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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전 백제 황칠갑옷 "명광개" 발견 (?)

설레임의 하루 2011. 10. 13.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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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전 백제 황칠갑옷 "명광개" 발견 (?)

백제 의자왕 5년(서기 645년)에 제작된 백제갑옷 출토..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가죽갑옷!
 
역사복원신문 기사입력  2011/10/13 [11:45]
▲   충남 공주 공산성 안 성안마을 1400여년 만에 세상에 드러나는 백제 가죽 갑옷          © 역사복원신문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재위 641~660) 때 백제 장수가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죽 갑옷이 1400여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백제가 멸망하기 15년 전인 645년 연대가 또렷이 적힌 데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가죽 갑옷으로 밝혀져 백제 멸망기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
 

▲   서기 645년 백제시대 옷칠 갑옷         

    © 역사복원신문

공주대박물관(이남석관장)은 공주 공산성 내 성안마을 유적(제4차) 발굴조사 결과,

저수시설 마무리 조사에서 서기 645년을 가리키는 명문 '정관 19년'(貞觀十九年)이라

는 글자가 적힌 최고의 옷칠된 가죽 갑옷(찰갑:비늘 모양 갑옷) 1령을 출토했다고 12일 밝혔다. 

이 갑옷은 저수시설 바닥에 인접한 곳에서 출토됐으며, 모두 1000여 조각이다.

 매우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옷칠이 이루어진 것으로 원래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출토상태가 양호하다.

특히 검게 옷칠된 갑옷의 일정부위에는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 '王武監

(왕무감)' '大口典(대구전)' '○○緖(서)' '李○銀○(이○은○)' 등의 붉은색 글씨가

또렷이 쓰여져 있다.(○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 
 

▲   백제 황칠 갑옷 "명광개" 처음 출토        ©역사복원신문

특히 이 중에서도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행정관십구년사월이십일일)'이라는 기록을 통해 당 태종 정관 19년, 즉 645년이라는 정확한 연대를 파악할

수 있다. 

 645년은 백제 의자왕 재위 5년째로,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해 안시성 전투를

벌였으며 이후로 삼국과 당의 전투와 외교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동안 고대사회의 갑옷은 쇠로 만든 판갑(板甲)이 종종 출토돼 원형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찰갑(札甲)은 부속 형태로만 나와서 구체적인 원형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백제시대 찰갑은 골제(骨製)와 철제(鐵製)로 된

편만 일부 확인되었을 뿐 전체적인 정황은 파악할 수 없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발굴된 백제시대 옷칠된 가죽갑옷은 우리나라 고대사회에서 확인된 가죽갑옷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형태를 복원할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한 상태이다.

 

특히 갑옷의 제작 및 사용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645년(정관 19년)이라는

기록은 함께 출토된 화살촉과 더불어 백제멸망기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한국고대사 인식에 매우 중요한 지표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이남석 관장은 "옻칠한 갑옷은 당시 왕에 준하는 권력을 누린 장수의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사기 백제 무왕.

27년(626)에 백제 갑옷으로 기록된 '명광개(明光鎧)'로 보인다"고 했다. 

명광개란 황칠(黃漆.옷칠)을 하여 그 광채가 상대방의 눈을 부시게 했다는 갑옷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에는 "사신을 당나라로 파견하여 명광개를 바치려 하였는데,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에 입조할 수 없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백제의 어느장수가 입은 갑옷일까?... 

   모두 1000여 조각으로 만들어진  백제 갑옷.   © 역사복원신문


고대 백제의 공예기술은 이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를 통하여 입증된 바 있다.

이번에 조사된 옷칠 가죽갑옷은 백제금동대향로에 비견될 수 있는 것으로, 백제 칠기공예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자료로 판단된다.

즉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백제의 공예수준이 최고에 달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편집자 주)
일제 식민사학인 반도사관에 쩔어있는 대한민국 사학자들의 가장 큰 병폐는 북한에서 유물이 발견되면 무조건 고구려 유물,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유물이 발견되면 모두 백제의 유물, 경상도에서 유물이 발견되면 앞.뒤 안 따지고 신라의 유물로 인정하려는 데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에 명광개에 대한 그런 기록이 있는 것은 맞다. 

 
그렇다고 의자왕 때 백제장수가 입었던 것으로 백제 멸망의 수수께끼를 밝힐 수 있을 지 모른다는 판단은 너무 성급한 것으로 보인다. 
정관 19년(645)이면 당태종이 요동정벌을 감행하여 고구려 안시성을 공격한 해이다.

그 안시성전투 직전 주필산전투에서 설인귀가 나타나 당나라 군대가 크게 이겨 고구려의 명광개 만벌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 갑옷은 의자왕 때 백제장수가 입었던 것이 아니라 안시성 전투와 관련지어야 할 것이다.

그런 갑옷이 어떻게 공주까지 왔는지는 솔직히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정관 19년'이란 글자가 씌여 있는 갑옷을 백제장수가 입었던 것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의 추측일 뿐이다.

분명 자체년호를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의 장수가 남의 나라 년호가 적힌 갑옷을 입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또 백제 멸망기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유물이라고 했는데 안시성전투 때의 갑옷을 백제멸망 시기인 660년까지 입었다는 것도

의문일 수 있다. 
 
그리고 백제 무왕 때는 백제가 명광개를 바치려 했는데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에 입조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의 명광개가

당나라로 가지 못하지 않았는가! 

또한 명광개라는 갑옷은 왕에 준하는 권력을 누린 장수가 입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왜냐하면 당태종이 고구려로부터 명광개를 만벌이나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 갑옷은 높은 장수가 아니라 일정 직급 이상이면 

입을 수 있었던 갑옷인 것이다.
 
그리고 1,400년 간이나 흙 속에 파묻혀 있던 갑옷의 글자가 너무 선명한 것도 의문이 든다.

특히 백제장수가 입는 갑옷에 당의 연호를 기록해 놓은 연유와 상황을 심도있게 연구, 검토하고 분석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좋은 유물이 발견된 것은 축하할 일이나  너무 역사를 자기 임의로 꾸며서 발표하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유물은 얼마든지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출토된 유물을 보고 역사가 어떻다고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작은 유물 하나에 역사적 사실을 너무 무리하게 끼워 맞추려다보니 이런 발표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기사입력: 2011/10/13 [11:45]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