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려

[스크랩] [열하일기]에서 연암이 말한 `안시성과 평양성` 그리고...

설레임의 하루 2011. 4. 10. 10:00

 

 

열하일기

 

 

안시성과 요동땅의 평양성

 

 

 

 

때마침 봉황성을 새로 쌓는데, 어떤 사람이 그런다.

“이 성이 바로 안시성이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라 하였다. 지금도 우리 시골말에 ‘봉황’을 ‘황새’라 하고, ‘사’를 배암이라 한다. 그러니 “수나라나 당나라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을 백암성으로 고쳤다”는 전설이 자못 그럴듯하다.

또 옛날부터 이러한 말이 전해져 왔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당나라 태종의 눈을 쏘아 맞추었다. 그러자 태종이 성 아래에 군사를 집합시켜 시위하고, 양만춘에게 비단 백 필을 하사하였다. 그가 자기나라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켰다고 칭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연 김창흡이 연경으로 가는 자기 아우 노가제 창업을 송별하는 시를 이렇게 읊었다.

 

천추에 크신 담략 우리나라 양만춘님이

용 수염 범 눈동자를 한 화살에 떨어뜨렸네.

 

또 목은 이색도 ‘정관음’에서 이렇게 읊었다.

 

주머니 속 미물이라 하잘 것이 없다더니,

어이 알았으랴, 검은 꽃이 흰 날개에 떨어질 줄을

 

‘검은 꽃’은 당태종의 눈이고, ‘흰 날개’는 화살이다. 이 두 선배들이 읊은 시는 필시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리라.

 

당태종이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이 하찮은 탄알만한 작은 성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창황히 군사를 돌이켰다는 것은 사실 의심되는 점이 적지 않다. 김부식은 옛 글에 그의 성명이 전하지 않는 것을 애석히 여겼을 뿐이다. 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다만 중국의 역사책에서 한 번 골라 베껴내면서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또 유공권의 소설을 끌어와서 당태종이 포위했던 사실까지 입증하였다. 그러나 󰡔당서󰡕와 사마광의 󰡔통감󰡕에는 이러한 사실들이 기록되지 않았으니, 이는 아마도 그들이 중국의 부끄러움을 감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 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미덥건 아니건 간에 다 빠뜨리고 말았다. 내 생각은 이러하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 안 잃었는지는 확인하고 증명할 길이 없지만, 대체로 이 성을 ‘안시성’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당서󰡕에, ‘안시성은 평양에서 오백 리나 떨어져 있고,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이라고 한다.’ 하였으므로 󰡔지지󰡕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 하기도 한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또 󰡔지지󰡕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의 동북쪽 칠십 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으니, 대개 개평현 동쪽으로 수암하 까지가 삼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쪽으로 이백 리 더 가면 봉황성이다. 만약 이 성을 옛 평양이라고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오백 리라는 말과 서로 부합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의 평양만 알므로, “기자가 평양에 도읍했다.”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하면 이를 믿는다. 그래서 만일 “봉황성이 바로 평양이다.”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고 한다면 해괴한 말이라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 ․ 예 ․ 맥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또 오라 ․ 영고탑 ․ 후춘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사군을 모두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패수를 그 속에서 찾았는데, 어떤 사람은 청천강을 ‘패수’라고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압록강을 ‘패수’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다 정해놓고, 패수의 위치가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물러갔다가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땅히 여진 땅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말하였다. 무슨 근거로 그러한 사실을 알았는가 하면, 󰡔한서󰡕 「지리지」에 현도나 낙랑은 있지만, 진번과 임둔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나라 소제 시원 5년에 사군을 합하여 2부로 만들고, 원봉 원년에 다시 2부를 2군으로 고쳤다. 현도 세 고을 가운데 고구려현이 있고, 낙랑 스물다섯 고을 가운데 조선현이 있으며, 요동 열여덟 고을 가운데 안시현이 있었다. 다만 진번은 장안에서 칠천 리, 임둔은 장안에서 육천 리 되는 곳에 있었다. 이는 조선조 세조 때의 학자 김윤이 밝힌 것이 옳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지경 안에서는 이 고을들을 찾을 수 없다. 마땅히 지금의 영고탑 등지에 있었을 것이다.”

이로 본다면 진번과 임둔은 한나라 말기에 바로 부여 ․ 읍루 ․ 옥저에 들어간 것이다.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던 것이 혹은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고 혹은 변하여 말갈靺鞨이 되며, 혹은 변하여 발해가 되고, 혹은 변하여 여진이 된 것이다. 발해의 무왕 대무예가 일본의 성무왕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이런 게 있다.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가 남긴 풍속을 물려받았다.”

이로 미루어본다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서 서로 포옹하고 잇달렸으니, 이는 본시 우리 강토 안에 있었음이 더욱 명확해진다.

 

그런데 한나라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디인지 일정하지 못한데다, 또 우리나라 선비들도 반드시 지금의 평양으로써 표준을 삼아 이러니저러니 패수의 자리를 찾는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옛날 중국 사람들이 무릇 요동 이쪽의 강들을 죄다 ‘패수’라 하였으므로, 그 이수가 서로 맞지 않아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조선과 고구려의 지경을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치고, 다음에는 패수를 요동에 가서 찾아야만 한다. 그리하여 패수가 일정해진 뒤에라야 우리나라의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진 뒤에라야 고금의 사실이 부합될 것이다. 그런즉 봉황성이 틀림없는 평양이냐고 묻는다면, ‘이곳이 만약 기씨 ․ 위씨 ․ 고씨 등이 도읍한 곳이라면 이 또한 한 개의 평양이다.’ 라고 대답할 수가 있다.

 

󰡔당서󰡕 「배구전」에서 말한다.

“고려는 본시 고죽국인데, 주나라가 이곳에 기자를 봉하였다. 한나라 때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

여기서의 고죽국은 지금의 양평부에 있었다. 광녕현에는 예전에 기자묘가 있어서 우관을 쓴 소상塑像을 앉혔는데, 명나라 가정연간에 병화兵火에 불살라졌다 한다. 어떤 사람들은 광녕현을 평양이라 부르며, 󰡔금사󰡕와 󰡔문헌통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광녕 함평이 모두 기자가 봉해졌던 땅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양평과 광녕 사이가 한 개의 평양일 것이다. 또 󰡔요사󰡕에서 말한다.

“발해의 현덕부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했던 평양성이었는데, 요나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이라 고쳤다. 이곳이 바로 지금의 ‘요양현’이다.”

이로 미루어본다면 요양현도 또한 한 개의 평양일 것이다. 따라서 내 생각은 이렇다.

 

‘기씨箕氏가 애초에 영평 ․ 광녕 사이에 있다가, 나중에 연나라 장군 진개에게 쫓기어 이천 리 땅을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겨갔다. 마치 중국의 진나라와 송나라가 남쪽으로 옮겨가던 사정과 같았다. 그리하여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우리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패수’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고구려의 지경이 때로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였을 테니, 마치 중국의 남북조 때에 주 ․ 군의 이름이 서로 바뀌던 것처럼 ‘패수’라는 이름도 따라서 옮겨졌다. 그런데 지금의 평양을 평양이라고 하는 이들은 대동강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이 물이 패수다.”

평양과 함경도 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켜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산이 개마대산이다.”

그러나 요양을 평양으로 삼는 이들은 ‘헌우낙수’를 가리켜 “이 물이 패수다.” 하고, 개평현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이 개마대산이다.” 한다.

그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고 하는 이들은 자기의 강토를 스스로 줄여서 말하는 셈이다.

 

당나라 의봉 2년에 고구려에서 항복해온 임금 고장高藏 요동주 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며, 안동도호부를 신성에 옮겨서 이를 통할케 하였다. 이로 미루어본다면 고 씨의 강토가 요동에 있던 것을 당나라가 비록 정복하기는 하였지만, 이를 지니지 못하고 고 씨에게 도로 돌려준 것이다. 그러니 평양은 본래 요동에 있었거나, 혹은 이곳에다 잠시 빌려 쓴 이름이거나, 또는 패수와 함께 때에 따라 들쭉날쭉하였을 뿐이다. 한나라의 낙랑군 관청이 평양에 있었다곤 하지만, 이도 지금의 평양이 아니요, 곧 요동에 있던 평양을 말한다.

 

그 뒤 고려시대에 이르러 요동과 발해지역이 모두 거란에 들어갔지만, 고려왕조에서는 겨우 자비령과 철령의 경계를 삼가 지켜서 선춘령과 압록강마저 버리고도 돌아보지 않았다. 하물며 그 밖에야 한 발자국인들 돌아보았으랴.

고려는 안으로 삼국을 합병하였다고 하지만, 그의 강토와 무력이 고 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하였다.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역사책만 믿고 흥미롭게 수나라와 당나라의 옛 자취를 이야기한다.

“이곳이 패수요, 이곳이 평양이다.”

이는 벌써 사실과 어긋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또는 봉황성인지 어찌 분간할 수 있으랴.

 

 

열하일기「도강록」 ‘28일 을해乙亥’ 뒷부분

 

 

 

 

 

위 글에 부연하다

 

 

 


 

이 봉황산의 최고봉은 찬운봉(836.4m)이고 오골성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이 찬운봉을 정점으로 오골성 서벽이 뻗어가고, 맞은편 동대정자(약 800m) 남북으로 동벽이 이어진다. 동대정자가 있는 산은 고구려 성이 있는 산이라고 해서 고려성자산高麗城子山이라고 부른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가파른 바위 절벽들이 이어지는 험준한 지형이 자연성을 이루고 있고, 산봉우리 사이의 낮은 지대에는 성을 쌓아 철통같은 방어벽을 형성하였다.

 

오골성의 규모는 수 백 개의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크다. 최근 현지 전문가들이 측량한 오골성의 둘레는 15,955m로 거의 16㎞에 가깝다. 오골성은 86구간의 돌로 쌓은 성벽과 87구간의 천연장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돌로 쌓은 성벽의 총 길이는 7,525m이다. 오골성의 천연 절벽은 높이 50m가 넘는 대형만 34구간이나 된다.

봉황산에 쌓은 오골성은 요동반도 동남부의 교통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다. 오골성은 서쪽으로 낭낭산성를 비롯한 수암의 여러 성을 거쳐 안시성에 이르고, 서북으로 백암성을 지나 요동성과 접하며, 동쪽은 압록강 물길 따라 ‘박작성’을 지나 중 상류에 있는 고구려의 내지로 직통할 수 있다. 명나라 󰡔요동지󰡕에 오골성은 “10만의 무리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고구려 산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산성이며 현존 상황도 가장 좋다. 오골성이 위치한 곳은 전쟁이 빈번한 요하 일선과 비교적 멀다. 그러나 고구려 역사에서 한 역할은 매우 뚜렷하다. 645년 당나라 이세적李世勣 군대가 백암성을 공격하자 오골성에서 군사를 보내 도왔고, 648년 당나라 설만철薛萬徹이 박작성을 쳐들어가 포위하자 고구려는 장군 고문高文을 보내 오골성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 남짓을 거느리고 와서 도왔다. 이처럼 오골성이 그 당시에 주위의 크고 작은 성들을 지원한 것을 보면 고구려가 이곳을 압록강 이북의 땅을 경략하는 센터로 삼아 군사를 양성하고 전력을 축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골성은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였을 때도 중요한 공격 대상으로 등장한다. 당 태종이 안시성을 수없이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자 당 태종에게 항복한 고연수 ‧ 고혜란이 “오골성 욕살은 늙어서 성을 굳게 지키지 못할 것이니 그 성의 군수 물자와 양곡을 빼앗아 평양으로 전진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건안성과 신성에 있는 10만 병력과 안시성의 병력이 퇴로를 막고 뒤를 칠까 두려워 오골성을 치지 못하고 결국 안시성에서 패하고 돌아간다. 여기서 오골성은 압록강 이북에서는 평양으로 가는 좋은 길목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을 고구려가 어느 땐가 경주로 부르고 ‘오골성’으로 불렀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지만 고구려의 패전 이후 신라가 점유했었다는 사실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도 숨겼고, 신라는 아예 압록강 이북으로 진출한 사실이 없었다고 하였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것.

마치 판도라의 상자 같은 봉황성의 비밀을 󰡔문헌통고󰡕와 󰡔만주원류고󰡕가 실토 하였다. 이 성을 신라가 계승하여 신라의 동주 낙랑부東州樂浪府로 삼았고, 신라 이후 고려는 이곳을 ‘삼경’ 중에 ‘동경’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한 금주金州 즉 대련을 ‘남경’으로, 남평양을 ‘서경’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평양이란 암연현의 서남쪽에 있다는 옛 평양을 말한 것이다. 일단 옛 평양은 당나라가 요양으로 옮겼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발해가 동경 용원부 책성東京 龍原府柵城으로, 요가 개주 진국군開州鎭國軍으로, 원이 동령로 봉황성으로, 금이 석성현 봉황성으로, 명이 봉황성보鳳凰城堡로 불렀다는 기록이 밝혀진 것이다.

 

이메지의 출전<文獻通考--卷三百二十五·四裔考二 >   [南平壤爲鎭州護西京]에서 '護字'는 '號字'의 오기

 

 

북한 학자들(채희국 ‧ 전준현)은 봉황산성은 곧 환도산성이라고 주장한다. 󰡔삼국사기󰡕의 산상왕 13년(209)에 “왕은 도읍을 환도로 옮겼다”고 하였는데, 이 환도가 바로 봉황산성이라는 것이다. 후에 수도를 현재의 평양으로 옮긴 뒤에도 봉황성을 부수도로 삼고 전쟁이 나면 국왕이 직접 이 성으로 나아가 지휘했으며, 관구검이나 모용황이 쳐들어왔던 환도성도 바로 이 봉황성이라는 주장이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에 “안시성은 옛날 안시홀이다. 혹은 환도성이라고 불렀다”고 되어 있고, 󰡔삼국유사󰡕 왕력에 “임인 8월에 안시성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곧 환도성이다”라고 한 기록을 바탕으로 환도, 즉 안시성이 한 때 고구려의 수도였으며, 환도 안시는 곧 지금의 봉황성이라는 논리도 추가된다. 봉황성이 안시성이라는 주장은 홍대용의 󰡔담헌서󰡕와 이익의 󰡔성호새설류선󰡕에도 나온다. 그러나 연암은 해박한 역사지식을 동원하여 봉황성은 안시성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었다.

 

“대체로 이 성을 ‘안시성’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당서󰡕에, ‘안시성은 평양에서 오백 리나 떨어져 있고,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이라고 한다.’ 하였으므로 󰡔지지󰡕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 하기도 한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또 󰡔지지󰡕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의 동북쪽 칠십 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으니, 대개 개평현 동쪽으로 수암하 까지가 삼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쪽으로 이백 리 더 가면 봉황성이다. 만약 이 성을 옛 평양이라고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오백 리라는 말과 서로 부합된다.”

 

연암은 󰡔당서󰡕의 기록 때문에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같은 󰡔당서󰡕에서도 지리를 전문으로 다룬 󰡔지지󰡕에서 안시성이 ‘개평현’ 부근에 있다고 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봉황성에서 서쪽으로 500리를 가면 안시성이 있으니 봉황성이 안시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맹자는 󰡔이루장구󰡕하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시고 명조鳴條에서 죽으셨는데, 제풍 ․ 부하 ․ 명조가 동이족의 땅이니 그는 동이사람이다.”

이 중 순임금이 죽은 동이족의 땅인 명조를 󰡔중국지명대사전󰡕으로 검색하면 아래와 같다.

 

古地名。在今山西运城安邑镇北,相传商汤伐夏桀战于此地。又名 高侯原 。

古地名,又名高侯原,其地具体位置,异说甚多,一说在今山西省运城市夏县之西,一说在今河南洛阳附近,还有一说在河南省新乡市封丘东。

 

번역| 고대 지명으로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 안읍진 북에 있다.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정벌한 전투지이다. 고후원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산서성 운성시 하현의 서쪽, 일설에는 하남성 낙양부근, 또 일설에는 하남성 신향시 봉구 동쪽에 있다고 한다.

 

위 ‘명조’에 대한 설명은 현재 순임금의 능이 있는 운성시 염지 부근과 같다. 맹자는 이곳이 동이족의 땅이라 했으니 산서성 최 남부 운성 일대가 단군조선의 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설명은 󰡔한서󰡕「지리지」에서 유주를 설명한 것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바로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의 강역이 나타나는 것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기이1’ 도입부를 읽었는가?

 

첫머리에 말한다.

대체로 옛 성인들이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가르침을 베풀려하면, 괴이, 완력, 패란), 귀신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날 때에는 천자가 되게 하는 하늘의 명령을 받고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언한 기록을 받게 된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었는데, 그런 뒤에 큰 변화가 있어 천자의 지위를 장악하고 제왕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니 황하에서 [팔괘] 그림이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오면서 성인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다, 무지개가 신모를 둘러싸 복희를 낳고, 용이 [신농씨의 어머니] 여등과 관계를 맺어 염제를 낳았으며, [소호씨의 어머니] 황아가 궁상이라는 들판에서 노니는데 자신을 백제의 아들이라 일컫는 신동[태백금성]이 있어 [그와] 교합하여 소호를 낳았고 간적은 [제비]알을 삼키고 설을 낳고 강원은 한 거인의 발자취를 밟고 기를 낳았다. 요의 어머니는 잉태한 지 14개월 만에 요를 낳았고, 패공의 어머니는 용과 큰 연못에서 교접해 패공을 낳았다. 이 뒤로도 이런 일이 많지만 여기에선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렇게 볼 때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데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으랴. 이 기이편을 이 책의 첫머리에 싣는 것은 그 뜻이 실로 여기에 있다.

 

그냥 흘려버리기 쉬운,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럽고 기이한 데서 나온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라는 글에 주목해보면 답이 나온다. 대한민국 역사의 시작점이 바로 기이한 현상 「기이편」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그곳은 현재의 한반도가 아닌 현재의 중국 땅이란 걸 금방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이 1 도입부에서부터 중국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복희가 등장하고 중국 최초 신화집이라는 󰡔산해경󰡕(󰡔경󰡕에 말하길…)에 기록되어있다는 언질이 있고 보면, 우리 역사의 시초가 이상하기조차 하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 혹 우리가 바로 인류의 기원인가?

 

황하에서 [팔괘]그림이 나왔다고 한다. 황하는 중국 제2의 큰 강 청해성의 비옌카라 산맥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흘러 큰 삼각주를 형성하고 발해로 흐르는데, 토사 운반량은 세계 제1위로 황토 고원을 침식한 후 화베이의 대평원에 퇴적된다. 지류인 위수유역은 고대문명의 발상지이다. ‘유량의 변동이 크며 범람하거나 물의 흐름이 변경을 되풀이해왔다’는 사전적 해석은 황하에서 [팔괘]그림이 나왔다는 사실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현상이다. 이러고 보면 막연히 기이한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낙수洛水의 ‘낙’은 ‘서울’이라는 뜻으로써, 황하 지류 부근에 낙자가 들어갔던 지명은 낙양洛陽, 낙동洛東, 낙원洛源, 낙서洛西, 낙수洛水가 있고,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낙양洛陽, 낙동洛東, 낙원洛源, 낙서洛西, 낙수洛水가 조선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중국이 바로 조선이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조선의 서울이 바로 중국에 있었다는 말이다. 아무튼 낙수는 중국 산시 ․ 허난河南의 두 성을 흐르는 ‘뤄수이’강이고, 뤄수이 강은 산시성 동남부의 친링에서 시작되어 허난성 낙양의 남쪽을 흘러서 황하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일연이 짚어주는 바대로 이 ‘낙수’에서 글이 나왔다는 말이다. ‘팔괘도’ 그게 도대체 뭔지, 등에 그림을 새긴 신귀가 낙수에서 나왔다는 말은 또 뭔지, 무엇보다도 「혹정필담」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는 복희는 과연 어떤 인물인지, 그림을 놓고 약간의 토를 달아 보이기로 한다.

 

 

위의 그림은 7세기경 트루판(중국의 서쪽, 돈황의 동쪽)에 있던 고창국의 왕묘에서 출토된 복희와 여와의 그림이다. 복희는 역경의 괘를 처음 만든 신이며 황제이고 여와는 흙으로 사람 인형을 빚어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 사람들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복희와 여와는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뱀으로 알려져 있다. 복희는 최초의 남자로서 만물 창조에 필요한 직각자를 들고 있고 여와는 최초의 여자로서 분도기를 들고 있다. 이 최초 부부의 하체는 서로 꼬여있다. 주위에는 별들이 그려져 있고 상하 중심에는 수레바퀴들이 그려져 있다. 이런 그림은 천에 그려졌거나 돌에 새겨진 형태로 자주 출토된다. 이 그림은 글자 한자 없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복희는 양을 상징하고 여와는 음을 상징한다. 서로 꼬여진 하체는 음양의 화합, 태극을 상징한다. 주위의 별들과 복희와 여와가 들고 있는 직각자(양)와 분도기(음)는 복희와 여와가 태극, 음양의 원리로 우주만물을 창조했음을 뜻한다. 상하에 그려진 수레바퀴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태양과 달을 괘도까지 그렸을 가능성도 있고 주역의 괘를 원으로 배열한 것일 수도 있다. 우주만물 창조의 코드로서 괘를 만든 복희는 유전자 코드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하는 그림이다. 복희와 여와가 서로 꼬여 있는 것이 수정란의 DNA에서 아버지로 부터온 DNA 한 가닥과 어머니로부터 온 DNA 한 가닥과 꼬여 있는 것 같다.

 (출처 : http://www.69yinyang.com/ICscience/digital.html)

 



 

 

[어니스트뉴스=손유민기자] 1973년 경주 155호분 즉 지금의 천마총 발굴이 시작됐다. 발굴 6개월 째, 마지막으로 목곽 바깥쪽에 발견된 궤짝을 해체하는 작업 중 발견 된 말갖춤 장식들. 6세기 신라 말갖춤 장신이 발굴된 것은 당시로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깜짝 놀랄 만한 유물이 나왔다.

1500년 전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회화 작품. 바로 ‘천마도’다. 어떻게 백화수피에 그려진 그림이 1500년을 견뎌냈을까? 역사스페셜 제작진은 당시 발굴 단장 김정기 선생을 만나 당시의 생생한 상황을 전해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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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도 발굴 당시 사진=KBS 

                             전 천마도 보고 발에 힘이 다 빠져서 주저앉을 뻔 했어요.
1500년 된 나무껍질에 만든 제품이 남아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당시 발굴단장 김정기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 천마도가 일주일 동안 공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 과학팀은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1200만 화소 고해상도 적외선 카메라로 천마도를 촬영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머리 부분에 숨겨져 있던 비밀을 발견했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던 뿔이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 천마도가 일주일 동안 공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 과학팀은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1200만 화소 고해상도 적외선 카메라로 천마도를 촬영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머리 부분에 숨겨져 있던 비밀을 발견했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던 뿔이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역사스페셜 제작진이 찾은 중국 내몽고. 이곳에서 제작진은 뜻밖의 오래된 유목민족의 관습을 만났다. 바로 말의 갈기를 세워 말상투를 만드는 것. 말을 삶의 동반자이자 신성시여기는 북방유목 문화에서 말상투 장식은 지금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말갈기로 상투를 틀어 뿔처럼 장식하는 것은 고대부터 유행했던 풍습이다. 4세기의 고구려 안악 3호분의 대행렬도, 이 그림에 행진하는 기마는 대부분 말상투를 하고 있다. 고구려시대 또 다른 벽화 덕흥리 고분에 나타난 천마지상. 이 벽화의 말 형상은 그 형상이 천마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렇다면 천마도는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계승 한 것일까? 

고대 사회 민족의 교류와 이동이 활발해 지게 한 일등 공신 말. 신라는 4세기경부터 기마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보편화시켰다. 기마 문화의 영향으로 말 숭배 사상도 자연스럽게 유입된다. 천마총, 왕의 무덤에 특별히 따로 부장품 상자를 만들고, 그 안에 말갖춤 장식만 모아둔 수장궤. 이것에서도 말 문화를 권력의 상징으로 여겼던 신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천마도의 재질은 자작나무 껍질. 한반도 남쪽인 경주에서 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제작진이 찾아간 내몽고 어룬춘 지역. 이곳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에 그림을 그리고 생활 공예품을 만든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들이 즐겨 그리는 문양과 천마도 문양이 흡사하다는 점이다. 자작나무에 그림을 그리는 시베리아와 유라시아에 한정 된 풍습. 이런 풍습이 왜 1500년 전, 신라에 존재했던 것일까?

이것은 이미 신라가 1500년 전 국제사회와의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는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임해현 서쪽에 신라산이 있다

 

북경 동북지방의 군현郡縣 가운데 고려장高麗庄이라는 이름이 많다. 그뿐 아니라 당나라 총장總章 연간에도 신라 사람이 많은 곳에다 관아를 두었으니, 지금 양향良鄕의 광양성廣陽城이 바로 그곳이다.

「구외이문」‘신라호’

 

 

위의 짤막한 글에 덧붙이는 글

 

중국과 대만의 양안문제로 관심을 끌고 있는 지역이 중국의 복건성 지역인데, 이 복건성 지역에도 ‘신라’라는 지명이 있다. 복건성 용암시 신라구新羅區가 바로 그 곳인데, 용암시 신라구 지방정부의 홈페이지를 인용하자면 아래와 같다.

“용암시 신라구는 복건성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룡강 상류에 있고, 하문廈門과 마카오 등지에서 200km 떨어진 곳에 있다. 신라구는 민서의 정치, 경제, 문화와 교통의 중심지이며, 민남의 금삼각金三角의 복부에 해당된다.……신라구의 역사는 유구하여 당나라 개원24년(736년)에 신라현으로 설치되었다. 당나라 천보원년(742년) 다시 용암현을 두었다. 1981년 현을 없애고 시를 두었다. 1997년 3월 용암시에 신라구를 설치했다. 3개 향과 12개의 진과 12개의 가도 사무소가 있으며, 면적은 2,677 평방미터이고 인구는 45만 명이다. 홍콩, 마카오, 대만과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가 10만 명이다. 이곳은 아름다운 토지와 산이 푸르고 물이 수려하다. 4계절이 봄 같으며, 기후는 사람이 살기 적당하다.”


(그림1) 복건성 용암시에서 소개하고 있는 신라구의 위치


(그림2) 중국고지도인 "주경도(州境圖)"상의 절강성 임해현과 "신라산

위 신라현에 대한 기록으로는 󰡔진서󰡕 ‘지제오 지리’ 하편에 “진안군은 진나라 태강3년(282년)에 설치하였는데 8개의 현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신라현新羅縣이다.”라고 되어 있어 이곳에 신라현이 설치 된지 오래임을 알 수 있다.

후대에 교간된 󰡔진서󰡕에는 천주 신라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를 달아 놓았다.

“신라성이 정주부의 동남에 있다.”

정주汀州는 신라현이 표기된 곳 바로 서북에 있는 현 복건성 장정長汀을 말하는데, 그 동남에 신라성이 있었다는 말이며, 실제로 그곳에는 신라현이 있었고 지금도 신교新橋와 나방羅坊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또한 복건성 북쪽의 양자강 하류의 남쪽에 해당하는 절강성 일대도 신라의 강역이었음이 나타난다. 역사상 존재했거나 현존하는 여러 지명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고지도에는 절강성 임해현 북쪽에 신라산이라고 뚜렷하게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대륙의 남단인 이곳 절강성 일대가 신라의 영토였음을 말해주는 물증이며, 청나라 때 편찬된 󰡔대청일통지󰡕에도 “임해현 서쪽 30리에 신라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산이 있는 절강성의 임해는 신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신라 21대 소지마립간 때의 기사에 이렇게 적혀있다. 15년 가을 7월에 임해와 장령 두 곳에 진을 설치하고 왜적을 방비하게 하였다.

 

또한 신라 30대 문무왕 15년에 당나라로부터 임해군공이라는 봉작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으며, 30대 소성왕 2년의 기록과 46대 문성왕 때의 기록 “평의와 임해의 두 전을 중수하였다.” 에서는 신라가 절강성 및 복건성 등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뿐인가. 신라 성덕왕 대에 살았다는 수로부인 설화는 또 어떤가. 수로부인이 용에게 납치되었다는 곳이 바로 임해 바다가 아닌가 말이다.

 

 

 - 난정주영숙

출처 : 주영숙|난정뜨락
글쓴이 : 난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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