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세기초 고려를 다녀간 서긍의 고려도경에 고려의 서북계가 정확하게 기록되어있다 이를 지리적으로 증명해보기로 한다.
-[封境] 봉경
高麗。南隔遼海。西距遼水。北接契丹舊地。東距大金。又與日本,流求,聃羅,黑水毛人等國。犬牙相制。唯新羅,百濟。不能自固其圉。爲麗人所幷。今羅州,廣州道是也。其國在京師之東北。自燕山道。陸走渡遼。而東之其境。凡三千七百九十里。若海道則河北,京東,淮南,兩浙,廣南,福建皆可往。今所建國。正與登萊濱棣相望。自元豐以後。每朝廷遣使。皆由明州定海。放洋絶海而北。舟行。皆乘夏至後南風。風便。不過五日。卽抵岸焉。舊封境。東西二千餘里。南北一千五百餘里。今旣幷新羅,百濟。東北稍廣。其西北與契丹接連。昔以大遼爲界。後爲所侵迫。乃築來遠城。以爲阻固。然亦恃鴨綠以爲險也。鴨綠之水。原出靺鞨。其色如鴨頭。故以名之。去遼東五百里。經國內城。又西與一水合。卽鹽難水也。二水合流。西南至安平城入海。高麗之中。此水最大。波瀾淸澈。所經津濟。皆艤巨艦。其國恃此以爲天塹。水闊三百步。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南四百八十里。自遼已東。卽舊屬契丹。今虜衆已亡。大金以其地不毛。不復城守。徒爲往來之道而已。鴨綠之西。又有白浪,黃嵒二水。自頗利城行數里。合流而南。是爲遼水。(하략)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와 맞닿았고 북쪽은 옛 거란 땅과 연속되고 동쪽은 금(金) 나라와 맞닿았고, 또 일본ㆍ유구ㆍ담라(聃羅)ㆍ흑수(黑水)ㆍ모인(毛人) 등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의 모양으로 되어 있다. 오직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합병(合倂)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이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 항주)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道)로부터 육로(陸路)로 가다가 요수(遼水)를 건너 동쪽으로 그 나라 국경에 이르기까지, 무릇 3천 7백 90리이다.만약 바닷길로라면, 하북(河北)ㆍ경동(京東)ㆍ회남(淮南)ㆍ양절(兩浙)ㆍ광남(廣南)ㆍ복건(福建)에서 모두 갈 수 있는데, 지금 세워진 나라는 바로 등주(登州)ㆍ내주(萊州)ㆍ빈주(濱州)ㆍ체주(棣州)와 서로 바라다 보인다.
고려에서는 이 강물이 가장 크다. 물결이 맑고 투명하여 지나는 나루터마다 모두 큰 함선이 정박해 있는데, 그 나라에서 이를 천참(天塹)으로 여긴다. 강물의 너비가 3백 보(步)인데, 평양성(平壤城)에서 서북으로 4백 50리이고, 요수(遼水)에서 동남으로 4백 80리에 있다. 요수에서 동쪽은 옛날 거란에 소속되었는데, 지금은 그 오랑캐 무리가 이미 멸망되었고, 대금(大金)에서는 그 땅이 불모지(不毛地)이기 때문에 다시 성을 쌓아 지키지 않는다. 그리하여 한갓 왕래하는 길이 되었을 뿐이다. 압록강 서쪽에 또한 백랑(白浪)ㆍ황암(黃嵒)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2리쯤 가다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요수(遼水)이다.
북경 서북계지도 (청 19세기) 북경서쪽에 고려의 백랑수가 남북으로 흐른다.
위는 청나라시대 이동된 요하를 요수로 잘못알고 있다.
[國城] 국성
高麗。(중략) 今王城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矣。其城周圍六十里。山形繚繞。雜以沙礫。隨其地形而築之。外無濠壍。不施女墻。列太上御名延屋。如廊廡狀。頗類敵樓。雖施兵仗。以備不虞。而因山之勢。非盡堅高。至其低處。則不能受敵。萬一有警。信知其不足守也。(하략)
고려는, (중략) 지금 왕성(王城)은 압록강의 동남쪽 천여 리에 있으니, 옛 평양이 아니다.그 성은 주위가 60리이고, 산이 빙 둘러 있으며 모래와 자갈이 섞인 땅인데, 그 지형에 따라 성을 쌓았다. 그러나 밖에 호참(濠壍)과 여장(女墻 성가퀴)을 만들지 않았으며, 줄지어 잇닿은 집은 행랑채와 같은 형상인데 자못 적루(敵樓)와 비슷하다. 비록 병장(兵仗)을 설치하여 뜻밖의 변을 대비하고 있으나, 산의 형세대로 따랐기 때문에 전체가 견고하거나 높게 되지 않았고, 그 중 낮은 곳에 있어서는 적을 막아낼 수 없었으니, 만일 위급한 일이 있을 때는 지켜내지 못할 것을 알 수 있다.(하략)
[長慶宮 ] 장경궁
長慶宮在王府之西南。由嵒山麓。
장경궁은 왕부(王府) 서남쪽 유암산(由嵓山) 기슭에 있다.
[別宮 ] 별궁
王之別宮與其子弟所居。皆謂之宮。王母,妃,姊妹別居者。給官受田。以奉湯沐。或空不居。許民射莫利。而供租賦。雞林宮在王府之西。扶餘宮在由巖山之東。又有辰韓,朝鮮,常安,樂浪,卞韓,金冠六宮。分置城內。皆王伯叔昆弟之居也。
왕의 별궁 및 그 자제들이 거처하는 곳을 모두 궁이라 한다. 왕의 모비(母妃)와 자매 중에 따로 사는 사람은 집과 전토(田土)를 받아, 탕목(湯沐 생활비)에 쓰도록 하는데, 더러는 비워 두고 거처하지 아니하며, 민간에게 이득을 보게 하여 세금을 바치도록 한다.계림궁(鷄林宮)은 왕부(王府) 서쪽에 있고 부여궁(扶餘宮)은 유암산(由巖山) 동쪽에 있으며, 또한 진한(辰韓)ㆍ조선(朝鮮)ㆍ상안(常安타본에는 장안(長安))ㆍ낙랑(樂浪)ㆍ변한(卞韓) ㆍ금관(金冠)의 6궁이 성안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왕의 백숙(伯叔)ㆍ곤제(昆弟)가 거처하는 곳이다.
키워드로 찾아본다.
▶ 河北省 滦县(or 唐山市) 岩山.이 아닐까?
[國城] 국성
(전략) 州郡非門名所宜。 正西曰宣義。曰狻猊。正北曰北昌。 舊名崧山。特登山之路。非本名也。東北曰宣祺。 舊名金郊。今易此。 西南隅。王府宮室居之。(후략)
주ㆍ군을 문 이름으로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정서에는 선의(宣義)ㆍ산예(狻猊)가 있고, 정북에는 북창(北昌) 옛 기록에는 숭산(崧山)이라 했다. 단지 등산하는 길이요 본 이름이 아니다. 동북에는 선기(宣祺) 가 있는데 옛 이름은 금교(金郊)였는데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서남 모퉁이에는 왕부(王府), 궁실(宮室)이 있고, 그 동북 모퉁이에 있는 것이 곧 순천관(順天館)인데 매우 완전하게 수리되어 있으며, 서문(西門)도 또한 웅장하고 화려하니, 대개 중국에서 사신 오는 사람을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 順天館 (현북경은 왜 고려궁궐의 이름과 같은 순천부라 했을까?)
백하가 고려와 조선초의 압록이다.(청나라 지도)
공무를 처리하기 위해 매우 빈번하게 한반도 개성에서 왕과 사신들이 한달씩 걸려 북경으로 왔을까?
고려營,고려館,고려莊,고려堡,고려城,고려灣(발해만)이 하북에 즐비함은 무슨 연고일까 고구려시대의 지명보다는 후대왕조 고려나 이후 조선도 고려라했으니 그런 연유 아니겠는가?
심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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