詰, 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發兵襲攻殺何. 天子募罪人擊朝鮮.)
○ 그 해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齊로부터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너게 하고⁵ 군사 5만으로 좌장군 순체는 요동에서 출격하여 우거를 토벌하게 하였다. 우거는 군사를 일으켜 험준한 곳에서 대항하였다.
좌장군의 졸정인 다多⁶가 요동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진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군사는 흩어지고 다多도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법에 따라 참형을 당하였다. 누선장군은 제나라 병사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에 이르렀는데,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으면서, 누선의 군사가 적음을 엿보아 알고, 곧 성을 나와 누선군을 치니 누선군은 패해 흩어져 도망갔다. 장군 양복은 그의 군사를 잃고 10여일을 산중에 숨어 살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거두어 모아들였다. 좌장군도 조선의 패수서군⁷을 쳤으나 깨뜨리고 전진할 수가 없었다.(其秋, 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出遼東, 討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卒正多率遼東兵先縱,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將齊兵七千人先至王險. 右渠城守, 窺知樓船軍少, 卽出城擊樓船, 樓船軍敗散走. 將軍楊僕失其衆, 遁山中十餘日, 稍求收散卒, 復聚.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 천자는 양장군의 전세가 유리하지 않다고 여기고, 위산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를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사자를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였으나 양 장군이 신을 속여서 죽일까 두려워했는데, 이제 신절信節을 보았으니 항복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태자를 보내 들어가 사죄하게 하고, 말 5천 필을 바침과 아울러 군량미를 내주었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지니고 막 패수 건너려 할 때 사자와 좌장군은 그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에게 말하기를,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버리라고 명하시오.” 라고 하였다. 태자도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속이고 죽일까 의심하여 끝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 위산이 돌아와 천자께 보고하니 천자는 산을 주살하였다⁸.(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往諭右渠. 右渠見使者頓首謝「願降, 恐兩將詐殺臣, 今見信節, 請服降.」 遣太子入謝, 獻馬五千匹, 及饋軍糧. 人衆萬餘, 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降, 宜命人毋持兵.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1. 우거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종래에는 우거를 단순히 위만의 손자의 인명으로 보아 왔으나, 최근의 언어학적 연구에서 ‘우거’를 어원적으로 분석하여 고조선 시대에 우거는 ‘씨족의 생활 공동체 혹은 생활 공동체의 연합체의 우두머리직 또는 사람’의 뜻을 지닌 보통명사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그 형태는 ‘우ㅅマ)(/UTK∧/)’라는 세 개의 구성형태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조승복,「Reflection upon the Ko Tsosen Word/UK∧/」)
위만이 기원전 3∼4세기 이래 초기국가(Pristine State)로서 존재해오던 ‘예맥조선’(종래의 기자조선)을 공멸하고, 강력한 정복국가인 ‘위만조선’을 수립한 것은 기원전 2세기경이었다. 그런데 이 위만조선은 위만의 손자인 우거대에 와서 발달된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강고한 군사역량을 구사하여, 주위의 제변방정치집단들의 대한漢교역을 매개함으로써 그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고자, 그들의 대한무역로를 차단할 것을 기도하였다. 아울러 우거가 이로 인한 한漢제국의 정치 ·군사적 압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흉노와 혹종或種의 군사적 제휴관계를 모색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상정될 수 있다. 한 무제가 ‘동벌조선東伐朝鮮 기현토낙랑起玄菟樂浪 이단흉노지좌비㠯斷匈奴之左臂’(『한서』「위현열전」)라고 한 발언은 당시 한漢ㆍ흉노ㆍ위만조선 간에 전개된 정치적 관계를 충분히 시사해주고 있다.
이러한 우거치하 위만조선의 한漢제국과의 제반이해관계의 상충이 한 무제로 하여금 조선정벌을 단행케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2) 필자의 주석
“최근의 언어학적 연구에서 ‘우거’를 어원적으로 분석하여 고조선 시대에 우거는 ‘씨족의 생활 공동체 혹은 생활 공동체의 연합체의 우두머리직 또는 사람’의 뜻을 지닌 보통명사로 사용되고 있었다.(조승복,「Reflection upon the Ko Tsosen Word/UK∧/」)”는 견해에 동의한다. 『부도지』에 따르면 고조선 사회는 우두머리가 화백제도를 통하여 선출되었다. 위만조선을 건설한 만滿의 성이 위衛씨인데 그의 손자인 우거의 아들이 장항長降으로 장長씨로 성이 다른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2. 소유한망인자다所誘漢亡人滋多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주석 없음
(2) 필자의 주석
한나라는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효혜ㆍ고후시기를 거치면서 변방국들과 평화를 추구하였다. 변방국들에게 공주와 매년 일정량의 재물을 주고 한나라를 침범하지 않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맺었다. 위만이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도 한나라와 평화협정을 맺고 군사와 재물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무제(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가 등극하면서 한나라는 평화협정을 깨고 공세적으로 주변국들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북쪽으로 흉노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양월을 정복하는 등 수많은 전쟁을 일으켜 전쟁에 지친 병사들과 피폐해진 한나라 백성들이 위만조선으로 망명하였다.
3. 중국衆國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본 사료에서는 진번과 인접한 국가들은 ‘중衆’(무리)과 ‘국國’(나라)의 두 글자로 표기하고 있다. 한편『사기』에서의 ‘중국衆國’이란 표현은 다른 사료들, 특히『한서』와『자치통감』에 비추어 보아, 한반도 남부의 부족연맹체를 지칭하는 ‘진국辰國’을 의미한다는 진국설도 개진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병도,「개국蓋國과 진국辰國」 pp. 238∼241) 그러나 진국辰國이라는 나라 하나만이 존재하였다고 보는 것은 해석상 난점이 없지 않다. 설사 진국辰國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하여도 그것은 여러 나라 가운데서 하나인 진국이지, 옛 삼한땅에 진국만이 있었다고 보는데는 무리가 따른다. 이러한 견해는 자구의 시비에 관심을 두고서 ‘중衆’자와 ‘진辰’자의 구별에 이해의 초점을 맞춘 것이지만, 오히려 근본적인 문제는 당시 존재하였던 정치집단의 성격규명에 있는 것이다. 즉, 진번 등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조선과 ‘중국衆國’ 혹은 ‘진국辰國’ 뿐만아니라 ‘진번眞番’도 문제의 대상이 됨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중국衆國’ 가운데 하나인 ‘진국辰國’으로 해석한다 할 때, 그것은 ‘진번眞番’과 대비되는 정치발전상의 의미를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진국설辰國說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본 사료를 ‘진번眞番’의 위치비정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료로 활용하고 있고, 또한 진번을 예로 들어 당시의 정치발전단계를 고려함이 없이 국명으로서 진국辰國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국衆國인가 진국辰國인가 하는 문제는 중국衆國 가운데 하나인 진국辰國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조선과 진국辰國 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시기에 존재했던 정치집단으로서 양자만을 인식하는 자세는 재고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사료를 ‘진번방중국眞番旁衆國’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진번방진국眞番旁辰國’으로 새기는 진국설辰國說의 그것보다, 당대의 실상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닐까 한다.
(2) 필자의 주석
앞에서 ‘군장君長’ 항목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고조선 사회는 사해평등과 민족자치를 통치이념으로 하였으므로 모든 족속들이 항상 6부로 나뉘어 자치를 행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진번의 주변에 많은 부족국가들과 군장들이 존재하였다. 다만 ‘중국衆國’ 또는 ‘군장君長’이라는 용어는 사마천이 중국의 봉건제적 입장에서 고조선을 바라본 것이고, 실제 고조선은 각 민족들이 6부로 나뉘어 민족자치를 행하였지만 그것이 각각 나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통의 관심사에 대하여는 화백제도를 통하여 모든 일을 처결하는 연방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4.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한제국의 지방제도는 제후국諸侯國과 열후국列侯國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진제秦制를 계승하여 군현제도를 실시하였다.
이 군현제도의 기구와 조직을 살펴보면 군에는 군수ㆍ승ㆍ도위가 있었는바, 그들은 모두 중앙정부에 의하여 임명ㆍ파견되었다.
한편 한제국의 지방군은 각 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각 군에서 병사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은 절秩 2천석의 도위였다. 도위는 각 군의 군사적 요지에 한 사람 아니면 두 사람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도위가 그 군의 병력을 직접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위는 군의 최고책임자인 태수의 규제를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병력을 동원할 때는 중앙에서 일종의 할부割符였던 동호부銅虎符를 가진 사자가 태수한테 파견되고, 태수가 가지고 었던 좌반부左半部와 합치되면 태수는 도위에게 명령을 내려 병력을 동원하였다.
(2) 필자의 주석
위와 동일하다. 첨부하면 연나라 시대의 요동과 한나라 초기의 요동은 그 위치가 다르다. 연나라 시대의 요동은 연나라가 진번ㆍ조선을 복속시키고 그곳에 상곡군ㆍ어양군ㆍ우북평군ㆍ요서군ㆍ요동군을 설치하였다. 반면 한나라 초기의 요동은 한나라가 위의 5군이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대폭 후퇴하였다. 위만조선이 진번ㆍ조선을 다시 회복함으로써 한나라와 고조선은 당하(패수)를 경계로 하였다. 따라서 한나라 초기의 요동은 당하唐河 이남지방이 될 수밖에 없다. 요동동부도위의 위치는 대략 당하이남 호타하이북 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 조선이 요동동부도위인 섭하를 공격하여 죽인 것은 섭하가 조선 비왕 장을 죽인 원한도 있지만, 당하 이남에서 호타하 이북은 원래 조선의 땅이므로 위만조선이 고토의 일부를 회복한 것이다. 본문에서 위만조선에 패수서군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한나라 초기 대代 땅과 당하 이남 호타하 이북의 땅에서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던 것도 그곳이 단군임검 당시의 조선 영토에 해당하는 곳이므로 고조선 세력들이 그곳을 수복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라 할 수 있다.
5. 종제부발해從齊浮渤海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발해는 기원전 3∼2세기 이전부터 발해로 불리어왔다. 즉, 기원전 5∼3세기의 기록으로 이해되는『산해경』「해내동경」에 ‘요수출위고산潦水出衛皋山 동남주발해東南注渤海 입요양入潦陽’(東南至潦陽注渤海로 읽어야 될 듯하다)로 나타나고 있고,『사기』「하거서河渠書」의 황하가 발해로 들어간다는 내용 등을 불 때 기원전 3∼2세기 이래로 발해는 변함없이 발해로 불려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발해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에 둘러싸인 지역으로 발해만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런데 발해의 이 같은 위치확정에서 전국시대의 제齊지역인 산동반도에서 출발하여 향한 지역이 한반도가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올 경우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발해만을 거쳐 요동반도 외곽으로 내륙을 끼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이 견해는 다시 한번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2) 필자의 주석
발해에 대한 설명은 위와 동일하다. 누선군이 “제나라로부터 발해에 배를 띄우고 나아갔다.”는 구절은 당시 위만조선의 세력판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아래 지도(황하의 흐름 및 해안선 지도, 다음카페 coo2.net/사기조선열전 해설본 참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한 당시 황하는 천진방향으로 흘렀다. 그러므로 누선군이 위만조선의 도성인 만성을 공격하려면 황하를 타고 내려가면 훨씬 수월하다. 그런데 굳이 제나라가 있는 산동반도에서 발해에 배를 띄우고 나아간 것은 황하하류 일대가 위만조선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황하하류 일대의 동해안 지역은 기자가 조선을 침범할 때 조선의 민중들이 피신한 동해지빈東海之濱으로 진번지역에 해당한다.(부도지 제27장 해설) 『사기』와『한서』에서 원삭 원년(BC 128) 동이의 예군 남려 등 28만 명이 항복을 하여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며, 『후한서』에 “예군 남려 등이 우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내속하니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다.”라고 한 창해군 지역이 곧 부도지에서 말한 동해지빈東海之濱이며, 진번의 핵심지역이다. 그러나 창해군은 원삭 3년 봄 폐지되었고, 도로 위만조선에 속하게 되었다.
6. 졸정卒正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당시 한제국에 있어서의 제군諸郡의 군사편제는 일반전투병과인 보졸과 재관材官(노수弩手)ㆍ기사(기병) 및 누선사樓船士(수군) 등의 특수병과로 구성되어 었었다.
따라서 졸정은 일반전투병인 보졸로 편성된 일정규모의 단위전투부대의 지휘관에 해당하는 관직명이며, 다多는 그러한 지휘관의 인명으로 추측되어진다.
(2) 필자의 주석 : 위와 동일
7. 패수서군浿水西軍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조선군의 편제가 본문상에 ‘패수서군’과 ‘패수상군’으로 나타나고 있음에서 위만조선의 군사편제가 한제국의 대규모원정군과 맞서 대등한 군사작전을 전개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조직적인 것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2) 필자의 주석
산서성과 하북성은 험준한 태행산맥을 경계로 나누어져 있고, 그 태행산맥을 넘는 길은 많지 않다. 산서성에서 태행산맥을 넘어 위만조선의 도성인 만성을 공격하는 길은 대략 세 갈래이다.
첫 번째가 산서성 대代에서 평형관平荊關을 지나 태백산 북쪽으로 당하(패수) 상류를 건너서 만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이곳을 방어하는 군사가 패수상군이다. 위만이 산서성 대代 땅의 장성 아래 주둔하다가 조선으로 망명한 경로도 이 길이다.
두 번째는 산서성 대代에서 용천관龍泉關을 나가서 대사하를 건너 태백산 남쪽으로 나가서 만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이곳을 방어하는 군사가 패수서군이다. 이 길은 장안에서 태원을 거쳐 만성까지 이르는 최단 경로로 본문의 한무제 사신 섭하도 이 길을 사용한 것으로 파악된다. '사기정의' 해설에 의하면 섭하가 조선 비왕 장을 찔러 죽이고 패수를 건너 도망간 장새가 평주平州 유림관楡林關인데 중국군사지도(1918년)에 용천관龍泉關 주변에 유림楡林이라는 지명이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세 번째는 산서성 태원에서 정형관井陘關을 나가 호타하와 대사하를 건너 만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졸정卒正 다多가 거느린 요동군의 진격로로 추정된다. 누선군은 당시 해안선이 만성부근까지 이어졌으므로 발해만에서 당하를 타고 북상하면 바로 만성에 도달한다.(‘한사군 전쟁 개요도’ 참조)
8. 천자주산天子誅山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주석없음
(2) 필자의 주석
위산이 주살된 이유가 무엇일까? 천자가 위산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兵威)을 갖추고 가서 우거를 달래라”고 하였는데, 납득하기 어렵다. 당시의 전황을 살펴보면 좌장군의 졸정인 다多가 요동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출진하였다가 싸움에 패하여 다多는 참형을 당하였다. 이어서 누선군도 참패를 당하였으며, 좌장군 순체 또한 패수서군과 싸워 이기지 못하였다. 한나라 군사가 연전연패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사의 위엄’ 운운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앞에서 한나라가 위만에게 병위재물兵威財物을 주고 외신으로 삼는 약속을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자가 위산에게 ‘병위’보다는 ‘재물’로 우거를 설득하도록 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사기』‘색은’은 찬술하여 이르기를 “ ..... 두 장수를 의심한 위산과 공손수는 법에 따라 주살되었다. 장계를 어지럽게 보고한 것이다.”고 하였다. “장계를 어지럽게 보고했다.”는 것은 위에서 우거가 항복하려고 했다는 내용들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당시 위만조선이 전쟁에서 연전연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할 이유도 없거니와 항복하러 가는데 무장한 병력을 만여 명이나 동원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위산은 많은 재물만 낭비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자, 그 허물을 좌장군에게 돌리려고 위와 같은 거짓 장계를 올렸다가 주살된 것이다. <다음호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