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조선(한단고기)

『부도지』로 본 한사군 전쟁(제1회)

설레임의 하루 2011. 12. 11. 23:37

*출처:다음카페-행동하는 언론소비자연대  글쓴이-사람이 하늘이다  201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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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로 본 한사군 전쟁(제1회)

 * 우리 상고사는 의문투성이다. 모든 의문의 출발점에 한사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한사군 전쟁의 중심에 있는 패수의 위치가 학자에 따라 한반도 평양에서 중국 하남성 황하 부근에

이를 정도로 그 편차가 수 천리에 이른다. 도대체 고조선의 실체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한사군 문제를 풀기 위한 자료가 너무나 빈약할 뿐만 아니라 또 있는 자료들마저도 권력과

욕망에 의해 수없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상고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한사군 문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한사군을 극복하는 과정과 더불어 우리의 삼국시대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역사서인 『부도지』에서 한사군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길이

보인다.

『부도지』에는 고조선의 위치와 그 존재의의 등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이 들어있다.

앞으로 5회 정도에 걸쳐 『사기』‘조선열전’을 통하여 한사군 전쟁의 전모를 살펴본다.

 

원문 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중국정사조선전’을 인용하였다. *

 

 

 

『부도지』로 본 한사군 전쟁(제1회)

 

 

1.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은 중국 하북성의 영정하와 호타하로 둘러싸인

  지역이며, 농경세력과 유목세력 및 해양세력이 만나는 중심지였다.

 

 

 

○ 사기 조선열전 원문 및 번역

조선¹왕 만滿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² 일찍이 진번과 조선³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이 연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⁵에 소속시켰는데, 한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⁶, 다시 요동의 옛 요새⁷를 수리하고 패수⁸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ㆍ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해설]

 

 

1. 조선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의 여러 견해가 있어 왔다.

『사기집해』에 인용된 3세기경 위나라의 장안張晏은 ‘조선에는 습수ㆍ열수ㆍ산수 3개의 강이 있는데

이들이 합쳐 열수가 되었으며 낙랑과 조선이라는 명칭은 이 강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 같다’고 하였다.

또『산해경』의 주석자인 4세기 초의 곽박郭璞은 ‘조선은 요동에 있던 낙랑과 동의어’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동쪽 끝에 있어 해가 뜨는 지역이므로 조선이라 불렀다’고 하였으며,

『동사강목』에서는 ‘선비의 동쪽에 있으므로 조선이라 칭하였다’고 하였다.

신채호와 정인보는 조선을 같은 음을 지닌 만주어의 주신珠申에서 온 것으로 해석하였다.

(신채호,『조선상고문화사』pp.351∼369; 정인보,『조선사연구』pp.51~52)『만주원류고』에는 원래

만주어로 ‘소속所屬’을 주신珠申이라고 하였는데 숙신肅愼은 주신珠申이 전음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근거하여 ‘소속’을 ‘관경’과 뜻이 통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주신珠申은 국호의 의미를 지녔을 것으로 인식하였고, 옛 문헌에 보이는 조선과 숙신은 동일한 뜻을 지닌 다른 호칭이었으므로 결국 조선의 명칭은 주신珠申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양주동은 고대 조선족은 태양숭배 신앙을 가지고 이동하면서 도처에 ‘밝’이나 ‘새’라는 지명을 남겼을

것으로 보고, 조朝를 ‘밝’으로 선鮮을 ‘새’로 해석하여 조선을

‘밝새’로 보았다. (『고가연구』pp.380~391) 이병도는『삼국유사』고조선조에 나오는 ‘조선’은 국가

이름이고 ‘아사달’은 그 수도라는 대목에 주목하여 이 단어들이 동의어일 것으로 보아, 조선은 곧 고대조

선의 단어 ‘아사달’의 중국식 모사라 하였다. (「단군설화의 해석과 아사달문제」 pp.27~43)

한편 리지린은 기본적으로 장안張晏의 설을 받아들였으나 약간의 이견을 보이고 있다. 그는 습수ㆍ

열수ㆍ산수 등의 명칭으로부터 숙신肅愼ㆍ식신息愼ㆍ직신稷愼 등의 숙신족 제명칭이 배태되었다고

보면서, 조선은 결국 위의 수명水名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직접 온 것이 아니고, 숙신이라는 종족

명칭을 통하여 온 것이라고 하였다. (『고조선연구』pp. 11∼20)

 

 

 

(2) 필자의 주석

부도지는 신라의 충신 박제상이 엮은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부도符都에 관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부도는 고조선의 수도로 아사달, 진한, 진조선(혹은 조선), 낙랑 등과 같은 뜻이다.

부도지는 고조선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책인데, 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와

선의 위치 및 조선이 그곳에 위치하게 된 필연성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책이다.

 

 

1)조선이라는 명칭의 유래

부도지 제15장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매년 10월에 조제朝祭를 지내니, 사해의 모든 족속들이 지방 토산물을 가져와 바쳤다.

산악족들은 사슴과 양을 바치고, 해양족들은 생선과 조개를 바치며 빌었다.

“조제에 나아가 생선과 양을 희생으로 바치오니, 오미의 피를 맑게 하여 창생의 허물을 그치게 하소서!” 이것이 바로 조선제朝鮮祭였다.⌟

 

 

조선이라는 명칭은 조제朝祭로부터 비롯되었다. 단군임검 당시에는 10월이 상달로 정월이었다.

조제는 매년 새해에 대륙의 모든 족속들이 모여들어 희생물을 바치고 하늘과 조상님께 차례를 드리는

거룩한 행사였다.

조朝는 ‘처음’ ‘시작의 때’라는 의미가 있으며, <상서대전>에는 정월 초하루를 한해의 조朝(正月一日歲之朝)라 하였다. 10월 상달에 지내는 제사를 조제朝祭라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또 선鮮이라는 의미는 ‘고기魚’와 ‘양羊’을 합한 것으로 조제를 지낼 때 올리는 대표적인 희생물이었다.

그 희생물을 통하여 인류의 허물을 속죄하고 하늘사람으로 거듭나려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결국 조선의 명칭은 ‘새해에 세상의 모든 족속들이 모여서 생선과 양을 희생물로 바치며, 하늘과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는 축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조선의 위치

<부도지> 제13장은 부도(아사달, 진한, 진조선, 조선, 낙랑과 같은 의미임)의 위치에 관하여 참으로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데, 조선은 중국 하북성과 산서성에 걸쳐있었다.

태행산맥에 위치한 태백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천진시, 서쪽은 영무시, 남쪽은 석가장시, 북쪽은 장가구시를 잇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남양하, 영정하, 호타하, 자아하가 감싸는 지역과 일치한다.

이 조선(부도)의 중심(아래 우적도의 웅雄 지역)에서 신시神市가 열렸으며, 이곳에 단군임검의 왕검성

(이 부근이 기자의 후손인 선우국, 중산국, 기자조선의 도읍지이며, 위만조선의 도읍지인 만성滿城이며,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추정)이 위치했다.

'조선의 위치' 지도에서 '당시 해안선' 및 '당시 황하'는 한사군 전쟁 당시의 해안선과 황하의 흐름을

나타낸 것이며, 점선의 '고대 해안선' 및 '고대 황하'는 단군임검 당시의 해안선 및 황하의 흐름을

나타낸다.

조선의 위치(붉은 선 사각형 내부)

우적도에 나타난 습수濕水

 

『사기집해』에 인용된 3세기경 위나라의 장안張晏은 ‘조선에는 습수濕水ㆍ열수洌水ㆍ산수汕水

3개의 강이 있다.’고 하였다.

송나라 고지도인 ‘우적도’와 비교해보면 습수는 남양하(또는 상간하)와 영정하임을 알 수 있다.

또 『산해경』에 “조선은 열양列陽에 있다.”고 하였으며, 그 주석에 “(열양)은 열수의 이름이다.” 하였다. 양陽은 북쪽을 가리키므로 열수는 조선의 남쪽을 흐르는 강이며, 호타하를 가리킨다.

산수汕水는 조선의 중심을 흐르는 당하唐河로 비정할 수 있는데, 한사군 전쟁에서 나오는 패수다.

당하는 오대산, 항산, 태백산 등의 태산준령 속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가히 산수汕水라 이름 할만하다.

그러므로 조선의 중심되는 세 강은 영정하(습수)ㆍ당하(산수)ㆍ호타하(열수)다.

 

 

3) 조선의 지리적 필연성

부도지에 의하면 고조선은 신시神市ㆍ조시朝市ㆍ해시海市라는 전 인류적 차원의 모임을 통하여 세상을 교화하고 다스렸다.

이 신시ㆍ조시ㆍ해시의 위치와 성격을 파악하면 한사군 전쟁 등 상고사의 비밀을 풀 실마리가 보인다.

 

단군조선의 중심지였던 신시, 조시, 해시의 위치

 

① 해시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인 팔택八澤에서 열렸다. 팔택은 양자강에서 발해만을 한 바퀴 돌아서

한반도의 남부에 이르기까지 천리간격으로 큰 강물의 하류에 만든 8개의 못이다.

양자강, 회수, 황하, 영정하, 요하, 압록강, 한강, 영산강 하류로 비정된다.

이 팔택에 나루와 포구를 건설하고 해상교통의 중심지로 삼았는데, 대륙전체에 실핏줄처럼 퍼져 그

강물들에 의지해 살아가는 모든 족속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지도에서 산동성의 해시는 태산 서쪽인지 동쪽인지 분명하지 않아서 두 곳의 위치를 모두 나타낸 것이다.

 

 

② 조시는 육상교통의 중심지인 섬서성 장안에서 열렸다. 조시는 사해의 모든 족속들이 매년 10월에

모여 조제를 지내는 제일 큰 시장이므로, 자연히 중원의 고대왕조들의 도읍지가 이 조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으로 본다.

 

 

③ 신시는 각 족속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천문을 살피고, 각 족속들의 계보를

밝히며, 말과 글을 정리하고 통일하는 일을 하였다.

신시神市는 이름 그대로 신들의 모임으로, 고대 모든 신화들의 본거지로 여겨진다.

이 신시가 조선(아사달)으로 섬서성 장안의 조시와 발해만 연안의 해시들을 가장 잘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존재하였다.

 

 

조선이 위의 자리에 위치한 이유는 대략 5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조선은 강물이 세 겹으로 감싸는 천연의 요새였다. 조선의 외곽을 남양하ㆍ영정하ㆍ호타하ㆍ

자아하 등의 강물이 둘러싸고 있으며, 당하와 거마하가 또 한 번 둘러싸고, 마지막으로 역수가 또 그

중심을 둘러싸고 있어 난공불락의 지역이었다.

(위 우적도 참조, 조선의 중심부는 웅雄 지역으로 이곳이 왕검성이며, 위만의 만성滿城이 있었음)

 

 

둘째, 조선은 발해의 해상교통을 모두 장악할 수 있는 중심지였다.

부도지 제14장에 보면 “그리하여 (조선에) 황궁씨 후예 6만이 이주하여 지키고, 나무를 베어 8만개의

뗏목을 만들어 신부를 새긴 후, 천지의 물에 흘려보내 사해의 모든 족속들을 초청하였다.

모든 족속들이 신부信符가 새겨진 뗏목을 보고 차례로 모여 들어, 박달나무숲에서 신시를 크게

열였다.”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통하여 중대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조선의 강에서 뗏목을 띄우면 자동적으로 뗏목들이

발해만 곳곳으로 퍼져나간다는 것이다.

발해만의 해류는 위 지도에서 보듯이 중심부를 타고 북상하다가 천진부근에 이르러 좌ㆍ우로 갈라져서 양쪽 해변을 따라 남하하는 특수한 형태를 지닌다.

발해만의 어디서든지 배를 타고 발해만의 중심쪽으로 들어서면 바로 북상해류를 타고 천진까지 자연스럽게 이동할 수 있고, 천진에서는 해변을 따라 남하하는 해류를 타고 자연스럽게 발해만 곳곳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발해만의 해류가 조선(신시)과 발해만 전체에 퍼져있는 8개의 해시들을 연결하는 바다의 고속도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다에서의 항해가 바람이나 해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고대에서 이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며, 이로

인하여 조선은 발해만 일대의 해상무역을 장악할 수 있는 중심지역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위 '조선의 위치'를 나타낸 지도에서 보듯이 단군임검 당시의 해안선은 왕검성(만성과 동일한 위치) 근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발해만에서 당하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왕검성에 닿을 수 있는 천혜의 위치였다.  

 

 

셋째, 단군임검 시대와 한사군 전쟁 당시 황하 흐름이 천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위 '조선의 위치'를 나타낸 지도에서 점선으로 표시된 '고대 황하'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황하를 통하여 물자를 조달받는 장안의 조시를 조선에서 원활하게 통제할 수 있었으며,

또 조선에서 서쪽으로 나가면 바로 분하를 타고 장안으로 갈 수 있는 길을 확보하고 있었다.

 

 

넷째, 조선의 북쪽으로 나가면 북방의 초원지대를 통하여 유럽까지 교통할 수 있는 초원의 실크로드가

있다. 그러므로 조선의 위치는 서역과 조시와 해시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천혜의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중원의 역사가 조시인 장안과 낙양을 중심축으로 전개되었다면, 한민족의 상고사는 신시인 조선을

중심축으로 전개되었다.

 

 

다섯째, 조선은 유목세력과 농경세력 및 해양세력이 모두 만나는 중심지였다.

고대의 대륙은 크게 유목세력과 농경세력 및 해양세력의 각축장이었다.

위 지도에서처럼 대륙 북서쪽의 유목세력과 대륙 남쪽의 농경세력과 대륙 동쪽의 해양세력이

절묘하게 만나는 지점이 바로 조선이었다.

 

 

2. 전연시全燕時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전연시全燕時’는 연국燕國의 전성기로 해석되는데, 여기의 연국은 전국시대의 연국을 말하며 그

전성기는 소왕(기원전 311∼기원전 279) 때였다.

당시의 연국은 진국ㆍ초국ㆍ조국ㆍ위국ㆍ한국 등과 연합하여 강국인 제국을 치고 70여개의 성과

도읍인 임치까지 점령할 정도의 세력이었다.

 

 

(2) 필자의 주석 : 위와 동일

 

 

3. 진번ㆍ조선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복속시켰다는 이 기록은『삼국지』에 인용된『위략』의 연국의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서방 2천여리를 공략하였다는 내용에 대응하는 것이다.

진번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과 나란히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서로 인접된 지역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과『위략』의 조선을 각각 지명과 국명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견해가 있으나,

(윤내현,「고조선의 서변경계고」)『사기』와『위략』의 기사는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 서로 대응되는

기사라는 점에서 이러한 견해는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이 기사는 연의 동방진출과 관련하여 고조선의 영역 및 그 중심지에 관한 논쟁점이 되고 있다.

아울러 뒤의 한사군 가운데 보이는 진번군과의 관련에서도 중시되는 사항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될 사실은 진번이란 표현이 고조선시대의 구체적인 명칭으로 존재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본문에 계속하여 나타나는 ‘其傍小邑 眞番ㆍ臨屯眞番旁衆國’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당시의

구체적인 정치체명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종래 진번 등의 명칭이 한사군설치와 관련하여 처음 나타난 것처럼 이해되는 경향은 불식되어야 하며, 상당한 정치체로 성장해 있는 진번 및 임둔 등 중국衆國의 존재가 중시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에 나오는 진번의 원위치는 후일의 진번군과는 달리 요동지역에 위치하였을 가능성이 보다 높다고 보여진다.

한편 이와 함께 진번ㆍ조선의 조선도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전체 고조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앞의

진번처럼 일부 지역에 한정된 의미로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된다.

 

 

(2) 필자의 주석

고조선은 삼한 또는 삼조선으로 이루어졌다. 삼한은 진한ㆍ마한ㆍ변한이며 삼조선은 진조선ㆍ마조선ㆍ변조선이다.

본문의 조선은 진한 또는 진조선이며, 위에서 언급한 남양하, 영정하, 호타하, 자아하가 감싸는 지역이다.

진번은 변한 또는 변조선의 일부다. 변한 또는 변조선의 위치는 조선의 동남쪽으로 하북성ㆍ산동성ㆍ

안휘성ㆍ절강성 등의 지역이다.

변조선의 일부가 진번으로 바뀐 시기는 기자조선 이후로 추정된다.

부도지 제27장에 의하면 은나라의 망명자인 기자가 진조선(부도)을 침범하자, 진조선의 민중들이

변조선의 일부지역으로 도망하여 함께 살므로 진변 또는 진번이 되었다.

또 진번은 진조선 주변의 울타리라는 뜻으로도 혼용된 듯하다.

 

 

4. 장새鄣塞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전국시 연 소왕대(B.C.311~279)의 장군인 진개의 조선공략과 관련되어 설치된 것으로 이해되는

요새이다. ..... 중략 ......본문에 의하면 연이 진번ㆍ조선 영역에 장새를 설치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이후 진ㆍ한의 대조선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다만 연의 동방 진출과 관련하여 그 진출기지를 이와 같이 모호한 표현으로 기술한 점으로 보아

사실상 연대에는 아직 조선영토였던 요동 지역에 대한 군현지배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 41)

 

 

(2) 필자의 주석

전국시 연 소왕대(B.C.311~279)의 장군인 진개의 조선공략과 관련되어 설치된 것으로 이해되는

요새이다. <사기> 흉노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왕秦王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다. 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에서 양평까지다.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ㆍ漁陽ㆍ右北平ㆍ遼西ㆍ遼東郡以拒胡.)”

 

위 구절은 연나라가 쌓은 장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진개가 동호를 격파하여

동호가 천 여리를 물러났다고 적고 있다.

『위략』등에서 “연국의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서방 2천여 리를 공략하였다.”는 내용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지 않는 내용으로 모두 허구다.

진개가 동호를 천 여리 물리친 후 장성을 쌓고,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군을 설치하였으므로

연나라 장성 이남의 땅이 본래 동호의 땅이며,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이 진번ㆍ조선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며, 한사군 전쟁의 전모를 파악하는 핵심이다.

『사기』에서 명백하게 기술하고 있는 이 사실을 혼동하면 그때부터는 짙은 안개 속을 헤맬 각오를

해야 한다.

연나라가 동호(진번ㆍ조선)를 천 여리 물리치고 쌓은 연장성은 조양에서 양평까지로 아래 지도의 노란색 장성이다(실제 연장성은 이보다 짧을 수도 있으나 최대한 길게 잡아주어도 난하를 넘지 못함).

연장성을 쌓음으로 인하여 조선(붉은 색 사각형 내부)과 진번(조선의 동남쪽)이 모두 연나라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5. 요동외요遼東外徼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1)요동 : 진ㆍ한대의 위치해명은 고조선의 영역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사학계에서는 요동의 위치비정을 둘러싼 논의가 다양하게 개진되어 왔다.

종래 고조선의 영역을 압록강 이남지역에서 찾은 견해에 의하면 진ㆍ한대 요동은 현재 요하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이해하며, 또 고조선 영역을 청천강 이남으로 이해하는 견해에 따르면

요동의 위치는 요하 이동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이 같은 견해에 의하면 진ㆍ한대 요동군의 영역은 난하 이동지역이 되며 요동과 요서의 경계가

현재의 요하로서 파악케 된다.

한편, 이지린은『전국책』「연책」의 ‘蘇秦 …… 說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이란 내용에서 조선의

요동이 존재했음을 강조하고, 이 지역에 점차 진의 세력이 침투하였고 한초에 ‘연분위요동

燕分爲遼東’(『사기』「진초지제월표」의제 원년)한 사실 등에 근거할 때 진ㆍ한초에는 요동국과

요동군이 존재했다고 이해하였다.

 

즉, 연왕 한광이 요동왕이 되어 무종에 도읍하고 연장 장자가 연의 왕이 되어 계薊에 도읍한 사실

 (『사기』「항우열전」)에서 요동국과 요동군이 구별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각도읍지를 고려하여 연과

구별되는 요동을 난하이동에서 찾고 있다.

이같은 내용은 진이세秦二世가 갈석산에 다녀온 사실을 요동에 갔다 온 것으로 이해하여, (『사기』

「진시황본기」) 현재의 산해관에 존재한 갈석산의 위치에 의하여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현재의 난하를 당시에는 요수로 칭했음을 논증하면서 이를 보강하여 진ㆍ한초의 요동은 현재의

난하 이동임을 강조하였다. (「진ㆍ한 요동군의 위치」pp.55~64) 이같은 견해는 최근 윤내현에 의해

부연되고 있다.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p.15~80)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사료해석에 논리적 비약이 심하여

많은 문제점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근에 제기된 고조선의 중심이 요동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하였다는 견해에 의하면, 연대의

요동군은 요하 중류의 군사기지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진대에는 그 범위가 압록강까지 확대되었으나

군현지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한대부터라고 한다.

따라서 연장 진개 침입 이전의 고조선 영역은 요동을 중심으로 대릉하 유역에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이와 같이 진ㆍ한대 요동의 위치에 관한 현재의 논의는 그 서변이 현재의 요하라는 견해와 난하라는

견해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다.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한반도인가 또는 현재의 요동지역인가라는 문제 및 고조선 강역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는 중요한 쟁점이다.

그린데 최근의 요동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성과와 문헌고증에 의거할 때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현채의 요동지역으로 이해되어지며, 특히 대릉하 이동 지역에서 고조선의 독자적 문화와 정치무대를

보게 되므로 이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2) 외요外徼 : 진은 15년간 존속한 나라로서 사마천은 이 시기 고조선과 진 사이에 있었던 국경선 변동을 본문과 같이 ‘진멸연秦滅燕 속요동외요屬遼東外徼’란 내용으로 간략히 기술하였다.

허승종은 이를 ‘요동새외지요遼東塞外之徼' 즉, 요동새 바깥의 ‘요徼’로 해석하고, 이에 대한 이해를

재개하였다.

(「중국『사기』에 보이는 ‘료동고새’에 대하여」 pp.18∼26) 그런데 ‘요徼’는 전국이래 한대에

이르기까지 국경지역에 설치된 변경초소선으로서『사기』「사마상여전」을 주석한『색은』에서 ‘요徼’

는 새塞이다.

목책과 강으로 만이와 경계가 되는 것이다’라고 한 내용 등을 볼 때 그 성격이 보다 구체화된다.

한편『연감류함』의 편자들은 ‘외요는 진대에 속하고 고새는 한대에 수리한 것이다

(外徼屬於秦時 故塞修於漢代)’라 하여 외요를 요徼로 인정하였다.

따라서 외요外徼를 요외徼外로 이해하여 지역적 성격을 부여할 것이 아니라, 새塞와 같은 국경초소선

으로 보아야 하며 ‘요동새遼東塞’의 바깥 ‘요徼’로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이 요동외요의 위치는 난하 이동으로 보는 견해와, 이후 중국의 요동식민의 거점이 된 곳임이 분명한

데에서 후대의 요동군치인 양평 일대가 아닌가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

 

요동의 장성

(2) 필자의 주석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하고 연나라 장성을 요동 바깥의 요새로 삼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요동은 황하의 동쪽이다.

요동에는 조선의 습수(상간하와 영정하)를 중심으로 상하로 긴 장성이 연결되어 있다.

연나라가 전성기 때 쌓은 장성은 습수(영정하) 위쪽으로 진나라의 수도인 장안에서 보았을 때 바깥의

장성이므로 요동외요遼東外徼에 해당한다.

위 ‘요동의 장성’ 지도에서 연장성(노란색)과 요동고새 1(하늘색)이 진의 요동외요이며, 요동고새

2(분홍색)와 요동고새 3(초록색)은 요동내요遼東內徼에 해당한다.

 

 

6. 기원난수其遠難守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염철론』과『위략』에 의하면 한초에 고조선의 준왕은 진ㆍ한 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진의 요동외요를 공격하여 요동지역의 고토 일부를 수복하는 한편 위만에게 100리의 땅을 봉해 주어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지키게 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그곳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려워’에서 그곳은 고조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면 그대로 진의 요동외요에서 관할하던 지역을 의미하며, 또한『사기』의 찬자撰者가 기록한 것처럼 거리가 멀어

후퇴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에 의해 요동외요가 함락되었던 것을 감추기 위한 중국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2) 필자의 주석

한이 일어나서 ‘그곳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이 부분은 진ㆍ한교체기의 시대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그 내용을 알 수 있으며, 뒤에 나오는 요동고새와 패수의 위치를 비정할 수 있는 단서를

공한다.

한고조 유방이 해하(垓下) 싸움에서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한 해가 BC202년 12월이다.

<사기> ‘흉노열전’에 의하면 한나라가 처음 중국을 평정하고 이듬해인 BC201년 9월 한왕韓王 신信이

대代로 옮겨 안문군 마읍馬邑에 도읍했다.

흉노가 대거 공격해 마읍을 포위하자 신信이 흉노에 항복하였고, 흉노는 한신을 얻고서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구주를 넘어 태원太原을 공격하여 진양晉陽 아래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유방이 직접 흉노를 공격하다가 산서성의 안문군 백등산에서 포위당하여 참패를 당한다.

이후 한나라는 흉노에게 공주公主를 바치고, 매년 일정한 양의 솜과 비단 등을 바치는 조건으로

굴욕적인 화친을 맺게 된다.

이 뒤로도 한왕韓王 신信은 흉노의 장수가 되어 조리, 왕황 등과 함께 수차례 화친의 약속을 어기고 대

代, 운중雲中을 침범했다.

또 BC107년 거록태수 진희가 배반하여 한 한신과 함께 대代를 공격했다.

한나라가 번쾌를 시켜 공격하여 다시 대代, 안문鴈門, 운중雲中의 군현들을 다시 함락했으나 새塞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사기> ‘한고조본기’ 등에 따르면 한왕6년(BC. 201) 10월 연나라 왕 장도가 모반하여 대代를 공격하여 장도를 사로잡고 태위 노관을 연왕燕王으로 봉했다.

이후 연왕 노관은 BC107년 거록태수 진희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한고조가 불렀는데 병이라 핑계대고 가지 않았다.

이후 BC.195년 4월 25일 한고조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흉노로 도망하였다.

위와 같이 <사기> ‘흉노열전’과 ‘한고조본기’ 등을 살펴보면 한나라 초기 연왕燕王을 세우면 모두

한나라를 배반하고, 산서성 대代를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으며, 당시 한나라의 국경이 대략

산서성 중부의 대代 지역을 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7. 요동고새遼東故塞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본문에 나타난 ‘요동고새’는『사기』의 표현상 앞서 기원전 3세기에 연이 진번ㆍ조선지역까지 침입하여 설치한 ‘장새’로 이해되어진다.

그런데 이를 진이 연을 멸망시키고 그곳을 ‘요동외요’에 속하게 한 것과는 별도로, 한이 흥기하면서 그

지역이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려운 까닭에’ 다시 수리하여 이용한 ‘요동의 고새’로 이해하여 그 위치를 ‘장새’나 ‘요동외요’와는 다른 지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요동고새라는 것은 한 이전부터 설치된 요새라는 것 즉, 한 이전 연ㆍ진대시기

부터 존재한 것으로 진의 만리장성 동쪽 끝에 설치된 것으로 이해된다.

(리지린,『고조선 연구』pp.44~47)

그러나 ‘한흥漢興 위기원난수爲其遠難守 복수요동고새復修遼東故塞’에서 ‘한흥漢興’이란 한의 건국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한나라 건국초의 옛 요새란 한이 건설한 요새가 아님이 분명하다.

『사기』「조선열전」에서 이에 해당되는 것은 진의 외요와 연의 장새 뿐인데, 요와 새의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고새故塞에 해당되는 것은『사기』에 의하는 한 연의 장새 밖에 없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 41)

 

 

(2) 필자의 주석

본문에 나타난 ‘요동고새’는 기원전 3세기에 연이 진번ㆍ조선지역까지 침입하여 설치한 ‘장새’와는

다르다.

본문에 의하면 연나라 장성인 ‘장새’가 멀어서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고새를 다시 수리했다’ 하였으므로 ‘요동고새’는 연나라의 ‘장새’ 보다는 훨씬 후퇴한 지역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본문의 ‘요동고새’는 위 지도의 ‘요동고새 1’과 ‘요동고새 2’ 또는 ‘요동고새 3’ 중에서 찾아야

한다.

만약 ‘요동고새’를 ‘요동고새 1’로 볼 경우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인 패수는 영정하가 된다.

이 경우는 진번ㆍ조선이 여전히 한나라의 영역이 되므로 위만조선이 진번ㆍ조선을 수복한 본문의

내용과는 맞지 않으므로 ‘요동고새 1’은 본문의 ‘요동고새’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본문의 ‘요동고새’는 ‘요동고새 2’ 또는 ‘요동고새 3’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리고 위의 ‘기원난수其遠難守’ 항목에서 보았듯이 당시 한나라의 국력은 산서성 중부의 대代 지역을

지키기도 힘겨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본문의 ‘요동고새’는 위 지도의 ‘요동고새 2’가 가장 유력하며, 이 경우 패수는 당하唐河이다.

 

 

8. 패수浿水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패수는 한과 조선의 국경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위만의 망명과 한 무제의 조선침공 및 한사군설치 등과

관련하여 당시 고조선의 위치와 영역 알려주는 중요한 지역으로 파악된다.

패수의 위치에 관해서는 종래 대동강설, 청천강설, 압록강설, 요동방면설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최근에는 난하, 혼하설 등이 제시되고 있다.

대동강설은 역도원의『수경주』이래『수서』·『신당서』·『통전』 등 중국사서에 유지되어 패수를

대동강으로 인식케 하는 작용을 하였다.

한편, 정약용은 패수에 관한 설이 압록강설, 대동강설, 요동니하설, 저탄수설 등으로 나뉘어져 한국전통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었음을 언급하고, 자신은 압록강설을 견지하여 패수에 관한 이해가 다양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여유당전서』「강역고」 패수변)

청천강설은 이병도 등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열수를 대동강으로 확정하고 평양 지역을 고조선의

중심지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제시되었다.

(「패수고」) 한편 신채호는 蓒芉濼說을, (『조선사연구초』pp.45∼65) 정인보는 어니하(대릉하)설을(『조선사연구』) 제기하여 패수의 요동방면 위치설을 구체화시켰다.

이와 같은 요동방면설은 이지린 등에 의해 대릉하설로 연결된다.

즉, 패수에 관한 최초언급으로서『수경』패수조의 ‘패수출낙랑루방현浿水出樂浪鏤方縣 동남과임패현

東南過臨浿縣 동입우해東入于海’라는 기사를 검토하여, 현재 요동, 요서지역에서 동남으로 흐르다가

하류에 가서 다시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은 대릉하 밖에 없다고 하고 또한 이것의 고명이

백랑수(『열하지』대릉하)였음을 밝혀 그 음상이音相似도 설명하였다.

특히, 한대 루방현이 대릉하 유역이었음을 설명하여 이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고조선연구』pp.72∼83)

한편,『한서』「지리지」 요동군 번한현조의 주註내용을 인용하여 패수라는 명칭이 보통명사로서

파악된 연유 등을 설명하면서 패수를 난하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윤내현,「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pp. 15~80) 그러나 고조선의 서쪽국경인 패수와 고조선의 중심인

열수가 모두 난하라는 견해는 수긍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즉,『사기』의 표현에 따르면 패수의 위치는 요동고새의 위치와 고조선의 중심지인 열수의 위치 사이에서 찾게 된다.

따라서 요동고새를 진장성의 동단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열수를 요하로 파악한 견해에 의하면 자연히

패수는 대릉하로 이해된다.

 (리지린,『고조선연구』) 한편, 고조선의 중심이 이동함에 따라 열수의 위치도 옮겨졌으리라는 견해를 따르면 자연 열수가 대동강에 비정되므로, 패수는 대동강과 요하 사이의 강이 된다.

그리하여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청천강(이병도)ㆍ압록강(정약용ㆍ천관우) 등이다.

 

그러나『사기』의 내용을 세밀히 검토하면 패수는 요동고새(연의 장새)와 진고공지秦故空地사이의

강이다.

연의 동방진출시 조선과의 국경선이었던 만번한滿番汗이 자연계선이라면 패수는 이와 병행하는 강이

된다.

만번한이 천산산맥 주변의 지명에 비정되므로 고조선의 중심 이동과 관계 없이 패수는 요동지역의

강임이 틀림없다.

다만, 패수는 조선계 지명으로 흔히 고조선의 수도 근처를 흐르는 강으로 이해되니,『한서』「지리지」

에 나오는 평양 남쪽의 후일의 패수는 바로 고조선 말기의 중심지였던 대동강으로『사기』의 패수와는

다른 강으로 이해된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2) 필자의 주석

패수는 한과 조선의 국경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위만의 망명과 한 무제의 조선침공 및 한사군설치 등과

관련하여 당시 고조선의 위치와 영역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역이다.

패수의 위치는 학자에 따라 한반도의 대동강에서 하남성 황하부근에 이르기까지 거리 편차가 수 천리에 이르고 학설이 다양하여 우리의 상고사를 미로에 빠뜨리고 있다.

한나라 초기 국력은 ‘7. 기원난수其遠難守’ 항에서 살펴보았듯이 산서성 중부인 대代 부근도 지키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 한나라가 난하를 넘어 심지어 한반도까지 지배하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사마천의 『사기』를 잘 이해하면 패수의 위치를 찾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위의 ‘장새鄣塞’ 항목에서 설명하였듯이 진개가 동호를 천 여리 물리친 후 장성을 쌓고, 상곡ㆍ어양ㆍ

우북평ㆍ요서ㆍ요동군을 설치하였으므로 연나라 장성 이남의 땅이 본래 동호의 땅이며, 이곳이 바로

진번ㆍ조선이다.

그러므로 패수는 반드시 하북성 영정하 이남에 위치해야 한다.

『수경』에서 ‘패수는 낙랑 루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으로 흘러 임패현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라는 기사를 참조하면 패수의 위치는 거의 확정할 수 있다. 영정하 이남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강은 역수, 당하, 대사하 뿐이다.

그리고 중국 고지도 대부분 당하 동편에 위만의 도성으로 보이는 만성滿城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패수는 자연스럽게 당하로 비정할 수 있다.

그러면 위만조선과 한나라는 위 ‘요동의 장성’ 지도에서 ‘요동고새 2’와 당하를 경계선으로 하게 된다.

이럴 경우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연나라는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뒤에 연왕 ‘노관’ 항목에서 보겠지만, 한나라 초기에는 장도, 노관 등을 연왕으로 임명하여 전성기 때의

연나라 땅을 회복하려고 많은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결국 장도나 노관 모두 반역을 도모하다가 죽거나 도망하고, 연나라는 유명무실한 나라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계속>

 

 

*출처:다음카페-행동하는 언론소비자연대  글쓴이-사람이 하늘이다  201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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