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려

[스크랩] 고려의 남산은 어디인가? (Trace the Namsan where imperial library existed)

설레임의 하루 2011. 9. 3. 04:53

 

개성이 조선 이전의 왕조수도라고 한다면 개성근처에 반드시 남산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개성에는 남산이 없고 子男山만 있다. 남산의 새끼남산이라는 뜻으로 새로운 남산이라는 뜻도 될수있다.

 

그러나 고려사와 조선초의 조선왕조실록에는 男山과 南山이 다 나온다. 男山인 경우는 南山과 같이 사용되어지고 있는것을 볼수있다. 고려왕들도 보정부 북쪽 패주인근 男山(혹 南山)에서 重要大事와 遊樂을 즐기고 태조 이성계도 남산에서 최영군부와 전쟁을 하고 나라를 새로이 세우는 일을한다.

 

그런데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내용을 아무리 보아도 지형또는 지세와 관련된 유적들의 이름이 서울의 南山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건물이름 광화문도 등장하지만 서울 광화문은 태조 이성계가 천도하여 왕조를 세울때에도 없었던 궁궐문이다. 1395년에 세워졌다는 광화문 이전에 이미 고려개경에 광화문이 있다는 고려도경의 기록이 보이고 임진왜란시 조선의 광화문이 충주에서 140리밖에 안되게 가깝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각산도 역시 고려개경 근방에 있는 지명이다.

 

서울의 南山에 도호부가 있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없다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남산에 있었던 도호부는 고려의 해주 대도호부로 교과서에도 없던 廣州道 (이상하게 교과서에는 광주도는 없고 양광도만 있다)에 南山등 15개 지방주가 속해있다고 쓰여있다. 결국 고려의 男山과 南山은 같은 지명으로 혼용해서 씌였다고 보아야한다. 

男山=南山의 등식이 성립된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아래 청시대 대청광여도와 하북현도를 보면 고려개경인 대성과 남산과의 거리와 방향이 보여지는데 고래로 고구려,백제,신라의 초기 및 후기지역이었다. 

 

 

대청광여도에 보정 북쪽에 이 지명을 표기해 놓았다.

 

 대성과 보정 동북방에 남산과 옥대하 (왕의 허리띠)가 있다.

 

고려지명 정흥 서쪽에 고리진(고려진)과 고림촌,고비점이라는 고려지명이 보인다.(군사지도)   

 

동일위치에 고려추정 지명들과 남산이 산남으로 표기되어 있다.(1950년대 지도)

 

위의 지도를 기준으로 찾아본 위성지도에 역시 보정시에 南山이 나온다.

 

고려사 

卷七 世家 卷第七 >文宗 7年 (1052) 9

    

癸巳 登都護府南山, 召親王宰樞侍臣, 置酒, 至夜而罷.

계사일,문종임금이 도호부의 남산에 올랐다.친왕들과 재상,대신들을 불러 술을 마시다 밤에서야 파했다. (친왕이라하였으니 임금은 황제라 불린다)

 

卷十九 世家 卷第十九 >毅宗 24年 (1170) 1

適當交泰之時, 益篤方來之慶, 擁神休於北闕, 保國壽於南山. 玉帛爭來, 萬邦預駿奔之列, 梯航畢集, 四方無後至之人 .

남산에서 나라를 보위하고 임금의 장수를 빌었다.

 

卷二十七 世家 卷第二十七 >元宗 12年 (1271) 3

甲戌 移御南山宮.

남산궁으로 임금이 옮겼다.

 

卷五十三 志 卷第七 >五行 一 >

九年四月乙丑 大雨雹, 震文德殿東廊柱, 南山·浿江·月盖窯等處樹木.

큰비가 오고 남산,패강,월개요등 숲에 지진이나서 문덕전 동랑기둥이 흔들렸다. (남산과 패강이 멀지않음을 알 수 있다)

 

卷五十三 志 卷第七 >五行 一 >

四年十一月丁酉 眞觀寺主山及南山, 群烏飛鳴相鬪, 凡七八日, 至有墜死者.

 진관사 주산과 남산에서 까마귀가 날며 소리를 지르고 서로 싸웟다.

 

卷五十七 志 卷第十一 >地理 二 >慶尙道

本新羅古都. 始祖赫居世王, 開國建都, 國號徐耶伐, 或稱斯羅, 或稱斯盧, 後稱新羅. 脫解王九年, 始林有雞怪, 更名雞林, 因以爲國號. 基臨王十年, 復號新羅.

 

太祖十八年, 敬順王金傅來降, 國除爲慶州.

태조18년(938) 경순왕 김부가 래항하였다.나라이름을 없애고 경주라하였다.

 

二十三年, 陞爲大都督府, 改其州六部名, 梁部爲中興部, 沙梁爲南山部, 本彼爲通仙部, 習比爲臨川部, 漢祗爲加德部, 牟梁爲長福部

태조23년(943) 대도독부로 승격시키고 6부명을 고쳐. 량부를 흥중부, 사량을 남산부,본피를 통선부,

한지를 가덕부,모량을 장복부로하다.

 

成宗六年, 改爲東京留守

 성종6년(986) 동경유수로 고치다. 

 

十四年, 稱留守使, 屬嶺東道.

14년(993) 유수사로 칭하고 영동도에 속하게하다. 

 

顯宗三年, 廢留守官, 降爲慶州防禦使.

현종3년(1012) 유수관을 폐하고 경주방어사로 강등시키다.

 

五年, 改安東大都護府.

 현종5년(1014) 안동대도호부로 고치다.

 

二十一年, 復爲東京留守. 時銳方所上三韓會土記, 有高麗三京之文, 故復置之.

현종21년(1030) 다시 동경유수로하고, 열방이 삼한회토기를 올려 고려3경의 글이 있었는데 옛대로 회복하다.

神宗五年, 東京夜別抄作亂, 攻劫州郡, 遣師討平之.

 신종5년(1202)동경야별초가 난을 일으켜 공격하여 주군을 위협하니 장수를 보내 평정하다.

七年, 以東京人造新羅復盛之言, 傳檄尙···原州道, 謀亂, 降知慶州事, 奪管內州府郡縣鄕部曲, 分隷安東·尙州.

신종7년(1204) 동경사람들이 신라부흥을 하자는 말이돌아 상,청,중,원주도에 격문이 전해지고 란을 모의하자 경주사가 항복하고 관내 주부군현향부곡을 빼앗자 안동과 상주로 나누어 예속시키다.  

 

高宗六年, 復爲留守.

고종6년(1228) 다시 유수로 하였다.

 

忠烈王三十四年, 改稱雞林府.

경주를 계림부로 고쳤다.(통일신라 경주가 현 예맥고지인 豊潤근처에 있었고 鷄林이라 했으니 북경동부 薊縣이 계와 발음이 같고 합리적인 위치이다)  

 

辛禑二年, 府與金州, 爭使營. 都評議使奏,金州賊殺按廉, 且置營歲月, 不及雞林. 况近海濱, 倭賊可畏, 乞移置雞林. 禑從之. 別號樂浪成廟所定. 有赫居世王陵, 金庾信墓. 又有瞻星臺新羅善德女主所築】ㆍ奉德寺新羅惠恭王, 鑄大鍾, 重銅一十二萬斤, 撞之, 聲聞百餘里. 屬郡四, 縣十. 領郡五防禦郡四, 知事郡一..

신우2년(1389) 계림부를 금주로 하고  도평의사로 하여금 금주의 도적무리들을 죽이고 안무하다.영을 설치하여 세월이 지났으나 계림에 미치지 못하으며 바다와 가까와 왜적이 두려우니 계림을 옮겨 설치해달라 구걸하자 우왕이 따랐다. 별도로 낙랑이라 하였다.혁거세왕릉과 김유신 묘가 있고 첨성대가 있다.   

 

신라의 경주는 고려남산에 가까운 낙랑부에있었고 현재 경상도 경주에 있지 않았음을 알수있다

 

卷八十二 志 卷第三十六 >兵 二 >站驛 

廣州道掌十五. 德豐·慶安·長嘉·安業·南山廣州, 良梓果州, 金領龍駒, 佐贊·分行竹州, 五行·安利利川, 無極陰竹, 遙安陰城, 丹月·安富槐州.

광주도가 아래 15개주군을 통솔한다. 덕품,경안,장가,안업,남산,광주,과주,용구,죽주,이천,음죽,음성,괴주 등..

 

卷九十四 列傳 卷第七 >諸臣 >지채문 

是夜, 王與后妃及吏部侍郞 蔡忠順等, 率禁軍五十餘人, 出都, 行至積城縣丹棗驛, 武卒堅英與驛人, 張弓矢, 將犯行宮. 蔡文馳射之, 賊徒奔潰, 復自西南山, 突出遮道, 蔡文又射却之. 王至昌化縣, 有吏告曰

 그날밤 왕과 왕비가 그리고 이부시랑 채충순등 금군50여인을 데리고 도읍을 나와 적성현 단조역에 다다르다.무장한병사 견영과 역인장궁시,무장이 행궁을 범하여 채문이 말을타고 쏘다.적이 도망갔는데 서도에 갑자기 나타나자 서남산에 매복해 있다가 채문이 또 쏘아서 제거했다. 왕이 창화현에 다다르자 고하길... 

 

卷九十八 列傳 卷第十一 >諸臣

仁宗朝, 直史館, 李資謙之亂, 宮闕連燒. 守雌直禁中, 負國史, 至山呼亭北, 掘地藏之, 得不焚. 遷直翰林院, 未幾有疾, 不樂在近職. 又以母老乞郡, 出爲禮州防禦使卒. 毅宗時, 吏部奏, “守雌於丙午之亂, 入直史館, 不惜身命, 移藏國史. 昔唐韋述爲史官, 祿山之亂, 國史藏南山, 身陷賊中, 汙僞官, 賊平, 流渝州死. 廣德初, 以功補過, 贈右散騎常侍.

인종때 사관을 배치하다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자 궁궐이 이어서 소실되었는데 국사를 짊어지고 산의 호정북에 이르러 땅을 파고 보관하여 불에 타지 않았다.한림원을 옮기고 ...의종시 이부 진이 병오년난에도 기켰는데 사관으로서 시키는것에 목숨이 아깝지 않다. 국사를 옮기어 묻다. 고려의 역사서를 포장하여 남산에 보관하였다.(하략)

 

卷一百三 列傳 卷第十六 >諸臣 >김경손

王如元, 以琿權署行省事, 尋罷. 後封樂浪君, 賜推誠翊戴功臣號, 改封鷄林府院君, 開府置官僚. 忠宣二年, 以判三司事卒, 年七十三, 諡忠宣.性寬和, 美容儀, 習禮度. 嘗如元賀正, 侍宴殿上. 端笏而坐, 每行酒者至, 琿必起揖而飮. 世祖見之, 喜曰, “此誠高麗宰相也.” 以敬順王后從弟, 得幸忠烈, 又與淑妃連戚, 忠宣亦寵遇之. 嘗請王, 宴于男山書齋, 因事淑妃甚勤, 晩年封拜, 皆由妃也. 凡所歷, 無樹立, 自奉甚侈, 衣服·飮食, 務爲華美.

 

卷一百二十九 列傳 卷第四十二 >叛逆 >최충헌

二年, 詔曰, “門下侍中 晉康侯忠獻, 當先君卽政之時, 及寡人繼統之初, 以至于今, 竭誠夾輔, 有大功業, 可立府以崇賞典.” 命禮司及樞密院, 立都監. 遣使冊忠獻爲晉康侯, 立府曰興寧, 置僚屬, 以興德宮屬之. 忠獻迎命于男山第, 諸王皆詣其門.  

최충헌이 남산에서 임금의 명을 받았다.

 

卷一百三十四 列傳 卷第四十七 >禑王 6>1

禑馳馬于男山.

우왕이 남산에서 말을 탔다.

 

卷一百三十五 列傳 卷第四十八 >禑王 9年 (1380) 12

甲戌 禑如定妃殿, 又率宮女, 遊男山 

우왕과 정비전하가 궁녀들을 데리고 남산에서 놀았다.

 

卷一百三十六 列傳 卷第四十九 >禑王 12年 (1383) 8

禑手擊鼓, 燃僧頭臂. 遣贊成事 尹珍·密直副使 李希蕃, 如京師, 謝蠲減歲貢, 密直副使 李竱, 再請衣冠. 謝恩表曰, “睿恩汪濊, 寶訓丁寧, 擧國均歡, 撫躬知感. 竊念, 爲臣之職, 當修奉上之儀. 但土地之崎嶇, 而人物之鮮少, 冒陳卑抱, 干瀆高明, 渙發德音, 曲加蠲免. 玆蓋陛下, 柔遠能邇, 厚往薄來, 視四海猶一家, 保萬姓如赤子. 遂令僻陋, 得與生成. 臣謹當祗服敷言, 恭承嘉惠, 永守藩於東土, 恒祝筭於男山.”

 

卷一百三十七 列傳 卷第五十 >禑王 14年 (1385) 6

太祖由崇仁門入, 與左軍掎角而進, 守城之軍, 莫有拒者. 都人男女, 爭持酒漿, 迎勞軍士, 曳車開路, 老弱登城望之, 歡呼踴躍. 敏修建黑大旗, 至永義署橋, 爲瑩軍所奔. 俄而, 太祖建黃龍大旗, 由善竹橋, 登男山, 塵埃漲天, 鼓鼙震地.

태조가 황룡대기를 세우고 선죽교를 돌아 남산에 올랐다.먼지가 하늘에 퍼지고 북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총서 85 

6월 초1일, 태조숭인문(崇仁門)산대암(山臺巖)에 둔치고 유만수(柳曼殊)를 보내어 숭인문으로 들어가고, 좌군(左軍)은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어가니, 최영이 맞아 싸워서 모두 이를 물리쳤다. (중략) 흑색 기가 영의서교(永義署橋)에 이르렀으나 최영의 군사에게 패하였다. 조금 후에 황색 기가 선죽교(善竹橋)로부터 남산(男山)에 오르니, 최영의 휘하 안소(安沼)가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점거했다가 황색기를 바라보고는 도망해 갔다. 태조는 마침내 암방사(巖房寺) 북쪽 고개에 올라 큰 소라[大螺]를 한 번 불었다. 이때 행군(行軍)하던 여러 군대들은 모두 각(角)을 불었는데도 유독 태조의 군대만이 소라를 불었다.

 

태조 4권,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8월 6일(기묘) 

임금이 미행(微行)하여 남산(男山)에 올라 성터[城基]를 시찰하고 화원(花園)에 들어가니, 예조 전서(禮曹典書) 이민도(李敏道)가 임금에게 아뢰었다.“신은 성 쌓는 일이 쉽게 마칠 수 없음을 염려합니다.”“무슨 이유인가?”“원리(員吏)들은 역사를 감독하는 데 게을리 하고, 역부(役夫)들은 일을 하는 데 게으르니, 한갓 민력(民力)만 허비할 뿐이고 역사(役事)에는 효과가 없습니다. (하략)

 

태조 14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8월 26일(기사)

방석 등이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싸우고자 하여, 군사 예빈 소경(禮賓少卿) 봉원량(奉元良)을 시켜 궁의 남문에 올라가서 군사의 많고 적은 것을 엿보게 했는데, 광화문(光化門)으로부터 남산(南山)에 이르기까지 정예(精銳)한 기병(騎兵)이 꽉 찼으므로 방석 등이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으니, 그때 사람들이 신(神)의 도움이라고 하였다. 정안군이 또 숙번을 불러 말하였다.

 

정종 4권, 2년(1400 경진 / 명 건문(建文) 2년) 6월 19일(임자) 

비가 크게 오고 천둥하고 번개가 쳐서, 남산(男山) 돌에 벼락이 떨어졌다. 삼각산(三角山)의 큰 돌이 무너져서 무착사(無着寺)를 덮쳤다. (무착사 역시 경기도내에 없고 전라도에 있다)

 

 

운영자 심제 글. 

출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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