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신라의 초기도읍 금성(金城)은 어디인가?

설레임의 하루 2011. 10. 13. 23:24

*출처:역사복원신문

 

 

 

 

 

신라의 초기도읍 금성(金城)은 어디인가? (3/4부)

한반도 경주가 신라 천년고도가 아님을 유적과 기록으로 입증
 
역사복원신문 기사입력  2011/09/17 [18:42]
 
 
한반도 경주는 신라의 천년고도가 아니다. 

식민사학계는 한반도 경주를 신라의 천년고도(千年古都)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대단히 잘못된 이론으로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만든 망국의 반도사관일 뿐이다.

 

신라가 후기에 강성해졌을 때 한반도에 동신라를 두어 그 중심지를 경주로 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처음부터 신라의 도읍이 한반도

경주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 이병도가 만든 식민사학의 이론은 우리 역사를  좁은 한반도 가두리양식장으로 몰아넣는 망국의

반도사관이다.

우리 민족은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민족이다.    

© 역사복원신문



초기 신라는 왕이 다스리던 나라 즉 왕국(王國)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기록적 근거가 <삼국사기>로 “지증마립간 3년(502년) 3월,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22대에 이르도록 다만 방언(方言)만을

칭하고 존호(尊號)를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지금 여러 신하의 모든 의견에 의하여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올리시옵소

서.”국호와 존호조차 제대로 없었던 나라의 국호와 존호를 정하는 대목이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이래 이때까지 신라의 통치자는 왕이라 불리지 못하고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 전기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있던 속국이나 부족성격이 강하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왕이 아니라 간(干)이란 칭호를 쓴 것으로 보여진다. 
그 근거가 호태왕비의 “백잔과 신라는 옛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는 문구로 속국도 아닌

속민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왜가 신라에 쳐들어오자 광개토태왕이 원병을 보내 격파하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전기 신라는 고구려와 전쟁을 한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하겠다. 
 

▲ 산서성은 하북성 서쪽으로 황하변에 있다.    

©역사복원신문


▲ 산서서 남부에 있는 임분은 대대로 왕조의 도읍지가 자리잡았다.

조선의 아사달, 신라의 금성, 고구려의 평양성 등이 임분에 있었다. 

임분시 서쪽을 흐르는 강이 고대 압록강으로 현 분하이다.    ©역사복원신문


 
기 신라의 위치는 어디인가?

<수서 신라전>에,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다.

 

한나라의 낙랑 땅에 사는데, 혹은 사라라고도 부른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北史)>에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辰韓)의

 

종족이다.

 

땅이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의 낙랑에 산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구당서>에도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국본기>에 “ 조선의 유민이 산 계곡 사이를 나누어 살아 여섯 마을(村)을 이루었다.

 

이것을 진한(辰韓)의 육부(六部)라고 하였다. (중략) 박혁거세 19년(bc39년)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중략)

 

예전에 중국인들이 진(秦)나라의 난리에 시달려 동쪽으로 건너온 자가 많았는데 대개 마한의 동쪽에 자리 잡아 진한(辰韓)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의 기록에 적혀있기를, “사로(신라)의 시왕(始王)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 제실(帝室:황제집안)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애를 뱄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수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辰韓)의 나을촌에 와 닿았다. 

 

이 때 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는지라, 진한 6부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거세간(居世干)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徐羅伐)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辰韓)으로 하고 또한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같은 내용을 <삼국사기>에서는 부여황실과의 관계와 진한으로 내려온 과정을 생략하고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로

 

설명한다.

 

위의 거세간 대신 거서간(居西干)으로,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어느 기록이 맞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한단고기>의 내용이 상세해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 산서성 임분시에서 발견된 신라의 초기도읍지 금성 유적.  정문 위에 金城이라는 글자가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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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의 정문과 연결되어 있는 담장은 토담으로 되어 있으나 많이 허물어져 있었다.    

 © 역사복원신문


▲ 금성의 정문은 서문으로 보이며 뒤쪽 반대방향에 있는 동문의 모습. 금성은 큰 성이 아니었다.

    (약 200mx300m)     © 역사복원신문

 
금성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들

“박혁거세 21년(bc 37년) 경성을 쌓고 이름을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26년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60년(ad 3년) 용 두 마리가 금성 우물 속에 나타나더니 소나기가 쏟아지고 성 남문에 벼락이 떨어졌다.

 

남해차차웅 원년 낙랑의 군사가 와서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했다.

 

유리이사금 33년 용이 금성 안 우물에 나타나더니 이윽고 폭우가 서북방에서 몰려왔다.”

“탈해이사금 9년(ad 65년) 금성 서편 숲 사이에서 닭울음소리가 났다.

 

금색으로 된 괘짝 안에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있었다. 성은 김(金)이라 짓고,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였다.

 

시림을 고치어 계림(鷄林)이라 하고 국호로 삼았다.”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 김알지는 흉노 출신으로 전한에서 높은 벼슬을 지낸 김일제의 후손이다.

“파사이사금 17년 남쪽에서 불어오는 폭풍으로 금성 남쪽에 있는 큰 나무가 뽑혔다.

 

22년(ad 101년) 2월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 이름 하였고, 7월 왕이 월성으로 이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새로운 도읍지인

 

월성이 어디인지는 추적이 되지 않고 있으나 아마 동남쪽으로 꽤 멀리 내려간 것이
아닌가 한다.

신라가 월성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또 도읍을 옮기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자비마립간 18년(ad 475년)에 명활성(明活城)으로 이거한다.”

 

이때는 장수왕이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한창 세력을 확장할 때였다.

 

그리고 소지마립간 때 다시 월성으로 천도한다. 이와 같이 신라는 도읍도 여러 차례 옮겨지고 국호도 여러 차례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도읍지인 금성과 월성으로 천도 이후 기록에 나타나는 금성이 같은 위치인지는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초기 금성이 있던 산서성 임분시 일대는 ad 100년 전후로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고, 장수왕 때 (ad 427년)는 아예 그곳

 

(평양성)으로 도읍이 옮겨옴에도 불구하고 계속 금성이란 지명이 등장하는데,
지명이 옮겨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 금성 내부의 모습. 만일 이 유적이 한족의 유적이었다면 이렇게 방치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 역사복원신문


▲ 금성 내부의 모습. 이렇게 방치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동이족의 유적임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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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신라 초도 금성의 위치가 산서성 임분시라고 주장하면, 식민사학자들은 임분시에 있는 금성유적은 중국의 금성이라 신라와

 

상관없다고 우길 지도 모른다.

 

아래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 가르키는 중국의 금성은 감숙성 황하북안 난주 또는 섬서성으로 나와 있어, 임분시 금성유적은

 

동이족 신라의 것임을 알 수 있으니 괜한 이의제기하지 말기 바란다.


(金城郡 금성군) 汉置,今甘肃旧兰州、西宁二府地,治允吾,在今甘肃皋兰县西北黄河北岸,晋初治榆中,

 

在今甘肃榆中县西北,东晋移治金城,在今甘肃皋兰县西南,(后魏金城郡初亦治榆中,后徙金城,)隋废郡,

 

改置兰州,寻复故,移今皋兰县治,唐复曰兰州,改金城郡,复改尘州,宋曰兰州金城郡,金曰兰州

 

(한나라 때 설치, 감숙성 황하북안 난주)
南朝宋置,并置县,南齐因之,今陕西南郑县地。 (남조송나라 설치, 섬서성 남쪽 정현 땅)
后魏置隋废,故治在今陕西汉阴县西 (후위때 설치 수나라 폐, 섬서성 한음현 서쪽)
 
신(新)나라 왕망이 망하자 김일제의 후손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간 땅은 과거 김일제와 관련있는 요동(遼東) 땅으로 산서성

 

임분 일대였던 것이다.

 

지금도 김일제로부터 시작된 김씨의 종가(宗家)가 산서성 임분에 있는 이유는 무엇이고, 산서성 임분에 초기 신라의 도읍지인 금성

 

(金城)이 발견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 산서성 임분에 살고 있는 김씨의 종손이 시조인 김일제의

화상을 공개하고 있다.     © 역사복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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