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려

[스크랩] 고려의 압록은 지금의 백하 (Goli Yalu river was current Baihe,Hebei)

설레임의 하루 2011. 11. 22. 23:29

하북성 북부 수계 -하늘색선이 백하수계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封境] 봉경

 

(상략) 昔以大遼爲界。後爲所侵迫。乃築來遠城。以爲阻固。然亦恃鴨綠以爲險也。鴨綠之水。原出靺鞨。其色如鴨頭。故以名之。去遼東五百里。經國內城。又西與一水合。卽鹽難水也。二水合流。西南至安平城入海。高麗之中。此水最大。波瀾淸澈。所經津濟。皆艤巨艦。其國恃此以爲天塹。水闊三百步。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南四百八十里。自遼已東。卽舊屬契丹。今虜衆已亡。大金以其地不毛。不復城守。徒爲往來之道而已。鴨綠之西。又有白浪,黃嵒二水。自頗利城行數里。合流而南。是爲遼水。(하략)

 

옛적에는 대요(大遼)와 경계를 했었는데, 뒤에 대요의 침벌을 받게 되매,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은 압록강을 믿고 요새로 한 것이다.


압록강의 물 근원은 말갈(靺鞨)에서 나오는데, 그 물 빛깔이 오리의 머리 빛깔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요동(遼東)에서 5백 리쯤 흘러가다 국내성(國內城)을 지나서 또 서쪽으로 흘러 또 하나의 강물과 합류하니,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 두 강물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에서는 이 강물이 가장 크다. 물결이 맑고 투명하여 지나는 나루터마다 모두 큰 배가 정박해 있는데, 그 나라에서 이를 천참(天塹)으로 여긴다. 강물의 너비가 3백 보(步)인데, 평양성(平壤城)에서 서북으로 4백 50리이고, 요수(遼水)에서 동남으로 4백 80리에 있다. 요수에서 동쪽은 옛날 거란에 소속되었는데, 지금은 그 오랑캐 무리가 이미 멸망되었고, 대금(大金)에서는 그 땅이 불모지(不毛地)이기 때문에 다시 성을 쌓아 지키지 않는다. 그리하여 한갓 왕래하는 길이 되었을 뿐이다.


압록강 서쪽에 또한 백랑(白浪)ㆍ황암(黃巖)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2리쯤 가다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요수(遼水)이다. (이상 고려도경)

 

조선초에도 명과 경계로 하였다는 鴨綠江과 燕山路 그에 대한 서술이 송나라 서긍이 고려를 왔다가면서 기술한 <고려도경>에 나와있는데 이에 대한 단서가 나왔다. <고려대제국의 증거> 저자 이성근씨가 연연산을 찾은것인데 이 지도를 운영자도 소장하여 이전에 찾아 보았으나 못보고 지나쳤다 그래서 고려의 압록을 洋河 지역으로 어렴풋이 비정했었는데 아래에 나오는 명.청시대 지도를 샅샅이 보지못해 놓치고 만것을 새롭게 찾아 올린다.

 

부여와 고구려의 故地이며 중세 거란과 원나라의 구토였으며 고려의 땅이기도한 지역이었다. 

 

 

 

 

가운데 청나라지도 좌측에 <연연산>이 확실히 보인다.

 

고려의 풍물을 소개한 서긍의 고려도경에 기술된 래원성과 압록이 필경 그 이전 시기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압록이라 이르는 지명은 고구려시대에도 이곳을 이른다고 본다.鴨綠江은 바로 하북성 장가구에서 북경으로 흐르는 한민족의 고토였던 白河를 두고 이르는 말이었다. 七渡河는 朝鮮河라고도 하였는데 거란시대에는 朝鯉河 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宋의 <왕기공행정록>에 나온다.

 

필경 명나라 이후 朝鮮이 이지역을 실지함에 따라 고유명사였던 朝鮮河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발음만 같은 潮河로 개명되었다고 판단한다.

 

 

운영자 심제글.

출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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