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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는 조선의 제후이며 역사적 대명사 (13부)

설레임의 하루 2011. 11. 21. 00:06

*출처: 

 

 

 

흉노는 조선의 제후이며 역사적 대명사 (13부)
조선의 제후였던 흉노의 중심지 약수는 내몽고 서남부 감숙성을 흐르는 강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1/11/09 [15:30]
 
<단군세기 원문> 3세 가륵단군 재위 45년
“갑진 6년 (B.C2177) 열양(列陽)의 욕살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있도록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곧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시조(匈奴之祖)가 되었다.
병오 8년(B.C2175) 강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단제는 이를 지백특(支伯特)에서 정벌하였다” 

(해설)
스키타이 문명을 이룩한 흉노는 영어로 훈(Hun)족으로 쓴다.

훈족은 5세기 경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동로마제국을 초토화시킨 유목민족이다.

 

서양의 역사학자들은 이 훈족이 고대 흉노족의 후예인지 불분명하다고 말하고 있으나, 여하튼 흉노를 영어로 쓸 때는 Hun(훈)이라고

쓴다. 
갑진년 기사는 흉노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조선의 3세 가륵단군은 열양을 다스리던 색정을 약수(弱水)로 유배 보냈다가,

나중에 그 땅에 봉했다는 의미는 색정을 흉노를 다스리는 제후(諸侯)로 삼았다는 말이다.

욕살이란 한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로 지금의 시장이나 군수를 말하는 것이고, 여기서의 조(祖)는 혈통의 시조(始祖)가 아니라 흉노의

첫 임금 즉 태조(太祖)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때부터 흉노가 제후국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흉노를 다스리던 초대 제후 색정(索靖)의 후손으로 보이는 색불루(索弗婁)는 흉노의 우현왕이 되었다가, B.C 1286년 엄청난 정변

(쿠데타)을 일으켜 종주국 조선의 22대 단군으로 즉위하고 색불루의 후손들이 제위를 이어간다.

이렇듯 흉노는 조선의 연방으로 제후이면서 때로는 조선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중국 역사서에서는 동이족에 대한 역사적 열등감 때문에 조선이라는 국명 대신 제후였던 종족명으로 표현했다.

흉노, 동호, 숙신, 훈육, 견융, 북적, 동이, 서이, 구이 등이 그것이다.

그러다보니 중국사서에 언급된 흉노가 조선 자체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진시황이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으며, 한나라가 흉노를 형님국으로 모시며 매년 공주와 공물을

올렸다는 기록들은 흉노라기보다는 조선으로 해석되어야 옳을 것이다.  

아래 중국측 자료에도 비슷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번역) 청나라 때 왕국유가 지은 <귀방곤이험윤고> 에서는 “흉노의 명칭이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은나라 때는 귀방.곤의.훈죽으로, 주나라 시기에는 험윤으로, 춘추시기에는 융.적으로, 전국시기에는 호로 이 모두 후세에서 말하는

소위 흉노이다.”
(원문)《史记·匈奴列传》记载:“匈奴,其先夏后氏之苗裔,曰淳维。唐虞以上有山戎、猃允、薰粥,居于北边,随草畜牧而转移”。”。

 

《山海经·大荒北经》称:犬戎与夏人同祖,皆出于黄帝。《王国维在《鬼方昆夷猃狁考》中,

 

把匈奴名称的演变作了系统的概括,认为商朝时的鬼方,混夷、獯鬻,周朝时的猃狁,春秋时的戎、狄,战国时的胡,

 

都是后世所谓的匈奴。 
 
어떻게 종족의 이름이 시대에 따라 이렇게 많이 바뀔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은 이렇듯 여러 종족을 거느린 어떤 종주국(조선)이 있었는데, 역사왜곡을 위해 그 종주국 이름을 쓰지 않고 자기네와 직접

관련된 휘하의 종족명을 역사서에 기록했기 때문이다. 

▲ 감숙성 지도.  약수는 내몽고 서부에서 발원해 감숙성 장액시로 흘러가는 강으로 흑수에

  합쳐지는 강이다.

  이곳이 흉노의 중심지이며, 그 남쪽 청해성 일대에 부여국과 읍루가 있었다고중국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색정이 유배간 약수는 어디일까? 

약수는 우리 역사지명을 해독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강이다.
<환단고기>를 일본에서 처음 발간한 가지마 노보루(鹿島昇)는 약수를 유프라테스 강으로 보았고, <환단고기>의 주해서를 낸

민족사학자 고 임승국교수는 약수를 흑룡강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 두 지명비정은 옳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만주에서 스키타이 흉노 유적발굴지인 내몽고 서부지역과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5세 대음단군 기축 10년(B.C 1652) 기록에 “단제께서는 서쪽으로 약수로 가시더니 신지 우속에게 명하여 금철 및 고유를 채취하도록

했다.(帝西幸弱手命臣智禹粟採金鐵及膏油)”라는 기록에서 조선에서 본 약수의 방향을 알려주고 있다.

이 기록은 조선의 도읍이 약수 동쪽에 있다는 말로 약수의 위치를 알면 조선의 대략적인 도읍 위치도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색정이 유배 갔다가 제후로 봉해진 땅인 약수(弱手)는 과연 어디일까?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약수(弱手)를 검색하면 다음과 같다.
(번역) 약수 : 우공의 약수이다. <서우공> 약수는 합려로 흐르고 나머지 물길은 유사로 들어간다.

 

<채심서전> 지지에 전하기를, 장액군 산단현에 있다.

 설씨가 말하기를 약수는 토곡혼 경계 궁석산에서 나와 산단에서 서쪽 합려산까지 가서 장액현하와 합쳐진다.
<수경> 약수는 장액 산단현에서 나와 서북으로 주천까지 흘러 회수현에서 합려산 가운데로 들어간다.
<한서지리지> 산단현 상연부터 약수를 인도하여 그곳에서 서쪽으로 주천.합려까지 흐른다. <정대창우공론> 장액군의 장액하라는


<서송서역수도기> 약수는 지금 위하의 흑하로 역시 장액하라고 하는데, 한나라 유학자들은 본래 한 강인 지 몰랐다.

장액하에서 갈라진 강이 우공의 약수가 당연하고 흑수는 당연히 우공의 흑수이다.
(원문) 弱水 : 禹贡之弱水,《书禹贡》导弱水,于合黎,余波入于流沙,《蔡沈书传》地志云,在张掖郡删丹县,薛氏曰,

 

弱水出吐谷浑界穷石山,自删丹西至合黎山,与张掖县河合,《水经》弱水出张掖删丹县,西北至酒泉,会水县入合黎山腹,

 

《汉书地理志》删丹县,桑钦以为导弱水自此,西至酒泉合黎,《程大昌禹贡论》费耽以张掖郡之张掖河当之,

 

《徐松西域水道记》弱水,今谓之黑河,又曰张掖河,汉儒不知本为一河,分张掖河当禹贡之弱水,黑河当禹贡之黑水,误矣。 

약수와 관련 있는 합려(合黎)를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번역) 합려 : <서우공> 약수가 합려까지 흐르는데 그 설은 3가지이다. 합려는 지명이고, 산명이며 또한 물길 이름이다.

 

<괄지지> 난문산을 일명 합려 일명 궁산이라고 한다. 산단현 서남 70리에 있다. 약수가 나오는 곳이다.

 

합려산은 지금 감숙성의 장액, 산단, 고태, 주천 4개현의 북쪽에 있다. 길이가 총 300여리이다.
(원문) 合黎 : 《书禹贡》“导弱水,至于合黎。”其说有三,谓合黎为地名, 谓合黎为山名,谓合黎为水名,

 

《括地志》兰门山,一名合黎,一名穷山,在删丹县西南七十里,弱水所出也,按合黎山在今甘肃张掖、山丹、高台、酒泉四县之北,

 延长三百余里,以产茶有名,亦作合离。
 
따라서 약수는 내몽고 서쪽 끝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흐르다가 감숙성 중부에서 동남류하는 강으로 지금도 그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약수는 물의 부력이 약해 새의 깃털도 가라앉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흉노의 중심지인 약수는 내몽고 서남부에서 발원해 감숙성을 흐르는 강이다.

  그 남쪽에 청해성이 있고, 그 남쪽에 티베트가 있다.

  고대 중국은 섬서성 또는 황하변 하남성 일대 뿐이었다.



또한 중국 사서에 우공 이외의 약수에 대해 여러 설명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눈에 띈다.
(번역) “<후한서 동이전> 부여국 북쪽에 약수가 있다. <진서 사이전> 읍루국 동쪽 변에 대해가 있고 북쪽 끝이 약수이다.

 

<호위우공추지> 약수는 산묘위 서남 궁석산에서 나와 동북으로 거연택으로 들어간다.

 

그 하류는 돌아오는 곳을 모른다. 약수는 연택에서 동북류해 부여를 지나 읍루의 북쪽 경계를 돌아 동해로 들어간다.”
(원문) 《后汉书东夷传》夫余国北有弱水,《晋书四夷传》挹娄国东滨大海,北极弱水,《胡渭禹贡锥指》弱水出山庙卫西南穷石山,

 

东北入居延泽,其下流不知所归,似弱水自居延泽东北流,厯夫余,挹娄之北境而归于东海
(필자 주 : 여기서의 동해는 청해호 또는 감숙성을 흐르는 황하를 말한다.)

<후한서>와 <진서>의 기록에 약수 남쪽에 부여국과 읍루가 있었다는 설명인데, 그곳은 바로 지금의 청해성(靑海省)을 말하는 것이다.  청해성은 현재 서장족(티베트족)이 살고 있는 곳으로 현재 중국 정부와 민족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지역이다.

그 이유는 이곳이 대대로 조선대연방(朝鮮大聯邦)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여는 대부여인지, 북부여인지, 동부여인지 불명확하나, 그곳이 우리 민족의 역사강역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하겠다. 

병오년 기사의 강거의 반란을 정벌한 지백특(支伯特)은 현재의 티베트를 말하는 것이다.

흉노 땅에 있는 약수는 감숙성에 있고, 그 남쪽이 청해성으로 부여와 읍루가 있으며, 그 남쪽에 티베트가 위치하고 있다.

<단군세기>의 이런 기록들은 조선을 반도사관인 한반도에 놓고서는 거리적으로 성립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결론적으로 조선의 핵심강역(도읍)은 산서성이었으며, 흉노의 감숙성과 청해성과 티베트가 모두 조선의 연방이었기 때문에 위

기록들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 감숙성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이 벽화는 고구려 벽화이다. 

  그 이유를 약수가 풀어주고 있다.   



 


기사입력: 2011/11/09 [15:30]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