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세기> 3세 가륵단군 재위 45년
(원문) 무신 10년(B.C2173) 두지주(斗只州)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犂)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소시머리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牛首國)이 되었다.
그 후손에 협야노(陜野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三島)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天王)이라 칭했다.
계미 45년(B.C2138) 9월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오사구가 즉위했다.”(해설) 1982년 <환단고기>를 최초로 일본에서 출간한 가지마 노보루(鹿島昇)은 <환단고기>의 기록이야말로 일본 민족사라 주장하며
‘아시아의 지보(至寶)’로까지 극찬했다.
그 주된 이유는 위 무신년 기록을 근거로 일본의 국가기원을 약 1,600년가량 앞당겨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서기>의 기록을 부정하고 <환단고기>를 정사로 인정해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 <환단고기>를 최초로 일본에서 출간한 재야사학자 가지마 노보루 | |
일본에서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에 의해“일본국의 기원은 B.C 660년 초대 진무(神武)천황이
즉위하면서부터”라고 되어있으며, “천황의 혈통은 B.C 660년부터 한 번도 단절된 적 없이 이어온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혈통”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는 자국의 국가기원을 끌어올리기 위해 <일본판 환단고기>를 추천한 사람들이 많았다.
내각총리대신, 의회의원, 학자, 지방단체장, 종교단체장 등 무려 1,040명이 <환단고기>의 번역작업을 지원하고 추천했다.
현직 내각총리대신의 추천을 받아 일본 국가에서 공인되는 ‘일본국사화’ 하였고, 의원들의 추천을 받아 ‘법적인 조치’를 취하였으며,
학자들의 추천을 받아 ‘학술적 지지’를 이끌어 냈다.
또한 아래의 한국 배부처(추천)들을 기록하여 한국에서도 시인한 것으로 근거를 남겼다.
- 서울대학교 포함 32개 대학교 - 서울신문 등 6개 신문사
- 종교 및 민족단체 12개 - 국회도서관 등 8개
- 개인인사 23명
이렇듯 가지마 노보루가 출간한 <일본어판 환단고기>가 나왔을 때 한국내 거의 모든 대학과 언론사와 국가기관들이
환영일색이었다가, 고 임승국교수의 <한단고기> 한글 번역판이 나오자 일제히 입장을 바꿔 <환단고기>를 위서로 매도하기
시작했으며 아직까지도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여하튼 이러한 일본의 행위는 우리 역사의 실체가 기록되어 있는 <환단고기>를 위서(僞書)로 인정하고 있는 우리나라 강단사학계와
완전 정반대되는 입장이었다.
일본은 자국의 역사를 유구한 역사로 만들기 위해 이렇듯 범국가적으로 애쓰고 있건만, 대한민국 역사학자들은 있지도 않은
단군신화를 들먹이며 유구한 우리 역사를 뿌리 없는 역사로 난도질하고 있다.
참고로 <일본서기>에 언급된 국가기원인 B.C 660년은 <단군세기>의 “36세 매륵단군 갑인 38년(B.C667) 협야후(陜野候) 배반명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엔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과 연결시킬 수 있다고 하겠다.
즉 협야후 배반명이 삼도를 평정한 후 그곳을 지배한 것으로 해석되어 지는데, 만일 그렇다면 이 배반명이 <일본서기>에 기록된 초대
진무(神武)천황일 가능성이 있다.
여하튼 이 기록은 위 무신년 기록과 혼돈될 정도로 비슷하기는 하다.
▲ 소머리국 즉 우수국은 하남성 개봉시 남쪽으로 대야택(발해) 서쪽에 있었다.
©역사복원신문 | |
우수국은 어디인가?
본문의 소시머리 즉 우수국(牛首國)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찾으면 황하변 하남성 개봉(開封) 근처에 있는 ‘하남성 통허현’으로
나타난다.
(번역) 우수 :춘추시대 정읍으로 하남성 통허현 서북에 있다. <좌전> 환공 14년 송인이 정을 정벌해 우수를 취했다. (두주)의
정읍이며, <구역지> 함평현에 우수성이 있다.
(원문) “牛首 : 春秋郑邑,在今河南通许县西北,《左传》桓公十四年,宋人以诸候伐郑,取牛首,《杜注》郑邑,
《九域志》咸平县有牛首城。(주: 함평현=통허현)”
그 소시머리의 후손인 “협야노가 바다로 도망쳐 삼도(三島)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天王)으로 칭했다”는 기록의 삼도는 지금의
일본열도가 아니라 아마 하남성과 산동성의 경계에 있던 발해(=대야택)에 있던 섬으로 추정되며, 그 일대에서 자칭 천왕으로 칭했다
하니 정상적인 국가형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천왕은 오로지 조선의 단제(檀帝)만 가능하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으로 자칭 천왕이라는 문구가 있어 그러하다.
여하튼 협야노와 관련된 <단군세기>의 B.C 2173년 기록은 일본의 새로운 국가 기원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전신은 왜(倭)가 역사기록에 등장하려면 아직 멀었고, 이 기록의 삼도(三島)는 마치 일본열도를 연상케 하는 기록일
뿐으로, 말 그대로 바다(海)로 불렸던 황하 또는 발해에 있는 3개의 섬일 뿐인 것이다.
▲ 좌측은 709년 이전의 야마토왜 시대로 남지나해상으로 결집되고, 우측은 1189년 이후로 일본열도로 결집된다 | |
참고로 박창범 전 서울대교수의 <일본서기>에 기록된 일식분석에 따르면, 왜의 위치는 남지나 해상 또는 중국 대륙 남쪽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현재의 일본열도와 왜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하겠다.
즉 현재 일본에서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일식을 볼 수 없으므로 일본의 전신인 왜도 대륙에 있었다는 말인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남부의 일부가 임나일본부라는 이론은 어불성설인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은 아무 근거 없는 낭설이다.
임나일본부설이란 한반도 남부의 일부가 약 200년간 왜의 식민지였다는 이론으로, 일제의 조선식민지배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정한론의 무서운 역사이론으로 그 기록의 근거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신공왕후의 삼한정벌이다.
신공왕후의 삼한정벌이란 4세기에 신공황후가 배타고 물고기가 밀어줘서 노도 안 젖고 넘어와 삼한을 정벌했다는 이야기이다.
신공황후가 넘어오니 신라왕이 무릎 꿇고 항복하고, 백제와 고구려도 뛰어와 항복했다는 싸움 한번 안하고 삼한을 정벌했다는 정말로
만화 같은 이야기이다.
▲ 신공왕후에게 항복하는 신라 왕의 모습 (?) .
이 이론이 정한론의 이론적 배경이 된다. ©역사복원신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