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조선(한단고기)

부도지』로 본 한사군 전쟁(제3회)

설레임의 하루 2011. 12. 11. 23:57

*출처:다음카페-행동하는 언론소비자연대  글쓴이-사람이 하늘이다  201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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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로 본 한사군 전쟁(제3회)|

* 우리 상고사는 의문투성이다. 모든 의문의 출발점에 한사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한사군 전쟁의 중심에 있는 패수의 위치가 학자에 따라 한반도 평양에서 중국 하남성 황하 부근에 이를 정도로 그 편차가 수 천리에 이른다. 도대체 고조선의 실체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한사군 문제를 풀기 위한 자료가 너무나 빈약할 뿐만 아니라 또 있는 자료들마저도 권력과 욕망에 의해 수없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고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한사군 문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한사군을 극복하는 과정과 더불어 우리의 삼국시대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역사서인 『부도지』에서 한사군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길이 보인다. 『부도지』에는 고조선의 위치와 그 존재의의 등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이 들어있다. 앞으로 5회 정도에 걸쳐 『사기』‘조선열전’을 통하여 한사군 전쟁의 전모를 살펴본다. 원문 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중국정사조선전’을 인용하였다. *

 

『부도지』로 본 한사군 전쟁(제3회)

 

3. 위만조선은 산서성과 하북성 및 산동성 등에 이르는 수 천리 영토의 강대국이었다.

 

○ 사기 조선열전 원문 및 번역(3)

이 때는 마침 효혜ㆍ고후¹의 시대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니, 요동태수는 곧 만滿을 외신²으로 삼을 것을 약속하여,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만이蠻夷의 군장³이 [중국에] 들어와 천자를 뵙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도 이를 듣고 허락하였다. 이로써 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리⁵가 되었다.(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1. 효혜고후孝惠高后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한 고조(B.C.206∼195) 사후 그의 여덟 아들 중 유일한 적자인 영盈이 즉위하였는바, 영이 곧 혜제(B.C.195~188)이다. 혜제는 태자시 ‘인약仁弱’하다 하여 폐위의 위험을 겪기도 하였으며, 즉위시 16세여서 모후인 여후가 섭정하였다. 고후(B.C.188∼180)는 혜제 즉위 후 여태후로 존칭된 여후의 시호이니, 이는 ‘부인종부시婦人從夫諡’란 예에 따라 추존된 것이다.

고후는 혜제의 유자幼子인 소제 공(B.C.188.~184)과 소제 홍(B.C.184~180) 대에도 섭정하였다. 따라서 ‘효혜ㆍ고후시’를 B.C.195~180년까지의 기간으로 보기도 하지만,『사기』에서 ‘효혜ㆍ고후시’라는 용법이 단지 혜제의 재위기간의 기록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데에서 혜제 즉위(B.C.195)~혜제 사망(B.C.188)까지의 기간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2) 필자의 주석 : 위와 동일

 

2. 외신外臣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한대의 외신은 한의 직접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외번外藩의 나라를 지칭한다. 이러한 나라 또는 군주를 외신이라 지칭한 것은 중국적 천하관이 분식粉飾된 용어로서 황제의 덕화가 미치어 신속臣屬되었다는 관념적 표현이며, 실제적으로는 인수印綬 정도만 받았을 뿐 한의 주권이나 법치의 대상은 아니었다.

위만은 한과의 이러한 의제적 상하관계를 통하여 병위와 재물을 취하는 실리를 얻어 국세를 신장시켰던 것이다.

 

(2) 필자의 주석

외신에 대한 용어 해설은 위의 주석과 동일하다. 다만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외신 약속’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점이 있다. 앞에서 『사기』 ‘고조본기’ ‘흉노열전’ ‘한신노관열전’ ‘번쾌열전’ 등을 통하여 보았듯이 한나라 초기에 산서성 대代 지역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반란(중국측 표현)이 일어났다. 대代는 아래의 ‘한사군 전쟁 개요도’를 보면 고조선의 서남부 지역(당하와 호타하 사이)으로 고조선 영토의 1/4에 해당한다. 고조선 세력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고토회복의 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만이 고조선의 영토 1/4을 포기하는 국경선(요동고새 2와 당하)을 인정하고 대신 한나라로부터 병사와 재물을 얻은 것이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외신 약속’의 본질이라 본다.

 

3. 군장君長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중국의 사서에는 우리 나라 여러 사회의 통치자가 군장ㆍ장수長帥ㆍ주수主帥ㆍ거수渠帥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호칭상의 차이는 각 사회의 발전단계가 상이했던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비슷한 단계의 통치자를 명칭만 달리하여 명칭한 것으로 이해된다.

중국의 천자와 직접 통할 수 있는 위치의 군장은 분명 정치적 지배자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기존의 연구 결과 군장사회(Chiefdom)는 분명히 계급이 있는 사회이고, 관료적 체제도 있으며, 경제·사회·종교적 활동을 상호협의 하에 진행한다는 점에서 부족사회와는 다른 점이 밝혀졌다. (김정배,「군장사회의 발전과정시론」pp. 46∼68)

따라서 이 단계의 사회는 고고학적으로는 최소한 청동기문화의 단계를 딛고 서는 사회이며, 철기문화가 이미 깊숙히 들어온 사회로서 국가(State)형성의 전단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2) 필자의 주석

고조선 사회는 사해평등과 민족자치를 통치이념으로 하였다. 모든 족속들은 항상 6부로 나뉘어 자치를 행하였다.(『부도지』제13장, 27장) 즉 고조선은 한사람의 왕이 통치하는 사회가 아니라 여러 명의 군장들이 화백제도를 통하여 일을 처리하는 지방자치의 사회였으므로 많은 군장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4. 진번ㆍ임둔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이 진번과 임둔은 위만조선의 공략을 받아 복속된 정치체명으로서 후에 한사군의 명칭으로 다시 나타난다. 다만, 여기의 진번은 전문에 나오는 연이 쳐 복속시킨 진번과는 그 위치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 만약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연이 조선의 중심지인 평양지역을 정복하였다는 것이 되어 모순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p. 44~45)

이로써 볼 때 진번과 임둔은 위만조선과 별도로 존재한 군장사회(Chiefdom level) 단계 이상의 정치체로 추측되며, 그 위치는 한사군 위치비정과 관련되어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2) 필자의 주석

한사군의 위치

 

진번과 임둔은 위만조선의 공략을 받아 복속된 정치체명으로서 후에 한사군의 명칭으로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 나오는 진번과 전문에 나오는 연이 쳐 복속시킨 진번은 동일하다. 연이 쳐 복속시킨 진번과 위만조선이 공략하여 회복한 진번을 다른 곳으로 해석할 이유가 전혀 없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역사의식에 투철한 인물이었다. 전문의 첫 구절에서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옛날 연나라 사람(古燕人)’이라고 구분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동일한 글에 나오는 진번이 위치가 서로 다른 곳이었다면 분명 이에 대한 언급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강단사학 등에서 동일한 곳의 진번을 다른 곳으로 해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연이 쳐 복속시킨 진번은 하북성에 있는데,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에 가두어 두려고 하니 엉터리 역사해설이 되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읽어보면 연나라가 전성기때 침략하여 복속시켰던 진번ㆍ조선을 위만조선이 공략하여 다시 회복하는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연나라의 전성기는 연소왕(BC314~279) 때다. 이 시기에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천 여리 물리치고 진번ㆍ조선을 복속했다. 그리고 조양에서 양평까지 연장성을 쌓고, 상곡군ㆍ어양군ㆍ우북평군ㆍ요서군ㆍ요동군을 설치했다. 진개가 동호를 천 여리 물리치고 위의 군을 설치하였으므로 상곡군에서 요동까지 거리는 천 여리 이내여야 하며, 연나라의 전성기 때 영토가 난하를 넘어 설 수 없었음은 자명하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의하면 시황 20년인 기원전 227년 경 연나라 태자 단丹이 진왕을 암살하려고 형가荊軻와 진개의 손자였던 진무양을 자객으로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이를 계기로 진시황은 연나라를 초토화시켰다. 연왕과 태자 단 등이 모두 목숨을 잃었으며 진개의 후손들도 멸문지화를 입었을 것이다. 연나라는 기원전 222년 진나라에게 멸망한다. 연나라의 전성기를 일구었던 지배세력의 후손들이 몰락하였으므로 그들에게 복속되었던 진번ㆍ조선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지 12년이 지난 기원전 209년 진시황이 죽고, 진승ㆍ오광의 난이 일어나서 대륙은 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연나라가 멸망한 때로부터 13년이 지나서였다. 이 시점에서부터 연나라가 재건되는 과정을 추적해 보면 연나라가 얼마나 유명무실한 나라였으며, 그런 연나라가 전성기 때 침략하여 복속시켰던 진번ㆍ조선을 그대로 유지할 여력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사기』 ‘진섭세가’ ‘항우본기’ ‘고조본기’ ‘한신노관열전’ 등을 통하여 연나라의 재건 과정을 살펴본다.

『사기』 ‘진섭세가’에 의하면 진승ㆍ오광의 난은 진나라 이세 원년(기원전 209년) 7월에 일어났다. 당시 안휘성 부양시와 숙현 일대에 사는 빈민들 900명이 북경일대인 어양의 수비병으로 징발되었다. 진승ㆍ오광은 50명 정도를 거느리는 하급부대의 지휘자인 둔장屯長으로 임명되었고, 그들 일행이 임지로 출발하려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서 도로가 불통되므로 정해진 기일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당시 진나라 법은 기한을 어기면 모두 참수형에 처해지므로 할 수 없이 진승과 오광은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라는 유명한 말로 무리를 선동하여 900여명의 무리들의 호응을 얻어 국호를 대초大楚라 정하고 거사를 일으켰다. 우습게 시작된 거사는 그 당시 천하 군현의 백성들이 진나라 관리들에게 시달림을 받아왔기 때문에 모두 들고 일어나 그 수장들을 처벌하거나 죽이고 진승의 거사에 호응함으로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진왕(진승)이 무신武臣, 장이張耳, 진여陳餘 등에게 군사를 내주며 옛날 조나라 땅(산서성 대代지역과 하북성 당하 이남의 땅)을 점령하도록 했다. 무신이 옛날 조나라의 수도였던 한단에 입성하여 스스로 조왕이 되고, 진여는 대장군, 장이와 소소는 각각 좌우 승상이 되었다. 진왕(진승)이 듣고 노하여 무신 등의 가족들을 체포하여 죽이려 하다가 주위의 만류로 어쩔 수 없이 무신이 조왕이 된 것을 축하하고, 조나라 땅의 군사를 모아 신속하게 관중으로 진격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조나라는 진왕의 명을 거부하고 옛날 상곡의 졸사(1년에 녹이 100석 정도의 관리)였던 한광韓廣에게 군사를 주어 연나라 땅을 거두도록 했다. 연나라의 옛날 귀족과 호걸들이 한광에게 와서 연왕燕王의 자리에 오르라고 권유하여 스스로 연왕의 자리에 올랐다.

『사기』‘항우본기’에 의하면 한나라 원년(기원전 206년) 천하의 패권이 항우에게 돌아오자 천하를 나누어 제장들을 제후 왕으로 봉했다. 이때 연왕 한광은 요동으로 옮겨 요동왕에 봉하고, 연나라 장수 장도臧荼를 연왕에 봉하고 계薊에 도읍하도록 했다. 장도는 자신의 봉국으로 가서 원래의 연왕 한광을 요동으로 쫓아내려 했으나 한광이 듣지 않았다. 이에 장도는 한광을 공격하여 무종에서 죽이고 그 봉지를 자기의 땅으로 했다.

『사기』‘고조본기’에 의하면 한왕 5년(기원전 202년) 10월 연왕 장도가 모반하여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대代의 성들을 함락시켰다. 고조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하여 장도를 사로잡고 연왕의 자리에는 태위 노관盧綰을 임명했다.(『사기』한신노관열전에는 연왕 장도의 모반을 진압한 것이 기원전 202년 7월이고 노관을 연왕에 임명한 것은 동년 8월로 기록되어 있음) 이어서 승상 번쾌樊噲를 시켜 군사를 이끌고 나가 대代 땅을 평정하라고 했다.

연왕 노관에 관해서는 ‘노관’ 항목에 자세히 소개한 바와 같다. 한고조 12년(기원전 195년) 연왕 노관은 “그의 장수들과 궁인들 및 가솔들과 수천의 기병들을 이끌고 장성 아래 머물면서, 후(무양후 번쾌)를 방문하고, 다행히 고조의 병이 낫게 되면 스스로 입조하여 사죄하려 하였다. 그해 4월 고조가 죽자 노관은 무리들을 이끌고 흉노로 도망쳤다.’는 내용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연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연소왕와 진개의 후손들은 진시황에 의하여 기원전 222년경 연나라가 망하면서 완전히 몰락하였다. 이에 따라 연나라에 의하여 복속되었던 진번ㆍ조선의 세력들이 다시 부활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졌다. 이어서 진승ㆍ오광의 거사가 일어나서 대륙이 요동치면서 야심가들이 스스로 왕을 칭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왕들은 진승이 900명의 무리를 가지고 거사하여 나라를 세우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왕권이라는 것이 그 나라를 대표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진나라가 멸망 후 스스로 연나라의 왕이 된 한광도 마찬가지였다. 왕이 된지 3년도 못되어 장도에게 패하여 목숨을 잃게 되고, 장도 또한 연왕이 된지 3년여 만에 한나라에 반란을 도모하다가 죽었고, 노관 또한 연왕이 된지 7년여 만에 연나라에서 쫓겨나서 한나라로 복귀할지 흉노로 도망칠지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흉노로 망명하였다. 이러한 상태의 연나라가 전성기 시절의 영토을 보전할 수 없었음은 자명하며, 연나라 전성기 시절에 복속되었던 진번ㆍ조선이 위만조선에 의하여 회복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할 것이다.

 

5. 방수천리方數千里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 주석없음 

 

(2) 필자의 주석

위만조선은 그 영역이 사방 수 천리에 이를 정도로 강대하였다.

사방 수 천리라면 적어도 사방 2~3천리는 넘었다는 말이다.

이 부분은 위만조선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항인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주석이 없다.

위만조선을 한반도에 두려면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진번은 고조선의 변조선지역 일부에 해당하며, 변조선은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 중국

동해안 일대를 가리킨다.

(‘진번ㆍ조선’ 항목 해설 참조) 임둔은 난하 동쪽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위만조선은 동서로는 산서성에서 난하 동쪽까지, 남북으로는 연장성 이남의 대륙 동해안

지역을 대부분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앞에서 ‘조선’ 항목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의 위치는 발해만 일대의 해상무역 중심지였으므로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의 대륙 동해안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위만조선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회 계속>

 

 

*출처:다음카페-행동하는 언론소비자연대  글쓴이-사람이 하늘이다  201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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