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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평양서 "신라 첨성대보다 200년 앞선 고구려 첨성대 발굴"

설레임의 하루 2011. 10. 13. 23:38

*출처:역사복원신문

 

 

 

 

 

 

北, 평양서 "신라 첨성대보다 200년 앞선 고구려 첨성대 발굴"

 
역사복원신문 기사입력  2011/10/13 [10:50]
북한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은 최근 김일성종합대 역사학부 연구집단이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에 있는 평양민속공원 건설장에서

 

고구려 시기 첨성대터로 볼 수 있는 건축지 유적을 발굴했다고 보도했다.

 

노동신문은 지난 8일자에 “최근 김일성종합대학 창립 65돌 기념 국제학술토론회에서 내놓은 발굴 고증자료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밝혔다.


▲     북한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은  김일성종합대 역사학부 연구집단이 평양민속공원 건설장에서

    신라 첨성대보다 200여년 앞선 것으로 보이는 고구려 첨성대터를 발굴했다고 보도했다.      

   © 역사복원신문


북한 매체들은 이 유적터에서 나온 숯의 연대 측정결과 5세기초 것으로 밝혀졌다며 이는 신라 경주첨성대보다 200여년 앞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가 삼국시기 천문학 발전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전했다.

 

경북 경주 첨성대는 신라 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년)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 첨성대터 유적은 안학궁성 서문에서 서쪽으로 약 250m 떨어진 곳에 있다. 4각으로 된 중심시설과 다른 7각으로 된 시설로

 

구성돼 있다.

 

유적의 4각기초는 띠모양으로 연결돼 있고, 4각기초는 비교적 큰 강돌을 석회와 섞어 축조됐다고 북한 매체는 설명했다.

▲     © 역사복원신문
이 고구려 첨성대의 기초시설 깊이는 1.3m로, 지금까지 발굴된 중세 건축유적들 가운데서 기초가 제일 깊다. 4각 시설의 기초부분은 제형이며 4각 시설 중심부분은 습기를 방지하고 건축물 안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게 숯과 석회를 엇바꾸어 쌓았다.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은 “건축학적으로 이 기초시설을 계산한 데 의하면 약 1000t의 무게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이번 고구려 첨성대 발굴 과정에서 고구려 시기 노끈무늬 붉은색 기와 조각들이 여러 점 발굴됐으며, 이는 주변의 대성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고구려 유적들에서 알려진 것이라고 북한 매체들은 밝혔다. 고구려시기 질그릇 조각들도 여러 점 나왔는데, 고구려 정릉사터에서 발굴된 조각들과 일치하며 특히 손잡이가 달린 독 조각은 색갈과 재질, 두께 등에서 정릉사터 독 조각과 일치 한다는 것이다.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은 “공화국 고고학학회에서는 심의 과정에 새로 발굴된 유적이 속이 빈 원형 또는 방형의 돌 구조물이며 고구려 시기 천문을 관측하던 첨성대터로 인정했다”고 밝혔다.

앞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8월 “4각형 중심시설의 가운데 부분에서 나온 숯 판정에 의하면 이 유적의 년대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1500~1600년 전으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이 통신은 “이것은 고구려가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안학궁을 건설할 때 이

 

첨성대도 함께
계획되고 동시에 축조됐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밝혔다
 
남측 사학자들은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교수는 “5세기 것이 확실하다면 천문학 기술상 큰 획을 긋는 일이지만, 정확한 연대는 단정하기 어려워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봉원 경주대 고고학과 교수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우리가 보기 전에는 덥석 얘기하긴 어렵다.

 

북한에서 단군릉이 나왔다는데 신빙성이 없다”고 말했다.

북한은 1993년 평양에서 단군과 부인 유골을 발굴했다며 이듬해 단군릉까지 복원했으나 남측 학계는 인정하지 않는다.

 
(편집자 주)
북한 지역도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평양 지역이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학설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한반도는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후방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평양성지론(平壤聖地論)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평양성지론이란 지금의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며 단군조선의 왕검성이라는 이론으로 대대로 평양 지역은 우리 민족의

 

중심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 역시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일제와 중국이 만들어 놓은 반도사관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고구려 첨성대가 발견된 것은 경하할 일이나,

 

이런 유적들을 근거로 반도사관을 굳혀주는 행위는 역사발전을 오히려 저해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평양에 단군릉을 조성한 것도 역사적으로 문제지만, 단군을 신화로 보고 있는데 북한에서 단군릉을 만들었다고 무조건 단군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남한의 식민사학자들이 더 문제이다.


기사입력: 2011/10/13 [10:50]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