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조선(한단고기)

『부도지』로 본 한사군 전쟁(제2회)

설레임의 하루 2011. 12. 11. 23:49

*출처:다음카페-행동하는 언론소비자연대  글쓴이-사람이 하늘이다 2011.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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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로 본 한사군 전쟁(제2회)

 

 왕검성은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다.

이곳이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중심지이며, 낙랑군 치소였고 고구려 평양성터였다.

 

 

○ 사기 조선열전 원문 및 번역(2)

연왕 노관¹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인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동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의 옛 공지인

상하장²에 살았다.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蠻夷 및 옛 연ㆍ제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³, 왕검에 도읍을

정하였다.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1. 노관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노관은 풍인豊人으로 한 고조(유방)와 동향인으로서 한 건국에 적극 참여하여 이성제후異姓諸侯 7인 중 1인으로 연왕燕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한 고조의 이성제후 제거정책이 진행되자, 흉노로 망명하였고 흉노는 그를 동호로왕東胡盧王으로 봉했다.

그는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2) 필자의 주석

노관은 강소성 서주시 풍현豊縣 사람으로 한고조 유방과 동향인이다.

한고조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항상 유방을 보필하면서 많은 공을 세웠다.

본문의 ‘연왕 노관의 배반과 만滿의 망명’을 이해하려면 당시 산서성과 하북성 및 연나라의 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연왕 노관의 행적을 통하여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한고조 당시 산서성과 하북성 및 연나라는 끊임없이 한나라와 갈등관계에 있었다.

특히 산서성 대代 지역을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많은 전쟁을 벌였다.

『사기』의 ‘고조본기’ ‘흉노열전’ ‘한신노관열전’ ‘번쾌열전’ 등을 참조하여 당시의 상황을 살펴본다.

한왕漢王 2년인 기원전 205년, 한신(회음후 한신과는 동명이인)이 산서성의 한韓나라 땅(태원 이남)을 공략하여 10여 개의 성을

평정했다.

한왕 유방은 약속대로 한신을 한왕韓王으로 봉했다.

기원전 202년 12월 한고조가 마침내 해하에서 항우을 격파하고 천하를 안정시켰다.(이때는 ‘冬十月’부터 한 해가 시작되므로

12월은 연초에 해당한다.

한무제 태초太初 원년인 B.C 104년부터 하정夏正으로 변경되어 태초 2년부터는 ‘春正月’로 한 해가 시작됨)

기원전202년 10월 연왕 장도臧荼가 반란을 일으키고 남하하여 대代 땅을 공략하였다. 고조가 친정하여 연왕 장도를 사로잡고,

태위 노관을 연왕으로 임명했다.

이어서 승상 번쾌를 시켜 군사를 이끌고 나가 대代 땅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기원전 200년, 한왕 신의 봉국을 태원 이북으로 옮겨 치소를 진양晉陽으로 삼아 호胡의 침입을 막도록 했다.

한왕 신이 변경의 방어기지와 가까운 마읍馬邑으로 치소를 옮겨달라고 황제에게 청하여 치소를 마읍으로 옮겼다.

그해 가을 흉노의 선우 모돈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마읍의 한왕 신을 포위했다. 한왕 신은 마읍성을 흉노왕을 접견하는데

예물로 삼아 헌상하고 흉노에 투항한 다음 군사를 태원으로 진격시켰다.

기원전 199년 겨울, 한고조가 친히 원정길에 올랐으나 흉노의 유인작전에 말려 백등산에서 7일 동안 포위당하여 곤욕을 당하였다.

이로부터 한나라는 흉노에게 공주를 연지(흉노의 왕비)로 보내고 매년 일정한 양의 솜과 비단 및 술과 음식을 바치기로 하는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

한고조는 회군하면서 진희陳豨를 열후에 봉하고 조나라 상국의 신분으로 조와 대 변경의 군사를 그에게 지휘하도록 했다.

그래서 조와 대 변경의 군사들은 모두 진희에게 속하게 되었다.

기원전 197년 7월, 한고조의 부친 태상황이 붕어했음으로 사자를 보내 진희를 불렀으나 진희는 중병에 걸렸다고 하면서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한신이 왕황 등을 진희에게 보내 모반하도록 선동했다.

그해 가을, 진희가 대(代)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가 한단邯鄲으로 친히 출전하여 진희의 군사를 격파했다.

연왕 노관 역시 진희의 군사를 동북쪽에서 공격했다.

그해 겨울, 조나라와 태원 및 대 땅을 평정하고 회군하면서 한고조는 그의 아들 유항을 대왕代王에 봉한 후 중도中都(산서성

태원부근)에 치소를 두고 대와 안문 등의 땅을 속하게 했다.

기원전 195년 봄, 한왕 신이 다시 흉노의 기병을 이끌고 삼합현參合縣으로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한나라에 항거하자, 한나라 조정이

시장군柴將軍을 보내 물리치도록 했다. 얼마 후에 양군이 교전에 들어갔다.

시장군은 삼합에 주둔하고 있던 흉노병을 모두 죽이고 한왕 신은 붙잡아 참수했다.

그 해에 한고조가 동쪽의 경포를 토벌할 때, 진희는 여전히 군사를 이끌고 대代 땅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한나라가 번쾌에게 진희를 공격하여 죽이도록 하였다. 진희의 비장이 항복하여 연왕 노관이 진희와 음모를 꾸민 것을 폭로했다.

고조가 사자를 보내 노관을 소환했으나 노관은 칭병하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윽고 연왕 노관의 주변 인물들이 모두 도망치거나 숨어버렸다.

 

한고조는 번쾌로 하여금 연나라를 토벌하도록 했다.

연왕 노관이 그의 장수들과 궁인들 및 가솔들과 수천의 기병들을 이끌고 장성 아래 머물면서, 후(무양후 번쾌)를 방문하고,

다행히 고조의 병이 낫게 되면 스스로 입조하여 사죄하려고 하였다.

그해 4월 고조가 죽자 노관은 무리들을 이끌고 흉노로 도망쳤다.

흉노는 노관을 동호노왕(東胡盧王)에 임명했다. 노관은 만이의 침탈을 받으므로 항상 한나라로 돌아올 생각을 갖고 있었다.

노관은 1년여 후에 호 땅에서 죽었다.

그해 겨울 번쾌가 군사를 이끌고 진희를 추격하여 영구(靈丘)에서 그의 목을 벴다.

 

 

2. 상하장上下鄣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한의 동계요새東界要塞는 당시의 패수 서안에 존재했으며 그 동쪽은 조선영토였다.

『삼국지』에 인용된『위략』에 의해 이 당시 진의 고지를 위만이 준왕에게 거주허가를 요청한 사실에서 조선영토였음이 확실하다.

‘진고공지秦故空地’를 문자 그대로 빈 땅으로 보아 진과 고조선과의 완충지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진고공지’에 장새가

설치된 데에서 이는 진의 요동외요에서 관할하던 지역으로 보는 것이 옳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42) 특히 이 지역에 중국유민과 만이(조선인)가 존재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즉, 이 지역을 근거로 위만은 구체적 영역(백리)내의 계속적인 인구 증가 등을 기반으로 준왕을 축출할 수 있는 정복국가적 성격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한편 ‘상하장’이란 표현은 순서적 표현일 수도 있고 원근적 표현일 수도 있는 바 두개의 요새가 존재했음은 확실하다.

또 이를 ‘오르내리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백마고길白鳥庫吉,「조선고대지명고」 p.29)

 

 

(2) 필자의 주석

만滿이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넜는데, 만滿이 도망하기 전에 있었던 곳은 어디일까?

그곳을 알면 패수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사기』 ‘한신노관열전’에서 이 의문을 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위의 ‘노관’ 항목에서도 소개한 구절이다.

 ‘진희가 산서성 대代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한나라가 번쾌에게 진희를 공격하여 죽이도록 하였다.

진희의 비장이 항복하여 연왕 노관이 진희와 음모를 꾸민 것을 폭로했다.

고조가 사자를 보내 노관을 소환했으나 노관은 칭병하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윽고 연왕 노관의 주변 인물들이 모두 도망치거나 숨어버렸다.

한고조는 번쾌로 하여금 연나라를 토벌하도록 했다.

연왕 노관이 그의 장수들과 궁인들 및 가솔들과 수천의 기병들을 이끌고 장성 아래 머물면서, 후(무양후 번쾌)를 방문하고, 다행히

고조의 병이 낫게 되면 스스로 입조하여 사죄하려 하였다.

그해 4월 고조가 죽자 노관은 무리들을 이끌고 흉노로 도망쳤다.’는 내용이다.

연왕 노관은 “주변 인물들이 모두 도망치거나 숨어버리고” 또 “노관이 그의 장수들과 궁인들 및 가솔들과 수천의 기병들을 이끌고

장성 아래 머물면서, 후(무양후 번쾌)를 방문하고, 다행히 고조의 병이 낫게 되면 스스로 입조하여 사죄하려고 하였다.

(燕王綰悉將其宮人家屬騎數千居長城下,侯伺,幸上病癒,自入謝。)”고 한 것으로 보아 노관은 연나라에 대한 지배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궁인들과 가솔들을 이끌고 망명을 준비한 것을 알 수 있다. 노관이 머문 ‘장성아래(長城下)’의 장성이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한나라의 번쾌와 대왕代王 진희 및 연왕 노관이 대치한 곳은 산서성 대代 땅 주변이므로 ‘장성’은 지도의 ‘요동고새 2(분홍색)’로

산서성 중부의 황하에서 태백산에 이르는 장성이다.

 

한사군 전쟁 개요도

 

 

당시 한나라는 한고조 유방이 병들어 누워 있었고, 여후(후일 여태후)와 유방의 총애를 받던 척부인 간에 태자의 자리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고 있었다. 『사기』 ‘번쾌열전’ 등에 의하면 “연왕 노관이 모반하자 한고조가 번쾌를 상국相國으로 삼아 연왕을 정벌하도록

했다.

번쾌는 여후(후일 여태후)의 여동생인 여수呂嬃의 남편이다.

어떤 사람이 ‘번쾌가 여씨들과 작당하여 고조 사후에 군사를 동원하여 척戚부인과 그 소생인 조왕 여의如意 및 가속들을 모조리

죽이려 한다.’고 모함했다.

고조가 듣고 크게 노하여 진평에게 ‘번쾌의 군영으로 가서 즉시 번쾌의 목을 베라’고 명하였다.

진평이 여후(여태후)의 보복이 두려워 번쾌를 직접 죽이지 못하고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장안에 당도했을 때 고조가 이미 죽고 난 후였다. 여후가 번쾌를 석방하고 그 작위와 식읍을 회복시켰다.”고 하였다.

만약 한고조가 그때 병으로 죽지 않았더라면 연왕 노관과 대왕 진희를 토벌하러 간 번쾌가 오히려 주살되고, 노관은 한나라로 복귀할

수도 있었다.

노관이 연나라 도성을 버리고 궁인 및 가솔들과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산서성 대代 지역에 있는 장성 아래로 나와 머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대代의 안문관(왼쪽 원), 평형관(중간 원), 만성(오른쪽 원), 상하장(파란색 원)

 

 

노관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한고조가 죽자 여태후가 실권을 장악하고 번쾌가 복귀하여 대代를 공격하자, 노관은 흉노로 도망하고,

위만은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노관과 위만이 장성아래의 대代 부근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볼 때, 노관은 북쪽의 안문관雁門關을 통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위만은

동쪽으로 달아나 평형관平荊關을 나가서 당하(패수로 비정)를 건너 조선으로 망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서성의 평형관平荊關을 나가면 바로 항산과 오대산 사이를 흐르는 당하(패수로 비정)가 있고 당하를 건너면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만성滿城이 나온다.

(지도 참조, 아세아동부여지도 1875년작/다음카페 향고도/중국고지도) 위만의 망명로는 위의 ‘한사군 전쟁 개요도’에서

 ‘① 패수상군쪽 진격로’와 일치한다.

상하장上下鄣은 산서성의 황하에서 장가구에 이르는 장성(요동고새 1)과 황하에서 태백산에 이르는 장성(요동고새 2)이 상하에

위치하며, 그 중간에 위치한 대동부에 운중雲中ㆍ좌운左雲 등의 지명이 보이는데 이 부근으로 추정한다.

이곳은 산서성에서 하북성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 상하의 두 곳에 존재한다.

위 ‘노관’ 항목에서 보았듯이 상하의 장성에 둘러싸인 연나라 지역은 노관이 가솔들을 이끌고 도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미

고조선의 세력권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3. 왕험王險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위만조선의 도읍지인 왕험王險(『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왕검王儉’으로 표기)의 위치에 대하여『사기집해』에서는 ‘창려유험

현야昌黎有險瀆縣也’라는 서광의 말을 인용하고,『사기색은』에서는 요동험독현‘遼東險瀆縣 조선왕구도朝鮮王舊都’라는 응소의

주를 인용하고 있다.

한편『한서』「지리지」 요동군조 험독의 주에는 ‘조선왕만도야朝鮮王滿都也 의수험依水險 고왈험독故日險瀆’이라는 응소의 견해와

‘왕검성재낙랑군패수지동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차자시험독야此自是險瀆也’라는 신찬의 해석이 부기되어 있다.

 

왕험성의 위치는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의 강역은 물론, 위만조선 멸망 후 그 지역에 설치된 한사군의 위치비정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인데, 이러한 주석 자료의 차이에 의해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왕험성의 위치는 현 평양으로, 또 고조선이나 한사군의 위치는 한반도 북부로

 

이해되어 왔다. (정약용,『여유당전서』「강역고」 조선고)

 

이에 대해 요동군의 속현인 험독險瀆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한자어 표기인 검독儉瀆으로 이해하고 이를 왕험성王險城에 비정하여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이 계속하여 요동에 있었다고 본 견해가 있는데, 리지린은 이러한 견해를 체계화한 대표적인 학자로서,

실제 현 개평 지방으로 그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고조선연구』pp.83~96) 그러나 왕험성은 패수 이동 진고공지秦故空地 이남에 있었던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이는『한서』「지리지」의 낙랑군 조선현이 분명하다.

따라서 요동군 험독현이 왕검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사기색은』에서 왕험성의 주석에 응소의 주를 인용한 것과『사기집해』에서

서광의 말을 인용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근거하여 위만조선의 도읍을 요동의 험독險瀆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성립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조선의 이동설에 의하면 험독은 고조선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조선계 지명으로서, 고조선의 도읍은 요동의 험독에서 평양의

험독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고조선의 초기 도읍지는 요동의 험독이 분명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대체로 요하 이동 천산 이서의 어느 지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사기』의 왕험성은 진고공지秦故空地 이남에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고조선이 요동의 험독에서 그 중심을 옮긴 이후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2) 필자의 주석

왕험王險은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왕검王儉으로 표기한 바와 같이 단군왕검(임검)의 도읍지로 본다. 『부도지』 제13장을

해석해보면 위만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만성滿城의 위치와 단군왕검(임검)의 부도(아사달, 조선)의 중심지가 거의 일치한다.

『부도지』에 의하면 부도(아사달, 조선)에 기원전 2000년 이전에 당요(요임금)의 침입이 있었고(부도지 제17장), 기원전 1000년

이전에 기자의 망명이 있었다(부도지 제27장).

중국의 고지도인 대청광여도(다음카페 향고도/중국고지도 참조)에는 만성부근에 요성堯城이 있어 요임금의 침입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춘추열국도와 전국칠웅도(다음카페 향고도/중국고지도/청국지지 참조)에는 기자의 후손이 세운 선우국과 중산국의 위치가

만성부근에 표기되어 있어서 기자의 망명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부도지』와 『사기』등의 역사서를 종합해보면 조선(신시, 부도, 아사달, 진조선)지역의 역사변천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단군임검이 부도를 건설한 이래로 요임금의 1차 침입이 있었으나, 요임금의 침입은 곧 평정되었다(『부도지』제18장과 19장).

그로부터 천여 년이 지난 기원전 1122년경에 기자가 조선(부도)에 망명하여 정권을 찬탈하였다(『부도지』제27장). 기자조선은

천여 년 동안 흥망을 거듭하였는데, 춘추전국시대에는 선우국鮮于國으로, 전국시대에는 중산국中山國으로, 전국말과 진나라시기에는

기자조선으로 존재하였다.

한나라 초기에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다가 기원전 108년 한무제 때 한나라의 낙랑군으로 편입되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한무제 시대에는 우거왕의 아들 장항長降을 기후幾侯에 책봉하여 하북성 중산 일대을 지배하게 하였으나,

모반을 일으켜 참수되었다.”고 하여 한사군전쟁 후에도 우거왕의 아들 장항이 조선의 핵심지역인 중산일대를 계속 다스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장항이 참수된 이후 조선지역에 대한 한나라의 지배가 본격화 되었으며, 이에 반발한 조선민중들의 투쟁과 더불어 삼국(신라ㆍ

고구려ㆍ백제)시대가 열린다.

『부도지』제27장에 의하면 고구려는 일어난 즉시 조선(부도)의 북쪽 땅(장가구시, 탁록일대)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또 『사기』‘정의’는 괄지지를 인용하여 “고려는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본래 한나라 낙랑군 왕검(험)성이며 또 옛부터 말하기를

조선의 땅이라 한다(高驪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고 하였다.

후일 고구려가 낙랑을 물리치고 왕검성을 평양성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단군왕검의 왕검성, 기자조선의 도읍지, 위만조선의 만성, 한나라 낙랑군의 치소, 고구려의 평양성이 모두 같은 곳이다.

 <계속>

*출처:다음카페-행동하는 언론소비자연대  글쓴이-사람이 하늘이다 2011.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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